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남북정상회담의 주체는 물론 남한과 북한 정부였지만, 제3의 주체로 정주영 명예회장이 이끌던 현대그룹을 또한 꼽아야 할 것이다. 정부의 정책결정과 활동 내용에 비해 기업의 역할은 공개되지 않는 것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대그룹과 북한 정부의 방대한 협력사업계획이나 소떼방북, 금강산관광 같은 엄청난 여론 조성 작업 등 겉으로 나타난 지표만 보더라도 제3의 주체로서 현대그룹의 역할은 분명하다.
몇 해 후 어느 대통령이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토로하기도 하는데, 재벌의 권력 강화는 1987년 이후 남한체제의 가장 중요한 변화의 하나였다. 1997년 소위 ‘IMF사태’를 초래한 원인의 하나로 재벌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이 약화된 상황이 꼽힌다. 군사 권력이 물러선 공백을 재벌이 채우면서 1990년대 남한의 재벌은 국내의 정치적 조건에 구애받지 않는 발전전략을 독자적으로 개발, 추진하고 있었다.
재벌의 초국가적 위상을 앞장서서 구축하고 있던 것이 현대-삼성-대우의 소위 ‘3대 재벌’이었다. 가까운 곳에 있는 꽤 큰 경제주체와의 전면적 관계 변화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던 북한과의 관계에 이들 재벌이 주목하지 않았다면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현대와 대우가 대북관계에 큰 노력을 기울인 반면 삼성은 당시만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북한 관계 사업에 큰 관심을 보인 일이 없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현대와 대우의 창업자가 이북 출신이어서 커넥션을 쉽게 확보할 수 있었다든가, 소비재산업의 비중이 큰 삼성이 다른 두 재벌보다 대북관계에 투자할 동기가 약했다든가 하는 설명이 있기는 하지만, 삼성이 대북사업을 외면해 온 일관성은 그 위상에 비추어볼 때 아무래도 이해하기 힘들다.
연재를 시작할 때 1992년 9월 남북고위급회담을 파탄에 몰아넣은 ‘훈령 조작사건’을 살피면서 그 주범인 이동복이 1988년까지 6년간 삼성그룹의 회장 고문 등 임원을 지낸 사실을 눈여겨보았다. 6년간 삼성에서 그가 한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가 1990년대까지 삼성을 위해 일한 것이 있는지 나는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짐작은 할 수 있다. 삼성그룹의 발전전략에 남북관계를 어떻게 고려할 것인지 의견을 제출하는 것이 그의 기본 역할이었으리라는 것을.
삼성그룹이 대북 비협력 노선을 이미 작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동복 같은 대결주의자를 채용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그런 대결주의자를 고문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에 북한을 바라보지 않게 된 것인지는 따질 생각 없다. 닭과 달걀의 관계 같은 것 아닐까? 삼성그룹이 이동복을 포용한 사실과 북한을 무시하는 발전전략을 취한 사실이 서로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정도로 이해해둔다.
대우그룹이 1999년 여름에 무너지자 현대가 대북사업의 강력한 선두주자가 되었다. 남북관계 개선이 현대에게 유리한 사업 기회를 보장해 줄 전망이 분명했기 때문에 정상회담 추진에도 앞장서 나섰던 것이다. 정상회담은 남북관계 확대의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이었고, 일단 그 고비를 넘기고 나면 관계가 공식화되어 비밀공작의 비중이 줄어들게 되어 있었다. 현대로서는 그 고비를 넘기기 전에 그때까지의 노력 성과를 최대한 공식화해 놓을 필요가 있었다. 화장실 가기 전과 다녀온 뒤의 마음이 다르다는 말대로, 남한 정부의 현대의 역할 존중은 정상회담 실현 이전이라야 더욱 확실할 것이었다.
지난 회에 소개한 대로 현대가 북한과 ‘7대 경협사업’의 독점권에 합의한 사실이 2000년 5월 초 정부 측에 알려졌다. 6월 중순 정상회담 개최 방침이 4월 10일에 발표되어 있었다. 그 시점에서 북한과의 합의에 대한 남한 정부의 보장을 받아놓으려는 의도였다. 이에 대해 김대중 대통령이 대단히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임동원은 전한다.
“현대가 정상회담 개최를 이용해서 북측과 미리 합의해놓고 정부를 물고 들어가려는 것 아닙니까! 이런 식으로 하면 우리가 정상회담을 둔 주고 사는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는 것을 그 사람들은 왜 모른답니까! 현대가 사업을 제대로 추진하려면 경쟁기업들과의 국제적인 협력도 필수적일 텐데 이런 식으로 해서 과연 협조를 얻을 수나 있겠습니까! 게다가 현대측의 처사는 대통령과 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습니까. 정상회담 후에 순리에 따라 국민과 세계의 축복을 받아가며 당당하게 추진할 수도 있는 일을 가지고 왜 북측에 끌려다니며 굳이 정상회담 전에 합의하려고 서두는 것입니까!”(<피스메이커> 44쪽)
여기서 “대통령과 국민에 대한 예의”란 말에 생각이 잠깐 머문다. ‘예의’란 특정한 관계를 전제로 성립하는 것이다. 현대가 외국기업이라면 대한민국 대통령이나 국민에게 특별히 예의를 갖출 필요가 없다. 현대를 대한민국 기업으로 보기 때문에 예의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그룹과 대한민국의 관계에 대한 정주영의 생각도 과연 그랬을까? 1992년 정주영이 국민당을 만들어 대통령후보로 나섬으로써 대한민국 정치계와 ‘맞장’ 뜬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현대그룹이 잘 되어야 대한민국이 잘 된다는 믿음을 그는 가졌고, 김영삼이 정부를 이끌어서는 그 길이 잘 열릴 것 같지 않아서 후보로 나선 것으로 나는 이해한다. 북한 개방을 현대그룹의 활로로 여겼다는 전제 아래 일리 있는 판단이었다.
이 도전에서 실패한 뒤에도 그는 물밑에서(김영삼 정권의 견제를 무릅쓰고) 대북관계에 노력을 쏟아온 결과 남북관계 개선의 여건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 적어도 대북사업에 관한 한 현대그룹이 대한민국 정부의 당당한 파트너라고 그가 생각했을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7대 경협사업’의 독점권을 가진다는 것은 북한 경제개발에 있어서 북한 정부의 제1파트너가 된다는 뜻이었다. 늦춰진 개혁개방을 서두르는 북한 정권에게는 남북관계 개선을 통한 남한과의 협력보다 현대그룹의 도움이 더 급하게 필요한 측면이 있었다. 그래서 정상회담 추진의 역할을 현대에게 맡김으로써 현대가 남한 정부에 대해 발언권을 갖도록 배려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현대는 남한 대통령과 국민에 대한 예의에 크게 얽매일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북한 경제개발사업이 궤도에 오른다면 현대 혼자서 자금 조달과 운영을 도맡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국내외 기업을 모아 컨소시엄을 만들고 그 주도권을 확보할 계획이었다.
현대의 이러한 움직임을 삼성그룹 지도부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재계의 동향을 나는 잘 알지 못하지만, 남북관계가 경색되어 있던 김영삼 정권 5년 동안 ‘3대 재벌’ 중 대북사업에 투자를 많이 했던 현대와 대우에 비해 삼성이 상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누렸을 것은 짐작이 간다. 그런데 이제 살아남은 현대가 초국가적 규모의 사업에서 주도권을 쥐게 된다면 그 위상 변화가 삼성의 ‘제1주의’를 무너트리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겠는가?
‘삼성 비자금’이니 ‘삼성 로비’니 ‘삼성 엑스파일’이니 하는 말들이 많이 나돌았는데, 나는 그 실상은커녕 떠도는 소문이 어떤 것이 있는지도 잘 모른다. 삼성은 대단한 로비력을 갖고 있으며 그에 관한 억측을 함부로 내놓다가는 다치기 쉽다는 인상을 나는 갖고 있을 뿐이다. 이 시대 이 사회의 많은 보통사람들이 가진 인상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도 억측을 좀 내놓아야겠다. 남북관계의 곡절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한도 내에서.
2000년 6월의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남북관계의 급속한 발전이 이뤄지는 상황 속에서 현대그룹의 비약적 위상 변화가 예상될 때, 삼성이 구경만 하고 있었을까? 반도체사업의 성공에 따른 삼성의 발전이 산술적 평면 위에 있는 것이라면, 예상되는 현대의 발전은 기하급수적인 것이었다. ‘대한민국 대표기업’이라는 전략적 가치가 걸려있는 일이었다.
내가 삼성그룹 지도부에 있는 사람이었다면 2000년을 전후한 남북관계의 전개 방향을 바꾸기 위해 갖고 있는 모든 로비력을 발휘할 동기를 가졌을 것이다. 이 동기가 2003년의 대북송금 특검 사태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 내 ‘억측’이다.
남북관계 발전에 제동을 걸고자 하는 동기를 가진 것은 물론 삼성그룹만이 아니었다. 한국사회의 기득권세력 중에는 남북관계의 급속한 발전을 원하지 않는 집단들이 상당한 비중을 갖고 있었다. 이 집단들의 힘이 합쳐져 특검 사태를 몰고 왔고, 삼성도 그 집단의 하나였으리라고 짐작하는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퇴임 직전인 2003년 2월 14일 “국민에 드리는 말씀” 방송에서 “현대의 대북송금 문제를 둘러싼 논란으로 국민 여러분에게 심려를 끼치게 되어 참으로 죄송하다”는 전제 아래 이렇게 해명했다.
“국민의 정부는 남북정상회담 추진과정에서, 이미 북한 당국과 많은 접촉이 있던 현대측의 협력을 받았다. 현대는 대북송금의 대가로 북측으로부터 철도, 통신, 관광, 개성공단 등 7대 사업권을 얻었으며, 정부는 그것이 평화와 국가이익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실정법상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수용했다.”(<피스메이커> 716-717쪽)
10여 일 후, 노무현 대통령 취임 이튿날인 2월 26일 민주당이 불참한 가운데 한나라당과 자민련 의원만으로 열린 국회에서 한나라당이 제안한 “대북 비밀송금사건 관련 특별검사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이 통과되었다. 제1야당과 협의를 거치지 않은 법안이라는 점만으로도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명분이 있었다.
그런데 노무현은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고, 6월 하순까지 진행된 특검을 통해 임동원, 박지원을 비롯한 몇 사람이 구속되었다가 유죄판결을 받기에 이른다. 개인적 이익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인정되어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가 곧 사면-복권을 받기는 했으나 현대 정몽헌 회장이 자살하는 등 종래의 남북관계 발전이 좌절되고 만 것을 임동원은 아쉬워했다.
이 특검 사건이 우리에게 남긴 상처는 대단히 깊었다. 민족문제와 남북관계에 대한 올바른 철학과 비전이 결여된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첫단추를 잘못 끼움으로써 남북관계를 경색케 하고 국론을 분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는 남북 화해협력과 통일문제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과 흥미를 감퇴시키고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추동력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피스메이커> 719쪽)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231-232쪽에 이 상황에 대한 회고가 적혀 있다.
거부권을 행사하면 특검은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검찰 수사까지 막기는 어려웠다. 검찰수사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논거는 ‘통치행위론’이었다. 나는 법률가로서 이 이론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옳다고 우기면서 검찰이 수사를 하지 못하도록 지시하고 정면으로 부딪칠 수는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김대중 대통령께서 나서주셔야 했다. “남북관계를 열기 위해 내가 특단의 조처를 취한 것이다. 실정법 위반이 혹시 있었다고 해도 역사 앞에 부끄럼이 없다. 법 위반은 작은 것이고 남북관계는 큰 것 아니냐.” 이렇게 말하면 나도 ‘통치행위론’을 내세워 검찰 수사를 막을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매우 신뢰할 만한 사람을 보내 이런 뜻을 말씀드렸다. 그런데 내 노력이 부족했는지 소통이 잘못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마지막 기자회견에서 4억 달러 문제를 사전에 보고받지 않아 몰랐다고 하셨다. 대통령이 한 일이 아니라고 했으니 ‘통치행위론’을 내세우는 데 논리적 근거가 사라져 버렸다. 참모가 대통령 모르게 한 일까지 ‘통치행위론’으로 덮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가 ‘노빠’로 알려진 사람이지만, 이건 말이 안 된다. 위에 인용한 2월 14일 연설에서 “실정법상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수용했다”고 하지 않았나? 막 물러난 전임 대통령에게 그보다 더 나아간 어떤 표현을 요구한단 말인가?
당시 제기된 특검법이 민주당의 동의 없이 통과되었다는 사실은 중대한 정치적 결함이었다. 국회를 다수결로 통과했다는 형식요건만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거부권’이란 제도가 뭐에 쓰려고 만든 것이란 말인가? 노무현의 특검법 수용에는 대통령으로서 직무유기의 의미가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민주당의 동요에 따른 정치적 부담과는 별개의 문제다.
특검으로 밝혀진 사실은 현대가 ‘7대 경협사업’ 독점권 대가로 4억 달러, 정부의 북한 지원금 1억 달러, 총 5억 달러를 북한에 제공하는 과정에서 현물 5천만 달러를 제외한 현금 4억5천만 달러를 송금하는 데 국가정보원 등 국가기관이 불법적 역할을 맡았다는 것이다. 그 시점까지 남북관계의 부진으로 송금 등 제도적 장치가 미비한 데 문제가 있었다고 본다면 김영삼 정권의 책임으로 돌려 마땅한 문제였다.
2000년 현대그룹의 분할에서 대북사업과 함께 그룹의 중심부를 이어받았던 정몽헌 회장의 자살은 많은 수수께끼를 남겼다. 검찰 수사 진행 중인 2003년 8월 4일 사무실에서 뛰어내린 것이다. 현대를 둘러싼 당시 남북관계의 이면에는 드러나지 않은 문제가 많이 남아있다는 짐작을 하게 된다. 1990년대 남북관계의 순탄치 못한 진로에서 파생된 문제가 현대의 역할에서 집약되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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