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참 반성이란 걸 할 줄 모르는 청년이었다. 나 자신을 "착한 사람"으로 굳건히 믿고, 잘못되는 일이 있으면 뭐든 외적 조건에서 핑계를 찾는 재간을 열심히 익혔다. 그래서 교수직에 있던 30대에는 가까운 이들에게 "합리화의 대가"란 평도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평인데, 당시에는 그런 줄도 몰랐다. 이제 늘그막에 들어서까지 한국근현대사의 치욕과 고통을 "남 탓"으로 돌리는 외인론에 치중하는 것도 그 여파일지.

 

그러다 며칠 전 이야기처럼, 1985년 영국 체류를 통해 나 자신을 돌아보는 눈을 새로 뜨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내 존재를 통째로 되돌아보게 하는 충격을 받는 일이 있었다. 1987년 말 어느 날 아버지 일기를 어머니께 넘겨받은 것이다.

 

넘겨받을 때는 개인적 유품이라고만 여겼다. 일찍 돌아가신 분에 대한 애틋한 마음 때문에 어머니가 지켜온 하나의 짐일 뿐이고, 이제 내가 넘겨받을 때가 된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내 인생을 바꿔놓을 가르침을 (또는 충격을) 거기서 만나게 될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5년 후 <역사 앞에서>란 제목으로 출간되어 많은 독자들에게 감동을 일으켜준 그 글에서 필자의 아들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고 불초함을 절실하게 느꼈을지는 읽는 분들 상상에 맡긴다. 내 인생이 갑자기 끝났을 때 내 삶의 누추한 단면들이 드러나는 광경을 참담한 심정으로 바라보는 악몽에 여러 해 시달린 일은 앞서 언급한 바 있다.

 

일기를 넘겨받은 일과 3년 후 교수직을 떠난 일 사이에 필연적 인과관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큰 배경조건이 되었던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학교를 떠난 후 혼자 지내면서 일기 내용을 틈틈이 입력하는 일을 시작했다. 한국현대사 연구자들에게 자료로 제공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입력 작업을 진행하면서 단순한 자료를 넘어 그 글이 가진 가치를 점점 더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도 자료 형태의 발표를 넘어 일반 독자를 위한 출판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자료 형태로라도 발표만 되면 자료 이상의 가치를 찾을 사람들도 찾아볼 수 있을 테니까.

 

입력이 끝난 후 서중석 선생에게 보였다. 나는 학술지에 몇 차례 나눠서 붙여 낼 길을 생각해봐 달라고 부탁했는데, 서 선생이 일반 출판도 고려하라고 권했다. 그 좋은 글이 자기 눈에 들어오게 해준 데 감사하면서.

 

그래서 창비사에 역할을 가진 백영서 선생에게 검토를 부탁했고, 그 결과 1993년 초에 책이 나오게 되었다. 그 일에 관계된 여러 분이 감동의 마음으로 보여준 열성적 태도에 내가 오히려 감동을 받았는데, 그중에서도 정해렴 선생과 한기호 선생의 열성을 잊을 수 없다.

 

<역사 앞에서> 출간은 내가 불초자로서 자격지심을 극복하려는 긴 과정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 점을 되새길 때마다 내게 그 일기를 넘겨줄 당시의 어머니 마음을 떠올려 본다. 당시의 한심한 내 꼴을 보며 하나의 충격을 던져줄 필요를 느끼셨을 것 같다. 그 결과 한편으로는 아들놈을 사람 비슷하게 만드실 수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세상에 잊혀졌던 지아비의 존재를 당당히 드러낼 수 있었으니, 양수겹장이랄까? 아버지의 '유족'으로서 어머니의 역할은 만점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또 한 분 지식인의 뒷일을 생각하며 아버지 일기를 둘러싼 일이 생각난다. 류연산(1957-2011). 6년 전 그가 불시에 세상을 떠났을 때 블로그에 그 이름으로 카테고리 하나를 만들었다.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고, 한 지식인으로서 업적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그분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꺼낼 수 있기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아직까지 제일 내용이 빈약한 카테고리로 남아있지만 닫고 싶지 않다. 그분에게 마음을 닫는 것 같아서이기도 하고, 언젠가 그분 이야기가 많이 나올 때를 기다리는 마음에서다.

 

"류연산" 카테고리의 마지막 포스팅은 그가 세상 떠난 지 1년 반 지났을 때의 글인데, 이런 말로 맺어져 있다.

 

아내에게 책 구해 달라는 전화를 하면서 가능하면 류 선생 부인을 한 번 만나보라고 부탁했다. 류 선생이 만든 자료가 어디 가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근년 현대사 작업을 하다 보니 그의 자료 범위를 파악해 뒀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이 수시로 든다. 지금이라도 그 자료에 접할 수 있으면 남은 <해방일기> 작업에 보탬이 될 것 같고, 현대사 연구자들에게도 활용을 권하고 싶다.

 

류 선생이 4백여 개의 녹취테이프를 남긴 사실을 그 후에 알게 되었다. 자신의 손으로 언젠가 정리할 것으로 생각하고 레이벌만 붙인 채로 그냥 쌓아놓은 모양이다. 자기 손으로 정리할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때 문병 온 김병민 당시 연변대 교장에게 그 자료를 학교에서 넘겨받아 달라고 부탁했다고 들었다.  김병민 씨는 류 선생에게 조선어문학계의 선배 같은 스승이었다.

 

김병민 교장에게의 부탁이 왜 이뤄지지 않았는지 아직도 나는 확실히 모른다. 오늘 점심 함께 할 력사학계 김성호 교수에게 좀 들을 수 있을지. 김 교수는 김 교장과도 류 선생과도 가까운 사이였으니 그 일에 간접적으로라도 관여했을 것 같다.

 

'류연산 자료'가 연변대로 넘어가지 못한 것을 알고 나는 그 자료의 활용에 한국 쪽에서 나설 여지도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조광 선생을 근 20년 만에 만나 그 얘기를 꺼냈다. 그 자료의 가치를 쉽게 이해할 만한 분이면서 또 한국사학계에서 그런 일에 나설 길을 잘 알아볼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었다.

 

조 선생이 국편의 당시 자료실장 이아무개 선생에게 그 이야기를 해서 내게 연락이 왔다. 그래서 류 선생의 아들 광엽 군과 연락을 붙여주었다. 그 후로 어느 쪽에서도 더 연락이 없기에 잘 풀리지 않은 모양이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차에 조 선생이 국편 위원장으로 취임하게 되었고, 이번에 연길 오면서 그 일을 환기시켜 드렸다. '류연산 자료'의 가치에 대한 그분의 기대감은 변함 없었다. 그래서 이 달 하순 연변대와 국편 공동주최의 학술회의 참석차 연길 오는 길에 유족을 만나기로 했다.

 

짐작이지만, 국정교과서 따위에나 매달려 있던 시절의 국편에서 자료 발굴사업 같은 일에 아무리 실무자들이 성의껏 임한다 해도 여건이 충분치 못했기 쉽다. 이제 국편이 제 모습을 되찾고 있는 장면에서 마침 이 자료의 가치를 잘 이해하는 기관장이 앉아 있으니 '류연산 자료'가 빛을 보기 위한 최상의 조건이다.

 

아끼고 존경하던 친구의 유족들 입장을 바라보며 내 아버지의 유족으로서 내가 맡았던 역할이 겹쳐져 생각난다. '류연산 자료'가 잘 활용되어 그분의 업적이 제대로 드러나는 모습을 유족들이 곧 보게 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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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