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국회의사당의 ‘조각상의 홀(Statuary Hall)’은 1857년까지 하원 본회의장이었다. 새 회의장을 지어 옮긴 뒤 이 홀에 ‘기억할 만한 미국인’의 조각상을 모시기로 하고 각 주에 두 명씩 추천을 의뢰했다. 받침대에 이렇게 새겨져 있는 한 여성의 동상이 그 중에 있다. “나는 전쟁에 표를 던질 수 없다.(I Cannot Vote For War.)”

 

동상의 주인공은 자네트 랭킨(1880-1973). 1916년에 미국 연방의회의 첫 여성 의원으로 몬태너에서 당선되었다. 미국에서 보통선거권이 여성까지 확대된 것은 4년 후의 일이었다. 여성참정권 도입 투표에 임하면서 랭킨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다른 일을 해내는 것이 없더라도,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기 위해 투표한 유일한 여성으로 기억되기 바란다.”

 

랭킨은 하원의원으로서 별로 할 수 없는 일이 없었다. 취임 직후의 세계대전 참전 표결에서 반대표를 던진 것이 치명적 악재였다. 당시 반대표를 던진 의원이 49명이었는데, 모두 비애국자로 몰려 정치적으로 매장되었다. 하물며 유일한 여성의원 랭킨은 의원활동조차 제대로 펼치지 못할 정도로 철저한 배척을 당했다.

 

여권운동가들 중에는 랭킨이 하원의원 노릇을 제대로 못하게 된 결과를 놓고 그의 참전 반대가 여권운동에 찬물을 끼얹었다고 비판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랭킨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항변했다. “전쟁에 ‘싫어요.’ 말할 기회를 가진 첫 여성으로서 그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의무감을 느꼈다.”

 

1940년에 랭킨은 다시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유럽에서 세계대전이 또 벌어진 상황에서 미국인들이 참전 여부를 놓고 첨예한 논쟁을 벌이고 있을 때, 랭킨은 참전 반대를 공약으로 당선된 것이었다. 그런데 1년 후 진주만 폭격 뒤의 참전 표결에서 반대표를 던진 의원은 랭킨 하나뿐이었다. 만장일치를 위해 뜻을 바꿔달라고 가까운 동료들이 부탁할 때 랭킨은 이렇게 대답했다. “여성인 나는 전쟁터에 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그리로 보내고 싶지 않습니다.”

 

정치인으로서 랭킨은 다시 매장되고 말았으나 20여 년 후 반전운동의 아이콘이 되었다. 87세의 나이로 다시 의사당 앞에 선 것이 1968년 1월 15일의 일. ‘랭킨 부대’(Jeannette Rankin Brigade)를 자칭하는 5천 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하원 의장 존 매코맥에게 ‘평화 청원’을 제출하기 위해서였다.

 

 

몇 해 전부터 어린이참정권에 관한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언젠가 민주주의 발전이 그리로 나아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뿐, 당장 우리 사회의 급한 일로 여기지는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세월호 사태를 바라보며, 바로 그런 방향의 발전이 이 사회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보름 전 한 꼭지 글을 올렸다.

 

글을 올린 후 독자들 반응을 보니 너무나 엉뚱한 생각으로 많이 보이는 것 같다. 찬성해 주는 분들 중에도 처음에는 황당하게 들렸는데 곰곰 생각하니 일리 있는 얘기로 생각되더라는 분들이 있었다.

 

아무 데서도 시행되지 않고 있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백여 년 전 사람들 눈에 여성참정권은 어떻게 보였을까? 지금 우리 눈에 어린이참정권이 엉뚱하게 보이는 것처럼 엉뚱하게 보이지 않았을까? 여성참정권 도입 과정을 되짚어보며, 어린이참정권도 엉뚱한 것으로만 볼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정리해 본다.

 

여성참정권이 널리 확립된 것은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으면서였다. 1913년 노르웨이에서 주권국가 최초로 채택될 때까지 여성참정권은 식민지나 지방정부에서만 실현되고 있었다. 덴마크와 아이슬란드(1915), 네덜란드와 소련(1917),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와 스웨덴(1918), 독일과 룩셈부르크(1919), 그리고 미국(1920)이 그 뒤를 따랐다. 민주주의의 본산인 영국과 프랑스에는 1928년과 1944년에야 도입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여성참정권이 세계적으로 민주주의제도의 표준이 되었고, 1952년에는 유엔총회에서 ‘여성참정권 협약’이 채택되기에 이른다.

 

‘만인평등’은 계몽주의시대 이래 근대민주주의 사상의 핵심 이념이었다. “세상의 절반”인 여성에 대한 근본적 차별이 프랑스대혁명 이후 1백 년 넘게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이 지금 사람의 눈에는 신기한 일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근대인의 머릿속은 계몽주의 사상이 지배하고 있었어도 현실이 그에 따라 돌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여성참정권만이 아니라 남성의 참정권도 현실적 필요에 따라 확장되어 온 것이었다. 1848년 이전에는 신분과 재산에 따라 참정권이 제한되는 것이 상식이었다.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이 독립혁명에 나서면서 “대표 없이 세금 없다!” 외친 것도, 세금을 내니까 참정권을 가져야겠다는 주장이었다.

 

1848년 2월혁명 후 프랑스에서 신분과 재산에 관계없이 모든 성인 남성에게 투표권을 주는 ‘보통선거’ 원리가 세워졌다. 나폴레옹 몰락 후 왕정이 복구된 이래 참정권 범위를 줄이려는 왕 측의 노력과 이에 반대하는 시민 측의 저항이 이어져 온 결과 왕정이 무너지자 참정권을 대폭 늘린 것이었다. 혁명에 대한 왕당파와 보수파의 저항을 이겨내고 혁명의 추동력을 얻기 위해 평민층을 정치에 끌어들인 것이다. 무엇보다, 대혁명 이래 평민층에서 징집한 군대의 지지를 얻기 위해 참정권 확장이 필요했다.

 

남성에게 의지하지 않고 독립생활을 하는 여성의 수가 극히 적던 당시 상황에서는 보통선거의 원리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성의 의사는 남편의 투표권을 통해 표출될 만큼 표출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산업화와 도시화의 진행에 따라 여성의 권익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자라나고 이에 따라 ‘여성참정권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까지 여성참정권 운동에 대한 가장 큰 반대 이유는 전통적 가정질서에 대한 위협에 있었다. 아내가 남편과 별도의 투표권을 가진다는 사실 자체가 종래의 바람직한 부부관계에 손상을 가져오는 것으로 흔히 인식되었다. 여권 운동가들은 공산주의자와 함께 파괴적 존재로 미움을 받았을 뿐 아니라 못 생기고 성질 나쁜 부적응자로 경멸까지 받는 일이 많았다.

 

 

1890년대에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등 식민지에서 여성참정권이 먼저 채택되기 시작한 것도 기존 사회질서의 저항이 비교적 약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미국에서도 여성참정권이 지방정부 차원에서나마 처음 채택된 곳이 와이오밍(1869), 유타(1870) 등 준주(territory, 아직 주로 승격하지 못한 새 영토의 행정단위)에서였다. 유럽에서 여성참정권을 처음 도입한 곳도 가장 변방의 핀란드(1907)였다. 당시 핀란드는 주권국가가 아니라 러시아제국 예하의 대공국이었다.

 

식민지나 개척지 사회는 본국 사회와 다른 조건 위에 놓여 있었다. 본국의 제도와 관습을 가져왔지만, 현지 사정에 맞지 않는 점들이 있었다. 여성의 활동도 본국에서처럼 가정 내에 국한되지 않고 생산이나 사회활동에 나서는 일이 많았다. 읍장이나 보안관을 뽑는 데 여성의 의견까지 수렴하는 것이 본국에서와 달리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식민지와 개척지의 독특한 인구구조가 여성참정권 도입을 뒷받침해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식민지와 개척지에는 유동인구가 많고, 그중에는 가정을 이루지 않은 남성이 많았다. 투표를 통해서든 술집 토론을 통해서든 이런 사람들은 안정을 취하기보다 투기 기회를 늘리는 쪽으로 사회가 운영되기 바라는 경향을 보였을 것이다. 여성참정권 도입은 이런 경향을 억제하고 정치적 선택이 안정 쪽으로 기울어지는 조건을 만들어주었을 것이다.

 

자네트 랭킨의 사례에서 보는 것처럼 여권운동은 평화운동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었다. 19세기를 지나는 동안 전쟁의 규모가 갈수록 커지고 민간인의 피해를 억제하기 힘들게 되는 데 따라 평화운동과 박애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교육받은 여성의 활동영역이 좁은 상황에서 이런 운동이 노동운동과 함께 여성의 대표적 활동무대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여성참정권 보급의 결정적 계기가 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장기간 전면전을 수행하면서 전쟁 노력에 여성의 적극적 참여가 필요하게 된 점은 많이 지적되어 왔다. 또 한편으로, 전쟁의 피해를 국민이 감수하도록 하기 위해 평화운동의 발판이던 여권운동을 수용함으로써 전쟁을 억제하려는 정부의 의지를 보일 필요가 있었다.

 

근대민주주의의 발전과 확산에는 사회경제적 조건의 변화에 따른 측면이 있다. 의회제도 발전의 초기에는 지주귀족과 신흥부르주아지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것이 초기 산업사회의 큰 과제였기 때문에 신분과 재산으로 투표권이 제한되었다. 19세기에는 국민국가 발전에 따라 평민층까지 투표권이 확대되었다. 그리고 20세기로 넘어오면서는 여성의 역할 확대와 함께 끝없는 전쟁을 몰고 오는 제국주의 풍조 억제를 위해 여성의 정치 참여가 필요하게 되었다. 20세기를 지나는 동안 여성의 정치적 역할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확대되었다.

 

여성참정권 확립에 이르는 참정권 확장은 한편으로 ‘만인평등’의 이념에 접근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경제적 조건의 변화에 부응하는 점진적인 움직임이었다. 이제 21세기에 들어와 ‘노령화’가 중요한 사회경제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고, 정치에 있어서도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고 있다. 지금까지 ‘만인평등’의 테두리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던 ‘어린이’의 정치적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 노령화에 대한 효과적 대응책이 아닐까. 여성참정권이 20세기 중 문명의 위기를 누그러트리는 효과를 가져온 것처럼.

 

 

어린이참정권을 도저히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이들이 가장 중시하는 문제가 ‘권리의 근거’다. 국가라는 정치공동체의 성립과 운영에 공헌하지 않는 사람은 국민으로서 참정권을 누릴 근거가 없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다. 어른들은 경제활동을 통해 국가에 공헌함으로써 권리의 근거를 확보하지만 아직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미성년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바로 이 논리가 19세기까지 평민층에게 참정권을 부여하지 않던 근거였다. 프랑스에서는 1848년 이후 신분과 재산의 제한이 철폐되었지만 다른 대부분 국가에서는 세기 말까지 제한이 계속되었다.

 

보통선거의 이념은 모든 인간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국가에 대한 공헌 여부를 따지지 않는다. 이것은 ‘국가’의 새로운 개념을 반영한 것이다. 종래의 국가 개념은 구성원들이 힘을 합쳐 자발적으로 만드는 공동체였다. 힘을 내놓는 사람들이 구성원의 자격을 가지고, 직접 힘을 내놓지 못하는 주변부 사람들(여성, 어린이, 노예 등)은 주체적 입장에 서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19세기를 지나는 동안 여러 모로 생각이 바뀌었기 때문에 보통선거 이념이 나오게 된 것이다. 한편으로는 사회과학의 발달로 사회경제적 현상에 대한 인식이 심화된 결과, 세금을 내거나 군대에 복무하는 등 직접적 방법이 아니더라도 구성원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국가에 공헌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 한편으로는 국가권력의 강화에 따라 국가가 개인의 행복을 좌우하는 힘이 커진 만큼 개인의 의사가 국가 운영에 영향을 끼칠 수 있어야 한다는 복지국가의 개념이 싹텄다.

 

세월호 사태를 겪으면서 어린이참정권 문제를 더욱 절실하게 생각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국가 운영방법은 어린이까지 포함한 모든 국민에게 영향을 끼친다. 그런데 당장의 경기 부양만을 위한 ‘규제 완화’가 노년층의 집중적 지지를 받아 정책으로 채택되고 지금의 어린이들이 수십 년 후에 악화된 환경과 고갈된 자원, 그리고 빚더미에 올라앉은 국가를 물려받게 해도 되는 것인가? 어린이들이 가장 무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는 재난이 빈발하는 세상을 만들어도 되는 것인가?

 

복지정책의 핵심 요소인 ‘기본소득’에 대한 김종철의 관점은 참정권 문제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 기본소득을 단지 새로운 형태의 복지 프로그램으로 간주할 게 아니라 사회구성원 전원이 당연히 가져야 할 ‘권리’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즉 기본소득을 ‘시민배당금’으로 정의하자는 거죠. ‘배당금’이라고 하면, 수급자를 선별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있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주식회사의 주주들에게 배당금을 줄 때 누구는 주고, 누구는 배제한다는 식의 분배는 있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배당금은 모든 주주의 권리이기 때문에 지급하는 것이니까요. 기본소득도 한 사회, 한 공동체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을 ‘주주’로 간주하는 토대 위에서 시행하는 것도 가능하고, 그게 논리적으로 더 타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 그렇게 시행하고 있는 곳이 있습니다. 알래스카에서 지난 30년 동안 해온 방식이 바로 그렇습니다. 알래스카에는 ‘알래스카영구기금’이라는 게 있는데, 그 기금을 이용해서 매년 알래스카 주민 전체에게 일정한 액수의 현금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이 영구기금은 대부분 알래스카에 있는 유전에서 나오는 석유생산 및 판매에 의한 수입금입니다. (...)

 

그런데 알래스카의 경우에 가장 중요한 점은 석유라는 자원을 알래스카 주민 전체의 공유자원으로 인식하고, 거기서 나오는 수입을 구성원 전원에게 배당금으로 고르게 배분해야 한다는 발상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알래스카가 30년이 넘게 꾸준히 이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것은 석유 덕분이라고 생각하기 쉽죠. 물론 그 점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석유자원이 있는 지역, 국가라고 해서 다 알래스카처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압니다. (“근대문명의 반생명성, 민낯을 드러내다” <말과 활> 2014. 5-6, 52-53쪽)

 

19세기에는 국가를 위해 국민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국민을 위해 국가가 존재한다고 대다수 사람들이 믿고 있다. 그렇다면 미성년 어린이들의 입장도 정책 결정에 반영되어야 한다.

 

 

또 하나 어린이참정권에 관해 많이 걱정하는 문제는 미성년자 부모의 대리투표가 ‘직접투표’와 ‘비밀투표’ 원칙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나는 앞서의 글에서도 참정권의 성립 여부가 근본이고 그 행사방법에 관한 원칙은 지엽일 뿐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나아가 생각하면 직접투표와 비밀투표는 주권자가 주권행사에 타인의 압력을 받지 않도록 해주는 방어 장치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 아닌 모든 사람을 ‘타인’으로 규정해서 일체의 영향을 받지 않게 하는 것이 꼭 바람직한 일일까? 미성년자의 투표에 대리투표를 행하는 보호자(부모)의 의견이 본인 의견 대신 나타나는 것이 꼭 잘못된 일일까?

 

부모 중에 자녀 본인에게 해로운 선택인 줄 알면서 자기가 원하는 쪽으로 표를 던지는 사람이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부모는 자녀를 위해 좋은 것이 어느 쪽인지 성심껏 판단해서 그에 따라 투표를 할 것이다. 지금도 학교 선택을 부모가 해준다. 자녀에게 해로운 학교를 선택할 조그만 위험 때문에 부모의 학교 선택을 금지할 수 없지 않은가.

 

나는 근년 과도한 개인주의를 비롯한 현대세계의 많은 문제들이 원자론적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물질이 독립적인 원자로 구성된 것처럼 사회도 독립적 개인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믿음이다. 개인의 소외, 과도한 경쟁, 공동체에 대한 무책임 등 많은 문제들이 이 믿음에서 나오는 것으로 생각된다.

 

물리학계에서 원자론은 20세기로 접어들 때 폐기되었다. 물질의 세계가 그리 쉽게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 후 물리학의 발전이 보여주었다. 그런데도 원자론에 기대어 인간사회를 손쉽게 파악할 수 있다고 보는 오만한 개인주의 관점은 21세기에 들어선 지금까지도 맹위를 떨치고 있다. 이를 극복할 필요의 인식에서 공동체, 연대, 유대감, 소통 등의 말이 여러 방면에서 나오고 있다.

 

직접투표와 비밀투표 원칙의 경직성도 개인주의 기준 때문이다. 주권 행사에서 권력자의 개입을 막는 것까지는 좋지만, 가족 사이에까지 꼭 적용될 필요는 없다. 부모가 아이와 함께 앉아 네 장래를 위해 어디에 투표하는 것이 좋을까 의논하는 것이 직접-비밀투표 원칙에 어긋난다면, 나는 그런 원칙을 내다버리고 가족공동체의 가치를 지킬 것이다.

 

백 년 전 여성참정권이 확립되던 시절을 되돌아본다. 무한경쟁의 근대정신이 인간과 인간 사이를 극한으로 몰고 가서 전 인류를 전쟁의 위협에 몰아넣던 제국주의시대였다. 그 지나침을 반성하고 위기 완화를 위해 도입한 제도의 하나가 여성참정권이었다. 여성이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극단적 대결주의를 견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무한경쟁의 폐해가 인간과 인간 사이의 문제를 넘어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심각한 문제로 제기하고 있다. 근대민주주의가 발전을 시작한 이래 미래에 대한 걱정을 가장 많이 해야 할 상황이 되어 있다. 과학 발전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기술만능주의의 낙관을 더 이상 지킬 수 없게 된 이제, 정책결정의 구조에서 미래에 대한 고려가 더 많이 필요하다. 어린이참정권의 실현이 그 길이다.

 

여성이 “세상의 절반”이라고 하는데, “세상의 3분의 1”로 줄여서 보았으면 좋겠다. 남성이 또 하나 3분의 1, 그리고 어린이가 또 하나 3분의 1이라고. 남성만 내세우는 데 문제가 있어서 여성까지 나서게 된 것이 1백 년 전의 일인데, 아직까지 빠져 있던 나머지 3분의 1을 이제 꺼낼 때가 되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