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일기> 10권을 완간한 역사학자 김기협은 스스로를 보수주의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극우에 포획되어 조정되고 있는” 지금의 보수와는 다르다. 해방공간에서 안재홍 등이 표방했던 민족주의 노선, 사회주의를 포괄하는 중도로서의 보수주의다. “1946년 8월 여론조사에서 70%가 사회주의를 원한다고 답합니다. 자본주의가 14%, 공산주의가 7%입니다. 당시 사회주의는 보수적인 선택이었어요.”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중간파’ 안재홍의 시각으로
해방이후 3년 역사 재구성
“내 안의 매판성부터 버려야
치욕의 역사 벗어날 수 있어”

해방일기 1~10
김기협 지음/너머북스·22만5000원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는 역사학자 김기협(65)이 <해방일기> 완간을 기념해 내놓은 메시지는 뜻밖에 강경했다. “<해방일기>에서 저는 이 악당들의 정체를 ‘매판(買瓣)세력’으로 밝혔습니다. 친일파의 형태로 존재를 시작한 이 세력은 외부의 힘을 발판으로 내부 권력을 장악하고 외부세력의 이익에 봉사하면서 ‘떡고물’을 주워 먹는, 이 사회의 기생충입니다.”

 

‘중간파’의 시각을 표방한 <해방일기> 1권 이후 마지막 10권이 나오기까지 4년 반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의 마음에 무슨 변화가 생긴 것일까. 25일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그는 실제로 심경의 변화가 있었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뭐 이런 이상한 놈들이 있나’ 하는 정도의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그들의 행태를 보면서 마음 속에 분노가 자라났어요. 제가 글을 쓰면서 감정이입을 했던 안재홍 같은 중간파로서는 얼마나 화가 났을까를 생각하게 된 겁니다.”

 

<해방일기>는 일제의 항복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던 1945년 8월1일부터, 이승만의 권력 사유화 의지에 대한민국이 떠밀려가는 1948년 8월14일까지 3년의 역사를 일기체로 써내려간 역작이다. 특히 일반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민세 안재홍(1891~1965)의 관점으로 당시 역사를 바라본다는 사실을 당당히 밝힌다. 민족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안재홍은 여운형(1886~1947)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했던 중간파로, 사회주의자까지 포괄하는 합동정부 구성을 주장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미 군정을 등에 업은 이승만과 한민당 등 우익과 모험주의로 기운 좌익 사이에서 세력을 잃었다.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됐으나 전쟁 중인 같은 해 9월 북한군 보위부에 의해 납북됐다. <해방일기>는 장이 바뀔 때마다 김기협과 안재홍의 가상 대화를 통해 당시 정세를 상세히 분석한다.

 

원고지로 1만8120매나 되는 방대한 저작에서 지은이가 가장 뼈아프게 생각하는 장면은 2권에 나오는 반탁운동 대목이다. ‘기생충’들의 매판본색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장면이기도 하고, 백범 김구가 정치적 한계를 보이면서 실패해가는 들머리이기도 하다. 당시 <동아일보>는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협정문이 공식 발표되기도 전에,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이 이를 반대하는 것처럼 신탁통치와 관련한 사실관계를 뒤집은 ‘고의적인 오보’를 싣는다. 책은 이를 “국제관리 형태의 신탁통치를 추구하는 미 국무성 정책을 뒤집기 위해 맥아더 사령부, 군정청, 이승만, 한민당 세력이 협력해온 사실”(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을 들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우익의 음모라고 말한다. 신탁통치를 식민지와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대중 정서를 이용해 반소반공운동을 획책했다는 것이다.

 

“미군정과 한민당과 이승만은 한반도의 분단을 원하고 있었다고 나는 생각하고, 그렇다면 반탁운동이 그들에게는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길이었다. 그러나 분단을 원하지 않던 김구에게는 비현실적이고 불합리한 길이었다고 생각한다. 김구가 무리한 반탁운동에 나선 데는 순수한 애국심만이 아니라 전국조직 수립 등 임정 법통 강화의 기회로 본 전략적 판단도 작용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 판단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본다.”(<해방일기> 제2권 1946년 1월13일치 일기)

 

인용문에서 보듯 이 책은 추측을 마다하지 않는다. 사료의 그물에 숭숭 뚫린 구멍을 합리적 추론으로 메운다. 안재홍과의 가상대화와 함께, 당시의 내밀한 사정을 뜯어보고 유추하는 효율적인 장치다. 같은 시기 폴란드나 유고슬라비아 같은 또다른 약소국들이 처한 상황을 수시로 보여주기도 한다. 이를 통해 미국과 소련 두 열강을 중심으로 한 세계 정세의 변화가 조선을 비롯한 탈식민지 국가들에 대한 전후 처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보여준다. 지구적 시각으로 국지적 사건을 바라보려는 시도다. 결과적으로 <해방일기>는 80~90년대 대학사회를 풍미했던 <해방전후사의 인식>(한길사)이나 <해방 40년의 재인식>(돌베개)의 성과를 받아 안으면서 한계를 확장하는 데 성공한다. 과거에 해방공간을 공부했던 사람도, 새로 공부하는 사람도 당시 역사를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것으로 보인다.

 

역사학자 김기협은 서울대 이공계 수석으로 물리학과에 입학한 뒤 사학과로 전과한 드문 경우다. 애초 이론 물리학에 흥미가 있었던 그는 “노벨상을 타기 위해 방대한 연구비를 투입해 조직적 연구에만 매달리는” 물리학계 분위기에 대해 “이게 무슨 학문이냐”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골방에 틀어박혀” “자유로운 관념”으로 공부할 수 있는 역사를 택하게 된다. 마흔이 다 되어서야 어머니가 보여주신 아버지(역사학자 김성칠)의 일기를 계기로 대학 교수직을 박차고 나와 재야 사학자의 길을 걷고 있다. 나중에 <역사 앞에서>라는 제목으로 그가 펴낸 아버지의 일기는 그에게 “학문이란 끼니를 때우기 위해 하는 일과는 다른 것이어야 한다”고 꾸짖는 것 같았다고 한다.

 

“외세를 등에 업고 권력을 쥔 자들만을 성공한 자로 받들며 좋은 뜻을 갖고도 좌절당한 이들을 무시하는 이 사회의 풍조가 바로 매판세력의 속성입니다. 남을 손가락질하기 전에 나 자신의 매판성을 반성할 때 치욕과 고통의 역사를 벗어나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