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준비위원회(건준)는 8월을 넘기지 못하고 심각한 파탄을 드러냈다. 8월 31일 위원장 여운형이 사퇴했고, 뒤이어 부위원장 안재홍과 집행부 간부들도 내부 혼란의 책임을 지고 총사퇴했다. 며칠 후 35인 간부회의에서 지도부의 재신임이 의결되었지만 다시 며칠 되지 않아 건준 일부에서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을 선포하자 건준은 해산해 버리고 만다.


건준의 좌절을 놓고 좌익의 책임이니 우익의 책임이니 따지는 얘기가 많았는데, 나는 총독부에 근본적 책임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총독부가 진심으로 협력할 생각 없이 건준을 이용하려 들기만 했기 때문에 건준의 입지가 없었던 것이다.


구체적 갈등의 사례야 수없이 많지만, 우발적 사건으로 치부할 수 있다. 근본적 문제는 총독부가 건준에게 ‘질서 유지 협력’을 바라는 대신 그에 상응한 보상을 거부한 데 있다.


총독부는 16일 안재홍의 방송 직후 그 내용 중에 ‘질서 유지’를 넘어서는 건국 사업 이야기가 들어 있다고 항의하며 건준 해산을 들먹였다. 20일에는 경기도 경찰부장이 모든 정당, 단체의 해산을 명령하면서 건준도 이름에서 ‘건국’을 뺄 것을 요구했다. 그 동안 일본 군경과 건준 치안대 사이의 충돌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15일 아침 여운형이 엔도 정무총감과 만났을 때, 두 사람이 계약서 쓰고 도장 찍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 상황이 이러한데, 지나친 혼란은 우리에게나 당신네에게나 피차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니 함께 도와가며 혼란을 최소화하도록 노력합시다.” 하는 원칙에 공감을 확인하고 약간의 구체적 방법을 의논했을 것이다. 8월 16일 휘문중학교 연설에서 여운형이 발표한 5개항은 의논한 내용 중 대중에게 발표하기 적합한 일부를 정리한 것이었을 것이다.


거래란 받는 것이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총독부는 ‘질서 유지 협조’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었다. 총독부가 아직 형식적 통치권과 실질적 무력을 갖고 있지만 정권 이양과 무장 해제 방침은 정해져 있는 상황이었다. 질서가 무너지면 총독부가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총독부가 여운형과 건준을 ‘질서 유지’만을 위해 월급 주고 고용하는 것이 아니라면 여운형과 건준에게, 그리고 그들을 통해 한국인에게 뭔가 도와주는 일이 있어야 했다.


도와줄 일이 뭐가 있었을까? 건국 준비보다 더 중요한 일이 뭐가 있었겠는가? 총독부와 일본군의 순조로운 퇴출을 도와주는 작업은 그 자체가 건국 준비의 뜻을 가지는 것이었다. 이 작업을 잘 해내는 주체는 많은 한국인의 신뢰를 모으지 않을 수 없으니까. ‘질서 유지’를 적극적으로 하도록 건준에게 부탁하는 것이 바로 총독부가 건준과 한국인을 도와주는 길이었다.


정치적 야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작업을 맡는 것이 정치 주도권을 쥘 좋은 기회다.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하면서도 어느 시점에서 누구에게 항복하느냐를 놓고 흥정 밑천을 삼을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항복선언 시점에서 누구에게 협조를 청하느냐 하는 것이 총독부가 쥔 칼자루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총독부의 선택에는 현실적 제약이 있었다. 친일파의 딱지가 너무 선명한 사람에게 맡겨서는 한국인을 설득할 수 없었다. 명망 있는 인물이면서 친일파가 아니고, 그러면서도 총독부의 순조로운 퇴출에 동의할 만한 대국적 식견을 가진 사람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여운형을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여운형과 건준의 성공을 도와주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건준이 한국인의 신뢰를 모으고 지키기 위해서는 총독부의 지휘체계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래도 건준이 요구하는 데 따라 총독부와 일본군이 필요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도와줄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질서 유지’의 범위를 좁게 잡고 그를 넘어서는 ‘건국 사업’을 막으려고만 들었다.


여운형과 안재홍이 송진우를 건준에 끌어들이기 위해 공들인 데는 송진우와 연계된 자본가 그룹으로부터 인적-물적 자원을 지원받으려는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송진우가 움직이지 않자 민중에게 손을 내밀지 않을 수 없었고, 그것이 26일 전선직역자치조직본부의 움직임이었다. 그것은 좌익에게 건준을 맡기는 길이었다.


건준은 발족 직후부터 광범위한 지지층을 확보하기 위해 전국유지자대회를 열려고 노력했으나 어수선한 가운데 지연되고 있었다. 송남헌은 <해방 3년사 I>(까치 펴냄) 45쪽에서 박헌영 계 공산주의자들에게 이 지연의 책임이 있다고 했다. 18일에 여운형이 괴한들의 피습을 받아 1주일간 활동을 못하게 되어 대회 개최가 계속 늦어졌다.


25일에 건준 지도부와 우익 인사들이 만나 전국유지자대회 대신 확대위원회를 열기로 하고 62명 확대위원 명단을 작성했다. 그런데 그 날 밤 건준 측에서 일방적으로 73명을 추가해 발표하는 바람에 건준에 협력하려던 우익 인사들까지 배신감을 느끼고 돌아서게 되었다. 여운형이 퇴원하던 25일까지는 공산주의자들이 건준의 요충을 장악한 것으로 보인다.


아래 붙이는 9월 1일자 <매일신보> 기사의 명단이 25일에 작성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2일에 열려던 이 회의도 결국 열리지 못하고 말았다.


建國準備委員會에서는 2일 오후 5시부터 京城府 安國町 徽文小學校 준비위원회사무실에서 同會 위원선정 後 제1회 위원회를 개최하기로 되어 1일 그 안내장을 발송하였다. 이날 위원회에서는 그동안 정세의 성숙과 사업발전에 따라 널리 각계 각층으로부터 진보적인 의사를 대표할 만한 인물을 망라하여 한층 더 강력한 지도부를 확립할 터이며 따라서 이 준비위원회 중앙집행부 전원은 지난 8月 31日 총사직장을 呂위원장에게 제출하였으므로 呂위원장 통솔하에 신중앙집행위원 선거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당면한 요구를 협의하게 될 터인데 안내장을 받은 이는 다음의 135名이다.

吳世昌 權東鎭 呂運亨 許憲 安在鴻 洪命憙 曹晩植 金性洙 明濟世 金恒圭 權泰錫 李仁 鄭栢 趙炳玉 李斗烈 李增林 崔奎東 白寬洙 金度演 李克魯 崔鉉培 趙東祐 李英 鄭在達 崔善益 尹洪烈 趙漢用 都宥浩 李萬珪 金重華 金丙淑 元世勳 朴瓚熙 吳鳳善 李裕弼 李康國 崔容達 具滋玉 金敎英 李英學 金銘洙 方應謨 兪億兼 孫在基 李奎甲 金俊淵 李如星 鄭寅普 白南雲 崔益翰 徐世忠 崔益煥 李珖 李昇馥 劉錫鉉 咸明燦 李鍾洙 金若水 鄭求忠 咸尙勳 宋鎭禹 張德秀 梁在厦 洪起文 鄭烈模 尹亨植 李容卨 高景欽 洪增植 梁柱三 洪永傳 李寬求 金良瑕 徐光卨 李義植 朴文圭 金觀植 康基德 鄭世容 鄭雲永 玄東完 李源赫 許永鎬 朴明煥 金振國 羅泰彙 金光鎭 崔謹愚 張埈 吳夏英 崔容馥 李圭鳳 鄭雲海 朴衡秉 洪南杓 金成壽 吳德淵 全永澤 金法麟 李□洙 尹炳浩 李鍾翊 金世鎔 李丙學 鄭宜植 張權 鄭珍容 李觀述 金台俊 金炳燦 李瑄根 金利龍 崔允東 白南薰 金錫璜 金良洙 朴儀陽 朱義國 李佑植 李鏞 鄭一亨 徐相日 具汝順 李鳳洙 蔡奎恒 高志英 朱鍾宜 金弘鎭 朴秉源 韓林 金性業 韓雪野 崔星煥 李相薰 李東華 鄭和濬 以上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여운형이 좌익과 우익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된 꼴이다. 그런 상황을 만들어놓은 것이 총독부의 협조 거부를 넘어서는 건준 박해였다. 건준이 총독부의 적극적 협조를 받고 있었다면 한국민주당으로 나타날 송진우 일파가 그토록 냉담한 태도를 취할 수는 없었을 것이고, 건준이 무기력하게 공산주의자들의 수중에 떨어지는 대신 좌우익 간의 공개적 경쟁의 장이 되었을 것이다.


총독부는 여운형에게 협조를 부탁하면서도 실제로는 건준의 협조를 요긴하게 여기지 않고 있었다. 맥아더는 항복선언 후 두 주일이 지난 29일에야 일본에 상륙했지만, 그 두 주일 동안 일본 정부와 맥아더 사령부 사이에 온갖 의논이 벌어지고 있었을 것이다. 본국 승인을 받지 않은 맥아더 취향의 통치노선까지도 드러나고 있었을 것이다. 새로운 정보의 일부는 조선총독부에도 계속 전파되고 있었을 것이다. 그에 따라 건준의 협력에 대한 총독부의 필요는 계속 줄어들었을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