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페리스코프] 뉴라이트 역사관 따져보기 ⑱

기사입력 2008-10-21 오전 10:35:38 

연재를 끝내며
  
  그 동안 애독해 주신 독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애초에 7~8회 가량 생각하고 시작한 작업이 길어진 것은 저 자신 들여다볼수록 생각이 자라났기 때문입니다. 욕심으로는 한참 더 계속하고 싶지만, 이제 지루해 하실 때도 된 것 같군요.
  
  마지막 회는 오늘 저녁 포럼 '진실과 정의' 강연을 위해 준비한 글을 올립니다. 포럼을 상대로 이야기하는 방향이 프레시안 독자들을 상대로 이야기하는 방향과 꼭 겹치지는 않지만, 마무리하는 글로는 조금 다른 방향을 보여드리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조금 쉰 다음 다른 주제를 가지고 여러분 앞에 다시 나서겠습니다. 건승하십시오.
  
  김기협 합장.

  뉴라이트 역사관을 그 동안 여러 층위에서 따져봤는데, 그 문제점의 가장 기본 줄기는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규정하는 독단성이다. 이 규정을 틀린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인간에게는 이기적 특성이 있다. 이 규정을 근거로 해서 정치 현상이나 경제 현상을 고찰하면 유용한 해석을 많이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시각 안에 인간 세상의 모든 현상이 들어올 수 없다. 자본주의를 비교적 잘 운용해 온 사회들은 다른 시각에서 파악되는 의미들도 함께 감안하여 복합적 정책 구조를 빚어냄으로써 인간성이 최대한 자연스럽게 발현될 수 있도록 노력해 왔다.
  
  신자유주의는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만 본다. 이론을 탐구하는 사람들이 이론에 매몰되어 현실 전체를 보지 못하는 수가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이런 '순진한' 독단성으로 보이지 않는다. 19
세기 초반 산업자본주의 시대 초기 자유주의에서 이기심만을 보는 인간관은 순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금융자본주의 시대 이래 이 관점은 많은 재검토를 받아 왔다.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그 동안의 재검토 내용을 하나도 모르는 척, 시치미 떼고 이기심 일원론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에는 뭔가 불순한 동기가 있다고 보인다. 나는 <밖에서 본 한국사> 맺음말에 이렇게 썼다.
  
  
"자원의 한계를 의식할 수 없던 19세기에 시장 기능을 강조한 자유주의는 하나의 이념이었다. 그러나 자원의 한계가 분명해진 21세기에 시장 만능을 주장하는 신자유주의는 일부 세력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정략일 뿐이다."(329~330쪽)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규정하는 뉴라이트 '역사관'은 정당한 학문적 노력의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니라 신자유주의라는 정략 노선을
지원하기 위해 억지로 짜 맞춘 틀이다. 따라서 그 위협은 역사 교육의 혼란에 그치지 않고 신자유주의와 관련된 정책 전반에 펼쳐지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어떤 위협을 어떤 방식으로 제기하는 것인지 살펴보자.
  
  "'성공'의 길이 멀어져 갈수록 현 정권은 '승리'에만 집착한다"
  
  어떤 위협을 제기하는지는 쉽게 눈에 보인다. 우선 직접적으로 역사 교육에 대한 위협이 적나라하게 진행되고 있다. 눈길을 들어 넓게 바라보면 경제 구조의 기형화, 사회 양극화, 민주주의 퇴행, 남북관계
악화 등 신자유주의의 일반적 특성과 관계되는 문제들이 있다. 경제, 사회, 정치, 외교 등 여러 분야의 문제들은 더 잘 다룰 분들이 있으므로 문제의 개연성만을 지적하고 넘어가겠다.
  
  독자들의 주의를 더 촉구하고 싶은 것은 이런 위협들이 제기되어 온 방식에 대해서다. 연재 중 역사
교과서 문제를 다루면서(☞관련 기사 : 뉴라이트는 교과서를 불쏘시개로 아는가?) 뉴라이트 '대안 교과서'의 내용을 따지고 싶은 충동을 꾹꾹 참고, 책동 방식에만 초점을 맞췄다. 내용이야 나보다 훨씬 더 잘 따질 전문 연구자들이 계시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응을 위해서는 내용보다 방식이 더 중요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념이고
나발이고 없이 욕심 하나만으로 권력과 돈에 눈감고 매달리던 과거 수구 집단의 행태에 비하면 뭔가 이념 비슷한 것을 들고 나온 뉴라이트는 한 단계 진화된 모습이다. 200년 전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만큼, 한 특정 집단이 원하는 여러 방향의 정책 노선을 관통할 만한 그럴싸한 논리를 제공해 주는 이념이다.
  
  이 이념이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는 사실은 100여 년에 걸친 경험과 연구로 밝혀져 있다. 그런데
레이건 이후 미국에서 그렇게 했다. 공산권과의 대결 상황에서 전술적 이득을 노린 것까지는 이해가 간다. 그러나 공산권 붕괴 후에도 그 노선을 벗어나지 못하다가 지금의 금융 공황에 이르렀다.
  
  미국 경제의 파탄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상황에서 '미국식'의 매력은 우리 사회에 꽤 널리 먹혀들 수 있었다. 그리고 2007년 대선과 2008년 총선에서는 한나라당의 권토중래가 예상되고 있었다. 그 단계에서 뉴라이트는 보수
진영의 담론 헤게모니를 장악함으로써 수구 집단이 칼자루를 쥐고 표면에 나설 길을 열어주었다.
  
  그렇게 해서 뉴라이트는 '승리'했다. 그러나 권력 장악 뒤의 상황을 감당할 길이 없다.
스타일대로 쇠고기를 주물럭댔더니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7-4-7' 공약은 출범하자마자 가벼운 (금융 공황에 비하면) 유가 파동 한 차례에 날아가 버렸다. 국민의 광범한 신뢰와 지지를 모으는 것은 이제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성공'의 길이 멀어져 갈수록 현 정권은 '승리'에만 집착한다.
주식 시장과 외환 시장에 매달리는 방식에서 문외한도 알아볼 수 있다. 불리한 상황은 얌전히 겪어내는 것이 손해 덜 보는 길일 수 있는데도, 기금 풀고 외환 풀고 자꾸 집적대서 덧나게 한다. 필요 없는 승부라도 자꾸 걸어서 점수 딸 기회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역사 교과서를 놓고 그쪽 입장에서 보더라도 바람직하지 못한 무리수를 자꾸 쓰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일 것이다.
  
  "'촛불' 현상이 정치 발전 없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겠는가?"
  
  뉴라이트 책동에 대한 대응은 '승리'보다 '성공'에 목표를 두어야 한다. 보수 진영이 '좌파 정권'에 대한 '승리'를 외치는 수구 집단에 헤게모니를 쥐어준 결과 정권을 넘겨받자마자 길을 잃고 있는 상황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또한 진보 진영이 1997, 2002, 2004년의 주요 선거에서 거듭 승리하고도 성공을 거두지 못한 이유를 반성해야 한다. (여기서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은 신한국당-한나라당과 그 대항세력을 가리키는 상대적 의미일 뿐, 엄밀한 의미에서 '보수'와 '진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주어진 여건에 비해 매우 훌륭한 업적을 이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국민의 폭넓은 신뢰와 지지를 받는 지도력을 안정시킨다는 가장 기본적인 과제에 실패했다. 그 실패가 가져온 2007~2008년 선거 패배는 2중의 패배였다. 한나라당에게 졌다는 것은 병가지상사라 할 만한, 큰 문제가 없는 일이다. 정말 심각한 문제는 한나라당이 수구 집단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한 것이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지도력의 안정에 실패한 근본적 이유는 정체성의 혼란에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정권의 지도부는 보수 노선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이끈 정당은(국민회의-민주당-열린우리당) 진보에서 보수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품고 있었다. 수구 세력 집권기에 '반 수구' 세력이 광범한 결집을 필요로 한 결과였다. '좌파 신자유주의' 얘기가 정색으로 오고갈 만큼 당시의 여권은 구성이 복잡했다.
  
  1997, 2002, 2004년의 진보 진영 승리는 모두 보수 진영의 분란에서 얻은
반사 이익에 적지 않은 행운이 곁들인 결과였다. 이 승리의 의미를 냉정하게 파악하고 정치 발전의 기회로 이용하는 데 진보 진영이 노력을 쏟았다면 오늘날 보고 있는 '정치의 실종'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2004년 총선의 대승 이후 여권은 그야말로 승리를 성공으로 착각한 듯, 정치 발전의 노력을 제쳐놓고 당권 경쟁에만 몰두하는 양상을 보였다. 1997년 대선을 앞둔 신한국당을 판에 박은 듯한 풍경이었다.
  
  아쉬움이 남기는 하지만 그 10년 동안에 정치 발전도 상당히 이뤄진 것이 사실이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촛불' 현상이 정치 발전 없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장내' 정치에 별 발전이 보이지 않는 동안 '장외' 정치에 큰 발전이 있었던 것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인프라가 확충되었기 때문이고, 두 정권의 노력이 여기에 작용했다. 노력을 더 집중하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다.
  
  "현 정권의 공세는 역설적으로 민주주의 발전의 기회를 만들어주고 있다"
  
  진보 진영은 2007~2008 선거에서 참패한 후 존재감마저 잃고 있지만 사회의 민주주의 인프라는 키워져 있다. 한국
현대사의 보다 자유롭고 합리적인 인식도, 방송의 공정성과 공익성 증대도, 촛불 정신과 함께 이 인프라의 일부분이다. 뉴라이트와 현 정권이 이 인프라의 파괴에 서둘러 달려드는 것은 수구집단의 통치 복원에 걸림돌이기 때문이다.
  
  진보 진영의 집권 연장을 위한 정치공학적 시도는 완전히 실패했다. 반면 사회의 민주주의 인프라는 추위가 닥친 뒤에 푸름을 뽐내는 송백과도 같이 그 가치를 빛내고 있다. 정권을 가지고 있을 때 목전의 경선과 선거보다 인프라 확충에 더 노력을 모으지 못한 것이 승리만 쳐다보고 성공을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다행인 것은 현 정권이 이 인프라의
성장을 도와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식 시장과 외환 시장을 자꾸 집적거려서 덧나게 하는 것처럼, 이 인프라의 의미를 국민들이 더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자꾸 집적거려 주는 것이다. 촛불부터 생각해 보라. 웬만큼 상식적인 대응을 했다면 촛불 정신의 폭발적인 힘이 그렇게 드러날 수 있었겠는가? 성공을 생각할 줄 모르고 승리에만 매달리기 때문에 뭐든 저지르지 않고 가만 있지를 못하는 것이다.
  
  뉴라이트를 앞세운 현 정권의 공세는 역설적으로 민주주의 발전의 기회를 만들어주고 있다. 물론 민주 시민들은 수구 집단의 현실적 위협으로부터 민주, 평화, 진실, 정의, 자유의 제 가치를 지키기 위해 분투, 노력해야 할 것이다. 바로 그 분투, 노력의 과정 속에서 그 가치들은 자라날 수 있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자면 지키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키우기 위한 노력이라 할 것이다.
  
  뉴라이트는 수구 집단의 가치관을 집약해서 보여준다. 한 마디로, 모든 가치를 재물에 종속시키는 가치관이다. 예컨대 그들이 떠받드는 '자유'가 어떤 것인가? 그들은 자유를 내면화하지 않고 소유의 대상으로 객체화하며, 따라서 내 것을 주장하되 남의 것을 존중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자유가 실천의 과정 속에 살아 움직이는 사회적 관계가 아니라 힘으로 빼앗고 돈으로 사는 물건이다. 이용의 대상이지, 사랑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뉴라이트의 도발을 타고넘어 인간적 가치들을 키워내는 원리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자유건, 평화건, 진실이건, 정의건, 어떤 인간적 가치든 '내 것'이란
도장을 찍고 남의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들 때 원래의 의미를 잃어버린다. 공자가 귀신을 공경하되 거리를 두라고 한(敬而遠之) 것도 그런 뜻 아닐까?
  
  진실과 정의는 허위와 불의에 승리함으로써 일어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사랑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나는 것이다. 1987년 국민의 승리는 진실과 정의를 가져다준 것이 아니다. 독재 체제가 가로막고 있던, 진실과 정의로 향하는 길을 열어준 것일 뿐이다. 독재 체제 아래서도 진실과 정의를 마음속에서 키우고 있던 이들이 있었지만, 보통사람들에게는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길이었다. 보통사람들도 걸을 만한, 꽤 편안한 길이 지금은 열려 있다. 진실과 정의를 얼마만큼 받아들일 지는 각자의 성품에 달려 있을 뿐이다.
  
▲ '촛불 문화'는 한국 사회의 질적 변화를 보여준다. 물리적 변화, 화학적 변화와 차원이 다른, 생물학적 진화에 비길 만한 비가역적(非可逆的) 변화다. 명박산성, 물대포와 군홧발, 방패의 물리력으로 이 변화를 되돌릴 수 있다는 생각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세계관에서 나온 것이리라. ⓒ프레시안

  "궁둥이를 쳐든 채 머리통만 구멍에 처박은 타조"
  
  이런 생각들을 바탕에 깔아놓고 뉴라이트의 도발에 대한 구체적 대응책을 생각해 본다. 역사관 따져보기 작업을 마무리하는 글이니, 당장 진행 중인 교과서 문제부터 살펴보자.
  
  점입가경이랄까, 무리수가 무리수를 불러온 끝에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꼴이 벌어지고 있다. 전문가협의회? 국가기관인 국사편찬위원회도 잘 따라와 주지 않으니 직제에도 없는, 따라서 권한도 책임도 없는 모임을 하나 만든 모양이다. 정부 측 직권수정이 도리에 어긋난다는 사실은 알기에 그 책임을 떠맡아줄 누군가가 필요해서 만들었겠지만, 잘 떠맡겨질까? 제도적 근거도 없고 구성원 명단조차 공개하지 않는 모임에게서 권위를 빌리겠다는 교육과학기술부의 꼴이, 궁둥이를 쳐든 채 머리통만 구멍에 처박은 타조를 떠올리게 한다.
  
  국사편찬위원회가 교육과학기술부에 보낸 보고서를 놓고 교과서 수정 필요성의 증거처럼 일제히 사설로 떠들어댄(17, 18일) 수구 신문들도 가관이다. 그 보고서의 어디에 절차를 무시하고 수정을 서둘러야 할 절박한 이유가 담겨 있단 말인가? 글 읽을 줄 아는 모든 국민에게, "우리에겐 너무나 절박한 정략적 동기가 있습니다" 광고하고 있는 꼴이다.
  
  이 사태에 임해 관계된 여러 부문의 반응에서 전화위복의 느낌을 받는다. 국사편찬위원회의 보고서 내용에 지엽적으로는 불만을 느끼는 점도 있지만, 그래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 하나의 국가기관이 대응하는 자세로는 훌륭한 것으로 생각한다. 역사학계 연구단체들이 입장을 표명한 것도 반가운 일이다. 과거 독재 시절에 역사학자들이 비정치성을 표방한 것은 정상적인 일이 아니었다. 그 관성으로 사회에 대한 책임을 경시해 온 풍조가 이 번 일을 계기로 다소나마 바뀔 것을 기대한다.
  
  무엇보다, 역사 교사들의 움직임에 큰 기대를 가진다. 교사는 교육에서 교과서보다 훨씬 중요한 존재다. 설령 이번 '교과서 전투'에서 뉴라이트가 승리해 교과서가 얼마간 개악되는 일이 있더라도, 역사 교육의 의미에 대한 교사들의 인식 심화는 그를 만회하고도 남는 우리 사회의 소득이 될 것이다.
  
  지금 사람들의 눈앞에서 도발을 행하고 있는 것은 뉴라이트를 앞세운 수구 집단이다. 나는 이 도발이 진보 진영에 대한 것이기 이전에 여러 인간적 가치에 대한 것이라고 본다. 이 가치들을 아끼는 사람들의 대응이 도발에 대한 승리를 넘어 바로 그 인간적 가치들의 성공을 바라보기 바란다. 제일 먼저 할 일은 그 가치들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키는 것이다. 그 가치들이 어느 단계에서고 완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닌, 지키고 키우기 위해 애쓰는 과정 속에서 의미를 가지는 것임을 생각하면, 고되더라도 보람찬 길이 될 것을 기대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