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1950년생으로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역사 공부를 해온 사람입니다. 2010년 시점에서 대한민국이 생겨나던 상황을 정리해 볼 생각을 했습니다. 1945년 8월 해방에서 1948년 8-9월 분단 건국에 이르는 과정을 65년의 시차를 두고 하루하루 더듬어보고자 합니다. 그 동안 나온 연구 성과를 힘닿는 대로 살펴볼 텐데, 이따금 선생님 생각도 여쭙고자 합니다.

안: 반갑습니다. 나도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이라서 다른 분보다 나랑 얘기하고 싶은 생각이 든 모양인데, 실망시킬 것 같아서 미리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우리 세대는 공부할 여건이 워낙 열악해서 공부에 어설픈 점이 많습니다. 독립된 우리나라에서 자라나고 공부한 김 선생 세대에게 가르쳐줄 만한 것이 뭐가 있을지...


김: 과연 “독립된 우리나라”에서 제가 공부를 제대로 해 온 것인지는 이번 작업을 하면서 깊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그것은 접어두고, 제가 선생님과 이야기 나누고 싶은 것은 꼭 역사학 선배시라서보다, 해방에서 건국에 이르는 3년간 정치의 전개 속에 꾸준히 중요한 역할을 맡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현실에 참여하면서도 역사학도의 냉철한 시각을 지키셨다는 점이 중요하기는 하지요.


안: 역할이라... 후손에게 부끄럽습니다. 소년시절에 잃었던 나라를 중년이 지나서야 찾으며, 후손들은 우리처럼 불행하게 살지 않기를 바랐는데... 우리 민족의 좋은 점을 잘 살려낼 수 있는 나라를 세우고 싶었는데... 그 3년의 시간에 보람보다 회한을 더 많이 묻게 되었습니다.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 그나마 부끄러움을 줄이는 길일 테니, 뭐든 서슴지 말고 물어보세요.


김: 고맙습니다. 65년 전 해방 시점으로 돌아가 보죠. 식민지 상황에 전쟁 상황이 겹쳐서 여러 해 동안 언론 통제가 엄청났지요. 그 동안 선생님은 국내외 정보를 어떻게 입수하고 계셨는지요?


안: 나는 사람 많이 안 보고 틀어박혀 지냈지만, 신문사 간부를 오래 했기 때문에 중요한 정보라고 생각되는 것이 있으면 찾아와서 전해주는 이들이 좀 있었습니다. 1942년 말 단파방송 사건으로 개성방송국과 경성방송국이 적발되었지만, 단파라디오가 그 두 군데만 있었겠습니까? 믿을 만한 분들에게서 이따금씩 이런저런 소식을 들으며 지냈습니다.

전쟁 말기가 되어서는 고위직 일본인에게서 중요한 정보를 꽤 얻게 되었습니다. 대화숙(大和塾)을 통해서 포섭이 안 되니까 총독부와 경찰의 고위간부들이 내 협력을 얻겠다고 만나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나를 설득하기 위해 상황을 설명하는 데서 알아내거나 확인할 수 있는 정보가 있었지요.


김: “도둑처럼 찾아온 해방”이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예기치 않은 해방이었다는 뜻이죠. 그런데 아무리 정보를 통제한다 하더라도 온 나라가 파국으로 치닫는 상황을 그 안에서 감지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의아한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은 일본의 패전을 꽤 오래 전부터 예견하고 계셨다면서요?


안: 민간 신문이 모두 폐간될 정도의 심한 통제였지만, 하늘을 손바닥으로 가릴 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 어느 날 5천리 밖에서 진격하고 있다는 뉴스가 나오고, 한 달 뒤에는 3천리 밖에서 진격, 또 한 달 뒤에는 2천리 밖에서 진격 중이라고 하니, 후방을 향해 진격하고 있다는 얘기겠습니까? 통제와 억압이 갈수록 심해지고 물자가 귀해지는 것만 보아도 전황이 불리하다는 사실을 모를 수가 없었지요.

내가 역사 공부하는 사람이라서 더 일찍, 더 깊이 알아차릴 수 있는 면도 있기는 했습니다. 1938년 10월 서대문형무소에 있을 때, 중국의 무한삼진(武漢三鎭) 점령을 축하하는 소리가 담장 안에까지 들렸지요. 함께 갇힌 사람들이 낙담할 때, 나는 일본이 패망의 길로 들어선 것을 장담했습니다. 3년 후 태평양전쟁을 일으킬 때는 이제 시간문제라고 확신했습니다. 역사 공부가 없었다면 일본이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이던 그 때 그 패망을 확실히 생각하기 어려웠겠죠.

나만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1943년 초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홍원경찰서에 있을 때, 일경의 학대는 내가 겪어본 중에서도 최악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매 맞고, 매어달리고, 물벼락을 뒤집어쓰면서도 갇혀 있는 우리들의 마음은 밝았습니다. 터널의 끝이 보였기 때문이죠. 그래서 고문당하고 나서 감방에 돌아오면 해방이 되었을 때 이 사람을 총리 시키면 좋겠다, 저 사람이 외교총장 감이다, 우스개를 나누며 지낼 수 있었습니다.


김: 그러나 선생님 못지않게 학식이 깊은 분들 중에도 일본의 패망에 대비하고자 애쓴 이가 거의 없었습니다. 해방 후에는 전혀 예견하지 못했다고 대개들 얘기했지요.


안: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전혀 예견하지 못한다는 것이 불가능했지요. 물론 정확히 언제라고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7월 말 시점에서 나도 보름 후의 일로 생각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몇 달은 더 버틸 줄 알았지요. 그러나 1945년이 될 때는 그 해 중에 끝날 것을 확실히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속으로는 예견했다 하더라도 겉으로 드러내서 말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일본의 패망을 거론한다는 것은 ‘비국민(非國民)’ 정도가 아니라 역적이었죠. 제대로 표현도 못하고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으니 속으로 생각만 했다고 하기가 더 부끄러운 겁니다.

대화숙에서 내게 요구한 것이 젊은이들이 징병-징용에 응하도록 설득하는 강연이었습니다. 나도 그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회피’했습니다. “어차피 질 싸움에 젊은이들 무의미하게 희생시키는 짓을 나는 못하겠소.” 당당히 거절하지 못하고 병으로 핑계를 댔습니다.


김: 말이 통하지 않는 실무자들에게야 핑계를 대고 ‘회피’를 하셨지만, 일본인 고위층에게는 당당히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해방 당시 여운형 선생과 함께 질서유지 협조를 부탁받아 건국준비위원회(건준) 사업에 착수하신 것도 그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안: “당당히” 얘기했다고 하기는 좀 어색합니다. 일본이 패망할 것이라고 생각대로 말한 것도 아니고, 지금 벌이고 있는 큰 전쟁의 결과를 낙관만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지 않느냐, 정치에 책임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떤 경우에도 대비책을 세워놓아야 하는 것 아니냐 하는 차원의 얘기였습니다.

1944년 봄부터 총독부, 일본군과 경찰의 최고위 간부들을 자주 보게 되었습니다. 조선의 ‘비협력 지도층’ 회유를 그들이 큰 과제로 삼게 된 것이었죠. 나 외에 여운형, 송진우, 조만식, 홍명희 제씨였습니다.

그들과 여러 번 만나다보니 빤한 사실을 접어놓고 딴전만 피우는 것이 답답해졌어요. 그래서 초겨울에 오카 히사오(岡 久雄) 경기도 경찰부장 만났을 때 그런 쪽으로 처음 얘기를 했습니다. 전쟁 결과를 낙관만 하고 무리한 정책을 폈다가 뜻밖의 결과가 벌어지면 조선인들의 쌓인 원한을 어떻게 감당할 거냐고 했죠. 그 사람이 다른 일본인들에게 그 얘기를 해서, 그 후로는 금기(禁忌)를 접어놓고 얘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김: 상식적인 얘기일 뿐이었다고 말씀하시지만, 당시 상황에서 상식적인 얘기를 하는 데 여간 용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죠. 그런 자세 때문에 신변의 위협도 많이 겪지 않으셨습니까. 일본인들끼리도 그런 상식적인 얘기를 나누기 힘든 시절이었는데, 여운형 선생과 선생님 두 분만이 패전 가능성을 당당히 언급할 수 있었던 데는 어떤 이유가 있었는가요?


안: 몽양과 내가 제일 늦게까지 옥살이를 한 까닭이 아닐지? 그건 농담이고, 몽양은 워낙 호걸의 풍도가 있는 사람이라서, ‘일본 패망’ 이야기를 주변사람들에게 일찍부터 해 왔죠. 1942년 말 내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잡혀 들어갈 무렵에 몽양이 잡힌 것도 그 때문이라 하더군요. 믿고 얘기한 사람이 고발하는 바람에.

나는 몽양 같은 호걸이 아니지만, 내 한 몸의 이해관계 때문에 할 말을 못해서는 안 된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내가 얼마간의 불이익이나 위험을 겪더라도 그 말을 해서 많은 조선인과 일본인이 겪을 위험을 줄일 수 있는 것이라면 해야죠. 내 그런 앞뒤 안 재는 성질을 일본인들도 웬만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 뒤에 무슨 꿍심이 있는지 오해받을 염려는 별로 없다고 믿었습니다.

나랑 얘기를 나누는 일본인들도 내 신변을 걱정해 줬습니다. 자기네는 이해하지만 헌병대에서는 나를 노리는 자들이 많다는 얘기도 해주고, 극우조직에서 나를 처치할 자객들까지 정해 놨다는 이야기가 있었죠. 그래서 마지막 몇 달 동안은 시골집에 내려가 있지 못하고 서울시내에서 숙소를 자주 옮겨가며 지냈습니다.


김: 일본인 고위층과 속을 털어놓고 얘기를 나눈 사실 위에 해방 시점에서 질서유지 협조 부탁을 받아들인 것 때문에 두 분에게 ‘친일파’라는 누명을 씌우려 한 자들도 있지 않았습니까?


안: 말 같지 않은 소리 하는 놈은 사람 같이 보지 않으니까 신경도 안 씁니다. 나보다 몽양이 많이 당했죠. 그놈의 전향서라는 것 때문에. 1943년 7월 그 양반 출옥한 다음날 찾아갔는데, 참혹한 지경이었어요. 그 지경에 이른 사람을 전향서를 써야 풀어준다고 하니까 가족들이 대신 써 내는데 막지를 못했다더군요.

일본인들 눈치만 보면서 별 짓 다하던 작자들이 그 종이 한 장 갖고 몽양을 모함하는 것은 정말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랄지. 그래도 한 가지 교훈은 얻습니다. 뜻 있는 사람이 뜻 나타내는 데는 정말 한 치의 어그러짐도 없어야만 당당할 수 있다는 것을.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