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달 동안 정치에 관한 글을 쓰지 않고 지냈다. 내키지도 않거니와, 본질과 거리가 먼 현상에 내 의식이 조금이라도 덜 얽매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더러 생각나는 것이 있어도 그냥 지나치려고 애쓰기도 했다. 총선이 지나고 나야 정치 얘기를 꺼낼 수 있을 것 같다고 주변사람들에게 말하곤 했다. 사사로운 이익의 충돌이 온 나라를 덮어씌운 상황에서 정치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이야기를 누가 들으려 하겠는가? 이럴 때는 혼자 마음속으로 생각을 다듬고 지내는 편이 낫다.
그래도 선거 과정에서나 결과에서나 흥미로운 현상이 많이 나타났으니 한 차례 살펴볼 마음은 든다.
야권 분열 조짐이 나타날 때, 일단 반갑다는 생각을 했었다. 거대야당의 존재는 해방 후 내내 한국 정치의 고질병인 적대적 공생관계의 지속이었다. 그 존재로 인해 진보세력의 현실 비판이 정치적 표현의 길을 찾지 못한 것은 많이 지적되어 온 일이거니와, 나는 보수세력의 헤게모니를 수구적 기득권세력이 장악하게 만든 데서 더 큰 문제를 본다. 거대야당이 해체되면 거대여당을 묶어놓고 있던 동아줄도 풀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번 선거 결과에는 그런 측면이 꽤 나타난 것 같다.
민주당과 철수당의 '뉴스메이커' 역할은 분명히 늘어날 것이다. 그런데 '정책메이커' 역할은? 큰 기대가 가지 않는다. 선거에 이르는 과정에서 정책에 큰 투자가 없었으니 선거의 승리를 정책의 승리가 아니라 전술의 승리로 인식하는 경향이 나타날 것이다. 이런 인식이 바닥에 깔린다면 다음 선거의 준비에서도 정책의 투자가 소홀해질 것이다. 양쪽 당에 훌륭한 생각을 가진 이들이 있더라도 그들의 생각이 잘 통하지 않을 것이다.
정책메이커 역할의 기반조건은 새누리당이 야당들보다 훨씬 낫다. 그 좋은 조건을 낭비하게 해 온 문제들이 이번 패배를 계기로 얼마나 해소될지? 일일이 따져보면 여당 정치인 중에 능력과 품성이 뛰어난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이 아무런 존재감을 보이지 못하거나 이상한 길로 가게 만든 것이 새누리당의 큰 문제였다. 그런데 학살이니 뭐니 해서 유승민 같은 사람의 정직성과 성실성을 부각시키게 된 것은 새누리당의 수구파 헤게모니가 한계에 이른 결과가 아니었을까? 새누리당의 건전한 보수세력이 이번 선거를 계기로 살아나게 된다면 그 정책메이커 역할에 꽤 기대를 걸 수 있겠다.
'잠룡'이 늘어난 것도 일단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잠룡'이란 말의 바닥에 깔린 '龍'의 관념에 좀 혼란이 있다. 동아시아 정치사상에서 '용'은 훌륭한 정치의 상징인데, '용'으로 번역되는 서양의 'dragon'은 폭력과 혼란의 상징이다. 동아시아의 긍정적인 '용'도 민주주의 이념과 배치된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신채호의 글에 나오는 '미르'와 '드래곤'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배경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유력한 정치지도자(또는 그 후보)를 놓고 '잠룡'이란 말을 쓰는 데는 조심성이 필요하다.
아무튼 유력한 정치지도자가 많이 나타난다는 것은 정치 풍토의 변화에 가능성을 더 늘려준다는 점에서 반갑다. 드러난 지도자가 서넛 안쪽이라면 정치투쟁의 양상이 진지전의 형태에 그치기 쉽기 때문이다. 진지전은 소모전이다. 과감한 전략을 회피하고 드러나 있는 가치에만 집착하게 된다. 한국 정치의 발전을 위해서는 다양한 가치에 대한 인식이 가장 크게 필요하다는 내 생각으로는 앞으로 예상되는 다자간 경쟁에 기대가 많이 간다.
대부분 사람들이 "이만하면 국가 지도자로 괜찮겠다," 탐탁하게 여기며 내년 선거에서 보고 싶어 하는 인물을 적어도 두어 명씩은 가지게 된 것 같다. 미더운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차악(次惡)' 고르기에 몰리던 시절에 비해 얼마나 좋은 상황인가? 기대를 많이 모으는 인물들도, 특정한 경쟁상대만 쳐다보며 전술에만 몰두하던 때와 달리 수많은 잠재적 지지자를 바라보며 더 좋은 정책을 개발하는 데 애쓸 동기를 가지게 된 상황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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