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한민국의 국가 성격은 어떻게 빚어진 것인가?

 

당 태종이 언젠가 명신 위징에게 소원을 말해보라 하니 “신(臣)으로 하여금 충신(忠臣)이 아닌 양신(良臣)이 되도록 해 주소서.” 하고 대답했다. 태종이 충신과 양신의 차이를 물으니 요순(堯舜)의 태평성대를 보좌한 것이 양신이고 걸주(桀紂)의 폭정을 간하다가 죽임당한 것이 충신이라 답했다.

 

난세가 영웅을 낳는다고 했듯, 사회가 혼란에 빠질 때 지도자의 역할이 부각된다. 평온할 때는 훌륭한 지도자가 있어도 큰 역할을 맡을 여지가 없다. 그런데 평온한 줄 알았던 이 사회가 얼마나 불안한 곳인지, 세월호 참사가 많은 사람들을 일깨워주었다. 그리고 제도상 국가의 최고지도자인 대통령의 눈물에도 마음을 놓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훌륭한 리더십의 필요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큰 문제 하나가 대한민국의 국가 성격이다. 도저히 우연으로 볼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이 겹쳐져 나타나고 있다. 이 국가는 운영을 맡는 사람들이 성실하게 노력해도 위험과 불안을 어쩌지 못하는 그런 국가인가? 혹은, 국민의 위험과 불안에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이 운영을 맡을 수 있게 하는 그런 국가인가?

 

누가 봐도 리더십의 필요가 컸던 시기가 해방에서 정부 수립에 이르는 3년간의 해방공간이다. 일본 통제가 사라진 한반도에 어떤 정치체제가 자리 잡을지 결정되어 가는 시기였다. 결과적으로는 이승만이 이끄는 대한민국과 김일성이 이끄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들어서, 3년간의 전쟁으로도 서로 상대방을 무너트리지 못하자 각각 실질적인 국가로 자라났다.

 

한반도 주민에게 최악의 결과였다. 그 피해는 전쟁의 참상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수십 년에 걸친 대결상태가 양쪽 국가 성격에 큰 영향을 끼쳤고 그로부터 많은 피해가 일어났다. 대한민국의 국가 성격에는 대결상태로 인한 문제들이 많이 들어있다. 1987년 이후 이 문제들을 해소시키기 위한 노력이 꾸준히 작용해 왔지만 성과가 아직 피상적인 수준에 그치고 있다는 사실이 이번 봄에 확인되었다.

 

대한민국의 국가 성격을 점검하기 위해서는 분단체제의 성격을 살펴야 하고, 분단체제의 성격을 살피기 위해서는 그것을 낳은 해방공간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 공간에서 훌륭한 리더십이 제대로 작동했다면 분단체제와 같은 최악의 결과를 낳지 않았을 것 아닌가.

 

앞서의 강의에서 이승만과 김일성의 리더십에 대한 검토가 있었다. 대결 주체가 된 두 국가를 이끈 ‘제도적’ 지도자였기 때문에 당연히 검토가 필요한 인물들이다. 이승만의 대안으로 부각되었던 김구, 이승만을 이어 분단기간의 대부분을 채운 박정희도 그렇다.

 

그런데 권력자만을 리더십의 주체로 보는 것이 타당한 일일까? 위의 4인 중 김구만은 제도적 국가지도자 자리에 오르지 않은 인물이지만, 그 역시 ‘임시정부 주석’이란 신분 위에서 패권주의적 권력투쟁에 나선 사람이었다. 그런 권력투쟁과 관계없이, 민심을 이끌고 대변한다는 리더십의 본원적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민심을 등진 최악의 결과를 보게 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민심을 제대로 이끌려 한 리더십을 찾아봐야 하겠다.

 

 

2. 진정한 리더십은 민심을 키워내는 과정이다.

 

하버드대학의 심리학 교수 하워드 가드너는 <지도자의 정신>(Leading Minds, 하퍼-콜린스 펴냄)에서 리더십의 매체는 ‘메시지’가 아닌 ‘스토리’라고 주장했다. 고정된 형태의 메시지와 달리 지속성을 가진 스토리를 통해 집단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꾸준히 키워내는 과정을 통해서만 진정한 리더십이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속적 과정을 통해 성립하는 스토리라면 추종집단의 반응이 그 위에 투영되게 마련이다. 그래서 가드너는 리더십의 성격이 추종집단의 성격에 의해 규정되는 면을 중시한다. 예컨대 하나의 국가나 민족처럼 의식수준에 제한이 없는 집단의 반응을 얻기 위해서는 어린아이도 알아들을 수 있는 명쾌하고 강렬한 이야기라야 한다. 일단 자기밖에 모르는 유아기 수준에서 시작해, 피아-선악의 대립구도를 세우는 소년기, 세상의 다양성에 눈뜨는 사춘기를 거쳐 인간적 종합에 도달하는 성년기에 이르기까지 이야기의 진행을 통해 추종집단의 의식수준을 고양시키는 것이 진정한 리더십이라고 한다.

 

마하트마 간디의 리더십을 보면 그 출발점은 영국인의 횡포에 대한 저항의식에 호소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자치권 확대에만 몰두하는 기존 민족주의자들과 달리 그는 인도인 내의 차별철폐를 더 앞세웠기 때문에 정치적 매장의 위험을 겪기도 했다. 그 위험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인민의 각성 덕분이었다. 비폭력 원칙도 비슷한 곡절을 겪었다. 간디의 리더십은 잠재해 있던 민심을 깨워냄으로써 인도인의 정치의식을 고양시키는 데 그 가치가 있었다.

 

가드너의 책에 다뤄지지는 않았지만, 호치민의 리더십에도 간디와 비슷한 패턴이 보인다. 프랑스와의 전쟁을 앞두고 전쟁을 어떻게든 피하려는 그의 노력은 거의 굴욕적인 수준이었고, 그 때문에 정치적 파멸의 위험을 겪기까지 했다. 그 후 20여 년에 걸친 기나긴 전쟁을 치르면서도 민심이 허물어지지 않은 데는 그토록 전쟁을 피하려 했던 지도자에 대한 신뢰가 한 몫 했을 것이다.

 

해방 전의 일본인 통치자들은 조선사회에서 일체의 리더십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해방이 닥쳤을 때 인민은 기쁨 속에서도 불확실한 미래에 불안감을 느끼며 지도자를 찾았다. 그 자리에 설 기회를 가진 것은 주로 해외에서 돌아온 독립운동가였고, 국내 인물로는 탄압 아래 지하활동을 하거나 감옥살이를 하던 좌익 인사들과 지조를 지켜온 몇몇 학자와 언론인 정도였다.

 

이런 잠재적 지도자들이 해방공간 안에서 인민의 욕구를 어떻게 키워내고 대변했는지 살펴보면서 지도자로서 그들의 역할을 검토해 본다.

 

 

3. 해방 당시 조선인의 염원은 민족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였다.

 

해방 당시 대다수 조선인이 바란 미래는 민족독립, 민주주의, 사회주의의 세 가지 방향이었다. 두 가지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인데,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설명이 좀 필요하겠다.

 

1946년 8월 13일자 <동아일보>에 군정청 여론국에서 8,453명을 대상으로 30개 항목의 설문으로 행한 조사 결과가 소개되었다. 그중 “귀하의 찬성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 하는 질문에 대하여 아래와 같은 조사 결과가 나왔다.

 

(가) 자본주의 1,189인(14%)

(나) 사회주의 6,037인(70%)

(다) 공산주의 574인(7%)

(라) 모릅니다 653인(8%)

 

‘사회주의’를 선택한 70% 응답자가 생각한 ‘사회주의’가 어떤 것이었을까. 따져 물으면 똑똑한 대답을 내놓는 사람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이 여론조사를 근거로 당시 조선인이 사회주의를 염원했다고 하는 내 주장을 아전인수(我田引水)라고 비웃는 사회과학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현실정치에 권력으로 나타난 사회주의보다 인민의 소박한 염원 속의 사회주의가 사회주의의 진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정치의 사회주의는 사회과학자가 탁상에서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인민의 염원을 발판으로 일어서는 것인데, 그 모습이 달라졌다면 달라진 쪽 문제다. 현실이라는 거울에 굴곡이 있어서 굴절된 그림자가 나타난다면, 그 그림자의 모습에 따라 인민의 원래 염원을 재단할 수는 없다.

 

위 조사에서 70% 응답자가 선택한 사회주의는 분명한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소유권을 절대화하는 자본주의도 소유권을 배격하는 공산주의도 모두 승인하지 않고, 제한된 범위의 소유권을 존중하는 체제가 사회주의라 그들은 생각한 것이다.

 

당시 정치권에서도 이 염원을 훤히 알고 있었다. 중경임시정부를 이끌던 한독당은 물론, 해방 한 달 후에 창당한 한민당도 바로 이런 ‘사회주의’를 강령에서 내세웠다. 한민당은 ‘지주정당’이라 불릴 정도로 친일파를 포함한 기득권층 위주의 정당인데도, 인민의 명백한 염원을 거스를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강령을 내건 것이었다.

 

인민의 어떤 염원도 현실 속에서는 당장 백% 충족이 될 수 없다. 불만을 다독여주면서 시간을 두고 실현을 확대해 나가는 길을 찾아 인민을 이끌어가는 것이 지도자의 역할이다. 해방된 조선에서 인민의 염원 실현을 가로막는 현실의 벽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자원의 부족이고 또 하나는 외세의 개입이었다. 이 벽의 존재를 인식하도록 인민을 일깨우면서 극복해 갈 길을 찾아주는 것이 당시의 조선사회가 필요로 하는 리더십이었다.

 

 

4. ‘국내파’ 여운형과 안재홍은 ‘해외파’의 지도력을 지지했다.

 

여운형과 안재홍은 해방 당일 출범한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이끌고 나섰다. 건준은 총독부 당국의 질서유지 협력 요청에 응해 갑작스러운 해방에 따른 혼란을 막는 데 1차적 임무를 두고, 그 대신 ‘건국준비’ 작업에 총독부의 협조를 얻으려 했다. 일본 천황은 항복을 선언했지만 후속조치가 이뤄지지 않은 채 조선 통치의 주체로서 총독부의 권한과 책임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총독부는 건준의 협력을 얻어 일본인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싶었고 파괴의 최소화는 조선인 입장에서도 순탄한 건국준비를 위해 바람직한 일이었다.

 

여운형과 안재홍이 건준의 위원장과 부위원장으로 나서게 된 것은 민족주의자로서 인민의 존경을 받으면서 합리적 인물로서 총독부의 신뢰를 받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해방 당시 조선 국내에는 친일의 흠이 없으면서 지명도 높은 인물이 극히 적었다. 여운형, 안재홍 외에 송진우, 조만식 등 몇 명의 언론계 중진이 그 범위에 포함되었다. 그중 여운형과 안재홍은 일제 말기까지 옥고를 치르며 민족주의자로서 높은 명성을 지키고 있었다.

 

대조적인 인상을 가진 두 사람이었다. 여운형이 호걸이라면 안재홍은 샌님이었다. 여운형은 3-1운동 직후 도쿄에 초청받아 일본 요인들 앞에서 조선 독립이 일본을 위해서도 좋은 길이라고 당위성을 주장하는 연설로 명성을 떨쳤다. 한편 안재홍은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도 국학 연구에 매진해서 큰 성과를 남겼다. 여운형과 마주친 사람들은 그 호탕한 풍모에 매료되었는데, 해방 이튿날 휘문중학에서 안재홍의 연설을 들은 소년 송건호는 후에 “말할 수 없이 초라한, 어떻게 보면 걸인 같은 모습의 한 50대 중반의 신사가 해방된 민족의 앞날에 관하여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는 회고를 남겼다.(<역사에 민족의 길을 묻다>153쪽)

 

1886년 생으로 해방 당시 환갑을 눈앞에 두고 있던 여운형은 안재홍보다 다섯 살 연상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눈길을 끄는 점 하나가 안재홍의 글에서 여운형을 대하는 태도다. 연장자인 여운형을 몽양, 몽양, 지칭하며 깍듯한 경칭을 쓰지 않는 것이 안재홍의 근엄한 글에서는 이례적이다. 호탕하면서도 허술한 데가 있는 여운형의 인품이 안재홍에게는 못마땅하면서도 아까웠던 모양이다. 여운형의 별세 후에 쓴 “몽양 여운형의 추억”을 이런 말로 시작했다.

 

“나무라고 싶다가도 탐탁스러이 생각되고, 미운 듯하다가도 그리운 인물은 고 몽양 여운형 씨이다.”

 

건준으로 뭉쳤던 두 사람은 보름도 안 되어 안재홍의 사퇴로 갈라졌다. 그 2년 후 여운형이 저격당할 때까지 두 사람은 좌우로 갈라져 정당활동을 했으나 좌우합작위원회(합작위) 등 활동을 통해 중도노선에 협력했다. 좌우대립의 벽을 사이에 두고도 두 사람 사이의 협력이 원활했던 데는 피차의 인품에 대한 깊은 인식이 한 몫 한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의 정치적 태도에서 한 가지 공통점은 권력에 집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안재홍은 해외에서 귀국한 독립운동가의 지도력 확립에 공헌하는 데 매진했다. 해방 두 달 후 이승만이 귀국하자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에 앞장섰고, 이승만의 친일파에 대한 애매한 태도에 실망한 후에는 뒤이어 귀국한 김구의 후원에 정성을 다했다. 자신이 이끌던 국민당을 김구의 한독당에 합당시키기까지 했다가 김구가 과격한 반탁노선으로 미소공위를 반대하는 대목에 이르러서야 떨어져 나왔다.

 

좌익에서 큰 명망을 누리던 여운형은 안재홍보다 복잡한 곡절을 겪었다. 그는 좌익의 헤게모니에 집착하는 대신 좌우합작을 추구했고, 남북합작을 위해 김일성의 주도권을 인정했다. 1947년 7월 저격 당시 그가 이끌던 근로인민당의 당세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잠재적 지도력이 크기 때문에 극우파의 표적이 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국내파의 거물이라 할 수 있는 두 사람이 해외파의 지도력이나 주도권을 지지한 것도 외세의 개입이 불가피한 현실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다. 막을 힘이 모자라서 불가피한 것만이 아니라 자원 부족 문제 때문에 외세의 지원이 필요한 것이 현실이었다. 자본주의를 권하는 미국과 공산주의를 권하는 소련 중 누군가의 지원은 필요한데, 극단적 양자택일은 분단건국과 전쟁의 위험을 품고 있었다. 중도적 사회주의 노선으로의 남북합작이 민족의 비극을 피할 수 있는 길이었다. 조선과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던 오스트리아가 좌우합작 정부를 구성하고 10년의 신탁통치를 거쳐 온전한 독립의 길을 걸은 것이 참고할 만한 사례다.

 

 

5. 중간파는 인민이 원하는 ‘사회주의’를 제시했다.

 

대다수 국민이 원하던 ‘사회주의’의 핵심은 토지개혁이었다. 소유권을 존중하는 자본주의사회에서도 ‘토지의 공(公)개념’은 널리 인정된다. 제조되는 물품과 달리 공급에 한계가 있는 토지는 소유권의 대상으로서 상품으로 취급될 수 없다는 견해가 경제학계에서도 유력하다. 더구나 농업국인 조선의 현실에서 토지 이용은 생존권과 직결된 문제였다.

 

해방 당시 노인들이 기억하고 있던 조선시대 토지제도에도 공개념이 깃들어 있었다. 지주의 소유권 행사에 국가가 제약을 가했던 것이다. 소작권을 존중했기 때문에 소작인을 지주 마음대로 바꿀 수 없었고, 소작료도 요즘 표현으로 ‘갑(甲)질’을 멋대로 할 수 없었다. 조선 후기에 지주의 권력이 꽤 강화되었지만, 소작료 5할을 받으면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일본 식민통치는 지주의 소유권을 절대화해 주었고, 그 결과 5할 소작료도 관대한 편이 되었고, 심한 경우 8할까지 올라갔다. 농업의 ‘경영합리화’를 통해 일본으로의 쌀 반출을 늘리려는 목적으로 지주의 착취를 강화시켜준 것이다. 인구의 5분의 1인 4백만 명이 일본과 만주로 일자리와 개간할 땅을 찾아 떠난 것은 빈농과 소작농에 적대적인 농업정책 때문이었다. 식민통치 중에서도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끼친 정책이었다.

 

해방을 맞아 인민이 무엇보다 원한 것은 당연히 식민통치의 질곡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이민족 지배, 군국주의 폭압통치와 함께 가장 중요한 극복 대상이 농민을 못 살게 굴고 농촌을 파괴한 식민지 농업정책이었다. 그 방법은 토지를 국유화해서 실수요자인 농민에게 사용권을 나눠주는 혁명적인 길에서부터 농민에게 농지를 나눠주고 그 대금을 분납후불로 받는 온건한 길까지 여러 가지가 가능했다.

 

소련군이 진주한 이북에서는 토지개혁이 바로 추진되어 해방 이듬해 봄 농사철이 시작되기 전에 시행되었다.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혁명적 공산주의 방식이었다. 한편 이남에서는 군정청에 큰 영향력을 가진 한민당이 ‘유상매상 유상분배’의 자본주의 방식을 고집하며 토지개혁을 늦췄다. 공산당-남로당은 이북과 같은 혁명적 방식을 주장하며 이와 대치했다.

 

여운형과 안재홍, 그리고 김규식이 주도한 합작위가 이 교착상태를 뚫고 중도적 토지개혁안을 내놓았다. 이 개혁안의 ‘체감매상 무상분배’ 원리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절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무상분배 원리는 공산주의와 공유하는 것이었고, 매상에 있어서 소지주에게는 시가를 지불하고 대지주의 규모가 커질수록 지불액을 줄이는 체감매상 원리는 소유권을 제한적으로 존중하는 사회주의 원리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공산주의 토지개혁안의 극단성을 비판하고 있던 한민당은 인민의 절대다수를 만족시키는 중도파 개혁안에 반대할 명분을 찾을 수 없었다. 궁색한 핑계로 이 개혁안을 거부함으로써 ‘지주당’의 본색을 드러내자 김병로, 원세훈, 김약수 등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대거 탈당, 창당 1년 만에 반쪽이 나고 말았다. 폭넓은 지지를 받은 이 개혁안을 미군정이 묵살하지 않았다면 분단건국의 명분이 남북 양쪽에서 크게 줄어들었을 것이다.

 

 

6. 중간파의 당면 과제는 분단건국 저지였다.

 

중도노선의 건전성을 확인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정책이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 협조였다. 1945년 12월의 모스크바 연합국 외상회담에서 조선의 신탁통치 경유 독립 방침을 결정하고 그 실행을 위해 미소공위를 설치했는데, 소위 ‘민족주의진영’에서는 신탁통치 반대를 이유로 미소공위를 무시하거나 반대하는 운동을 펼쳤다. 외상회담 직후에는 여운형, 안재홍 등도 민족주의 입장에서 반탁운동에 적극 나섰지만, 얼마 후 반탁운동의 기만성이 밝혀지자 그로부터 이탈해 미소공위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입장에 섰다.

 

반탁운동의 기만성이란 의도적 오보에 의한 운동 촉발을 말하는 것이다. 1945년 12월 29일자 <동아일보>에 모스크바회담의 조선 신탁통치 방침 결정 소식을 전하는 기사가 크게 실렸는데 그 내용이 반소 감정을 유발하기 위해 조작된 것이었다. 회담에서는 미국이 장기간의 신탁통치를 주장하다가 소련의 반대로 기간이 ‘5년 이내’로 줄어들었다. 그런데 이 기사에서는 미국이 반대하는 신탁통치를 소련이 고집해서 결정했다고 했다. 소련의 방해만 없으면 조선이 즉각 독립할 수 있는 것처럼 민족주의를 선동하는 기사였다.

 

이 기사가 거짓이라는 사실은 곧 밝혀졌지만 김구와 이승만은 격앙된 분위기에서 조직된 반탁운동을 대중 동원의 도구로 계속 이용했다. 반탁운동에 동참하지 않으면 비애국자로 몰아가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당신 신탁통치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독립을 원하지 않는 거야!” 하는 식이었다.

 

신탁통치 결정의 의미를 아직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1943년 말 카이로회담에서 조선 독립 방침이 결정되기 직전 연합국 외상회담에서 오스트리아 독립 방침이 발표되었다. 두 나라의 독립 방침은 독일제국과 일본제국의 내부 교란을 위해 결정된 것이었다. “오스트리아에 관한 선언” 말미에 이렇게 명시되어 있다.

 

“(...) 그러나 오스트리아가 히틀러의 독일과 같은 편에서 전쟁에 참여했다는 피면할 수 없는 책임을 갖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의 해방을 위한 오스트리아인 스스로의 노력이 최종적 처리에서 감안되리라는 사실을 오스트리아인들은 깨달아야 한다.”

 

오스트리아인에게 독일에 저항할 것을 촉구하면서 저항 실적이 “최종적 처리”에 감안될 것을 명언했다. 몇 주일 후 발표된 조선 독립 방침에는 이런 명시가 붙어 있지 않지만 맥락은 똑같은 것이었다. ‘최종적 처리’에서 오스트리아에 10년, 조선에 5년 이내의 신탁통치가 결정된 데는 ‘징벌’의 의미가 있었다. 연합국이 보기에 오스트리아인과 조선인은 독일과 일본의 전쟁 노력에 협조한 죄가 저항한 공로보다 컸다.

 

오스트리아인은 10년 신탁통치를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연합국의 어느 쪽에도 불안감을 주지 않도록 좌우합작 정부를 세우고 중도적 노선을 걸었다. 반면 조선인은 신탁통치가 부당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탁운동’을 통해 좌우대립이 격화되고 그 결과 분단건국과 전쟁이라는 결과를 맞게 되었다.

 

1946년 봄 잠깐 열렸다가 성과 없이 장기 휴회에 들어갔던 미소공위가 1947년 5월 재개될 때 미-소 합의를 통한 조선 건국 희망이 가장 밝았다. 극우 반공세력으로 범위가 좁혀진 반탁운동은 미소공위 실패를 위해 치열한 투쟁을 벌였고 그 와중에 여운형이 암살당했다. 반탁세력, 즉 반공-반소 세력이 남한의 실권을 장악한 것으로 본 미국은 미소공위를 버리고 한국 안건을 유엔으로 가져가 분단건국의 수순을 밟았다. 소련도 이에 반대하는 척하면서 부득이한 대응처럼 북한의 단독건국을 지원했다.

 

 

7. ‘힘’의 리더십보다 ‘뜻’의 리더십에서 배운다.

 

중간파 지도자들이 소명으로 삼은 과제는 넓게 보면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민족국가를 세워 해방된 조선 인민의 염원에 부응하는 것이었고, 좁게 보면 분단건국을 막는 것이었다.

 

내부 조직력이 약한데다가 자원부족에 직면해 있던 조선사회는 외세의 개입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해외에서 돌아온 지도자들에게는 각자 연고를 가진 특정 외세를 등에 업고 자기 영향력을 키우려는 경향이 있었다. 이 경향들 사이의 경쟁이 어느 선까지는 바람직한 것이었지만, 도를 넘을 경우 분단건국의 위험을 품고 있었다.

 

이 경쟁의 격화를 몰고 온 결정적 요소가 친일파의 향배였다. 친일파는 민족국가 건설 자체에 반대하는 경향을 갖고 있었다. 어떤 형태로든 제대로 된 민족국가가 세워질 경우 큰 불이익의 위험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민당을 중심으로 뭉친 이 세력이 이승만과 손잡으며 막강한 분단건국 추진세력을 형성했다. 미국의 냉전 추진세력은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힘을 넘겨받아 지배력을 확보하려는 정책의 일환으로 이승만을 밀어주었다.

 

특정 외세와 연고를 갖지 않은 국내 지도자들이 분단건국을 막기 위해 중간파를 형성하고 좌우합작과 납북합작을 제창했다. 여운형과 안재홍, 그리고 투철한 민족주의자로서 결국 월북하게 될 홍명희와 이극로 같은 인물들이 두드러진 역할을 맡았다. 임정 요인들은 중국과의 연고를 활용하려는 경향도 있었지만 중국의 힘이 갈수록 약해졌기 때문에 김규식 등 일부 인사들이 중간파에 합류했다.

 

중간파는 가장 기본 목표인 분단건국 저지에 실패했다. 분단건국 후 남북한의 정권 안에서 큰 역할을 맡지도 못했다. 물론 전쟁을 막을 힘도 그들에게 없었고, 전쟁을 통해 그들의 얼마 안 되는 힘이나마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이승만 일당은 서울을 탈출하면서 중간파의 지지를 받던 이시영 부통령에게도 알리지 않았고, 안재홍, 김규식 등 중간파 지도자들은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납북되었다.) 그 후 남한에서 중간파 이념을 당당히 내놓은 것은 조봉암뿐이다. 해방공간에서 조봉암은 중간파 주류에 끼지는 못하고 그 외곽에 있었다.

 

중간파는 결국 한반도의 상황 전개에 큰 힘을 쓰지 못하고 말았기 때문에 그 역할이 크게 조명받지 못해 왔다. 권력을 쥐었던 이승만과 김일성, 그리고 이승만의 권력에 위협으로 의식됐던 김구에게 조명이 집중되었다. ‘뜻’의 지도자보다 ‘힘’의 지도자에게 우리 사회의 관심이 치우쳤던 것이다. 권력자가 잘못한 것을 비판하기보다 그가 잘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앞서는 이 사회의 비민주적 풍토가 여기에 비쳐져 보인다.

 

그러나 힘보다 뜻이 더 널리 펼쳐지고 더 오래가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정세의 변화를 배경으로 펼쳐진 해방공간 이후 또 한 차례 세계정세의 큰 변화를 겪고 있는 지금, 우리는 힘의 지도자들보다 뜻의 지도자들에게 배울 것이 더 많다.

 

“조선인에게는 독립 능력이 없다”고 하던 당시 국내외의 냉소가 지금도 모습을 바꿔 이 사회를 떠돌고 있다. 이를 당당히 반박하기 위해 나는 중간파 지도자들을 떠올린다. 민심을 받들며 잘 키워내려던 그들의 리더십은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다. 너무나 무식한 현실의 힘이 그들의 뜻을 짓밟아버렸지만, 그 뜻은 역사 속에 살아있다. 그 뜻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한다면 오늘 우리의 잘못일 뿐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