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6일 이후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며 여러 가지 감정을 느끼고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그러나 입을 떼기 어려웠다. 두어 차례 글을 써보려고 시도했으나 쓰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우리 사회에 대한 너무나 큰 총체적 위협이 드러난 이 마당에 한 모퉁이에 관한 생각을 적는다는 것이 부질없는 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뭔가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다시 나 자신을 다그친다. 우리 사회가 어쩌다 이 꼴이 되었는지 살피는 일은 역사학도로서 꼭 할 일이고, 앞으로 꾸준히 해 나갈 것을 스스로 다짐한다. 그러나 갈피를 더 확실히 잡을 때까지는 참고 기다려야겠다. 우선은 이 사회가 잘못되었다고 평소 생각해 온 문제, 지금 상황에서 사람들이 심각하게 생각하기 바라는 문제 하나부터 내놓겠다.

 

2012년 11월 1일 이 자리에 “이참에 '아동 투표권'도 도입하자!” 글을 올린 일이 있다. “해방일기” 작업을 하던 중 떠오른 생각을 적은 것이다. 1947년 5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보통선거법’을 통과시킬 때 투표권을 만 25세 이상으로 규정한 대목에서였다.

 

1947년 당시 거의 모든 민주주의국가에서 선거연령 하한이 20세 또는 21세였다. 체코슬로바키아는 1946년부터 18세로 시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1947년 당시 입법의원을 장악하고 있던 한민당 등 극우세력은 시대에 역행하는 선거연령을 통해 젊은이들의 투표를 싫어하는 성향을 보여준 것이다.

 

‘보통선거’란 성별, 종족, 신분, 재산에 관계없이 ‘모든 국민’에게 공평한 참정권을 부여한다는 이념이다. 그런데 왜 ‘연령’이란 기준만은 국민의 참정권을 제한한단 말인가? 미성년자는 국민이 아니란 말인가?

 

19세기 중엽 ‘보통선거권’이 처음 거론될 때는 ‘연령’만이 아니라 ‘성별’의 기준도 무시되었다. 그 전에는 심지어 신분과 재산으로 투표권을 제한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기도 했다. 미국독립전쟁 때의 널리 알려진 구호 “대표 없이 세금 없다!”를 생각해 보라. 선거권을 납세 의무와 연계한 것이니, 세금 내지 않는 사람에게는 선거권도 없다는 뜻이다.

 

여성참정권이 처음 제도화된 것은 1893년 뉴질랜드에서였고, 유럽에 처음 도입된 것은 1907년 핀란드에서였다. 영국과 함께 근대민주주의의 본산으로 여겨지는 프랑스에는 1944년에야 도입되었다. 여성참정권을 포함하는 보통선거권의 개념은 그 무렵에 확립되어 지금까지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보통선거권 개념이 어린이참정권까지 포함하게 될지는 앞으로의 숙제로 남아있다.

 

선거연령을 낮추는 움직임도 그 무렵부터 계속되어 왔다. 1960년대까지는 18세까지 하한을 낮춘 나라가 몇 되지 않았는데, 1970년 영국을 필두로 유럽국들이 바꾸기 시작해 1990년대까지는 18세 하한이 세계적 표준이 되었고 그 후에는 많은 지역에서 16세로 낮추려는 입법시도가 널리 일어나고 있다.

 

선거연령 하향운동의 대표적 논거는 청소년층의 법적 책임 증가라는 사회적 변화다. 예컨대 미국의 선거연령 조정 논의는 베트남전으로 촉발되었다. 18세 이상을 징집 대상으로 했는데, 선거권은커녕 음주권조차 없는(대부분 주에서 20세 미만 미성년자의 술집 출입을 금지하고 있었다.) 사람들을 목숨을 건 전쟁터로 끌고 가는 것이 법적-정치적으로 타당한 일이냐는 문제 제기가 널리 일어났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제도적 차원이 아니라 원리적 차원에서 미성년자의 참정권을 생각할 필요가 근년 제기되고 있다. 미성년자에게도 선거권을 주자는 것은 인구학자 폴 데미니가 1986년에 발표한 의견인데 여기에 '데미니 투표권'이란 이름을 붙여 제창하는 운동이 2000년대 들어 확산되고 있다. 사회의 노령화에 따른 선거의 노령화 때문에 이 원리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것으로 보인다.

 

선거의 노령화는 정책 선택에서 기성세대가 혜택을 누리고 사회의 빚을 늘리는 방향으로 압력을 일으킨다. 젊은 층의 선거권에 더 비중이 커야 선출되는 위정자들이 사회의 장래를 더 많이 생각하게 될 것이다. 어린이투표권이 실현될 경우 정치에서 환경에 대한 배려가 늘어나고 청소년층의 참여 의식이 자라날 것이라고 지지자들은 주장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참정권은 인권의 핵심 요소다. 어린이들의 참정권이 배제되어 있는 상황에서 기성세대가 당장의 혜택을 제시하는 후보들을 선택해서 자원을 낭비하고 환경을 망치고 국가와 사회의 빚을 늘리게 하는 것은 정의로운 길도 아니고 사회의 발전을 바라보는 길도 아니다. 세월호에서 보았듯이, 잘못된 정치의 피해는 미성년자에게 면제되는 것이 아니다. “대표 없이 세금 없다!”가 아니라 “대표 없이 피해 없다!”를 생각해야 한다.

 

의무교육이 끝나는 만 16세 이상에게 투표권을 주는 것은 세계적 변화의 추세에도 맞는 길이다. 갓난아이를 포함해 정치적 판단을 요구하거나 기대하기 어려운 연령층 어린이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어린이들의 법적 책임을 대신해주는 보호자(부모)가 대신 행사하게 하면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절반씩 대신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2012년 11월 쓴 글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우리 사회의 경우 아동 투표권 도입은 미성년자를 자녀로 둔 30대와 40대의 선거권을 대폭 늘려주는 결과가 될 것이니, 그 연령층에게 인기 없는 정당의 '결사반대'가 예상된다. 그러나 아동 투표권이 실행되는 광경은 상상만 해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갓난아이의 부모들이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그 아이의 장래를 위한 선택을 생각하는 모습. 초등학생의 부모들이 아이 자신의 선택을 분명히 해주기 위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이런 모습들이 들어갈 때 민주주의의 모습이 더 완벽해질 것이다.

 

젊은 층에게 인기 없는 정당의 ‘결사반대’를 뚫고 아동투표권이 도입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그때는 생각했다. 그래서 스스로 “몰상식한 제안”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세월호 사태를 겪은 이제, 과연 어떤 상식을 상식이라고 인정할 것인지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기존의 상식’을 버리고 ‘미래의 상식’을 생각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또 하나 참정권과 관련해 생각할 문제가 있다. ‘투표의 의무’다. 권리 없는 의무가 있을 수 없고 의무 없는 권리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기존의 상식으로도 인정되는 원리 아닌가. 참정권을 놓고 권리 측면만을 주장하면서 의무 측면을 무시하는 것이 한국만이 아니라 어디서나 정치를 타락시키는 중요한 원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위키피디아> “compulsory voting”에 따르면 2013년 8월 현재 의무투표제의 원칙을 채택한 나라는 22개국에 달하고 그중 10개국이 실제로 시행중이라고 한다. 1989년 이래 시행하고 있는 브라질 경우를 보면 16세 이상의 모든 국민이 투표권을 가지는데, 그중 18세에서 70세 사이의 문맹자를 제외한 모든 국민이 의무투표제에 해당된다. 해당자가 사전에 사유서를 제출하지 않고 투표에 불참하면 벌금을 물리게 되어 있다.

 

여론조사와 통계가 발달해 있는 오늘날 투표율의 높고 낮음이 어느 정치세력에게 유리하고 불리한지 쉽게 판별된다. 투표율이 높기를 바라는 세력이 투표율 제고를 위해 애쓰는 것은 그렇다 치고, 투표율 낮기를 바라는 세력이 투표율 하락을 위해 애쓰는 것은 민주주의에 해로운 일이다. 하물며 ‘정치혐오증’에 부채질하는 것을 자파에 유리한 정치노선으로 여기는 세력까지 활개를 쳐서야 되겠는가. 권리와 의무가 함께 한다는 원리를 제도에 도입함으로써 자해적 정치 행태가 근본적으로 척결되기 바란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