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건너와서 며칠 안 되었을 때 조광 선생에게 전화를 받았다. 8월 하순에 이곳에서 한-중 역사가포럼이 열리는데, 참석해 줄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물론 그럴 수 있다고 대답하자 강평을 맡아달라고 했다. 뭘 어떻게 강평하라는 건지 몰라도, 그분 권하는 일은 뭐든지 하기로 마음먹고 사는 터인지라, 그러마고 했다.

 

응락을 해놓고 나서 가만 생각하니, 이미 여기 와 있는 나를 항공료, 호텔비도 들이지 않고 끌어들일 심산인데, 발표를 맡기기에는 너무 촉박하니 토론에 참여시키려는 모양이다.

 

학술회의에서 토론은 참여자의 노력 수준이 들쑥날쑥이다. 발표자들 못지않게 열심히 준비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그냥 나와서 하나마나한 소리만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공동주최 기관의 하나인 국편 책임자가 추천한 토론자가 얼렁뚱땅할 수는 없는 입장 아닌가. 토론자로 참석해 본 중에 최대의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아직 발표문들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먼저 든 걱정은 할 말이 너무 없을까 하는 것이었다. 발표문이 너무 늦게 와서 읽을 시간이 충분치 못하거나 발표 내용이 너무 재미없어서 붙일 말이 없으면 어떡하지? 그래서 비상용으로 글 한 꼭지를 써놓았다. "한-중 역사가포럼"의 취지에 맞춰 할 만한 개괄적인 이야기로. http://orunkim.tistory.com/1738

 

그런데 발표문은 충분히 일찍 도착했고, 재미있는 것이 많았다. 그래서 준비했던 글은 접어놓고 발표문에 매달렸는데, 이제 그것만으로도 할 말이 너무 많다. 토론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하지? 내가 이야기할 시간은 어느 정도가 적당하지? 물어볼 데도 없으니 모든 상황에 대비해서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금요일(25일) 한국대표단 도착 후 연변대 주최 만찬 자리에서 토론 사회를 맡을 변주승 교수를 붙잡고 의논했다. 토론이 한 시간 남짓 되는데, 발표자 아닌 토론자가 나 하나니까 모두에 10분 가량 전반적 소감을 얘기해 주면 좋겠다고 했다.

 

막상 이튿날 회의 때는 시간 형편이 괜찮아서 20분가량 발표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의견을 이야기할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수박 겉만 핥은 느낌이다. 가장 흥미롭게 읽고 생각을 많이 한 순커즈(孫科志)의 발표에 관해서는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아서 나중에 조용히 얘기를 하겠다"고 넘어가야 할 정도였다. 그날 국편 주최 만찬에서는 헤드테이블의 자리를 사양하고 순 교수 옆에 앉아 이야기를 더 나눌 수 있었다.

 

이번 행사 중 익숙지 않은 "원로" 대접을 받으면서 착잡한 마음이 든다. 내딴에 논쟁적인 이야기를 내놓아도 맞받아쳐 주는 사람 없이 다들 "네, 네"만 하니 뒷방 늙은이가 된 기분이다. 나는 학문이란 것을 problem-solving 보다 problem-raising 으로 여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문제 제기에만 주력해 왔는데, 이제 다른 화법도 모색해야 되겠다. 내 이야기에 토 달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여 주려는 이들을 위해.

 

조 선생의 이번 연길 방문에 학술회의와 별도로 내가 바란 일이 두 가지 있다. 그 하나는 국편의 '류연산 자료' 접수 가능성을 검토하는 것이다. 열흘 전 일기에 적은 것처럼 나는 조 선생의 국편 취임이 '류연산 자료'의 활로를 찾는 데 좋은 계기가 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그래서 25일 만찬 후 류 선생 부인과 접견 약속을 잡아놓고 있었고, 접견에 배석한 박진희 선생이 앞으로 그 일을 추진해 나갈 출발점을 만들 수 있었다.

 

내가 바란 또 하나 일은 시시한 것이지만 반성하는 뜻에서 굳이 적어둔다. 홍석현의 책에 대한 최장집의 서평을 보고 깜짝 놀란 일을 얼마 전 적었는데, 홍 회장에게 책을 보내달라고 하면서 국편 조 위원장님 앞으로 두 권을 보내달라고 했다. 요즘은 어떤지 몰라도 이곳의 우편서비스에 대해 나는 아주 나쁜 인상을 갖고 있다. 헌데 마침 조 선생이 곧 이리 올 참이니 책심부름 한 번 시켜먹자는 꾀를 내고, 조 선생도 흥미를 일으킬 책이니 두 권을 보내달라고 (심부름값 포함) 한 것이다.

 

그런데 막상 연길에 온 조 선생에게 "책은요?" 물으니 "무슨 책?" 한다. 그래서 "홍석현 회장 책 선생님한테 안 왔어요?" 하니, "그 책? 왔지요, 두 권씩이나. 왜 왔는지 몰라서 어리둥절했어요. 그분 전화번호 좀 주세요. 고맙다고 인사하게."

 

집에 돌아와 메일함을 열어보니 메일 하나가 '임시보관함'에 걸려 있다. 어쩌다 발송을 깜빡하고 지나갔던 모양이다. 부끄러움을 깊이 새기기 위해 아래 붙여 놓는다.

 

"죄송"이란 말은​ 수십 년 전에 제 사전에서 지운 말인데 오늘 씁니다. 현실적으로 제가 빨리 보고 싶은 책을 안심하고 빨리 받아볼 수 있는 길을 찾는다는 게... 대부님께 심부름 시키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그 친구... 십여 년 전 볼 때보다 코드가 잘 맞는다는 생각은 들었는데... 오늘 프레시안에 실린 최장집 교수 서평을 보며 상상 외로 내 생각과 가까운 게 많다는 것을 알고 빨리 책을 보내달라고 졸랐더니 보내주겠다네요. 정말 선생님도 재미있게 보실 책 같습니다.

​기도 올리는 습관이.. 잘 익혀지지 않네요. 선생님 연변 오시는 길에 합숙훈련이라도 해야 되는 건가? 사람 많은 식사자리라도 기도 열심히 올리시는 모습 뵙고 싶습니다. ​기도보다 고해가 제게는 큰 과제로 느껴집니다. "퇴각일기"에도 고해의 마음을 담고 싶은 건데... 쓰레기를 제대로 버려야 기도하는 자세를 제대로 세울 수 있겠죠?

​홍 회장에게도 강조해서 보여줬지만, "E H 카"라는 이름의 우상에 부딪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우상이 아직도 강건하기 때문에 부딪치는 맛이 괜찮을 것 같습니다. 틈 나실 때 http://orunkim.tistory.com/1534 글도 한 번 살펴봐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레오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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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