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해방공간

 

내가 <해방일기> 작업을 떠올린 것은 20107월 초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막 <망국의 역사> 작업을 끝내고 있었는데, 그 작업은 경술국치 100주년을 맞는 시점에서 망국의 의미를 그때까지 나온 설명보다 더 넓고 깊게 내놓아야겠다는 생각에서 2009년 여름 시작해 1년 동안 매달려 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망국의 과정을 살펴보는 그 작업을 끝내며 생각하니, 망국의 의미를 충분히 밝혀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고려에서 조선에 걸쳐 1천년 동안 우리 조상들이 누리며 살던 민족국가가 1910년 여름 어느 날 사라진 것이 망국입니다. 그런데 그때 잃어버린 민족국가를 아직도 제대로 되찾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반도를 강점했던 일본의 패망으로 해방을 맞았는데도 제대로 된 민족국가를 다시 세우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지금까지도 온전한 민족국가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해방 후의 실패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문제의식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도 같은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이죠. 그런데 <인식>이 나온 20여 년 후에 <재인식>이란 이름으로 반론이 나왔습니다. 나는 2008<뉴라이트 비판> 작업 때 <재인식>을 살펴보며, 시대를 역행하는 그런 주장이 태연하게 나오는 우리 사회의 상황을 걱정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에 대한 의견은 수록된 논문들에 관한 것이 아니고 편집진의 태도에 관한 것입니다. 개별 논문 중에는 인식에 도움이 되는 좋은 것이 여럿 있습니다.)

이 사회의 일각에서는 <인식>을 통해 역사를 바로 보려는 노력이 일어나는 한편 다른 일각에서는 <재인식>처럼 식민통치와 독재정치를 미화-옹호하는 주장이 횡행하는 상황입니다. 정치와 무관하게 역사 공부만 해온 이 사람의 눈에는 <인식>에는 중요한 학문적 가치가 있는 반면 <재인식>은 비학문적인 동기로 만들어진 책입니다. 그런데 두 책이 양대 정치진영 간의 대립에 얽혀 학문적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정쟁의 도구로 전락한 것으로 보입니다.

<인식> 이후 한국현대사의 연구가 꽤 많은 성과를 거둬 왔습니다. 이 성과를 종합해 해방공간에 관한 설명을 사회에 제공하기에 내가 적합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적합한 조건 두 가지가 생각되었습니다. 하나는 동서교섭사를 공부해 온 사람으로서, 한반도의 경계선에 묶이지 않고 넓은 시야를 제공할 수 있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정치적 편향성을 의심받을 염려가 적다는 점입니다. 나는 1990년대 중엽 이후 신문에 글을 많이 실어 왔는데, <중앙일보><프레시안>에 올린 분량이 비슷합니다. 그리고 나를 웬만큼 아는 이들은 나를 합리적 보수로 인정합니다.

이런 생각을 떠올리고 바로 <프레시안> 연재 방침이 결정되어, 201081일부터 37개월간 작업을 계속했고, 작성된 원고를 10권의 책으로 묶어 내는 일이 얼마 전에 끝났습니다.

이 작업의 성과로 내가 보람을 느끼는 중요한 측면들이 바로 작업에 나설 자격으로 스스로 생각한 조건들이 뒷받침해 준 것입니다. 하나는 해방공간을 바라보는 시각을 시간적-공간적으로 확장한 것이고, 또 하나는 해방공간의 정치적 갈등을 좌-우 대립 아닌 중-극 대립으로 본 것입니다. 중간파와 극단파 사이의 중-극 대립이란 곧 민족주의 세력과 외세의존 세력 사이의 대립입니다. 극우와 극좌는 민족주의 세력을 봉쇄함으로써 특정 외세에 의존하는 자기네 세력을 반도의 일부분에라도 확립하려는 목적을 함께 갖고, 중요한 대목에서 중간파, 즉 민족주의 세력을 배제하는 데 종종 힘을 합쳤습니다.

이제부터 시각의 확장과 중-극 대립 관점, 해방공간을 새로 바라보는 데 도움을 드렸다고 내가 자부하는 두 측면이 어떤 것인지 설명하겠습니다.

 

<시각의 확장>

 

1. 카이로선언과 조선 해방

 

1910년에서 1945년 사이에 두 차례 세계대전을 통해 세계정세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1910년까지 제국주의 경쟁의 초점은 영국과 독일 사이에 맞춰지고 있었다. 영국은 두 차례 대전에서 독일을 이겼지만 그 과정에서 세계패권을 잃었다. 2차 대전이 끝날 때는 미국과 소련이 패권국가로 떠올라 있었고, 두 나라를 중심으로 진영이 형성되어 냉전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20세기로 넘어올 무렵 열강의 대열에 끼어든 일본은 두 차례 대전 사이에 국력을 키워 2차 대전에서 큰 역할을 맡았으나 독일과 함께 패전을 겪고 그 동안 확보했던 해외 식민지와 점령지를 토해놓게 되었다. 이것이 조선 해방의 계기였다.

전쟁이 진행 중이던 194311월 카이로에서 열린 미--중 정상회담에서 전쟁 후 조선을 독립시킨다는 내용을 담은 카이로선언이 나왔다. 명목상으로는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른 방침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일본제국의 결속력을 줄이기 위한 전략적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직전 미--3국 외상이 발표한 모스크바선언 중의 오스트리아 독립 방침과 비교해보면 그 의도가 분명하다. 오스트리아 독립 방침에서는 독일제국의 결속력을 줄이려는 의도를 분명히 드러냈다. 오스트리아인의 독일에 대한 저항을 독립의 조건으로 명시했던 것이다.

19455월과 8월 독일과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오스트리아인과 조선인의 항쟁은 충분하지 못한 것으로 연합국은 보았다. 그래서 신탁통치 방침이 나온 것이었다. 독일제국과 일본제국의 잔재를 척결한 뒤에야 독립을 허용하겠다는 신탁통치 방침에는 전쟁 중 연합국보다 추축국 쪽을 더 많이 도왔던 두 나라 국민에 대한 징벌의 의미가 겹쳐져 있었던 것이다.

오스트리아인은 10년 신탁통치를 순순히 받아들이고 좌우합작 정부를 세워 미-소 양대국 어느 쪽에도 불안감을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에 1955년에 영세중립국으로 독립할 수 있었다. 반면 조선에서는 5년 신탁통치 방침에 대한 격렬한 저항이 일어났고 미-소 중 한쪽을 따르면서 다른 한쪽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남북 양쪽에서 정세를 장악했다. 그 결과가 분단건국과 내전이었다.

 

2. 민족국가 건설에 불리했던 세계정세

 

대전 직후에는 미-소 어느 나라도 조선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미국은 일본을 점령했고, 중국도 장개석 정부의 통치를 받을 것이므로 한반도가 공산주의 세력 저지의 현장이 될 것으로 보지 않았다. 소련은 동유럽 공산권 구축에 전념하고 있어서(1국사회주의 노선) 중국과 베트남에서 무르익어 가는 공산혁명마저 외면할 정도로 동아시아에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1947년 여름 냉전이 가시화되는 단계에서 중국 공산군이 우세를 확보하는 상황이 되자 조선에 대한 미국 정책이 바뀌었다. 이로 인해 미국과 소련이 조선을 통제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1910년에 일본이 갖고 있던 욕망에 못지않은 것이 되었다. -소 두 나라가 연합국으로 함께 싸우기는 했지만, 서로에 대한 적대감이 독일-일본에 대한 것보다 오히려 더 심했다. 공동의 적이 제압되자 곧 냉전이 시작되었고, 한반도는 두 나라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지점이 되었다.

국제정세가 불리한 위에 조선인사회의 독립 역량도 충분하지 못했다. 일본은 통치기간을 통해 친일파를 육성했고, 이 세력이 우세한 학력과 자금력을 독점하고 있었다. 이 세력에는 민족국가 건설보다 외세에 의지하는 편을 유리하게 여기는 매판적 속성이 있었다. 조선인의 민족주의는 외세의 억압보다도 이 매판세력의 공격 때문에 제대로 펼쳐지지 못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많은 국가가 독립했다. 그러나 이들 중에 주권과 평화를 제대로 누린 나라는 몇 되지 않는다. 식민지시대가 끝났지만 강대국의 패권주의는 계속되었고, 대부분의 신생국은 내부적 역량보다 형세에 떠밀려 혼란스러운 방법으로 독립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당시의 어느 신생국보다도 국가 전통을 잘 갖춘 나라였지만, 불리한 국제정세를 이겨내고 민족국가를 제대로 세울 수 없었다.

 

3. 폴란드와 베트남의 행로

 

2차 대전 후 독립한 나라 중 한국만큼은 아니라도 국가 전통을 비교적 잘 갖추고 있던 나라로 폴란드와 베트남을 꼽을 수 있다. 두 나라의 독립 과정을 살펴보면 당시의 국제정세가 민족국가 건설에 얼마나 불리한 것이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폴란드인은 추축국에 대한 항전에 가장 큰 노력을 쏟고 큰 희생을 겪은 민족(국가)의 하나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후 폴란드는 영토의 동쪽 절반을 소련에게 빼앗겼다. (그 대신 서쪽으로 상당한 영토를 독일로부터 떼어 받기는 했다.) 그리고 항전을 지도하던 임시정부는 폴란드를 점령한 소련에게 거부당했다. 이런 방침이 종전이 임박한 19452월의 얄타회담에서 소련의 요구에 따라 결정되었고, 이 요구에 따라 폴란드를 외면한 서방의 배신(Western Betrayal)’은 유럽의 수치로 인식되었다.

소련의 고집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폴란드는 18세기 말에 오스트리아-프러시아-러시아의 ‘3국 분할로 사라졌다가 백여 년이 지난 1918년에 광복을 맞았다. 1차 대전이 끝난 후 영국과 프랑스 등 서방국이 폴란드 독립을 지원했는데, 전쟁을 일으킨 독일과 공산혁명으로 세워진 소련을 견제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서방국을 등에 업은 폴란드는 동유럽의 패자로서 과거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팽창정책으로 나서서 혁명 후 혼란에 빠져 있던 소련을 침략해 많은 영토를 빼앗았다. 이 때문에 폴란드는 소련에게 서방국의 괴뢰인 눈엣가시처럼 여겨지게 되었고, 2차 대전 개전 당시 소련은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으면서 폴란드를 나눠 가졌다.

폴란드의 동부지역을 점령한 소련은 카틴 학살을 저질렀다. 소련이 참전하자 독일은 연합국 사이의 이간을 노리고 카틴 학살을 공개했다. 소련은 진상을 숨기고 해명을 내놓았는데, 소련과의 협력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여러 연합국은 속으로 믿지 않으면서도 이 해명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폴란드 망명정부는 거부했다. 그 때문에 전쟁 수행에도 차질이 일어났다. 19448월 독일군이 패퇴하고 있을 때 폴란드 독립군이 바르샤바를 점령하고 항쟁에 나섰는데 소련군은 강 건너까지 와서도 진격하지 않고 방관했다. 독일군이 독립군을 진압한 후에야 강을 건너와 독일군을 물리쳤다.

독일의 항복을 두어 달 앞둔 얄타회담 때가지도 연합국 진영에서 소련의 역할이 막중했다. 그 상황에서 소련은 전후 처리에 관한 여러 가지 약속을 얻어냈는데, 동유럽 지역에 소련의 영향력이 보장되는 공산권을 구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다. 그래서 폴란드를 묶어놓을 것을 요구했고, 소련의 이탈을 감당할 수 없던 연합국은 이 요구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베트남은 19세기 후반부터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어 있다가 2차 대전 중에 일본에게 점령되었다. 독일과 일본에 합병되어 있던 오스트리아와 조선에게 주어진 것과 같은 독립 약속이 베트남에는 주어지지 않았다. 연합국의 민족자결주의는 적측의 식민지에만 적용되고 자기 편 식민지에는 적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베트남인은 프랑스에 대항해 7년간의 독립전쟁을 치르고, 이어 미국을 상대로 20년이 넘는 치열한 항쟁 끝에 민족국가를 회복했다. 그 과정에서 한국은 자기 민족국가도 세우지 못한 채 다른 민족의 민족국가 수립 노력을 탄압하는 데 거드는 역사의 오점을 남겼다.

베트남인의 불굴의 노력과 궁극적 성공은 민족주의 기준으로 경의를 표해 마지않을 일이다. 그러나 30년에 걸친 참혹한 전쟁으로 겪은 인민의 고통을 생각하면 부러워할 일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많은 식민지의 독립을 놓고 보면 2차 대전 후의 상황이 민족주의에 유리했던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얼마나 불리한 것이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베트남이다.

한 가지 유의할 점은 베트남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냉전의 제물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국의 구 식민지는 다소간의 곡절을 겪은 뒤 1960년대까지 대개 독립했다. 베트남도 프랑스가 나가떨어지는 시점에서 독립하는 것이 타당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미국이 달려들어 프랑스보다 더 집요하게 베트남 통일을 가로막은 것은 중국의 공산화로 인해 베트남이 냉전의 최전선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한국 역시 1947년 초여름까지는 미소공동위원회의 합의를 통한 통일건국의 희망이 남아있었다. 그 무렵 중국에서 공산군이 우세를 잡은 것이 미국의 분단건국 방침을 결정하는 중요한 조건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극 대립>

 

해방 후 한국사회의 정치적 갈등을 -우 대립으로 흔히 바라봐 왔다. 그런데 나는 이번 작업을 통해 그보다 -극 대립에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당시 한국사회의 가장 크고 가장 급한 과제가 민족국가 건설에 있었다고 보는 데 있다. 식민지시대에 한국인을 괴롭힌 문제는 일본제국의 정치체제 성격에 앞서 이민족 지배라는 사실에 있었다. 따라서 해방에 따른 최우선 과제는 민족국가 건설이었고, 특정한 정치체제를 선호하는 사람들도 일단 민족국가 건설에 협력한 다음 정치체제의 조정은 차후의 과제로 남겨놓아야 할 상황이었다. 비슷한 처지에 있던 오스트리아에서 좌우합작 정부를 세워 신탁통치 기간을 견뎌낸 것이 현명한 대응이었다.

당시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은 좌익이든 우익이든 대부분 중간파의 길을 걸었다. 그들도 처음에는 정치적 이념에 따라 좌우로 갈라진 길을 찾았으나 분단건국의 위험이 떠오르자 통일건국을 최우선 과제로 하는 중간파의 길로 모였던 것이다. 반면 극좌와 극우는 분단건국을 통해서라도 자기네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외세에 의탁했다.

극좌와 극우는 표면적으로 대립관계에 있었지만 각각의 핵심세력은 정치적 이념 없이 권력과 이익만을 추구하는 기회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분단건국에 이해관계가 합치되었다. 그래서 양자 사이에 적대적 공생관계가 형성되어 겉으로는 서로 싸우는 것 같으면서도 공동의 적인 중간파를 배제하는 데 힘을 합치는 장면이 거듭된다.

외세의 비호와 지원으로 막대한 재력과 공권력을 장악한 극좌-극우의 현실적 힘 앞에 중간파는 유린당했고, 그 결과가 분단건국과 내전이었다. 이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김구 세력의 향배다. 김구는 분단건국을 지향하는 이승만의 반탁노선에 동조하다가 1948년으로 접어들어서야 중간파의 남북협상 노선에 합류했는데, 민족주의 세력을 자임하면서도 반탁노선에 동조한 것은 극우파의 자금과 행정력에 현혹된 것으로 이해된다.

남한의 극우파는 식민지시대의 친일파를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친일파에도 극단적 친일파와 온건한 친일파가 있었는데, 극단적 친일파는 민족국가 건설보다 외세에 의존하는 분단건국을 원했다. 극우의 핵심세력이 된 극단적 친일파와 민족주의자의 중간파는 온건한 친일파를 포섭하기 위한 경쟁을 벌였는데, 현실적 힘에서 압도적 우위에 선 극우의 입장이 관철됨으로써 남한에서는 식민지시대의 청산이 좌절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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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