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10월의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에 대한 남한 정부의 불만은 북미관계의 개선이 남북관계의 진전과 관계없이 이뤄진다는 데 있었다. 1993년 6월 고위급 북미대화가 시작된 이래 김영삼 정부는 북미 간의 어떤 합의에도 남북대화 진전을 조건으로 연계시키도록 미국 측에 계속 요구했다. 스스로는 북한과의 관계개선에 애쓰지 않으면서 이런 요구를 한다는 것은 북미관계 발전을 가로막는 데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북미회담의 미국 대표단에게 곱게 보일 수 없었다.
미국 측은 합의문에 남북대화에 관한 언급을 꼭 넣도록 고집할 것인가의 여부를 두고 의견이 엇갈려 있었다. 갈루치를 비롯해 대부분의 협상단원들은 이 조항을 꼭 넣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들은 김영삼 대통령이 협상 막판에 와서 제멋대로 끼어들어 훼방을 놓는다고 진저리를 쳤다. 남북대화 같은 중요한 문제를 놓고 갈팡질팡한 김 대통령을 비난하지 않을 수 없다. 또 미국의 정책결정에 대한 자신의 분노를 <뉴욕타임스> 같은 미국 언론에 털어놓은 것 자체가 그의 판단력이 수준 이하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퀴노네스 <한반도 운명> 333쪽)
1994년 6월 카터의 북한 방문 이후 클린턴 정부는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위한 대화를 꾸준히 진행시켰다. 그런데 이 정책은 국민의 지지를 모으기 어려웠다. 북한을 발톱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던 공화당의 오만한 정책을 미 국민의 대다수는 더 좋아했다. 1992년 1월 뉴욕회담에서 북한의 대화 요청을 여지없이 거부하던 그 당당한 자세를 왜 누그러트려야 하는지 이해하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미국 국민 중에 소수였다.
그런데 한국 대통령이 마무리 단계에 와 있는 북-미 합의에 대한 불만을 <뉴욕타임스>에 털어놓는다는 것은 클린턴 정부의 발목을 잡는 정도가 아니라 등에 칼을 꽂는 짓이었다. 미국 독자들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전쟁을 피하기 위해 협상을 한다는 것인데, 전쟁이 나면 미국보다 더 큰 피해를 입을 나라가 한국 아닌가. 그런데 한국 대통령이 필요가 없다는 협상에 미국 정부가 매달릴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인가?
독기 어린 김영삼의 <뉴욕타임스> 회견기사는 미국 여론에 독을 뿌렸다. 이 독이 제네바 기본합의의 실행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나중의 일이지만, 당장의 협상 진전에는 도움이 된 면도 있었다. 무엇보다, 김영삼은 더 이상 미국의 발목을 잡지 못하게 되었다. 기사가 나온 당일로 미국 국무장관이 한국 외무장관에게, 미국 안보보좌관이 한국 외교안보보좌관에게 항의 전화를 거는 등 전방위 공세로 나오자 김영삼은 며칠 만에 태도를 바꿨다.
다음날[10월 13일] 아침 김 대통령은 마침내 마음을 바꿨다. 한[승수] 장관의 표현을 빌면 대통령은 “국가지도자가 될 준비가 되었고” 그에 따라 제네바 합의를 지지할 것이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클린턴 대통령이 김 대통령에게 직접 전화를 해야만 정책변화를 정당화할 수 있다고 했다. (위트-폰먼-갈루치 <북핵위기의 전말> 385쪽)
그래서 클린턴이 전화를 했고, 김영삼 정부는 이홍구 통일부총리의 발표 형식으로 임박한 제네바합의에 대한 지지를 공식적으로 밝혔다. 그러나 믿을 수 없는 한국 정부 때문에 미국은 협상의 마무리를 서둘러야 했고, 그로 인해 실행과정의 어려움을 더 많이 남겼다.
10월 14일 저녁 미국협상단은 워싱턴에 조만간 협상을 마무리해야 한다고 알려왔다. 이제 워싱턴에서 언제 어떤 형식으로 마감할 지를 결정해야 했다.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첫째는 한국의 한[승주] 장관이 요청한 대로 바로 합의를 마무리 짓는 방법이었다. 그럼으로써 재협상의 위험을 줄이는 장점이 있었다. 문제는 의회와 상의할 여유가 없다는 점이었다. 둘째는 일단 잠정합의서에 서명을 하고 본국으로 돌아가 협의를 한 다음 제네바로 돌아와 최종합의서에 서명하는 방법이었다. 보다 합당한 방법이었지만 서울이나 평양에서 합의를 깨고 재협상을 요구할 가능성이 있었다. 결국 첫 번째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가장 큰 이유는 서울의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결과적으로 현명한 방법이 아니었다. 한 달 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다수를 차지한 의회는 행정부에 맹공을 가했다. 가장 큰 이유는 사전 협의 없이 결과만 의회에 들이밀었다는 것이었다. (같은 책 387-388쪽)
합의문 서명은 10월 21일에 이뤄졌지만, 합의 내용은 나흘 전인 17일에 완성되었다. 완성을 앞둔 마지막 난관도 남북관계 문제였다. 10월 15~17일 사흘간의 협상과정을 <북핵위기의 전말> 388-396쪽에 소상하게 기록한 것은 저자들이 너무나 애를 먹은 기억 때문일 것이다. 합의문의 이 대목이 “애매하고 엉성한 문장”으로 되어 있는 것만 보더라도 문제의 성격을 알아볼 수 있다.
"The DPRK will engage in North-South dialogue, as this Agreed Framework will help create an atmosphere that promotes such dialogue."
이런 글을 잘 썼다고 하는 영작문 강사는 없을 것이다. 접속사 "as"에 문제의 초점이 있다. ‘이유’를 뜻하는 것인가, ‘병행’을 뜻하는 것인가? 북한은 ‘이유’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 합의가 먼저 효력을 발휘한 뒤에 남북대화가 따라올 것으로 해석하면서 이 표현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반면 미국은 ‘병행’으로 생각해서, 기본합의와 남북대화가 함께 진행될 것이라고 했으니 남한의 요구를 충족시켰다고 우긴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제네바 기본합의는 겨우겨우 만들어졌다. 북한은 NPT 규정보다 엄격한 기준의 사찰에 응하면서 일부 핵활동을 포기한다는 약속을 하고, 미국은 그 대신 외교관계 수립을 목표로 제재를 완화할 것, 핵위협을 하지 않을 것, 그리고 북한의 경수로 도입을 도와줄 것을 약속한 것이다. 클린턴 행정부는 의회 동의를 얻는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2000년 물러날 때까지 이 합의를 지키려고 애쓰는 자세를 유지했다.
1994년 12월 17일 휴전선을 넘어간 미군 헬리콥터 한 대가 격추되어 조종사 한 명이 죽고 한 명이 생포되는 소규모 위기가 발생했지만 12월 31일까지 해결되어 문제가 확대되지 않았다. 미국과의 관계개선에 대한 북한 측의 의지도 확인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김영삼은 버르장머리를 고치지 않았다. 다음으로 걸고넘어진 것은 경수로의 ‘한국형’ 표시 문제였다.
미국은 경수로 비용의 70%를 남한이, 20%를 일본이 내도록 협상을 해놓았는데, 북한이 남한의 도움을 직접 받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컨소시엄 형태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를 만들었는데, 명색은 국제기구지만 한-미-일 3국 외에 형식적으로라도 참여한 것은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5백만 달러), 뉴질랜드(30만 달러)뿐이었다. 1995년 3월 9일 KEDO가 발족하고, KEDO와 북한 사이의 경수로 공급계약 협상을 위해 제5차 북미회담이 5월 20일부터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렸다. 이때 공급될 경수로를 ‘한국형’으로 표시할 것을 남한 정부가 강력하게 요구하고 나섰다.
당시 김영삼 정부는 제네바 기본합의를 둘러싸고 많은 국민의 불신을 사고 있었다. 물론 북한 형편이 풀리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고 그 반대를 바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느 쪽이 보기에도 김영삼 정부의 태도에는 일관성이 없었다. 미국이 너무 많은 양보를 한다고 간헐적으로 핏대를 올리다가는 그 결과를 결국은 그대로 받아들이고, 종내 수십억 달러의 비용까지 짊어지는 석연치 않은 모습에 이르렀다. 반공주의자는 말할 것 없고, 대북 유화론자가 보기에도 그만한 비용을 투입하면서 뚜렷이 추구하는 정책목표가 없었다.
김영삼은 경수로에 ‘한국형’이란 이름을 붙임으로써 ‘체제 승리’의 기쁨이라도 국민에게 선물하고 싶었던 것일까? 99% 미국 기술에 1% 덧붙인 것을 ‘한국형’으로 불러야 한다니, 에디슨이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땀으로 이뤄진다”고 한 말을 잘못 해석한 걸까? 아니면 아Q의 ‘정신적 승리’가 부러웠던 것일까?
<북핵위기의 전말> 443-444쪽에는 쿠알라룸푸르 회담에 참석한 한 미국 관리의 말이 소개되어 있다. 좌절감과 분노, 그리고 경멸감이 느껴진다.
“우리는 단어를 둘러싼 제로섬게임의 포로가 돼있었다. 그 게임에서 남과 북은 서로 상대가 체면을 살릴 여지를 남겨두려고 하지 않았다. 단어가 담고 있는 내용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단어가 의미하는 상대방에 대한 모욕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타헙의 여지는 전혀 없었다. 한 쪽이 수락할 수 있는 용어가 있다면 이는 곧 충분히 모욕적이지 않다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이 게임에서 승리란 상대방을 화나게 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었다.”
경수로의 ‘한국형’ 표시에는 미국 협상단원들도 전혀 공감하지 않은 것 같다. 결국 KEDO와 북한 간의 계약에는 그런 표시를 하지 않고 KEDO와 남한 사이에서만 그 표시를 쓰기로 했다. 한국 측에게 대단히 불만스러운 결정이었다.
그 다음 일주일은 한국인들을 설득하느라고 보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미국 측이 북한 측으로부터 얻어낸 최선의 용어는 KEDO가 “미국을 원산지로 하는 디자인 중 신형”을 선택한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한국의 요구에 한참 못 미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 힘든 회담 중 잠시 취한 휴식시간에 한국의 한 외교관이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을 말로 표현했다: 북한이 받아들일 수 있는 표현이라면 한국은 받아들일 수 없다. 결국 타헙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은 타협만이 아니었다. 그처럼 시시한 말장난 때문에 전쟁을 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 의미는 명백했다. 미국은 내용이 아닌 형식에 구제불능할 정도로 집착하고 있는 한국정부의 허락에 더 이상 연연하지 말고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선에서 타결을 봐야 했다. 6월 7일 미국의 제안에 따라 북한은 이중구조의 합의안에 동의했다. 즉 KEDO와 북한은 한국이라는 내용이 언급되지 않은 경수로 공급협정을 체결한다; KEDO는 별도로 한국을 경수로의 제공자로 선정했다고 발표한다. (같은 책 444쪽)
이 결정이 내려진 이튿날 클린턴이 김영삼을 달래려고 전화했을 때 김영삼이 꽤나 성질을 부린 모양이다. 클린턴의 통화를 도와주던 대니얼 폰먼이 나중에 김영삼의 통역이 번역한 내용과 자신이 들은 내용을 대조했을 때 꽤 많은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통화가 끝난 후 폰먼은 김 대통령의 통역이 전한 영어를 중심으로 자신의 메모와 클린턴 대통령의 통역이 적은 메모를 비교해봤다. 한국 측의 통역이 김 대통령의 표현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 것이 드러났다. 특히 영어에 존댓말과 반말의 구별이 없는 것이 그에게 큰 도움이 됐다. 김 대통령이 클린턴 대통령을 부를 때 사용한 이인칭 대명사는 동등한 상대를 높여 부르는 말이 아니라 아랫사람을 부를 때 쓰는 용어였다. (같은 책 445쪽)
그 2인칭 대명사가 뭐였을까? “당신” 정도에 폰먼이 감명을 받았을 것 같지 않은데... 설마...? 폰먼 만나면 꼭 물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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