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8월 12일 제3차 북미회담의 결과로 발표된 합의 내용은 1년 전 제2차 회담에서 제시된 방향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미국은 경수로를 제공하고 북한은 핵 활동을 줄이고 공개한다는 것이 그 골자였다.
이 빤한 내용을 확인하는 데 왜 1년 넘는 시간이 걸렸을까? 북한이 남한 및 IAEA와의 관계를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는 바람에 제3차 회담을 열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남한과 IAEA의 정책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지연의 책임을 IAEA와 남한에게 돌리는 것이 좀 어색하다. 미국이 회담을 정말 빨리 진행시키고 싶다면 그런 방향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여지가 많이 있었다.
미국이 회담의 성공을 바라기는 하되 그 성공을 늦추고 싶은 입장이었을 가능성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책임이 될 ‘경수로 지원’의 비용을 확보하는 대책을 세울 시간과 공작이 필요했을 것 같다. 수십억 달러를 미국정부 예산으로 충당하려면 의회 승인이 필요한데,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관계된 여러 나라가 부담을 나누게 하려면 그에 합당한 여건을 조성하고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야 할 일이었다.
1994년 6월까지 상황을 악화시켜 전쟁 위험까지 구체화시키는 것이 남한과 일본의 지갑을 여는 데 유리한 조건이었을 것 같다. 결국 한국은 비용의 70%, 일본은 20%를 부담하기로 합의하는데, 전쟁 위험이 구체화되는 상황을 겪지 않았다면 이런 합의가 가능했을까? 남은 10%에 대한 의회 승인도 ‘전쟁 불사’의 의지까지 보임으로써 쉬워졌을 것이다.
9월 23일로 예정된 제4차 회담에서는 제3차 회담 합의 내용의 실천방법을 의논하게 되어 있었다. 미국 측의 가장 중요한 준비는 경수로 비용의 보장 방법이었다. 9월 중순 갈루치 수석대표가 비용 분담을 교섭하기 위해 일본과 남한을 방문했다.
일본 정부는 미국이 만족할 만한 20% 수준 부담에 아무 이의가 없었다. 일본 입장에서는 안전보장 문제가 극히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비용보다는 북-미 협상의 군사적 측면에 더 관심이 많았다. 제네바합의가 타결된 뒤 일본은 북한에 대해 핵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미국의 보장이 일본에 대한 안전보장의 약화를 가져올 가능성을 걱정하고 있었다.
12월 12일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미국 팀은 일본 외무성의 외교정책국 국장인 야나이를 만났는데 뜻밖에도 완강한 저항에 부딪쳤다. 야나이는 북한에 대한 안전보장이 일본의 안보에 악영향을 미칠지 모른다고 크게 우려했다. 그러면서 안전보장서에 북한이 NPT의 “정상적인 회원국”이어야 한다는 조건과 북한이 핵무장한 국가와 “함께 또는 동맹을 맺고” 다른 나라를 공격할 경우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문구를 추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 않으면 북한이 계속하여 NPT를 우롱하거나, 러시아 또는 중국과 동맹하여 일본을 공격해도 미국의 핵공격을 피할 수 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십상이라는 것이었다. (위트-폰먼-갈루치 <북핵위기의 전말> 353쪽)
일본에 비해 남한은 맡을 지분도 클 뿐 아니라 북한 문제의 당사자 위치에 있기 때문에 훨씬 더 중요하고도 예민한 교섭 상대였다. 남한 정부는 군사통치의 전통이 남아있어서 안보 문제를 일본처럼 중요시하지 않는지, 북-미 협상의 진전을 싫어하는 기색을 보여 왔다. 미국의 ‘지나친 양보’에 반대해 온 남한 정부가 협상의 핵심인 경수로 제공에 협조적인 태도를 보일지 의심스러운 장면이었다.
관련된 여러 한국인과 미국인들의 회고를 훑어봐도, 남한 정부가 70% 부담에 동의한 이유가 아직까지 내게는 명확하지 않다. 증언을 남긴 관계자들(한완상, 임동원, 위트, 갈루치, 폰먼, 퀴노네스 등)보다 윗선에서 오고간 뭔가가 있었는지? 아직까지도 공개되지 않을 만한 어떤 사정이 있었던 건지? 갈루치의 일본-남한 방문이 제4차 회담을 코앞에 두고 이뤄진 것을 보면, 한-미-일 3국 사이에 보이지 않는 합의가 이미 이뤄져 있었고 갈루치의 방문은 그 합의를 공식화하는 요식적 절차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8월 17일의 김영삼-클린턴 간의 전화통화에서 북미회담에 대한 김영삼의 이 무렵 태도를 알아볼 수 있다.
제네바 회담이 끝난 5일 후 클린턴 대통령은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로 좋은 말로 안부를 교환했지만 김 대통령이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은 감출 수 없었다. 며칠 전부터 이미 한국이 제네바의 “합의성명”에 대해 미온적이라는 것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다. (...) [김영삼은] 김정일이 한동안 공개석상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북한과 합의를 서두르는 것은 현명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북한이 이처럼 불확실한 와중에 한미 양국은 보다 긴밀하게 협력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클린턴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달래는 것이었다. “제네바 합의문은 좋은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북한의 핵위협을 없애고 북한을 정상화시킬 수 있는 여러 가지 좋은 조치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게다가 북한이 한국형 경수로를 수용할 것 같으며, 비핵화공동선언도 이행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클린턴은 평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실치 않은 한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데 동의했다. (같은 책 341쪽)
이 통화에 앞서 김영삼은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온건한 입장의 대북정책을 발표했었다. 남북한 공동발전계획을 제시하며 경수로사업이 그 최초의 사업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며칠 후 평양 몇 곳에 반정부 전단이 살포되는, 남한 안기부 작품으로 보이는 일이 벌어지자 김영삼은 이것이 “북한이 심각한 상황에 처해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라고 주장했다. (같은 책 342-344쪽) 갈팡질팡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 단계 남한의 정책결정에 한승주 외무장관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지원 여부가 이 경수로 프로젝트의 성패를 좌우할 수 있었다. 갈루치가 한국-일본 방문길에 나서기 수 주 전인 9월 초, 한승주 장관이 워싱턴을 방문했다. 그의 임무는 재정보증관련 협상을 시작하는 동시에 한미양국 간 보조가 맞지 않는다는 대통령 및 국민들의 불안을 진정시키고 북미대화의 속도를 늦추기 위해 워싱턴에 대해 보다 확고한 견제장치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
그러나 북미대화의 속도조절은 순탄하지 않았다. 남북대화와 북미대화의 진전 사이에 느슨하나마 “동반진전”이 있어야 한다는 한 장관의 주장은 씨도 먹히지 않았다. 미국의 관리들은 미북대화와 남북대화를 연계시킴으로써 생겨난 문제에 치를 떨고 있었다. 백악관 안보보좌관실에서 한 장관을 만난 토니 레이크 안보보좌관은 상황을 자전거에 비유했다. 미국과 한국이 계속 페달을 밟아주지 않으면 넘어질 것이라는 것이었다. (같은 책 351쪽)
9월 16일 갈루치와 폰먼이 레이니 대사와 함께 청와대로 찾아갔을 때 김영삼은 “3개월이 지났는데 김정일은 아직도 권력을 승계하지 않고 있다”며 “시간은 우리 편”이라는 둥 협상을 지연시키고 싶은 속마음을 드러냈다. 그러나 협상에 너무 많은 엄격한 조건을 연계시키면 “상황이 결국은 ‘안보리’로 귀결되고 말 것”이라고 미국 관리들이 협박함으로써 김영삼의 동의를 받아냈다고 한다. (같은 책 354-355쪽) 북한 문제의 안보리 회부는 전쟁 위험을 뜻하는 것이었으므로 한국 대통령으로서 절대 택할 수 없는 길이라는 사실이 이때는 분명히 인식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 과정에서 갈루치는 한승주와의 협력에 매우 만족한 것으로 보인다.
갈루치도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한승주 장관의 역할이 가장 컸다. 한 장관이 보기에 경수로 프로젝트는 남북대화를 재개하는 데 중요한 수단이 될 뿐만 아니라 잘만 이용하면 한국회사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기도 했다. 게다가 통일이후까지 내다보면 지금 북한에 경수로를 건설하는 것이 통일이후 통일비용을 경감시키는 효과도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한 장관의 입장은 행정부 내부, 청와대, 국회, 그리고 보수언론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
국내정치적 분위기는 복잡하고 적대적이었지만 좌우간 갈루치와 한 장관은 일을 해냈다. 미국이 들고 온 초안에 비해 많이 완화되었지만 보증각서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한국 측 초안에는 많은 수사와 조건들이 나열돼 있었다. 반면 갈루치는 한국의 지원과 비용부담에 대한 명시한 규정을 요구했다. 그러려면 클린턴 대통령이 먼저 친서를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그러기로 했다. 갈루치는 바로 클린턴 대통령 친서의 초를 잡아서 김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건네주었다. (같은 책 355쪽)
한완상이 통일부장관으로 있던 1993년 중 한승주 외무부장관, 김덕 안기부장, 정종욱 외교안보수석이 모두 학계 출신 인사들이어서 대북정책에 원만한 협조를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런데 북핵위기 과정에서 정종욱에게서는 대통령의 뜻을 벗어나거나 넘어서는 입장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한승주 역시 김영삼의 뜻을 거스르는 입장은 보여주지 않지만, 은근히 온건정책으로 이끌려는 노력을 계속한 것으로 보인다.
9월초 한승주가 워싱턴에 갔을 때도 겉으로는 김영삼이 요구하는 (미국 관리들에게는 “씨도 안 먹히게” 된) 북미대화-남북대화의 연계에 계속 집착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실제로는 경수로 비용의 한국 분담을 순조롭게 하는 데 노력을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 한완상처럼 정치적 ‘색깔’을 드러내는 것을 삼감으로써 대북 강경파의 견제를 피하면서 남북관계의 파탄을 막는 데 현실적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정관정요>의 한 대목이 생각난다. 당 태종이 위징에게 소원을 말해보라 하니 “신으로 하여금 충신(忠臣)이 아닌 양신(良臣)이 되도록 해 주소서.” 대답했다는 것이다. 태종이 충신과 양신의 차이를 물으니 요순(堯舜)의 태평성대를 보좌한 것이 양신이고 걸주(桀紂)의 폭정을 간하다가 죽은 것이 충신이라 답했다고 한다. 한완상은 충신의 길, 한승주는 양신의 길을 찾은 셈일까?)
김영삼 정부가 북한에 대한 적대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경수로 프로젝트에서 70%의 재정 부담을 끌어안은 것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이 결정을 뒷받침한 것이 북한붕괴론이었다는 데 아이러니가 있다. 누군가 속마음으로 원만한 남북관계를 바라는 사람이 강경론자들에게 “여러분 생각대로 북한이 곧 붕괴할 거라면 어차피 머지않아 우리 것이 될 테니 남한 땅에 짓는 거나 북한 땅에 짓는 거나 무슨 차이가 있냐?”고 설득한 것은 아닐까? 한승주 같은 사람이 그런 위치에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 둔다.
제3차 북미회담이 1년간 늦어진 이유가 IAEA의 ‘특별사찰’ 문제와 남북관계-북미관계 연계에 있었다. IAEA는 한 번 꺼낸 칼을 명분 없이 거둘 수 없었고, 남한은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힘을 쓰지도 않으면서 북미관계가 앞서 나가는 것을 견제했다. 그러나 이런 표면상의 문제들보다 실제로는 경수로 비용 문제가 진짜 이유였을 것 같다. 막상 북-미 합의가 임박하자 미국은 남한과 IAEA의 입장에 크게 얽매이지 않았다. 퀴노네스는 제4차 회담을 앞두고 특별사찰에 대한 미국대표단의 입장을 이렇게 설명했다.
끝까지 남은 것은 영변 핵폐기물 은닉장소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의 특별사찰 실시를 언제 북한이 수용하도록 요구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특별사찰은 핵문제의 핵심사안이었다. 한스 블릭스 국제원자력기구 사무총장은 국제 핵안전체제를 유지하려는 국제원자력기구의 의지를 천명하기 위해 특별사찰 요구라는 전례 없는 강력한 조치를 취한 바 있다. 북한은 블릭스의 특별사찰 요구를 미국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의 예속성을 보여주는 증거로 간주했다. 북한은 또한 특별사찰을 북한 주권에 대한 침해로 여기고 북한 군사기밀 유출로 악용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미국은 특별사찰이 필요불가결한 조건임을 지난 1년간 줄곧 주장해 왔다. 애초부터 미국의 목적은 국제원자력기구가 핵확산방지를 위해 취한 전례 없는 강경 자세에 지지의 뜻을 천명하는 것이었다. 미국도 북한이 이미 추출한 분량에 강한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핵폐기물 은닉장소에 대한 특별사찰을 통해 샘플을 채취한다고 해서 확실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갈루치는 9월 21일, 국무부 1일 뉴스브리핑에서 기자들과 문답 중 특별사찰은 “절박한 문제가 아니라”고 언급, 특별사찰에 관한 결정 방향을 예고한 바 있었다. 10월 3일에 모인 외교정책의 ‘주역’들은 특별사찰 문제를 경수로의 주요 부품 수송 때까지는 미뤄두어도 괜찮다는 데 합의했다. (<한반도 운명> 331-332쪽)
절박하지 않은 문제에 그렇게 발목을 잡혀 있었다니, 뛰기 싫어서 꾀병 부린 것 아닌가! 미국대표단이 남한 입장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역시 퀴노네스의 기록을 살펴본다.
한국 정부 안팎의 인사들은 미국이 북한과의 협상과정에서 한국과의 협의를 중단했다고 그때도 주장했고 지금도 주장한다. (...) 한미관계는 1993년 6월 11일 북미공동성명 이후 몹시 불편하게 되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김영삼 대통령은 국내 여론에 끌려 다니며 대북정책과 우선순위를 뒤범벅으로 만들었다. 예컨대 한반도 긴장이 고조될 때에는 한미군사동맹의 방패 뒤에 숨으려 했고, 긴장이 완화되면 북미협상에 대한 한국의 지분을 행사하려 했다.
한편 미국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확고한 지도력의 부재라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토니 레이크와 샌디 버거는 한국이 제기하는 골치 아픈 문제를 가급적 피하려고만 했다. 양국 간의 고위급 회담은 뜬구름 잡는 자리가 되기 일쑤였고 자연히 어려운 문제들은 실무자들에게 떠넘겨지곤 했다. 이렇게 한두 달 시간이 흐르자, 중요한 문제가 제때에 다뤄지지 못하는 것은 물론 결정 자체가 지체되어 양측에는 불만이 쌓이고 있었다. (같은 책 313쪽)
김영삼 정부가 하도 갈팡질팡하다 보니 미국 고위관리들은 한국 관계 문제라면 실무진에 미루기만 하고 실무자들은 지겨워하게만 되었다는 것이다. 제4차 북미회담 진행 중 특별사찰 요구의 완화에 대한 남한의 강력한 반대도 미국에게는 성가신 것이었다.
10월 6일 밤 갈루치가 브리핑을 한 다음날 아침 뭔가 심상치 않은 조짐이 보였다. 장[재룡] 대사가 갈루치에게 한승주 장관에게 바로 전화를 해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학자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갈루치와 한 장관과의 관계는 좋았다. 서로 밀접히 협력하며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왔고 서로를 높이 인정하고 있었다. (...)
“우린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거요.” 한 장관의 말이었다.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공사비와 장비구입비를 지출하고도 5년 동안 북한의 과거 핵 활동을 밝힐 수 없다면 한국정부에겐 그야말로 치명타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국회가 비용지출을 승인하지 않을 것임은 물론이고 아마 IAEA도 찬성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미국과 한국이 공개적으로 또 내부적으로 합의했던 “광범위하고도 철저한” 해결책은 어디 갔냐고 불평했다. (<북핵위기의 전말> 376-377쪽)
미국은 북한과의 협상에서 ‘특별사찰’을 원천적으로 거부해 온 북한 입장의 번복을 위해 5년 후로 예상되는 ‘경수로 공사 75% 진척’ 이후로 미뤄주려 하고 있었다. 갈루치와 한승주의 이 통화가 있기 직전 김영삼은 10월 8일자 <뉴욕타임스>에 나올 인터뷰를 했다. “한국 대통령, 미국을 맹타하다”란 제목 못지않게 도발적인 내용이었다. “미국이 이 설익은 타협에 만족하고 언론이 그것을 좋은 합의라고 부르겠다면 그렇게 하라고 하시오. 그러나 내 생각에 그것은 더욱 큰 위험을 가져올 뿐이오.”라는 말도 있었다. 이 인터뷰의 의미와 파장이 <북핵위기의 전말> 380-382쪽에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김영삼 대통령의 입장에서 세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 북한의 과거 핵 활동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전에 경수로를 상당부준 완공해야 하고 그 비용의 대부분을 한국이 부담해야 했다. 특히 그에 따르는 정치적 부담은 김 대통령이 져야 하고, 그 과실은 후임자가 누릴 것이었다. (...) 둘째, 김 대통령이 최악의 상황으로 여기는 것이 현실화되고 있었다. 즉 한국의 가장 가까운 동맹국 미국이 남북관계의 진전과 무관하게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특히 외교관계 개설에까지 접근하고 있었다. 셋째, 북한이 곧 붕괴할 것이 틀림없으므로 북한과의 대화를 서둘지 말라고 한 그의 충고는 완전히 무시됐다. (...)
미국도 즉각 반응했다. 영국에 있던 크리스토퍼 장관은 현지 시간으로 새벽 2시 한승주 장관에게 항의전화를 걸어왔다. 그 시간에 잠자던 그를 깨워 한국으로 전화를 하게할 만한 것은 클린턴 대통령의 분노밖에 없었다. 안보보좌관 토니 레이크도 정종욱 외교안보수석에게 전화를 걸어 클린턴 대통령에 대한 “순진하고 설익은” 공격에 대해 항의했다. 그리고 또 한국이 뒷전에 앉아서 북한의 양보만 기다린다면 향후 대화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제 한국정부는 공개적으로 협상결과를 지지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
[한승주와 갈루치의 통화에서] 한 장관은 그 인터뷰는 불행한 일이었다며 선수를 쳤다. 그러나 갈루치는 할 말은 했다. 김 대통령의 그와 같은 인터뷰는 클린턴 대통령과 그를 대신한 협상자에 대한 불신을 공개적으로 표명한 것으로 도저히 수락할 수 없다고 했다. 한 장관이 전화로 요청한 것에 대해서 워싱턴에 보고는 하겠지만, 그날 오후 강석주와 열릴 회담에서 어떤 말을 할지에 대해서는 미리 말해줄 수 없다고 했다. (...)
강석주는 김 대통령의 10월 8일자 인터뷰를 자신의 입장에서 이용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예의 “트로이의 목마”론을 다시 제기하면서 북한의 외교부장도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 남한이 제네바 회담의 결렬을 획책하고 있다고 했다고 전했다. 그 의미는 분명했다. 북한은 남한이 떨어져 나가기 전에 경수로 공급과 특별사찰 문제를 마무리 짓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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