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페리스코프] 뉴라이트 역사관 따져보기 ③
기사입력 2008-08-18 오전 9:35:50
지금까지 뉴라이트 측 역사서술에서 가장 두드러진 문제의 하나가 일제 통치기의 성격에 관한 것이다. 이 문제는 주제 자체가 중요한 것일 뿐 아니라 역사를 바라보고 서술하는 자세를 단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특히 검토의 가치가 있다.
뉴라이트의 이른바 '근대화론'은 한국 사학계의 지배 담론인 '수탈론'에 맞서는 것이다. 수탈론은 매우 넓은 범위에서 표출되어 왔고, 또 피해망상적인 정서의 뒷받침도 받아왔기 때문에 그 담론 중에는 더러 불합리하고 편향적인 내용도 섞여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일제 통치기를 더 합리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자는 제안은 바람직한 것에 틀림없다. 더욱이 국가들 사이의 접촉면이 갈수록 넓어지고 두터워지는 21세기 상황에서, 이웃 나라들끼리 서로의 역사를 함께 돌아보는 길을 닦는다는 점에서 절실히 필요한 노력이기도 하다. '역사 전쟁'으로 불필요한 갈등을 일으키는 것도 그런 노력의 부족 때문이다.
그러나 바람직한 방향, 필요한 방향이라 해서 손바닥 뒤집듯 내 입장을 내던져버릴 수는 없다. 우리 학계의 입장에도 상당한 범위의 스펙트럼이 있고, 일본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범위 중에서 가장 합리적인 길을 찾아 상대방의 합리적인 길과 어울리면서 그 시너지 효과를 통해 양쪽 사회의 분위기가 접근되기를 바랄 일이다.
우리 쪽의 극단을 비판한다 하여 저쪽 입장 가운데 극단적인 노선을 지지하고 나선다면 갈등을 해소하기는커녕 증폭시키는 길이다. 우리의 뉴라이트가 일본 사회의 여러 역사관 가운데 가장 극우파의 관점을 따르는 것이 문제다.
"연 평균 3.6%가 높은 성장률이었다고?"
여러 가지 주제를 놓고 뉴라이트 측이 많이 활용하는 수법 하나를 미리 지적하고 싶다. 통념을 벗어나는 새로운 관점을 통계 수치로 포장하는 수법이다. 안병직 씨와 이영훈 씨가 경제사 분야를 연구했기 때문에 주류 역사학자들에 비해 통계 수치를 많이 활용하는 것은 이해가 가는 일이다. 숫자를 들이대면 뭔가 '과학적'인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숫자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 엄정한 태도가 아쉽게 느껴진다.
1910년대에서 193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연평균 3.6%를 기록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 단적인 예다. 30년간 그만한 성장률을 유지했다는 사실을 내세우는 것은 한국경제가 그 기간에 꽤 활기찬 발전을 이뤘다는 인상을 주려고 하는 이야기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이 성장의 출발점이 어디인가? 거의 아무런 산업화도 이뤄지지 않고 있던 1910년도다. 오늘날처럼 산업화가 이뤄질 만큼 이뤄진 상황에서도 연 5% 이하로 성장률 목표 낮추는 것을 놓고 온 국민이 서운해 하는 판인데, 아무것 없던 출발점에서 연 3.6%가 높은 성장률이라고?
1960년대 이후 20여 년간 한국경제가 이룩하던 연평균 7~8%보다도 높은 성장률이 근대화 출범 시점에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일본인의 손을 통해서가 아니라도 근대 기술은 어떻게든 들어오게 되어있었고 근대화는 진행되게 되어있었다. 맨바닥에서 시작하는 산업화가 수십 년간 연 4% 미만의 성장률에 머물렀다는 것은 일제 통치가 도와준 결과라고 볼 수 없다. 억누르고 가로막은 결과라고 봐야 할 것이다.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원들이 계량적 자료에 중점을 두고 한국경제사 분야에서 쌓아온 연구업적 중에는 높이 평가할 것이 많다. 그러나 안병직 전 소장과 이영훈 소장이 학계 외부를 상대로 이 업적을 포장해 보여주는 방법에 문제가 있다. 연 3.6% 성장률을 밝혀낸 것은 훌륭한 연구 업적이지만, 이것이 마치 높은 성장률이었던 것처럼 들이대는 데 정략적 의도가 엿보인다는 말이다.
안병직·이영훈 대담집 <대한민국 기로에 서다> 144쪽에 이영훈의 말로 "결론을 말씀드리면 연간 2.3%의 실질 성장률에 따라 식민지기에 1910~1940년간 한반도의 총소득이 2.7배나 커졌습니다"라 하였다. 그러나 연간 2.3% 성장률로는 30년간 170%의 성장을 이룰 수 없다. 총소득이 170% 성장했다고 하는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구' 조에 따르면 그 기간 중 한반도 인구는 1313만 명에서 2439만 명으로 86% 증가했으므로 실질 성장률은 30년간 총 45%로 연평균 1.3%에 미치지 못한다. 현금 지출이 늘어나는 '근대화' 과정 속에서 총체적으로 비참한 상황에 틀림없다.
이영훈은 같은 책 142쪽에서 "1910~1940년간 연간 평균 3.6% 정도의 성장이 있었습니다. 동기간 인구 증가율은 연간 1.3%였습니다. 이를 빼면 1인당 실질소득은 연간 2.3%의 수준으로 증가하였습니다"라 하였다. 이영훈의 <대한민국 이야기> 88~89쪽에도 거의 같은 내용을 적었다. 총생산이나 총소득의 근거 자료는 필자가 확인하지 못했으나 같은 기간의 인구증가율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타난 연평균 2.3%가 틀림없다고 본다. 이영훈이 인구 증가율과 실질소득 증가율을 뒤바꾼 것으로 보인다.
"달걀을 수탈하려면 닭에게 모이를 준다"
뉴라이트 측은 수탈론에 반대하면서 일본 식민 통치는 16~17세기에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에서 있었던 것처럼 악랄한 착취 체제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대다수 수탈론자들도 그런 맹목적 착취 체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경제 성장의 수준과 방향을 결정하는 데 수탈 의도가 중점적으로 작용한, '합리적' 수탈 체제를 말하는 것이다. 달걀을 수탈하기 위해 닭에게 모이를 줄줄은 아는 체제.
허수열 씨가 근대화론 비판서를 "개발 없는 개발"이라는 제목으로 냈지만, 식민지 경제체제와 관련해 더 널리 쓰이는 말은 "발전 없는 성장(growth without development)"이다. 식민지 경제가 성장한다고는 해도 덩치가 클 뿐이지, 발전의 주체로 자라날 길이 열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본국 경제체제의 부속품으로 식민지의 역할이 제한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합병 이전부터 대량의 한국 쌀을 수입하고 있었다. 일본의 산업화 과정에서 쌀 공급은 극히 예민한 과제였다. 일본의 한국 통치에서 가장 중요한 정책이 쌀 증산이었다. 해방 무렵까지 논의 70% 이상을 소수 지주가 소유하게 된 기형적 토지 소유 구조도 이 정책 목표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농지 소유를 집중하고 농업 노동을 저임금에 묶어놓는 것이 쌀의 대량 반출에 편리했기 때문에 조세를 비롯한 모든 정책을 꾸준히 지주층에 유리하게 펼친 결과였다.
쌀의 생산도 수출도 늘어났다. 그러나 그 이익을 거둔 것은 상당수 일본인을 포함하는 소수 지주층이었고 그들은 일본제 공산품을 수입해서 썼다. 민중의 소비 수준은 별로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 내의 공업 생산에 큰 자극을 주지 못했다.
1930년대 들어 북한 지역에 중공업 건설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일본이 괴뢰 만주국을 세우고 '대동아' 건설에 나서면서 세운 입체적 개발 전략의 일환이었다. 많은 자본이 투입되는 주요 시설을 중국과의 분쟁 소지가 있고 통치 전망이 아직 불안정한 만주 땅보다 식민지 체제를 확립해 놓은 한국 땅에 배치한 것이다.
여러 개 대형 공장이 세워지고 이에 따라 한국의 공업 인구와 공업 생산도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제국의 산업 구조 안에서 부속적 역할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내적 재생산 구조를 가지지 못한 것이었다. 한국인의 소득 증대는 하급 인력의 노임에 그쳤고, 연관 산업의 발전 여지도 극히 적었다.
"식민통치는 한국을 종속적 위치에 묶어두었다"
식민지 시대 한국에 근대화 현상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고, 일본의 통치가 이 근대화에 작용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 일본이 꾸준히 노력했는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그 시기에 근대화가 진행되었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 입증되는 것이 아니다. 수탈론이라 해서 근대화의 사실을 일체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을 수탈 대상으로 만드는 방향의, 건전하지 못한 근대화였다고 하는 것이다.
뉴라이트는 일본의 한국 지배가 기본적으로 선의에 입각한 것이었다고 주장함으로써 한국에서 실제로 진행된 근대화가 당시 상황에서 최선의 길이었다는 인상을 주려 한다. 식민 통치자를 '악마'에 가깝게 그리는 극단적 수탈론과 반대로 근대화론자들이 '천사'의 모습으로 보려고 애쓰는 것이 그 까닭이다. 이런 대목에서는 '실증'이 실종되어버린다.
예컨대 일본의 한국 병합 의도가 '영구 병합', 즉 일본의 완전한 일부로 만드는 데 있었기 때문에 한국을 무책임하게 수탈하지 않고 잘 키우려 노력했다고 말한다. 창씨개명을 해주고 일본어 사용을 강요한 '내선일체' 정책을 그 증거로 내세운다.
근대 세계에 갑자기 내던져진 한국은 독립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적응력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은 19세기 후반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직면한 세계 각지 거의 모든 국가와 사회가 함께 한 문제였다. 이 문제를 넘어서는 데 10여 년이 걸린 나라도, 100여 년이 걸린 나라도 있었고, 아직까지 넘어서지 못한 나라들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갑자기 주어진 근대적 상황으로 인한 일시적 문제였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이다.
일본의 한국 통치는 이 일시적 문제를 스스로 넘어서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이었다. 그래야 종속적인 위치에 머물러 있으면서 일본의 이용 대상으로 남아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당시 일본의 '합리적' 선택이었다.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규정하는 뉴라이트에서 일본 식민 통치자들만을 예외로 볼 까닭이 없지 않은가?
"식민 통치자도 합리적 인간이었다. 천사가 아니었다"
일부 수탈론자들이 보여 온 지나친 편향성에 대한 뉴라이트의 지적에는 나도 공감하는 바가 적지 않다.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서도 식민 통치자를 짐승이나 악마보다 가능한 한 합리적 인간으로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일본의 '선의'에 너무 매달리는 것은 편향성의 보정이 아니라 더 심한 편향성이 될 수 있다. 정부가 일본을 합리적으로 대하려 하지 않고 일본 우파에게 "우리가 남이가?" 식 추파를 던지다가 독도 문제로 뒤통수를 얻어맞는 것이 그런 사고방식의 문제점이다.
수탈론의 지엽적 문제들을 지적할 때는 그토록 떠받드는 '합리성'이 근대화에 대한 일본의 공헌, 그리고 그 공헌을 뒷받침한 일본의 선의를 강조할 때는 어디로 가버리는 것일까. 식민 통치자를 가능한 한 합리적 인간으로 보자는 당부가 일부 수탈론자들보다 뉴라이트 근대화론자들에게 더 절실한 것 같다.
열강들이 식민지를 확보하려 애쓴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제국주의의 속성에 관해서는 상식 차원에서 확립되어 있는 인식이 있다. 뉴라이트는 이 상식을 무시한다.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가 야욕 때문이 아니라 자기방어를 위한 것이었다는 말까지 한다. 대동아전쟁 당시 "민족의 활동 공간을 확보한다"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선전을 아직도 곧이듣고 있는 자칭 '역사학자'들을 21세기 한국에서 보는 것이 놀랍다.
일본은 1854년 미국의 함포외교에 굴복해 개항했다. 메이지유신으로 능동적인 근대화의 길을 연 것은 1868년의 일이었다. 그 사이의 14년 동안 혼란에 빠져 있던 일본을 식민지로 만들려고 달려든 열강이 없었던 것은 일본의 행운이다. 개항 후의 한국에게는 그런 행운이 없었다. 활동 공간을 넓히고 싶어하는 열강, 일본이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신흥 열강 일본은 유럽의 고참 열강들에 비해 구조적 문제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 부담으로 인해 일본 자체 국민들에게까지 억압적인 군국주의 체제로 흘러가게 되었다. 식민지 되는 것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하더라도 하필 그런 일본에게 침략을 당했다는 것은 한국인에게 겹쳐진 불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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