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오버도퍼는 1997년에 낸 <두 개의 한국> 개정판을 2001년에 내면서 “후기”에 그 동안 자신의 관점 변화를 이렇게 적었다.
97년 이 책 초판의 집필을 끝냈을 때 필자는 획기적인 변화가 없는 한 북한 정권이 오랫동안 버티기는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다. 또한 그와 같은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을 크게 보지 않았다. 그런데 새로운 세기에 들어선 오늘날 김정일은 그늘 속에서 걸어 나와 그의 부친 사망 후 처음 몇 년 동안보다 훨씬 더 유능하고 유연한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는 어떤 사람이 예측했던 것보다 더 많은 일들을 더 신속하고 순조롭게 해내었고 그에게 찾아온 기회들을 이용할 줄 알았다. 북한이 생명을 이어나갈 전망은 예전보다 향상된 것으로 보인다. (639-640쪽)
1997년에는 북한의 장래가 극히 비관적이었던 것이 2001년에는 훨씬 밝게 보이고 있다는 것이 미국 언론계에서 최고의 한반도 전문가로 꼽히는 오버도퍼의 견해였다. 그 4년 사이의 어떤 변화가 그의 시각을 바꿔놓았을까?
1997년은 북한 상황이 2중의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하나의 위기는 공산권 붕괴와 소련 해체에 따른 경제적 난관이었다. 또 하나는 30여 년간 유일지도체제를 이끌어온 김일성의 죽음에 따른 권력 공백이었다.
1945년 33세 나이로 귀국한 이래 근 반세기 동안 북한을 이끌어온 김일성의 지도력은 북한체제의 중심축이 되어 있었다. 그 후계자가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고 오랜 기간 준비를 해왔다 하더라도 김일성 자신의 지도력과 비교할 수준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최악의 상황에서 김일성의 지도력이 사라진 것이었다.
3년간의 ‘유훈통치’는 현명한 전략이었다. 김정일은 후계자가 원래의 수령보다 부족한 존재라는 사실을 스스로 분명히 했다. 위대한 지도력을 잃어버린 사회가 ‘고난의 행군’을 겪는 것을 당연한 일로 국민을 인식시켰다. 후계자가 지도력을 키워내는 과정을 고난의 시대에서 벗어나는 과정과 겹쳐지게 만들었다. 기대치가 최하로 떨어진 상황에서 새로 출발해 상승의 과정을 통해 체제에 대한 자존심의 불씨가 다시 자라나도록 한 것이다.
오버도퍼는 2000년 3월 김정일의 중국대사관 방문을 주목한다. 북한의 ‘재활’ 과정에서 중국과의 관계가 가질 중요성을 예시(豫示)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일이다.
사실상 2000년 초 북한은 확고한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무언가 사태가 변화하고 있는 듯한 가시적인 조짐을 외부에서 처음 느낀 것은 3월 5일이었다. 이날 김정일은 떠들썩하게 평양 주재 중국 대사관을 방문했고 다섯 시간 가량 이어진 그 만남은 임기 만료로 본국으로 돌아갈 예정인 완윤샹 대사에 대한 환송차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적인 의미는 그보다 훨씬 더 큰 것이었다. 김정일은 평소 대사들을 접견한 일이 없었고 대사관으로 찾아간 것은 그간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김정일은 아마 중국 지도자들에게 앞으로 생길 일을 미리 알려주고 아울러 두 달 뒤 베이징에서 그들을 만나기 전에 미리 초석을 깔아두는 의미에서 그곳을 방문했던 것으로 보인다. (<두 개의 한국> 617쪽)
북한은 1998년 9월 제8차 헌법 개정을 통해 주석제를 폐지하고 국방위원회의 권한을 강화한 다음 1999년 4월 제9차 개정에서 국방위원장의 지위를 공화국 최고지도자와 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명시함으로써 후계자의 위상을 안정시켰다. 제9차 개정에서는 ‘선군사상’을 ‘주체사상’과 함께 공화국 통치이념으로 명문화했다. 내부체제의 조정을 마친 것이다.
두 차례 헌법 개정에서는 경제체제의 개혁개방을 위한 지침도 세워졌다. 제8차 개정에서 개인 소유 확대와 특수 경제지대 설치, 지적재산권 조항 등 경제 분야 7개 조항이 신설되었고, 제9차 개정에서 ‘공산주의’란 용어가 삭제되었다. 이 개정 내용은 중국형 모델의 채택을 보여준다.
1998년 8월 31일의 (인공위성 발사를 명분으로 내건) 장거리미사일 발사는 체제 정비의 마무리를 위한 제8차 헌법 개정을 자축한 행사라는 데 기본 의미가 있다. 미국과 일본이 이 발사를 ‘도발’로 받아들일 것을 북한 지도부도 예측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 서방 관계를 한 차례 정리하고 새 출발의 계기를 마련하려는 뜻이 있었을 것 같다. 내부 체제의 정비에 몰두하는 몇 해 동안 북한은 대외관계에 큰 노력을 쏟을 여유가 없었고, 그에 따라 제네바합의 체제는 동력을 잃고 있었다.
대포동미사일 발사 후에 대북정책조정관으로 임명된 윌리엄 페리의 활동을 통해 미국의 대북정책이 한 차례 정리된 결과를 보면 ‘잊어진 상대’가 되기보다는 ‘미움 받는 상대’가 되려는 북한의 뜻이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북한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는 데서 이 효과가 대표적으로 확인된다.
페리 조정관이 미국 정부를 설득해 자신의 계획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모두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긍정적인 방향을 택할 경우 북한 정권은 이전보다 합법성을 더 크게 인정받을 수 있게 되며 이에 대한 국제사회의 승인이 쉬워진다. 그는 북한이 극도의 경제난을 겪고 있기는 하지만 붕괴의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북한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북한 정권을 바라보고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이어 개최된 백악관 각료회의에서 페리는 더 이상의 현상유지는 불가능하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자신이 겪었던 94년의 경험을 내세워 북한이 몰락의 길로 접어들 경우 얼마나 끔찍한 위험이 닥칠지를 생생하게 설명했다.
평소 민주주의에 반하는 정권에 강한 적대감을 갖고 있었던 올브라이트는 페리의 의견을 들은 뒤, 개인적으로 주한미군 사령관 존 틸러리 장군에게서 브리핑을 받고 나서야 북한의 붕괴가 엄청나게 위험한 일이며 따라서 북한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기 위한 진지한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데 동의하게 되었다. 또한 올브라이트는 김대중 대통령의 시각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그에 대해 높은 신뢰와 확신을 갖게 되었는데, 그녀는 클린턴 역시 자신과 같은 생각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두 개의 한국> 607-608쪽)
1999년 5월 말 평양을 방문한 페리 조정관과의 교섭을 통해 대미관계의 새로운 안정을 바라보게 되면서 북한의 대외관계가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6월에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이 중국으로 떠났는데, 이것은 1991년 11월 김일성의 중국 방문과 1992년 4월 양상쿤 중국 국가주석의 평양 방문 이래 최초의 고위급 방문이었다. 11월에는 이고르 이바노프 러시아 외교장관이 평양을 방문하고 12월에는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수상이 이끄는 일본 의원단이 평양에 왔다.
1999년 중에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를 소강상태로 돌려놓고 일본과의 관계에 전향적 자세를 보였으며 러시아, 중국과의 관계를 발전시켰다. 그해 말까지는 남한과의 관계에도 큰 변화를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도 2년 동안 확인되어 있었다. 2000년은 큰 이벤트에 적합한 상징적 숫자를 가진 해이기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1월 20일 남북정상회담 제안을 공표하고 뒤이어 장소와 형식에 구애받지 않겠다는 적극적 자세를 발표한 것은 북한의 준비된 상황을 확인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999년 말에 임동원을 국가정보원장에 앉힌 것도 정상회담의 보이지 않는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임동원은 북한이 현대를 통해 정상회담 추진의 뜻을 알려왔다는 이야기를 2월 3일에 대통령으로부터 들었다고 하는데, 남북 정부 간의 물밑 접촉은 이미 꽤 진행되어 있던 시점이었으리라고 추측된다.
그로부터 겨우 두 달 만에 단 두 차례 특사회담을 통해 6월 중순의 정상회담 일정이 결정된 사실로 보더라도 남한 정부가 공식적으로 정상회담 준비에 착수하기 전에 상당한 교섭이 이뤄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상회담에 임박해서 임동원은 두 차례, 5월 27일과 6월 3일에 북한을 방문했고, 6월 3일에는 김정일을 장시간 만났다. 6월 4일 돌아온 후 김대중 대통령에게 김정일에게 받은 인상을 이렇게 보고했다.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며 말하기를 즐기는 타입입니다. 식견이 있고 두뇌가 명석하며 판단력이 빨랐습니다. 명랑하고 유머감각이 풍부한 스타일입니다. 수긍이 되면 즉각 받아들이고 결단하는 성격입니다. 개방적이고 실용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으며, 말이 논리적이지는 않지만 주제의 핵심을 잃지 않는, 좋은 대화상대자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특히 연장자를 깍듯이 예우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피스메이커> 73쪽)
1998년 후계체제가 일단락될 때까지 김정일은 외국인을 만나지 않고 지냈다. 불안정한 상태에서의 노출을 피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실체가 드러나지 않고 있는 동안 미국 네오콘을 비롯한 대북 대결주의자들은 그에 대한 온갖 기괴한 소문을 퍼뜨렸다. 김정일에 대한 혐오감을 통해 북한에 대한 적대감을 일으키려는 것이었다. 북한의 ‘고위 망명자’로 한국사회의 주목을 받던 황장엽의 진술이 대표적인 것이었는데, 다시 인용할 가치도 없다.
이런 전 세계적 비방을 김정일은 몇 해 동안 묵묵히 감수했다. 은근히 즐겼을 것도 같다. 그러고 있다가 때를 기다려 몇 해 동안 쌓여 있던 이미지를 일거에 뒤집음으로써 극적 효과를 일으킨 것이다. 6월 정상회담에 뒤이어 남한 언론사주들을 초청한 것은 비방 전파에 앞장섰던 자들에게 “직접 보니 어떻소?” 하며 놀려준 장면 같다. 괴물로부터 영웅으로의 극적 변신은 남한사회의 북한 인식에 큰 충격파를 일으켰고 그 파장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김대중 대통령은 정상회담 준비 단계에서 김정일의 실제 모습을 상당히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000년 2월 도쿄방송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높은 식견을 갖춘 훌륭한 판단력의 소유자라고 믿고 있다.” (돈 오버도퍼 <두 개의 한국> 617-618쪽)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눈 감고 상대방을 추어준 말로 들리지 않는다. ‘식견’과 ‘판단력’은 김정일이 모습을 드러낸 후 널리 인정받은 강점이고 스스로도 자부심을 가진 측면이었을 것이다. 다른 덕목 아닌 이 강점을 김대중이 짚어서 말한 것은 김정일의 인물에 대한 확실한 파악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한에서 열린 어느 스포츠대회에서 김정일 초상이 비를 맞는 것을 보고 북한 응원단이 어쩔 줄 몰라 하던 장면이 있었다. 북한에 대해 호의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들도 이런 장면에서 드러나는 북한체제의 특성에는 고개를 가로젓지 않을 수 없다. 나도 그렇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개인숭배의 힘은 외부세력의 침해 앞에서 극대화되는 것이다. 지도자가 뛰어난 위인이라는 일방적 내부선전보다 인민의 마음을 더 쉽게 움직이는 것은 지도자에 대한 외부의 모욕이다. 요즘 김정은에 대한 비방이 성행하는 것을 보며, 또 어떤 반전이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궁금한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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