2010. 1. 3. 17:11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보주수의자의 한국 근·현대사 ④
기사입력 2008-11-20 오전 8:48:21
일제시대를 다룬 <대안 교과서> 제 3부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원천적 문제를 안고 있다. 한국이 일제 통치 아래 근대화의 길에 접어들었으며, 이것을 식민지 시대의 가장 큰 의미로 내세우는 것이다. 식민 지배가 '억압적'이라고 비판적으로 보는 시늉은 이따금씩 하지만, 전체 구성부터 서술 방법까지 근대화의 혜택을 강조하는 데 노력이 집중되어 있다. 지금의 세계화가 불가피한 길인 것처럼 당시의 근대화도 불가피한 것이었다. 제국주의 침략이란 것이 애초에 근대화를 강요하는 데 목적을 둔 것이었다. 산업화를 이룬 국가들이 산업 구조의 부속적 기능을 떠맡기기 위해 식민지를 획득한 것이다. 세계화에 가해자가 있고 피해자가 있는 것처럼 근대화에도 가해자가 있고 피해자가 있었다. 일본이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에 성공했다고 하는 것은 피해자 아닌 가해자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는 뜻이다. 가해자로서 일본이 누구를 피해자로 삼았는가? 두 말 할 필요 없이 한국이 일본의 첫 번째 피해자였다. 한국은 어차피 근대화의 길에 들어서게 되어 있었다. 1870년대 한국의 개항 무렵은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쟁탈전이 가열되고 있을 때였다. 일본이 위치 때문에 한국의 개항도 자기 손으로 하고 다른 열강보다 집요하게 달려들어 결국 식민지로 만들었지만, 제국주의 침략으로 세계를 휩쓰는 근대화의 물결을 한국이 피해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식민 지배국이 식민지를 지배하는 방법은 산업화의 단계에 따라 일차적으로 결정되었다. 산업화 단계가 낮은 식민 지배국은 식민지를 단순한 약탈 대상으로 삼았다. 이에 비해 산업화 단계가 높은 식민 지배국일수록 수준 높은 수탈 방법을 개발하고, 이를 위해 식민지에도 상당 수준의 산업화를 진행시켰다. 일본의 한국 지배는 약탈에 가까운 수준에서 시작되었다. 투자는 별로 없이 쌀을 많이 반출하는 데만 노력을 집중했다. 그러다가 일본의 산업화 진전과 제국의 규모 확대에 전쟁의 자극까지 겹침에 따라 산업화 투자가 다소 이뤄졌다. 그러나 질적, 양적으로 일본과 비교가 되지 않는 수준이었고, 그나마 제국 경제 구조에 부속적인, 자생력 없는 것이었다. 식민지의 전형적인 '개발 없는 성장(growth without development)' 구조였다. 교과서포럼의 이영훈은 강요 아래 왜곡된 이 산업화를 '문명'의 은혜로 여긴다. 제국주의 침략을 미화한 '백인의 짐(white man's burden)'보다도 더 거룩한 은혜로 보는 것 같다. 역사학자를 자처하는(역사학계의 인정은 별로 못 받아도) 사람이 한 가지 가치에만 매달려 역사의 흐름에 이렇게 눈을 질끈 감고 달려드는 것이 보기에도 민망하다. 근대화는 한국인에게 피할 수 없이 주어진 길이었다. 그런데 그 길을 잘 걷기 위해서는 피해자의 위치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근대화 과정의 주역은 국가였다. 국가를 회복하는 것은 그 시기에 있어서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도, 근대화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도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그런데 뉴라이트는 국가 회복을 위한 항일운동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오히려 일본 지배에 협력한 사람들을 근대화의 기수로 떠받든다. 자신에게 개인 발전의 기회를 준 어떤 체제에라도(식민제 체제든 독재 체제든) 흔쾌히 협력해서 능력과 실력을 키워 온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발전의 주역이라는 것이다. 역사의 해석은 열려 있다. 자신을 한민족의 일원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본주의 사회의 성공자로 여기고 싶은 사람이라면 일본 식민통치를 고마워해도 좋다. 그러나 그런 관점을 대한민국의 국민 교육에 적용해야 한다고 나설 일은 아니다. 밑의 내 글은 식민지 시대를 극히 간략하게 다룬 것이다. 원래 소략한 책에서도 이 부분이 특히 간략했던 것은 내 공부 수준에 비해 너무 예민한 측면이 많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뉴라이트 역사관 따져보기 작업을 하면서, 장차 이 부분을 확충할 필요를 절실하게 느꼈다. 간략하게 다루는 가운데서도 친일과 항일의 흑백론을 넘어설 필요를 강조했으니, 뉴라이트와 같은 방향 아니냐는 오해를 가장 쉽게 받을 수 있는 대목이었던 것 같다. 국가 회복의 노력만이 아니라 다른 방면의 노력도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는 생각은 사실 뉴라이트의 주장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민족 정체성 문제가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고 나는 생각하며, 다른 과제들이 이에 매몰되어 완전히 무시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민족 정체성에 아무 의미를 두지 않는 뉴라이트와 혼동되지 않도록 각별히 노력할 필요까지 느낀다. |
독립운동의 여러 가지 얼굴들
한국의 근대 항일운동은 운요호 사건(1878) 때부터 시작된 것이지만, '독립'운동이라면 주권 상실의 위기감을 전제로 하는 것이니 청일전쟁(1894) 이후의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군 진주 이후에 전개된 동학농민전쟁 후반부가 그 출발점이 된다. 1894년 6월 매듭지어진 농민전쟁 전반부는 조선 조정을 상대로 올바른 정치를 요구한 것이었는데, 7월에 일본이 출병하여 조정을 장악하자 이에 항의하여 10월에 다시 일어난 것이었다.
농민전쟁 지도부의 마음속에 '척왜(斥倭)' 의식이 이 때 싹트기는 했지만 주권 상실의 위기감에까지 이른 것은 아니었다. 청나라에서 일본으로 간섭 주체가 바뀌었다는 정도가 당시의 일반적 시각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10월 왕비가 일본인에게 살해당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조선 조야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일본인 축출을 목표로 하는 의병 활동은 민비 시해를 계기로 시작된 것이었다. 얼마 후 아관파천(1896년 2월)에 이어 대한제국 간판을 내건 후 일본 세력이 다소 견제되는 모습 앞에 의병 활동이 잦아들었지만, 1895년 '을미의병' 경험은 1905년 이후에 전개될 본격적 의병 활동의 밑바탕이 되었다.
3·1운동 이전의 항일운동은 '위정척사(衛正斥邪)'를 표방하는 의병 활동이 주축이었다. 구질서를 수호하고 변화를 거부하는 이 입장은 조선조 성리학의 연장선 위에 선 것이었다.
'정'과 '사'를 구분하는 흑백론적 관점은 주어진 충격에 대한 피동적 반응이었고, 새로운 시대를 맞을 때가 되었다는 인식은 보편화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무엇이 과연 지켜야 할 '정'이냐에 대해 여러 시각을 조정하는 것이 불가능했으므로 의병들은 명망가를 대장으로 소규모 부대들이 난립하는 양상을 피할 수 없었다.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1919년 초 위정척사론의 구심점이던 고종의 죽음을 계기로 항일운동은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 변화를 무조건 배척하고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미래를 어떻게 그려 나가느냐 하는 과제를 중심으로 항일운동이 새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왕정 아닌 공화정 지향은 당연한 일이 되었고, 그 공화정이 시민층 중심의 것이냐, 사회주의를 지향하느냐 하는 차이가 차츰 온건파와 급진파 사이의 갈림길로 떠올랐다.
동아시아에 충격을 준 열강들 중에는 왕정 국가도 있고 공화정 국가도 있었지만 모두 시민층 중심의 입헌국가였다. 일본은 이 점을 철저하게 모방했다. 폭력을 쓰는 강한 상대를 만났을 때 첫 번째 반응은 피하는 것이고, 피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면 상대의 강한 점을 배워야 한다. 일본은 피할 수 없는 상황임을 일찍 깨닫고, 또 상대방의 강점도 꽤 정확하게 파악한 셈이다.
상황 판단과 전략 선택의 주체가 취약했던 조선은 개항 초기에 일본만큼 능동적 대응을 하지 못했고, 그 결과 열강으로 변신한 일본에게 침략당하는 처지에 빠졌다. 그런 처지에서도 일본을 깔보는 전통적 정서는 쉽게 사라지지 않아, 갈수록 커지는 일본의 영향력을 무조건 부정하려고만 하는 자세가 항일운동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가 결국 합방에 이르렀다.
1910년대 일본의 전면적 직접 지배를 겪으면서 단순한 부정만으로 해결될 사태도 아니며, 과거로 되돌아갈 수도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리고 일본이 보여준 '신식(新式)'의 좋은 면도 깨닫게 되면서 지나간 왕조시대보다 나은 미래를 바라볼 수 있다는 희망도 가지게 되었다. 3·1운동은 항일운동의 주류가 과거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방향을 돌린 전환점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종결되면서 '민족자결' 원칙이 공언되고 러시아 공산혁명이 안정되어 가는 국제 상황도 한국의 독립운동에 새로운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실력을 배양하여 일본 못지않게 힘 있는 나라를 키워내려는 노선은 1920년대 이후 새 단계 독립운동에서 보수적 노선이라 할 것이고, 러시아 공산혁명을 모델로 하여 일본 등 기존 열강과 전연 다른 국가체제를 지향한 노선은 보다 혁신적 노선이라 할 것이다.
"1920년대는 일본 정치에 있어 불확정성의 시대였다"
의병 전통을 이어받은 무장독립운동은 합방 후 국경 밖, 만주와 연해주로 자리를 옮기고 국내에는 1919년 이후 새로운 형태의 독립운동이 형성되었다. 1920년대의 국내 독립운동에는 일본에서 배워온 각종 정치사상이 작용했다.
일본의 자유민주주의 사조를 받아들여 실력 양성을 통한 점진적 독립 획득을 바라본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과도적으로 일본의 도움을 받는 '자치' 단계를 구상하기도 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했다는 점에서 성숙한 면도 있는 관점이었지만, 일본의 현실이 1930년대에 군국주의로 나아가게 되면서 개량주의 신봉자들은 진퇴에 어려움을 겪고 무더기로 '변절' 시비를 남기게 된다.
1920년대는 일본 정치에 있어 불확정성의 시대였다. 한편에서 민권과 민생의 목소리가 자라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군부를 중심으로 편협한 국수주의가 강화되고 있었다. 군부는 천황에게 직속한다는 명분으로 행정부와 의회로부터 독립되어 있었다.
결국 1931년 군부가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일본 정치를 장악한다. 세계적 대공황으로 인해 열강의 대외정책이 배타적 분위기로 돌아서는 가운데 이뤄진 일이었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전면적 군국화에 나서게 되고, 조선 통치의 목적도 '민족말살'을 뜻하는 동화정책으로 굳어지면서 통치 방법에도 폭력성이 강화되었다.
1920년대 후반 신간회를 중심으로 한국 독립운동이 좌우를 망라한 폭넓은 연합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세계 정세와 일본 정세가 관용적 방향으로 펼쳐질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대공황을 계기로 경화된 국제 관계가 이 노선을 좌초시켰다.
코민테른이 배타적 노선을 채택하는 데 따라 좌익 인사들이 연합전선에서 이탈한 것이 1931년 신간회 해체의 직접 원인이었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1930년을 전후하여 일본 경제가 악화되고 정치가 불안해지면서 일본 정부당국과의 타협 내지 협력 전망이 흐려짐에 따라 신간회의 노선이 흔들리고 있었다.
"독립에 대비하는 노력이 국내외에서 일어났다"
1930년대 들어 일본의 군국화에 따라 한국 지배도 무단적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민족 발전을 위한 일체의 노력이 국내에서 제대로 펼쳐질 수 없게 되었다. 일부 지도자들은 새로운 상황을 또 하나의 현실로 받아들여 그 속에서 최선을 다하려는 타협적 자세를 취했는데, 여기서 변절 문제가 많이 불거지게 되었다.
국내의 독립운동이 좌절함에 따라 많은 지사들이 해외로 망명하여 새로운 단계의 독립운동이 1930년대 초부터 중국 등지에서 펼쳐지게 되었다. 신간회 운동이 일본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출 수 있었던 것과 달리, 해외의 독립운동은 일본을 적대하는 여러 현지 정치 세력에 제가끔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결집에 한계가 있었다.
독립운동의 가장 큰 무대였던 중국에서도 국민당과 공산당에 각각 연계된 조직들이 서로 불화를 일으켰고, 국공합작 시기에 연합을 이룰 때도 실질적 융화에 이르지 못했다. 무장투쟁의 본산이었던 만주의 경우는 일본의 조종을 받는 만주국이 들어선 후 국민당의 외면으로 인해 공산 세력과의 연결 없이는 활동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일본이 1937년 중국과 전면전을 시작하고 1941년 미국과 전쟁을 시작함에 따라 일본제국의 종말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고, 그 후의 독립에 대비하는 노력이 국내외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일제의 단말마적 억압으로 인해 이런 노력이 공론화될 공간이 전혀 없었고, 해외에서도 서로 다른 지향성을 가진 조직들이 공동노선을 형성할 여건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1919년 상해에서 설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가장 깊은 뿌리와 가장 넓은 대표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국민당에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조건 때문에 포용력에 한계가 있었고 의회 기능도 크게 발달하지 못했다. 한편, 공산당과 연결된 독립운동 세력은 공산당 정책의 혼선으로 인해 큰 희생을 겪었다. 1930년대 초·중엽 만주 동부지역에서 발생한 민생단 사건이 가장 참혹한 사례였다. 한국 독립운동은 운동가들의 희생과 고통에 비해 성과가 적어서 1945년의 해방에 결정적 역할을 맡지 못했다.
"독립을 위한 모든 노력은 더 좋은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 더 좋은 세상으로의 길을 밝히는 촛불. 1000여 년간 민족 문화를 키워온 지혜도, 100여 년간 역경을 견뎌내 온 용기도, 더 좋은 세상을 향한 마음속의 촛불 빛이 밝혀준 것 아니었겠는가. 물대포와 군홧발이 촛불을 일시 가리기는 할지언정 꺼버릴 수 없다는 것을 역사에서 배운다. ⓒ프레시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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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을 위한 모든 노력은 더 좋은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식민지 상태보다 좋은 것은 물론, 그 전의 왕조시대보다도 더 좋은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더 좋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사람들 사이에 차이가 있기 마련이고, 그 차이를 조정해 나가는 것이 정치다. 그런데 식민지 상황은 국내에서 정치의 과정이 일어나지 못하게 가로막았다. 또한 해외에서도 정치다운 정치가 일어나지 못한 것은 망국 이전의 조선이 정치의 전통을 제대로 남겨주지 않은 데 큰 이유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날 독립이 주어졌지만, 건전한 정치의 발전을 여전히 가로막는 새로운 예속과 함께 주어진 것이었다.
남한에는 일본 지배기의 변화와 운동에 대한 합리적 평가를 어렵게 하는 정치적 사회적 조건이 오랫동안 있어 왔다. 일본 지배에 협조적이었던 집단이 미군정을 매개로 하여 대한민국 지도층에 큰 자리를 잡아 친일행위에 대한 검토와 비판을 봉쇄해 온 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였다. 분단과 독재의 상황에 힘입어 반세기 이상 지속되어 온 이 문제가 근년에야 해소되어 가고 있다.
과거 청산의 지체에 대한 반발은 친일을 무조건 죄악시하고 항일을 무조건 영웅시하는 흑백론의 분위기를 낳았다. 이것이 또한 과거에 대한 균형 잡힌 성찰을 어렵게 해왔다.
일본의 제국주의 폭력을 전제로 하면 현실적으로 독립운동이 곧 항일운동이었다. 그러나 운동의 두 측면이 논리적으로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고, 40년(1905~45)이나 지속된 일제 지배 기간 중에는 항일의 장벽에 부딪치기보다 이를 우회해서 독립을 추구하는 타협적 노력도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될 여지가 있었다. 올바른 과거청산을 위한 '진실과 화해'를 이루기 위해서는 흑백론을 넘어서서 타협적 노력도 있는 그대로 보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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