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40년 내력 역사학자의 4년 작업

 

김기협의 <해방일기> 전 10권이 완간되었다. 1945년 8월부터 1948년 8월까지 3년간의 역사를 정리한 것이다. 해방 3년의 역사를 매주 2∼3건의 토픽을 정해 '일기'의 형식으로 풀어낸 것이다. 완간 후 신문 인터뷰를 보니 원고 분량이 1만8120매에 달한다고 한다. 매일 12시간 이상씩 자료를 정리하고 집필하는 데 꼬박 4년이 걸렸다는 것이다. 어지간한 필력과 정력으로는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형식과 내용도 아직 접해보지 못한 유형의 작업이다. 이 일을 4년을 끌고 온 노력과 집중력에 일단 감탄할 수밖에 없다.

왜 '해방일기'인가에 대해서는 저자의 설명이 있다. 저자는 '일기(日記)'보다는 '일지(日誌)'가 더 정확한 이름이겠지만, 조금이라도 일기의 주관적 특성에 접근하고 싶은 마음에서 '일기'라고 이름 붙였다고 밝히고 있다(1권 19쪽). 기획 의도는 1980년대 이후의 연구 성과를 참조해 <해방 전후사의 인식> 다음 단계의 담론을 제시하려는 목적이었다(7권 345쪽). 또 저자는 연재 중 <해방일기> 작업이 완료된 후 1948∼1987년까지를 다룬 <대한민국 실록>을 한때 계획하기도 했다. 에세이 성격으로 계획했던 이 4개년 집필 구상은 중단된 것 같지만 저자의 뚝심과 도전 의지를 알 수 있다.

이 작업의 형식적 모태는 아마도 부친 김성칠의 일기 <역사 앞에서>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김성칠은 해방 이후 꾸준히 일기를 써왔는데, 매일의 반복적 일상을 기록하기보다는 역사학자로서 시대의 흐름과 결을 파악하고 평가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평자는 수년 전 <역사 앞에서>의 해제·교감 작업을 한 바 있는데, 김성칠의 글솜씨와 탁월한 시대 비평에 탄복한 바 있다. 김성칠은 한국전쟁기 주요한 상황적 단서들을 중심으로 시대에 대한 가감 없는 비평을 거리낌 없이 기록했다. 전쟁 중 위험을 무릅쓰고 시대를 기록한 것이다. 문체는 단정하고 평이해 잘 읽혔고, 나아가 대격변의 시기에 중도적이며 이성적 판단을 덧붙임으로써 후세 독자들의 호평을 얻었다. 김기협도 부친의 일기 쓰기 형식을 빌려와 이 작업을 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부친으로부터 역사학자라는 직업과 일기라는 글쓰기 형식을 물려받았고, 나아가 탁월하고 평이한 글솜씨를 물려받은 것 같다.

ⓒ너머북스

ⓒ너머북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도 '일기' 형식에 있다. 매일의 일상을 기록하는 것이 일기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남들에게 쉬 드러내 보일 수 없는 속내와 생각을 적기 쉬운 형식이기도 하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유명한 일기는 윤치호의 것인데, 그는 1883년부터 사망하던 1945년까지 일기를 썼다. 그는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1889년부터 영어로 일기를 썼다. 반백년 이상 한국 사회 상층에서 경험한 개인과 사회, 시대에 대한 온갖 단상들을 거리낌 없이 기록했다. 윤치호 일기를 읽다보면 그가 이 일기를 영원히 비밀의 공간에 감춰두고 싶은 생각은 없었겠구나 하고 느끼는 대목들이 있다. 독자를 생각하고 쓴 느낌이 강하게 표출되기 때문이다. 김성칠의 한국전쟁기 일기 역시 미증유의 역사적 대사변을 맞아 그 속에서 생동하는 현실과 가장으로서 삶, 역사가로서 소회 등을 내밀한 개인 기록 형식을 통해 표출함으로써 울림이 강했다. <해방일기> 역시 일기라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해방 3년사를 다루면서 저자의 판단과 시각에 의해 적극적으로 시대를 재해석하려 했다. 이 책은 역사적 사실을 미시적으로 다루면서 화자의 적극적 평가를 강하게 배합함으로써 독자의 시선을 끌고 있다.

이 책은 김기협이라는 저자가 아니면 누구도 도전하거나 마무리하기 어려운 성격이다. 그는 "여생을 바치게 되기 쉬운 이 거창한 작업, 참고할 포맷도 없는 이 막막한 작업"을 구상 후 한 달 만에 착수하게 되었고, "가만 생각하면 바로 이런 성격의 작업을 위해 지금까지 내 삶이 배치되어온 것이 아닌가, 운명적인 생각까지 듭니다"라고 책머리에 쓰고 있다. 시작하던 소회였지만, 끝맺는 소회로도 손색이 없다.

그는 매우 특이한 역사학자이다. 전도유망한 물리학도였으나 뜻이 있어 역사학으로 전공을 바꾸었고, 동양사를 전공한 현직 대학교수가 되었으나 강단을 떠나 전업 문필가로 변신하였다. 한 자리에 머무를 수 없는 방랑자이자 기인이랄 수 있겠다. 자유분방한 재사(才士)이자 박람강기한 문사(文士)의 대표 격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개인적·학문적 풍상을 겪으며 동서양과 한국사를 넘나드는 40년의 내력을 지니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의 문필적 재능과 역사학자 40년의 내력이 이 책을 가능케 했다. 학회지 논문 편수에 얽매인 강단 역사학자들은 시도하기 어려운 범주의 작업이다. 다른 한편 자극적이고 말초적 가공으로 대중을 현혹하거나 전문학자의 성과를 슬쩍 베끼거나 역사학계 비난을 책 판매의 도구로 사용하는 축과는 격이 다르다.

현대사 전공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치밀하고 정교한 자료의 연계가 부족한 부분이 있으며 평가가 과도하거나 인색한 측면이 있으나, 부족한 자료와 증거들은 역사학자의 뛰어난 상식적 감각으로 채워 넣었고, 인물과 사건에 대해선 주저함 없는 적극적 평가를 덧붙였으며, 못다 한 얘기는 안재홍과의 가상 담화를 통해 해설했다. 유려하고 매끈한 솜씨가 돋보였다.

 


2. 연대기와 적극적 평가의 교직

먼저 이 책의 형식을 살펴본다. 총 10권의 부제, 머리말, 간략한 소목차만 적어보자.

해방일기 1 (1945. 8. 1∼10. 29)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인가
머리말 : 원칙과 상식을 낯설어하는 사회
1.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인가(1945년 8월 전반)
2. 항복을 선언했으나 아직 항복하지 않은 이들(1945년 8월 후반)
3. 남과 북 점령군의 서로 다른 모습(1945년 9월 전반)
4. 댄스홀과 요정이 그토록 번창한 이유는?(1945년 9월 후반)
5. 남북 공산주의운동의 갈림길(1945년 10월 전반)
6. 이승만의 등장(1945년 10월 후반)

해방일기 2 (1945. 11. 1∼1946. 1. 31) 해방을 주는 자와 해방을 얻는 자
머리말 : 독립의 길을 험하게 만든 반탁운동
1. 이승만, 주도권을 선점하다(1945년 11월 전반)
2. 기다리고 기다린 임정의 귀국(1945년 11월 후반)
3. 좌우대립의 선봉장 이승만과 박헌영(1945년 12월 전반)
4. 파국을 향해 떠내려가는 조선(1945년 12월 후반)
5. '신탁통치'를 둘러싼 좌우대립의 격화(1946년 1월 전반)
6. 쪼개진 임정, 굳어진 좌우대립(1946년 1월 후반)

해방일기 3 (1946. 2. 1∼4. 30) 소련군의 해방과 미군의 해방
머리말 : 미국과 소련이 조선에서 원한 것
1.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성립(1946년 2월 전반)
2. 해방공간의 미소 대결, 극심한 좌우 대립(1946년 2월 후반)
3. 민심을 읽지 못한 미군정 정책(1946년 3월 전반)
4. 미소공동위원회 개막(1946년 3월 후반)
5. 미소공동위원회의 구조적 문제(1946년 4월)

해방일기 4 (1946. 5. 2∼8. 31) 반공의 포로가 된 이남의 해방
머리말 : 민심을 대변하는 중간파, 왜 열세에 빠졌나
1. 미소공동위원회 무기휴회(1946년 5월 전반)
2. 미군정의 폭압적 통치(1946년 5월 후반)
3. 남북의 분열을 희망할 자 어디 있는가(1946년 6월 전반)
4. 좌우합작 추진(1946년 6월 후반)
5. 좌우합작 회담과 원칙(1946년 7월)
6. 해방1주년을 돌아보다(1946년 8월)

해방일기 5 (1946. 9. 2∼12. 30) 길 잃은 해방이 가져온 비극
머리말 : 앞서가는 이북과 혼란에 빠진 이남
1. 미군정의 공산당 탄압(1946년 9월)
2. 좌우 대립 격화의 분수령, 대구사태(1946년 10월)
3. 조미공동소요대책위원회의 역할과 의의(1946년 11월)
4.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개원(1946년 12월)

해방일기 6 (1947. 1. 2∼4. 30) 냉전에 파묻힌 조선 해방
머리말 : 조선을 냉전의 길로 몰아넣은 이승만의 승리
1. 반탁운동 재개와 건국 노선 갈등(1947년 1월)
2. 김구·이승만의 동상이몽(1947년 2월)
3. 외세에 따른 분단 건국 vs. 통일 건국(1947년 3월)
4. 미군정, 친일파에게 친미파의 길을 열어주다(1947년 4월)

해방일기 7 (1947. 5. 2∼1947. 8. 31) 깨어진 해방의 약속
머리말 : 냉전의 시작과 미소공동위원회의 파탄
1. "이박사 지령 앞에 무서울 것이 없다"(1947년 5월)
2. 미소공위, 성공의 희망이 보인다(1947년 6월)
3. 여운형의 죽음에서 조선의 현실을 본다(1947년 7월)
4. 미국은 미소공위를 버리고 어디로 가는가?(1947년 8월)

해방일기 8 (1947. 9. 3∼1947. 12. 31) 의미를 잃어버린 해방
머리말 : 분단건국의 길이 뚜렷해져 가고 있는데...
1. 미소공동위원회를 떠나 유엔으로(1947년 9월)
2. 미군정이 키워낸 '부패공화국'(1947년 10월)
3. 38선을 굳힌 것은 누구였던가?(1947년 11월)
4. 어지러워진 김구의 행보(1947년 12월)

해방일기 9 (1948. 1. 2∼1948. 4. 29) 해방된 자, 누구였던가
머리말 : 김구의 각성은 때를 놓친 것이었던가?
1. 유엔에서 온 '칙사'들(1948년 1월)
2. 진면목을 찾은 김구(1948년 2월)
3. 남북협상의 동상이몽(1948년 3월)
4. 목소리를 빼앗긴 민족주의(1948년 3월)

해방일기 10 (1948. 5. 1∼1948. 8. 14) 해방을 끝장 낸 분단건국
머리말 : 대한민국을 '권력의 시장'으로 만든 이승만
1. 해방 조선의 비극을 대표한 제주 '폭동'(1948년 5월)
2. 유엔은 조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1948년 6월)
3. 독재의 길을 닦는 이승만(1948년 7월)
4. 독립 아닌 건국(1948년 8월)
연재를 끝내며 : 내일의 민족주의를 생각한다

번호가 붙은 소목차 밑으로 최대 23개에서 최소 6개의 작은 꼭지들이 달려 있다. <프레시안> 1회 연재 분량이다. 1945년 104꼭지, 1946년 172꼭지, 1947년 131꼭지, 1948년 89꼭지를 다루었다. 37개월 동안 총 496개 꼭지를 다루었다. 이 작은 꼭지 제목만을 적어도 수십 페이지 분량이 될 것이다. 일단 해방 3년의 매달별로 연재한 꼭지 수를 정리하니 다음과 같다.

ⓒ정병준

ⓒ정병준



평균을 내보니 1개월에 13.4개 꼭지를 다루었다. 연재를 처음 시작한 1945년 8월부터 1946년 3월까지는 매달 20여 건에 달하는 꼭지를 다루었다. 1946년 4월 이후부터 1946년 8월호까지는 14∼15꼭지의 과도기를 거쳐 1946년 9월부터는 12건 내외의 꼭지를 매달 다루었다. '꼭지'가 무슨 뜻인지 이해를 돕기 위해 제1권에 수록된 1945년 8월분을 살펴보자.

1.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인가? 1945년 8월 1∼15일
1945. 8. 1. <해방일기>를 시작합니다
1945. 8. 2. 포츠담회담에 나타난 원자폭탄
1945. 8. 3. 폴란드의 해방 아닌 해방
1945. 8. 4. 모겐소가 부끄러워한 지독한 점령정책, '모겐소 플랜'
1945. 8. 5. 일본의 지정학적 위치는 '미국의 밥'
1945. 8. 6. 원폭의 참혹성은 인간성의 증발이었다
1945. 8. 9. 하늘 위에서 내려다본 참극
1945. 8. 10. 일본의 항복 시점이 미·소 지분을 결정했다
해방의 시공간 - 1945년의 세계
1945. 8. 11. 미-소의 '눈치 보기' 속에 그어진 38선
1945. 8. 12. 다급해진 총독부가 붙잡고 매달린 인물
1945. 8. 13. '항복'이라는 마지막 칼자루를 쥔 일본
1945. 8. 15. 일본이 망할 줄 시인은 정말 몰랐을까?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해방이 도둑처럼 찾아왔었나요?

1945년 8월 전반기를 다루면서 모두 12개의 주제를 정해서 정리한 것이다. 한 꼭지는 단순하게 하나의 사실, 인물을 다룬 것이 아니라 당시 시대 흐름과 갈래 중 핵심적인 사안을 정해 이를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글을 쓴 것이다. 해방 3년의 3∼4개월이 책 한 권으로 묶였고, 해방 3년사가 총 10책이 되었다.

과문한 탓인지 <해방일기>와 형식적인 면에서 동일한 시도는 없었던 것 같다. 다만 유사한 책들이 존재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최영희의 <격동의 해방 3년>이다. 국사편찬위원장 시절 최영희 선생은 신문기사 스크랩을 중심으로 해방 3년사를 실록처럼 정리한 <자료 대한민국사> 전7권을 편찬한 바 있다. 해방 3년사 연구의 가장 중요한 상세 일지와 연보를 제공하는 책이다(현재는 한국전쟁 휴전 시점까지 다룬 총 29권이 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 내용의 일부를 축약해 일간지에 연재했는데, 이것이 훗날 단행본으로 묶인 것이다. 이 책은 주요 일지와 사건을 정리했지만, 논평이나 흐름을 강조하지는 않았고, 무색무취에 가까웠다. <자료 대한민국사>는 이후 해방 3년사의 길잡이 역할을 했고, <해방일기>도 이 책에 크게 의지하고 있다. 같은 뿌리에서 갈려나온 한 갈래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다음으로 생각나는 것이 <우리는 이렇게 살아왔다>(오소백), <해방 20년(목격·내막·증언)>, <한국 근세 30년사> 등이다. 오소백의 책은 1945년부터 1961년까지의 연도별 주요 일지를 정리하고 특정 사건들에 대해 해설을 붙인 책이다. 다음 두 책은 8․15, 건국, 6․25, 휴전, 4․19, 5․16 등 주요 주제를 정하고 그 밑에 작은 제목의 글을 수록한 형태이다. 다만 해방 3년에서 다룬 주제는 10여 개에 불과했다.

형식적으로 이 책과 가장 유사한 것은 한국편집기자협회가 펴낸 <(기자가 본) 100大 뉴스 : 事件 365日>이라고 생각된다. 이 책은 1985년 이래 매년 편집기자들이 선정한 100대 기사를 심층 분석해 놓은 것이다.

해방 3년사를 대상으로 한다면 한홍구 교수의 <대한민국사>나 강준만 교수의 <현대사 산책>을 꼽을 수 있겠다. 이 책들은 주제별·통사적 접근을 하고 있으되 연대기적 묘사가 강하지 않다.

정리를 하면 이 책은 연대기적 서술과 적극적 평가를 버무린 독특한 글쓰기 형태를 취하고 있다. 또한 인터넷 신문에 연재된 것이므로 평가가 강조된 소제목을 앞세운 인상도 강하다. 이 책은 전문적 학술 연구는 아니다. 기왕의 연구 성과들을 적극 활용한다고 했으나, 저자가 주로 의지한 연구들이 그리 많지는 않다. 자료의 주된 출처는 이미 공개되어 있는 당시의 신문류로, 앞서 언급한 국사편찬위원회의 <자료 대한민국사> 및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등을 주로 참조했다.

 

 
3. '열린 보수주의자'의 중앙노선

이 책의 저류에 흐르고 있는 저자의 해방 3년사를 바라보는 관점을 살펴보자. 이 책에서 특징적으로 제시된 저자의 관점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저자가 강조하고 있는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자세·관점은 '열린 보수주의자'의 '술이부작(述而不作)' 정신이다. 자료와 근거가 있으면 서술하고 비평하지만 없는 사실을 조작·창작하지는 않는다는 역사학계의 오랜 전통을 강조한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 연재가 4년여에 이르면서 저자와 인터넷 언론사 관계자들이 내란음모죄로 고발까지 당할 정도로 "정치적 입장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신은 오랫동안 '열린 보수주의자'의 시야를 지키려고 노력했다고 한다(7권 331쪽). 저자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반공주의자들이 주장해온 정통성과는 다른 의미의 정통성을 모색할 뿐"라고 썼다. 저자는 대한민국을 자랑스러워하는 면도 있고 부끄러워하는 면도 있으나 아끼는 내 나라라며 이렇게 주장한다.

대한민국의 문제점을 너무 크게 봐서 대한민국의 정당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자세를 나는 인정하지 않는다. 어떤 정체성 위에 세우는 자세란 말인가? 한편 뉴라이트처럼 그 정당성을 절대화하는 태도에서는 더 큰 문제를 본다. 더 좋은 나라,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가로막으려는 야비한 술책이기 때문이다. (8권 155∼156쪽)

<뉴라이트 비판>, <밖에서 본 한국사>, <망국의 역사> 등 수년래 저자의 노력이 모두 한국 근현대사를 비판적 관점에서 조망함으로써 자기 성찰적 미래를 열어가자는 데 주안점을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 사회의 반성 능력, 자기비판 능력은 매우 중요하다. 일본의 정치학자이자 사상가인 후지타 쇼조(藤前省三)가 일본인들의 자기비판 능력 결여를 비판하며 행한 발언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유의미하다.

"그 나라의 문화적 성숙도는 국민들에게 얼마만큼 자기비판 능력이 갖추어져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자학과 자기비판은 다르다. 자기비판은 자기만족의 반대이고, 자신의 그릇된 점을 솔직히 인정함으로써 자기변혁을 수행해가는 고도의 지적이고 심리적인 작업이다." "참된 의미에서의 예리한 역사의식, 긍지로 여길 수 있는 역사의식이란 자기비판 이외에는 없습니다. 자기비판이 냉정하고 객관적이며 용기에 차 있다는 것은 그 개인과 사회의 정신적 지적 능력이 높다는 것입니다." (나카무라 마사노리, <일본 전후사 1945∼2005>, 223∼224쪽) 아마도 김기협이 지향하는 "더 좋은 나라,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바로 이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둘째, 이 책 전반에서 가장 중요하게 강조된 것은 분단건국이 내인론(內因論)보다는 외인론(外因論)에서 비롯되었다는 입장이다. 특히 이 책은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 미국과 소련 가운데 상대적으로 미국의 책임이 더 중한 편이었다고 본다. 미군은 '점령군'으로서 군림의 자세를 취한 것과 달리 소련군은 '해방군'의 자세를 지키려고 애썼다(2권 6쪽), "해방 조선의 자연스런 진로를 왜곡한 외세로서 미국의 역할이 소련보다 압도적으로 컸다"는 커밍스의 관점에 전면적으로 동의하지만, 커밍스는 이를 지나치게 일관적이고 확정적인 것으로 본 점에 불만이 있다(7권 345∼347쪽). 소련은 조선의 주권을 적극 인정하는 공식적 관점을 따른 반면 미국은 조선을 정복 대상으로 보는 현실적 관점을 취했다. 그래서 이북의 소련군이 조선인의 자치를 육성, 지원한 것과 달리 이남의 미군은 조선인을 통치 대상으로 여겼던 것이다(5권 5∼6쪽).

평자 역시 분단의 주요 동력이 외세에 있었다는 관점에 동의한다. 다만 현상적으로 두드러져 보이는 미국 책임론 강조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해방 후 미국과 소련은 모두 강대국으로서 남북한에 '우호적 정부' 수립이라는 국가주의적 목표를 추구했고, 다만 대한 정책의 수단과 방법에 차이가 있었을 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미국은 태평양전쟁기 군사 점령, 군정 실시, 신탁 실시 후 독립이라는 대한 정책을 구상했고, 그 주된 지렛대는 미국이 갖고 있는 국제 외교 자원·능력의 우위였다. 즉 국제적 우위가 미국의 강점이었다. 미국은 군정 실시와 직접 통치를 정책적 선택지로 택했으므로 해방 후 남한에서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반면 소련은 태평양전쟁기 구체적 대한 정책을 확정하지는 못했지만, 지리적으로 소련과 연결된 한반도가 오랫동안 식민 지배와 계급 갈등 속에 민족 문제, 계급 문제가 폭발 일보 전이라고 판단했다. 즉 한반도는 혁명적 상황이기 때문에 직접적 개입을 하지 않더라도 친소적 정부가 수립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소련의 대한 정책은 대소 우호적 정부의 수립이었으며, 이를 위해 미국이 제안한 다자 간 국제 신탁통치나 한반도 내부의 동력을 중시한 즉시 독립 방안 모두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소련의 강점은 국내적 우위였으며, 대한 정책은 직접 통치보다는 간접 통치와 현지화였다. 이것이 북한에서 구현될 때 소련이 앞장선 것이 아니라 한인들이 주인인 것처럼 비쳤을 뿐이다. 그러나 북한에서 행해진 주요 정치·정책의 최종 결정권은 크레믈린에 속해 있었다.

한편으로 미소는 해방 후 1945년 12월까지 한국 문제 해결을 위한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지 않는 태만을 통해서 한반도를 혼란과 파탄으로 몰고 갔다. 미소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자신의 점령지에서 독자적인 현지 정부, 경찰, 군대를 창설했으며, 자국에게 우호적인 정부 수립을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자 했다. 누가 먼저 시작했고, 누가 좀 더 적극적이었는가를 묻는 것은 무의미했다. 마치 거울을 마주 보듯, 미소 양군은 상대방을 의식하며 끊임없이 자신들의 성채를 쌓기 시작했다. 남북한은 서로의 거울이었고, 한쪽의 압력은 다른 쪽으로 그대로 이전되었다. 거울 효과이자 풍선 효과였다. 북한이 민주기지로 거듭날수록 남한은 자유기지, 반공기지로서 성격이 강화되었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소련이 북한에서 '민주기지노선'을 채택해 5도행정국­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1946. 2)­북조선인민위원회(1947. 2)의 길을 걸었다면, 미군정은 남한에서 일종의 '자유기지노선'을 채택해 정무위원회 계획(1945. 10)­민주의원(1946. 2)一입법의원(1946. 12)·과도정부(1947. 4)에 이르는 '과도정부' 형태를 만들었다.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이라는 공식적인 외교 합의가 존재했지만, 서로 자국군이 주둔한 남한과 북한을 공고히 함으로써 미소·남북·좌우의 협력과 합의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이라는 목표를 파괴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인민위원회', '과도정부', '자율정부', '단독정부'로 불리는 분단의 이명(異名)이 성장하고 있었다.

셋째 이 책이 제시한 새로운 시각은 해방 후의 대립 구도는 좌익과 우익의 좌우 대립이 아니라 중도파와 극단파의 중극(中極) 대립이었다는 주장이다. 김기협은 "해방 후 좌우 대립은 이념 대결이 아니라 중도파가 원천적으로 배제되고 극좌와 극우가 평행선을 그린 정략 대결"이라며(2권 6쪽) 중도파를 재평가하기 위해서 '좌우 대립'이 아닌 '중극 대립'의 새로운 틀을 제시했다. 극좌·극우파는 외세로부터 힘을 얻은 반면 중간파는 민심의 지지로부터 힘을 얻었으나 결국 극단파의 '힘'에 압도당했다는 것이다. '중'을 민심의 대표로, '극'을 외세의 대표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이다(4권, 8∼9쪽).

나는 이러한 주장과 판단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해방 후 좌우 대립에 대해 오기영은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좌우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합당한 복수 수준을 벗어나, 넘치는 복수를 거듭한 결과, "좌는 모두 극렬분자가 되어 버렸고, 우는 모두 반동분자가 되어 버렸다. 이를 해탈하고 충고하라는 부류는 기회주의자로 분류되었다"고 한탄했다. 조선에는 극렬분자, 반동분자, 기회주의자뿐이라는 그의 하소연은 비극적인 해방 정국의 민낯을 드러내준다. 오기영은 이렇게 말한다.

우에 속한 아버지는 반동분자요, 좌에 속한 아들은 극렬분자인데 만일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가만있으면 이근 기회주의자요, 부창부수로 각기 남편을 따라서 고부마저 진영을 달리하면 극렬과 반동은 뚜렷할까 모르거니와 이것이 도시 이 집안의 흥조(興兆(냐 망조(亡兆)냐. (482∼384쪽) <신천지> 1권 6호(1946년 7월)

한국에서 중도파 혹은 중간파는 이상주의자, 비현실주의자로 규정되고 있다. 그들이 정치적으로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남북 어느 곳에서 안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운형은 암살당했고, 김규식과 안재홍은 납북되어 역사에서 마멸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미소 대결, 좌우·남북 대립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좌우 합작, 남북 협상을 주장하는 비현실적 노선을 취했고, 때문에 현실 정치에서 승리할 수 없었던 이상주의자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평자는 오랫동안 이들의 노선은 가장 현실적인 노선이었고, 민족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해방 후 한반도는 미소라는 진영의 대립, 남북이라는 지역의 분립, 좌우라는 사상의 대결 구도 하에 놓여 있었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한반도가 통일·독립을 목적으로 한다면 미소·남북·좌우 대립이라는 3층위의 중층적 대립 구도를 타개하는 수밖에 없었다. 미소와 협상하고, 좌우가 연합하고, 남북이 합작해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민족의 분열, 국토의 분단, 통일·독립의 좌절, 동족상쟁의 앞날이 있을 뿐이었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가장 쉽고 간단한 미국·남한·우익, 소련·북한·좌익이라는 일극적(一極的) 노선을 취했다.

해방 후 중간파는 한반도가 처한 현실적 어려움을 인정한 위에서 이를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해결하려 한 주체들이었다. 안재홍은 중간파, 중간노선이란 호명에 대해 '중간'이란 어구부터 배격했다. "소위 극좌 극우의 편향노선에 비추어 진정 민주주의노선은 그 상대성에 당연히 중앙노선이 가하다. 중앙노선은 민족자주노선, 독립기본노선, 신민주주의의 사회건설의 토대 위에 구축 현현되는 신민족주의노선, 독자적인 민주독립노선이다."(9권, 165∼166쪽). 가히 안재홍다운 '중앙노선'의 주창이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들 중앙노선은 존립하기 어려웠다. 여운형은 미군정에 드나들었지만, 소련군 고위 장교들과도 회담했고, 좌우합작을 추진했으며, 공개적으로 여러 차례 방북해 남북 합작을 추구했다. 해방 후 분단이 가시화되기 전 공개적으로 방북해 남북 합작과 통일을 모색한 것은 여운형이 유일했다. 해방 후 남북한 정치인들은 38선을 금단의 경계선으로 인정한 상태에서 각각 자신이 속한 서울과 평양의 권력 강화에만 몰두했다. 분단내인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1945∼1948년간 남북 주요 정치인들의 평화통일·남북합작 외면·회피는 가장 중요한 귀책사유에 해당했다. 여운형의 노선은 한반도가 처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이성적 판단이었고 현실적 접근이었다. 그러나 극단적 입장에 선 정적들은 그에게 '미국의 주구', '공산당의 스파이', '팔방미인', '기회주의자'라는 비난을 퍼부었다. 그는 위험인물로 낙인찍혔다. 극단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대화와 타협'으로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려 했기 때문이다. 해방 후 12차례의 테러를 당했으나 굴하지 않던 여운형은 경찰서 앞에서 끝내 암살당했다.

▲ 일제 강점에서 벗어난 지 70년이 된 오늘날까지도 분단은 여전히 살아 있는 현실이다. 사진은 한 장병이 휴전선에서 가장 넓고 높은 고지인 육군 백두산부대 최전방 초소에서 북녘을 응시하는 모습(2009년 6월 23일). ⓒ연합뉴스

▲ 일제 강점에서 벗어난 지 70년이 된 오늘날까지도 분단은 여전히 살아 있는 현실이다. 사진은 한 장병이 휴전선에서 가장 넓고 높은 고지인 육군 백두산부대 최전방 초소에서 북녘을 응시하는 모습(2009년 6월 23일). ⓒ연합뉴스



4. 탁견과 약점

이제 이 열 책의 강점과 약점, 제시된 탁견(卓見)과 다양한 질문들을 살펴볼 차례이다. 먼저 이 책의 장점과 강점을 정리해 보자.

첫째, 이 책은 해방 3년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 순간들을 정치사를 중심으로 촘촘하게 다루었다. 기성의 사실과 연구사들을 힘닿는 범위 내에서 잘 종합했다. 해방 3년사의 큰 흐름을 일별, 주간별, 월별의 미세하고 세밀한 순간으로 포착했다. 포커스가 예각적이므로 평가 역시 미세적이고 국면적이고 예각적인 면이 적지 않다. 그래서 이 책의 가장 큰 특장은 '해방 3년 정치사 백과사전'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이 책은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연구 성과가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유연하고 역사적인 평가를 덧붙였다. 이는 이 책의 가장 큰 강점이다. 이 책은 일기적 형식을 취함으로써 다양하고 자유로운 평론, 평가를 내릴 수 있었다. 또한 안재홍과의 대담 형식을 빌린 부분은 저자의 생각이 대폭 드러나는 지점인데, 안재홍에 의탁한 저자 자신의 목소리이지만, 그럴법한 대목이 적지 않다. 예를 들어 1947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초기에는 성공의 가능성이 높아 보이다 왜 좌절되었는지에 대해 유럽에서 전개된 마셜플랜의 사정을 대입한 부분은 설득력 있게 읽혔다. 미국이 마셜플랜으로 공산권을 유혹하던 시점에는 공위의 성공 가능성이 높게 보였고 유별난 성의가 표출되었지만, 공산권의 보이콧이 확실해지자 미소공위에서 강경한 입장으로 돌아섰다는 분석이 그러하다. 또한 1948년 2월 소련이 유엔 소총회를 보이콧한 사실, 한국 문제가 안전보장이사회가 아닌 유엔 총회에서 다뤄진 사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소총회 결정 수용 과정 등에서 소련과 공산측이 참석했다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 수도 있다고 분석한 대목도 눈길을 끌었다.

셋째,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은 역사에서 발현되지 못한 가능성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한 점에 있다. 이미 역사의 경로가 어떻게 결정되었는지는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역사의 분기점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결과는 예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끊임없이 환기하고 있다. 역사를 결과로 평가할 것이 아니라 경로와 과정을 중시하며, 그 속에서 발현되지 못한 가능성들의 강점과 약점을 재해석하자는 것이다. 저자는 중도파의 시각과 입장에 서서 해방 3년사의 결정적 분기점들을 재해석하고자 했다.

넷째, 이 책의 문제 제기는 당위성의 차원이 아니라 비교역사의 차원에서 제시됨으로써 설득력과 합리성을 부여받았다. 저자는 동시대 타국의 사례들을 적극적으로 해방 3년사에 대입했다. 이 책은 베트남, 폴란드, 핀란드, 오스트리아 등 2차 대전 이후 '독립'을 획득했거나, 강대국의 점령지가 된 국가들의 전후 '독립' 획득 과정을 한국과 비교해 설명했다. 재미있고 수긍할 수 있는 대목들이 적지 않다. 각국은 2차 대전기 상이한 국제적·국내적 지위에 놓여 있었는데, 이후 역사의 경로를 한국의 상황과 비교하고 평가한 부분들이 눈길을 끌었다. 얄타회담에서 폴란드에 대한 '서방의 배신', 베트남에서 프랑스와 전쟁을 회피하기 위해 호치민이 택한 현실주의적이고 실용적 노선, 오스트리아가 10년 신탁통치를 감수한 사실, 1939∼1944년간 독립을 지키기 위해 독일과 소련 사이를 오가며 전쟁과 휴전을 주도한 핀란드의 국부 마너하임의 노력 등을 해방 직후 한국 상황과 견준 부분은 주목할 만하다.

다섯째, 이 책은 현대사의 주요 인물에 대해서 훼예포폄(毁譽褒貶)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평가했다. 적극적인 평가에는 긍부(肯否)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적극적인 평가를 시도하다보니 저자의 감정이 실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 이 책은 안재홍, 여운형, 김규식, 유림, 정인보, 오기영 등 중도파에게는 내내 우호적인 시선을 유지했다. 반면 이승만, 조병옥, 장택상, 신익희 등 '극우파', 박헌영, 김일성 등 '극좌파'에 대해서는 냉정한 비평으로 일관했다. 우파 가운데 '양심적 극우파' 김구에 대한 평가는 부정과 긍정을 오갔고, 이시영은 따뜻한 시선으로 다루었다. 김대중도 다루어졌다.

이번에는 이 책의 약점을 생각해 본다.

첫째, 이 책의 형식적 약점이다. 해방 3년사를 다루었지만 정치사 위주이며 그 밖의 사회나 문화는 거의 다루지 못했다. 남한·미군정은 많이 다뤄진 반면 북한·소련군은 거의 다루지 못했다. 자료와 연구의 한계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고, 본격적인 연구서가 아닌데서 오는 어쩔 수 없는 측면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료와 서술 분량의 비대칭성·부등성(不等性)은 북한·소련에 대한 정밀한 분석 부족과 연결되었다고 생각한다.

둘째 이 책이 취한 일기 형식의 글에서 비롯된 문제이다. 일기는 단기적, 국면적 느낌과 평가가 강조될 수밖에 없는 형식이다.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에는 인생을 걸고 화급을 다투던 것 같던 일이나 감정도 몇 개월, 몇 년이 지나면 흐린 기억이나 추억으로 남듯이, 긴 역사의 맥락에서 보면 중요하지 않은 대목들이 미시적이고 일기적 평가를 통해 과도하게 강조된 측면이 강하다. 특히 김구, 이승만, 박헌영 등 주요 인물들에 대해 일제 강점기 이래의 긴 역사적 맥락에서 평가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해방 후 김구의 반탁운동에 대한 평가에서 이런 점들이 눈에 띄었다. 김구는 '정치가'라기보다는 26년간 임정을 지키며, 임정을 통해서만 존립 가능한 '운동가'의 삶을 살았다. 그가 반탁운동을 벌이고 해방 후 국내 정치에 정착하는 과정은 '운동가'의 삶이 '정치가'의 삶으로 전환되는 과정인 동시에 그를 이끌어온 역사적 관성의 연장이었다. 긴 호흡의 평가가 아쉬웠다. 저자 혼자 감당하기는 어려운 문제였으리라고 생각한다.

셋째, 선별적 주제 선정으로 해방 후 다양한 정치적 사건, 주제, 인물, 정당, 사회단체들이 저자의 시선을 받지 못했다. 또한 과감하고 적극적 평가를 앞세웠으나 정확한 사실을 파악하지 못함으로써 벌어진 실수 혹은 오류들이 눈에 띈다. 예를 들어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을 소련의 1국 신탁통치 결정이라고 보도한 <동아일보> 1945년 12월 27일 자 기사를 허위 기사, 오보로 단정한 부분이다. 이 기사는 허위·가공의 사실을 <동아일보>가 창작한 것은 아니었다. 이 기사는 워싱턴발 합동통신(UP)의 「May Grant Korea Freedom」이란 기사를 번역·전재한 것이고 국내외 신문에 많이 보도되었다. <동아일보>가 해당 기사를 다른 신문보다 도드라지게 편집해 1면 톱으로 부각한 것은 사실이지만, 기사 자체는 외신 보도를 전재한 것이었다. 물론 이 기사는 단 하나의 사실도 포함하지 않고 있을뿐더러 사실을 정반대로 왜곡하며 허위 사실을 주장했다. 날조와 왜곡을 목적으로 창작된 기사였다. 모스크바 회담에서 미국은 한국의 즉시 독립을 주장한 반면 소련은 1국 신탁통치를 주장했고, 카이로선언에 따라 한국은 주민투표로 정부 형태를 결정하기로 했다는 등 허위 사실과 왜곡을 담고 있다. 어떤 미국 기자가 무슨 이유로 이런 기사를 썼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철저한 언론 통제를 자랑하던 미군정 하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고, 이런 논조가 1946년 1월까지 지속될 수 있었는지가 더 궁금한 문제이다.

정판사 위폐 사건에 대한 저자의 분석 가운데 패전 직후 총독부가 발행한 30억 원 '붉은 지폐'가 대량 위조지폐의 출발이었다고 지목한 대목은 탁견이다. 현재 공개된 자료로는 정판사 위폐 사건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다만 북한에서는 조선은행권 대신 소련군표가 유통되고 있었고, 조선공산당에는 다양한 경로로 사용 중단된 북한의 조선은행권이 유입된 흔적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형욱 회고록에도 북한이 거액의 화폐를 드럼통에 숨겨 경북의 좌익에게 보냈고, 이 사람이 이를 은닉해 방직회사를 매수해 거부를 쌓았다는 이야기를 싣고 있다. 김모 씨는 훗날 공화당 중진을 지냈다.

박헌영이 1946년 관 속에 숨어서 월북했다는 이야기를 부정한 대목도 재미있다. 그런데 북한 주둔 소련 제25군 정치위원을 지냈고 초대 평양 주재 소련대사가 된 슈티코프(Terenti Fomitch Stykov)가 남긴 일기 1946년 10월 7일 자를 보면 따르면 박헌영은 관에 숨어 38선 이북으로 도피했다. 박헌영은 1946년 10월 6일 북한에 도착했는데, 9월 29일부터 산악을 헤매며 방황했고, "그를 관에 넣어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승만도 1920년 11월 하와이에서 상해 임시정부로 가는 배편을 구하기 어렵자 장의사 친구의 도움을 받았다. 고향에 묻히기 위해 중국으로 향하는 중국인 관들을 실은 화물선에 몰래 숨어 하와이를 빠져나간 것이다. 이승만 자신의 기록이고, 이것이 훗날 이승만이 관에 숨어 상해로 향했다는 전설의 출발이 되었다. 좌우익 거물들이 모두 관에 숨어 탈출함으로써 일종의 신화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제 <해방일기>는 독자들의 평가를 기다리게 되었다. 각 권의 소주제와 개별 꼭지 글들은 쉽게 읽히는 미덕이 있으나, 10권의 덩치는 쉽게 완독을 허락하지 않는다. 전공자의 입장에서는 대중적 글쓰기의 장점과 아쉬운 점들이 교차하지만, 이런 노력과 작업이 지니는 긍정적 의미들이 잘 부각되길 희망한다. 시비·곡직·긍부가 교차하는 인물들에 대해 눈 밝고 예리한 독자들이 문제를 제기한다면 저자는 즉문즉답으로 응대하리라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 해방 3년사의 중요성과 의미가 새로 부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저자가 집필 과정에서 구상했다가 포기한 <대한민국 실록>과 같은 방대한 작업을 가능하게 하는 기회와 시간이 다시 허락되기를 기대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