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과의 관계에 대한 여러 미국 관료-학자-언론인의 회고에서 김영삼의 정책결정 기준에 관한 일치된 견해가 있다. 국내여론에 민감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론에 억지로 영합하려 한다 해서 꼭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다. 김연철이 <냉전의 추억>(후마니타스 펴냄) 251쪽에서 김영삼 정권 시기의 남북관계를 요약한 대목에 지지율 추이가 언급되어 있다.

 

정권별로 남북회담 횟수를 살펴보아도 김영삼 정부가 제일 적다. 박정희 정권은 7-4남북공동성명 이후 남북회담이 집중적으로 개최되어 111회, 전두환 정권은 32회, 노태우 정권은 163회, 김대중 정부는 80회였으며, 김영삼 정부 시기는 28회에 불과했다. (...) 김영삼 정부 시기는 1995년 베이징 쌀 회담의 차관급 접촉 2회를 제외하고는 핵 문제 해결을 위한 특사 교환 실무접촉 8회, 남북정상회담 실무접촉 5회로 본회담은 한 번도 못해 보고 대부분 준비단계에서 무산되었다. 이런 점에서 남북접촉의 역사에서 김영삼 정부 시기를 ‘잃어버린 5년’이라고 부를 수 있다.

 

김영삼 정부가 출범했던 1993년 3월 대통령 지지도는 84.2퍼센트에 달했다. 쌀 지원 과정에서 촌극을 빚었던 1995년 9월에는 33.3퍼센트로 떨어졌다. 그리고 한보 사태를 겪던 1997년 3월에는 8.8퍼센트로 떨어졌다. 물론 그의 지지율 하락은 결코 대북정책 때문만은 아니다. 대북정책에서 보여준 즉흥성은 다른 정책의 결정과정에서도 비슷했을 것이다.

 

지나치게 민감한 것이 오히려 여론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김연철은 바로 이어 설명한다.

 

김영삼 정부는 대북정책에서 왜 온탕과 냉탕을 넘나들었을까? 역설적이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여론에 너무 민감했다. 그러나 몰랐던 부분이 있다. 바로 대북정책에 대한 여론의 이중성이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평상시에는 북한에 대해 다소 보수적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결코 전쟁 위기와 같은 불안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북한의 핵 개발에 대해 당연히 비판적이다. 그러나 교착이 길어지고 위기가 고조되고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면, 정부의 능력을 문제 삼는다. 시간이 지나면 정부의 해결능력을 의문시하는 것이다.

 

대통령 취임 초의 김영삼은 참 행복한 정치가였다. 지지도가 80%를 넘은 것은 한국 대중정치의 초창기 혼돈 덕분이었다. 민주화 투사로서 후광은 아직 살아있는 위에 3당합당 후에 보여준 파워폴리티션의 면모가 수구세력의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큰 반대세력이 없었다. 정치적 양극화가 진행된 후로는 불가능하게 된 행운이었다.

 

‘독설의 대가’로 명성을 떨친 버나드 쇼의 일화 하나가 생각난다. “당신과 내가 결합해서 당신의 두뇌와 내 육체를 함께 물려받는 아이를 얻고 싶어요.” 하며 어느 절세미인이 접근할 때 “내 육체와 당신의 두뇌를 함께 물려받는 아이를 얻을 수도 있지 않겠소?” 하고 사양했다는 이야기다. (아인슈타인과 매릴린 먼로를 대입한 이야기가 많이 떠돌지만, 아무래도 이런 독설은 아인슈타인보다 쇼에게 어울린다.) 김영삼은 민주화 정신과 산업화 정신의 장점을 결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는데, 결과를 보면 단점만 결합한 것 같다.

 

김연철의 말처럼, 김영삼의 정치적 몰락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어울려 작용했다. 그러나 임기의 딱 중간인 1995년 9월까지 33.3%로 폭락한 데는 대북정책 혼란이 큰 몫을 맡았다. 그때까지는 대형 사고나 정치적 문제가 터져도 그의 취임 전에 쌓여져 있던 문제가 불거져 나오는 것으로 ‘이해’해주는 국민이 많았다. 그런데 노태우의 북방정책으로 키워져 있던 남북관계의 발전에 대한 국민의 기대를 그는 너무나 황당하게 저버렸다. 당시 국민의 기대 중에는 한반도 평화 정착을 바라는 ‘진보적’ 희망과 북에 대한 남의 우위를 빨리 확립해서 교착상태의 부담을 벗어나기 바라는 ‘보수적’ 희망이 뒤섞여 있었는데, 그는 양쪽의 기대를 동시에 저버렸던 것이다.

 

한 쪽 기대를 저버리면 다른 쪽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보통이다. 양쪽 기대를 동시에 저버린다는 것은 양쪽을 모두 충족시키는 것 못지않게 힘든 일이다. 그런 힘든 일을 어떻게 해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 일 하나가 위 인용문에 언급된 1995년의 ‘쌀 지원’이었다.

 

북한이 국제사회에 공개적으로 지원 요청을 한 것은 1995년 7월 말에서 8월 초에 걸친 집중호우로 최악의 홍수를 겪은 직후의 일이었다.

 

‘사회주의 낙원’을 자처하던 북한은 전통적으로 국내의 재해를 외부에 떠벌리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8월 중순 비가 그치자 북한은 침묵을 깨고 과장까지 섞어가며 홍수로 인한 극심한 피해를 외부에 알리기 시작했다. 자력갱생의 화신처럼 행세하던 북한이 8월 말 사상 최초로 공개적으로 바깥 세상에 도움을 호소하고 나섰던 것이다. (돈 오버도퍼 <두 개의 한국> 537쪽)

 

사실 이 홍수를 계기로 공개적으로 나섰을 뿐이지, 북한은 식량부족 문제를 여러 해 전부터 겪고 있었다.

 

북한이 식량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몇몇 나라에 남몰래 도움을 요청하기 시작한 것은 홍수가 발생하기 훨씬 전부터였다. 서동권 전 안기부장의 말에 따르면 90년대 초 북한은 비밀리에 제공한다는 단서를 붙여 남한에 쌀 50만 톤 지원을 요청했던 적이 있었다. (...) 후일 북한 관리들은 94년 미국과의 제네바 협상에서도 자신들의 절박한 식량 사정을 밝혔지만 핵문제에만 골몰해 있던 미국 협상단은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같은 책 539쪽)

 

식량부족 문제는 공산권 붕괴 이후 북한에 닥친 경제난의 한 부분으로 볼 수도 있다. 이태섭은 <북한의 경제위기와 체제변화>(선인 펴냄) 294-295쪽에서 주체사상에 입각해 ‘자립경제’를 표방하는 북한이 의외로 대외 경제관계에 예민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북한식 자립 경제의 보다 근본적인 한계는 그것이 대외 경제 관계에 매우 취약하다는 것이었다. 북한의 대외 무역과 경제 성장 사이의 상관관계를 역사적 추이를 통해 분석해보면, 그 양자 사이에는 대체로 강한 양의 상관관계가 존재하였다. 즉 무역 의존도가 증가하면 경제 성장률도 증가하고, 무역 의존도가 감소되면 경제 성장률도 감소되었던 것이다. 물론 북한의 대외 무역 의존도는 비교적 낮은 편에 속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양이 아니라 질이다.

 

즉 북한은 주요 전략 물자인 원유, 코크스, 생고무 등 주요 원자재와 에너지, 설비 등을 다른 나라에 의존하여 왔다. (...) 때문에 1990년대 사회주의 시장의 붕괴에 따른 무역 등 대외 경제 관계의 급격한 감소는 북한 경제에 실로 엄청난 타격을 주는 것이었다. 1990년부터 1998년까지 연속 9년간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것이 그것이다. 당시 북한은 대외 무역의 70% 정도를 사회주의 시장에 의존하고 있었던 바, 사회주의 시장의 붕괴는 극심한 원자재난과 에너지난을 야기하였다.

 

“이런 바보, 문제는 경제야!” 했다는 클린턴의 말이 생각난다. 1980년대 공산권의 경제침체 속에서 골병이 들어 있던 북한 경제에 공산권 붕괴가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미국과 남한의 북한붕괴론도 그 인식에 발판을 둔 것이었고, 북한 당국도 그 때문에 나름대로 개방의 결단을 내린 것이다. 연료도 비료도 부족한 가운데 식량난이 계속 깊어지다가 이제 집단아사의 지경에 이르러 공개적 지원요청을 하게 된 것이다.

 

1990년대 중반 북한의 경제 위기는 김일성의 사망과 맞물리며 곧 정치 위기로 파급되었다. 극심한 경제난으로 국가 공급 능력이 크게 약화됨에 따라 기존의 국가 식량 배급 체계와 소비품 공급 체계도 와해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탈북자가 증가되고, 직장에서 이탈하여 식량과 생필품을 구하기 위한 주민들의 사회 이동성이 증가되었으며, 이에 따라 주민들의 조직 정치 생활도 이완되었다. (...)

 

경제난으로 인해 국가 기능뿐만 아니라, 당 기능 역시 크게 약화되었다. 1996년 12월 김정일은 식량난으로 인해 무정부 상태가 되고 있으며, 당 조직들이 맥을 추지 못하고 당 사업이 잘 되지 않아 사회주의 건설에서 적지 않은 혼란이 조성되고 있다며 당 중앙위원회를 비롯해 당 조직과 당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 요컨대 경제 위기가 당과 국가의 기능 약화와 주민들의 사상적 동요 등 정치적, 사상적 위기로 파급되고 있었던 것이다. (같은 책 296-297쪽)

 

1994년 8월 초순 제3차 북미회담 중 북한 측의 식량원조 이야기를 들은 것은 케네스 퀴노네스였다. <한반도 운명> 303쪽에 이렇게 적었다.

 

북한 대표부에서 축소회담이 한창 진행되던 중이었다. 휴식시간 중에 한성렬이 허바드, 세이모어와 함께 큰 회의실 안에서 쉬면서[쉬고 있던?] 나를 자기 옆으로 불렀다. 한성렬의 질문은 나를 놀라게 했다. 미국이 1994년 가을부터 100만 톤의 밀을 북한에 제공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었다. 나는 북한이 어떻게 대금을 결제하려는지 되물었다. 한성렬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미국은 PL480 식량원조계획에 따라 밀을 무상공급할 수 있는 것으로 안다고 대답했다. 나는 이 문제를 허바드 차관보에게 전달하기는 하겠지만, 양국간에 정상적 외교관계가 없다는 점에 비추어 실현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으로 안다고 대답했다.

 

이런 식으로 미국에게까지 손을 벌렸다면 누구에게든 기회 있는 대로 지원을 요청하고 있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이 가는 일이다. 오버도퍼가 <두 개의 한국> 539쪽에서 “95년 1월에는 남한과 일본에 긴급 구호 식량지원을 호소했다”고 한 구체적 경위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일본은 5월 말 식량지원을 구체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김영삼 정부는 일본보다 뒤지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서둘러 ‘쌀 회담’에 나섰다. 6월 27의 지방선거를 의식해서 더더욱 서둘렀다. 김연철이 “이상한 회담”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 결과였다.

 

비극의 첫 단추는 북한이 남한 당국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2년 반의 대립 시대를 거치면서 모든 대화가 끊어졌다. 노태우 정부 시기 8번의 고위급 회담을 치렀던 공식 채널도 끊겼고, 전두환 정부 시기부터 가동되었던 비밀 접촉 라인도 끊어진 지 오래였다. 북한은 한술 더 떠, 쌀을 주겠다니 받겠지만 당국 회담은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일본보다 먼저 쌀을 주겠다는 방침을 정한 김영삼 정부는 할 수 없이 민간인들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른바 비선이다. 비선은 밀사와 다르다. 밀사는 비밀 접촉이지만 공식 조직이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나 비선은 민간 업자가 중재하는 비밀 접촉이다. 사적 이해관계가 개입되고 공식 회담이 갖추어야 할 절차가 소홀해지며, 결국 후유증도 커지고, 남북 당국 관계의 개선으로 이어지기도 어렵다. (...)

 

마침내 회담을 베이징에서 열기로 합의하고 북측에서는 전금철 통일전선부 부부장, 남측에서는 이석채 재정경제부 차관이 대표로 결정되었다. 북한은 당국 회담이 아니라는 의미로 전금철의 직함을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 고문으로 정했다. (...) 출국 사실도 숨기고 베이징으로 온 이 차관은 회의록도 작성하지 않은 채 회담을 했고, 6월 21일 작성된 합의문은 공개되지 않았다. 이 차관은 대한민국 재경원 차관으로 서명했지만, 전금철은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 고문으로 서명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든 당국 회담으로 보이고 싶어 했던 김영삼 정부는 결국 이 합의문을 공개하지 못했다. (<냉전의 추억> 246-247쪽)

 

6월 21일 작성된 합의문에 따라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와 삼천리총회사 사이에 계약이 맺어진 것은 6월 25일 정오경이었다. 계약서는 즉각 김포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홍구 총리 일행에게 공수되었고, 계약서를 받은 일행은 헬기를 타고 동해항으로 갔다. 그곳에서는 씨 아펙스 호가 2천 톤의 식량을 싣고 총리 일행이 참석할 ‘대북 쌀 지원 수송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식이 끝나자 배는 바로 출항했다. 북한의 어느 항구로 갈지도 모르는 채로.

 

씨 아펙스 호는 청진항으로 들어오라는 연락을 6월 26일 오후에 받았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청진항에 들어갈 때 북한 관계자의 요구에 따라 태극기는 내리고 인공기만 단 채 입항했다. 베이징 합의 내용이 항만당국에게도 선장에게도 알려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공기 게양’ 사건이었다. 대북 강경론자는 물론 유화론자도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날 지방선거에서 여당은 참패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