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회담을 열흘 앞두고 회담 준비의 마무리를 위해 임동원이 특사 자격으로 김정일을 찾아갔을 때 김정일이 미국과의 관계에 대한 솔직한 생각을 토로했다고 한다.
“우리 조선반도는 주변국들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는 지역이며 주변국들은 사실 조선반도의 분단이 지속되는 것을 좋아합니다. 따라서 조선반도 문제는 외세에 의존하지 말고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나가야 한다는 자주의 원칙이 중요합니다. 물론 역사적 경험으로나 조선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로 보나 미국과의 관계유지는 매우 중요하지요. 김 대통령께서는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통일 후에도 미군이 계속 주둔해야 한다고 주장하시는데, 사실 제 생각에도 미군주둔이 나쁠 건 없습니다. 다만 미군의 지위와 역할이 변경돼야 한다는 겁니다.
주한미군은 공화국에 대한 적대적 군대가 아니라 조선반도의 평화를 유지하는 군대로서 주둔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미 1992년 초에 우리는 김용순 비서를 미국에 보내 이러한 뜻을 미국정부에 공식적으로 전달한 바 있어요. 너무 반미로만 나가 민족이익을 침해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우리 역시 과거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미국과 관계정상화를 이루는 일을 중요한 과제로 생각하고 있어요. 미국과 관계정상화가 된다면 미국이 우려하는 모둔 안보문제를 해소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루라도 빨리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자는 겁니다.“ (임동원 <피스메이커> 62-63쪽)
1992년 1월 21일 김용순 국제부장과 캔터 국무부 정무차관 사이의 뉴욕회담을 언급한 것이다. 당시 김용순의 발언 중 위와 같은 취지의 내용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주한미군에 대한 북한의 포용적 입장이 일찍부터 북한 개방정책의 기본 요소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셀리그 해리슨의 증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주한 미군은 연방제 수립 이후에도 제한적인 기간 동안 존속할 것으로 생각한다. 북한도 그런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1998년 5월 7일 김병홍 북한 외교부 정책기획국장은 나에게 “한반도는 러시아, 중국, 일본 등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우리는 미군 철수가 지역 차원의 세력 균형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야 합니다. 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게 된다면 일본이 즉각 재무장에 나설 가능성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하루 전날 김영남 외교부장은 좀더 완곡하게 얘기했다. “미국이 연방제의 길을 막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반도가 통일되면 지역의 안정성이 증대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통일 과업을 미국이 지원하는 것이 미국에도 이익이 될 겁니다. 우리가 연방제로 통일되면 미국은 남북한 모두에서 이익을 증대시킬 수 있을 겁니다.” 1997년 5월 10일 저녁 식사 때 만난 한성렬 당시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 정무참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는 미국의 정책에 따라 남한뿐만 아니라 북한에도 미군이 주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한반도 엔드게임> 192-193쪽)
냉전기에 남북한이 서로를 ‘괴뢰’로 몰아붙인 것은 민족주의 기준에서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괴뢰로서의 종속성은 남한 쪽이 훨씬 더 심했다. 소련군과 중국군은 꼭 필요한 때 외에는 북한에 주둔하지 않았다. 반면 남한에는 1945년 9월 이래(1949~1950년간 ‘군사고문단’ 이름으로 축소되었던 잠깐을 제외하고) 미군이 계속 주둔해 왔다.
대규모 외국군의 지속적 주둔은 ‘독립국’ 자격에 실질적으로 저촉되는 조건이다. 한민족의 반도국가 1천년 역사를 통해 중국을 ‘종주국’으로 섬기면서도 전쟁 상황 외에는 중국 군대가 반도에 주둔한 예가 없었다. 1882년 임오군란 후 위엔스카이 부대의 주둔은 그래서 청나라가 종주국 노릇을 포기한 징표라고 나는 해석한다.
주한미군의 존재로 인한 남한의 독립국 자격 결함은 북한과의 관계에서도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1972년 이래 남북관계의 발전을 위한 조건으로 북한이 미군 철수를 꾸준히 요구한 것은 단순히 전술적 공세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남한 정권이 미국의 국익을 도외시하고 민족의 복리만을 추구하는 입장에 설 수 없었던 것은 주한미군의 존재 위에서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1991년에 북한의 개방노선이 얼마나 절박하고 확고한 것이었는지는 무엇보다 유엔 동반가입에서 확인된다. 민족주의 정통성에 집착해 온 김일성이 남한을 대등한 국가로 인정한 것은 획기적 노선 변화였다. 그 변화의 일환으로 남한의 ‘괴뢰성’을 뒷받침해 온 주한미군에 대해서도 그 성격을 바꾸기만 한다면 용인하겠다는 유연한 자세로 바꾼 것이었다.
남북관계의 주체는 남한과 북한이다. 논리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미국이 제3의 주체로 엄연히 존재해 왔다. ‘북괴’의 종주국으로 지목되던 소련과 중국은 어느 때에도 ‘남괴’의 종주국 미국처럼 지배적 역할을 맡은 적이 없었다. 게다가 소련은 해체되고 중국도 제 몸 추스르기가 벅찬 상황이었다.
1990년대를 통해 미국은 압도적 외부세력으로 한반도에 군림했다. 1992년 후반기 이후 남한의 대결주의 세력이 고위급회담 등 남북관계를 파탄에 빠트린 것은 네오콘 등 미국 대결주의 세력의 앞잡이 노릇이었다. 클린턴 정권(1993-2000)이 그 앞의 부시(아비) 정권과 그 뒤의 부시(자식) 정권에 비해 북한을 포용하는 자세를 보이기는 했지만 상대적 차이일 뿐이었다. 공화당의 대결주의 세력이 의회와 언론을 통해 압박을 가했을 뿐 아니라 클린턴 정부 자체의 포용성에도 한계가 있었다.
1970년대 말 카터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브레진스키는 클린턴 정부의 대외정책을 ‘선량한 무능’으로 규정했다. 행정부가 적극적으로 악역을 맡지는 않았지만 정책추진의 주도권이 약했다는 것이다. 의회와 언론, 재계 등의 압력에 취약했다는 이야기다.
무엇보다 두드러졌던 것은, 운용 방식(modus operandi)에 있어서 나타난 부시 시대와의 차이점이었다. 외교 문제에 있어서 부시의 관리 방식은 대통령이 확고하게 지휘자의 위치에 서고, 국가안보 보좌관이 대통령의 분별력 있는 분신 역할을 하는 가운데, 하향식으로 운용되었다. 그리고 운용 범위는 고위 정책결정자들의 협소한 범위에 국한되었다. 클린턴의 방식은 부시의 방식과 매우 달랐다. 그는 질서 있는 과정에 속하는 대부분의 규칙을 파괴했고 손쉬운 특성화를 허용하지 않았다. 클린턴의 백악관에서 이루어진 외교정책 심의는 고위 정책 입안에 대한 어떤 통념보다도 ‘카페에서의 비공식 대담’과 유사했다. 그것은 엄격한 의제 없이 장기적으로 이어지는 회의를 수반했고, 시간 계획도 거의 시작이나 끝이 분명치 않았고, 다양한 백악관 관료들의 자발적 참여로 이루어졌다. (...) 대통령은 지배적인 발언자이기보다 한 사람의 참가자였으며, 회의가 마침내 종결되었을 때 어떤 결정들이 내려졌는지가 종종 불명확했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미국의 마지막 기회>(김명섭-김석원 옮김, 삼인 펴냄) 109쪽)
한반도에 대한 미국 정책의 유연성에 분명한 한계를 지어주는 요소의 하나가 주한미군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반도만이 아니라 세계 각지의 미군 주둔은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현상이다. 미국에 앞선 패권국가 대영제국의 해외주둔군은 미국의 10분의 1 규모였다. 미군의 해외주둔은 클린턴 정부와 공화당 정권의 차이로 좌우될 문제가 아니었다.
냉전 이후의 미국에게 해외 군사 활동의 중요성이 더 커졌다는 주장이 주목을 끈다. 아리기는 미국이 ‘헤게모니 없는 지배’의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본다. 그가 말하는 ‘헤게모니’란 자본주의체제를 이끌어가는 지도력을 뜻한다. 20세기 중엽 진정한 헤게모니를 갖고 있을 때 축적한 힘으로 체제를 억지로 지탱하고 있기 때문에 군사 활동의 필요가 크다는 것이다.
우리는 미국의 헤게모니 없는 지배의 조건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상대적 쇠퇴 단계의 영국 경우처럼, 미국 경상수지 적자의 확대는 국내외에서 미국 기업의 경쟁적 지위 악화를 반영한다. 그리고 영국의 경우처럼, 비록 덜 성공적이기는 하지만, 미국 자본은 이러한 악화에 대해 세계적 금융 중개업으로 특화함으로써 부분적으로 맞섰다. (...)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런 상황은 런던이 해외 제국을 포기하고 불만스럽지만 새로운 헤게모니 세력의 하위 파트너에 만족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이 세계의 주도적인 채권국으로서 예전의 지위를 상실하는 데는 두 차례의 세계 전쟁이 소요되었다. 두 차례 전쟁으로 영국은 군사적으로는 승리했지만 재정적으로는 패배했다.
반대로 미국은 영국보다 훨씬 일찍 그리고 더 심각하게 채무국이 되었는데, 미국의 소비주의적 경향만이 아니라, 영국이 자국의 헤게모니 기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세계 남측에서 끊임없이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모든 군대를 공짜로 끌어 쓸 수 있는 인도가 미국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워싱턴은 이들 군대와 고도로 자본집약적인 무기에 돈을 치러야 했다. 그 위에 해외 제국으로부터 공물을 수탈하기는커녕, 미국은 세계 금융시장에서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경상수지 적자의 균형을 맞추는 데 필요한 자본을 위해 기를 쓰고 경쟁해야만 했다. (죠반니 아리기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강진아 옮김, 도서출판 길 펴냄) 271-272쪽)
중국의 국력 강화에 대응하기 위해 동아시아지역의 군사력 유지가 미국에게 필요했다는 지적도 있는데 그 점은 나중에 살펴보기로 하고, 우선 전 세계 차원에서 군사력에 대한 미국의 의존도가 높아졌다는 사실만 유념해 둔다. 북한에 대해 비교적 포용적인 태도였던 클린턴 정부로서도 주한미군 철수는 지역 사정과 관계없이 고려하기 어려운 문제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북한도 이 점을 이해했기 때문에 개방노선에 착수하면서 바로 주한미군 용인 방침을 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군의 계속 주둔을 용인하기 위해서는 명분이 필요했고, 명분으로 남북 간의 상호 도발 억지와 함께 주변 강대국에 대한 견제의 역할을 내세운 것이다.
한반도의 대결 해소로 인한 새로운 상황에서 주변국의 입지에 변화가 예상되는데, 그런 상황에서 미국의 우선권을 북한도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이 변화를 통해 미국의 국익이 침해받지 않고 오히려 증진되도록 하겠다는 약속인데, 그렇다면 다른 주변국에게는 손해가 될 것이다. 여기에서 1차적 문제가 되는 것이 중국의 입장이다. 한반도 상황에 대한 일본과 러시아의 관계는 미-중 두 나라에 비해 부차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미군의 계속 주둔을 통해 미국의 우선권을 보장한다는 방침은 중국의 양해를 받지 않은 것일 수 없다. 중국 입장에서는 미국의 우선권 보장이 그 자체로는 자기네에게 손해가 되는 것이라도, 북한의 고립 상태를 방치하는 위험보다는 감수할 만한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1989년 말에서 1992년 초까지 북한과 중국 사이의 관계가 매우 긴밀했다. 고위급 상호 방문만 하더라도 1989년 11월, 1990년 9월, 1991년 11월 김일성의 중국 방문이 있었고, 중국 쪽에서도 1990년 3월 장쩌민 총서기, 1991년 5월 리펑 총리, 1992년 4월 양상쿤 국가주석의 북한 방문이 있었다. 이 시기에 북한의 개방노선을 권하는 중국 지도부에서 주한미군 용인 방침도 가이드라인으로 제시했으리라고 생각된다.
정상회담을 통해 획기적 발전의 계기를 맞는 남북관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물론 당사자 간의 합의다. 그러나 어떤 합의든 그 실천을 위해서는 미국의 양해와 협조가 꼭 필요했다. 미군의 한반도 계속 주둔은 이를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라고 남북한 지도부는 합의했던 것이다. 이것은 북한 측의 큰 양보였고, 북한의 개방정책이 얼마나 진지한 것이었는지 보여주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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