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12월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한 것은 소련으로부터 경수로 핵발전소를 제공받는 데 따른 조건이었다. 당시 북한의 핵무기 개발 가능성을 NPT 실행기구인 국제원자력기구(IAEA)에서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은 가입 후 절차 진행을 IAEA 측에서 서두르지 않은 것에 비추어 확실해 보인다.

 

당시 북한 지도부들이 NPT 서명으로 인해 떠안게 될 의무에 대해 어느 정도 진지하게 검토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훗날 NPT의 탈퇴를 둘러싸고 국제사회의 압력이 얼마나 가열될지에 대해서는 짐작하지 못했던 것이 확실하다. 핵확산금지조약에 서명함으로써 북한은 핵무기를 외국으로부터 들여오거나 제조하지 않을 것이며 그 진위의 확인을 위해 보유하고 있는 모든 원자력 시설에 대한 국제사찰을 받아들이기로 동의했던 것이다. 이같은 약속은 훗날 미국과 유엔, 그리고 국제사회의 북한의 핵개발 규제를 위한 개입을 정당화시켰다.

 

NPT에 의거해 북한은 사찰의 주체인 IAEA와 핵 안전 협정 및 서명을 위해 18개월의 기한을 허용받았다. 약속된 18개월이 끝나갈 무렵이 87년 중반, IAEA는 평양에 송부한 협정문서 양식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포괄적 사찰 양식이 나닌 개별시설 사찰에 관한 협정 양식을 보냈던 것이다. 전적으로 IAEA측의 실수였기 때문에 평양은 그로부터 18개월의 협상시한을 추가로 인정받았다.(돈 오버도퍼 <두 개의 한국>(이종길 옮김, 길산 펴냄) 380-381쪽)

 

이렇게 연장된 마감 시한인 1988년 12월까지 북한이 IAEA와의 협상을 위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이 1989년 초에 ‘북핵문제’의 싹을 틔우는 조건이 된 것으로 보인다. 아무런 새로운 사실도 발견된 것이 없는 상태에서 북한의 핵무기 제조 능력에 관한 이야기가 떠돌게 된 것이다.

 

[1989년 5월] 남한 관리들을 상대로 브리핑을 실시하기에 앞서 무기통제 및 군축국 소속의 한 관리는 자신의 상관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본인은 일단 남한에게 자체적인 핵개발 계획에 착수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과 행여 우리가 제공하는 정보를 외부에 흘린다면 결코 국인에 도움이 될[되]지 않는다는 점을 주지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두번째 우려는 곧이어 현실로 나타났다. 기밀유지를 위해 최선을 다했건만, 90년대 중반 북한이 핵무기 제조 능력을 확보할 가능성이 있다는 경악할 만한 소식은 어느새 언론에 누설됐고 그 후 미국과 전세계 언론들은 앞을 다투어 이 놀라운 기사를 실었다.

 

필자의 기사가 워싱턴포스트지에 보도된 후 주유엔 북한 대표부는 핵무기 개발을 전면 부인하고 필자의 기사가 “사실 무근의 거짓말”이라고 비난하는 보도자료를 즉시 배포했다. 그 같은 부인에도 불구하고 미 정보부 자료에 근거한 보도에 대한 신뢰감과 그 심각성 때문에 북한 핵개발 계획은 정계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 사이에서도 크나큰 파장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오버도퍼 위 책 383-384쪽)

 

1988년 시점에서 앞으로 6~7년 후 북한이 핵무기 제조 능력을 확보할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것이 왜 “경악할 만한 소식”일까? 핵무기 제조는 예전 같은 고급기술이 아니었다. 웬만한 나라는 마음만 먹으면 몇 해 안에 확보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그래서 그 확산을 막기 위해 NPT가 필요하게 된 것 아닌가.

 

“기밀유지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오버도퍼는 말하지만 일부러 누설한 혐의가 짙다. 제조 능력을 확보할 가능성 자체는 “경악할 만한 소식”이 아니다. 북한에게 그럴 의지가 있다는, 곁들여진 추측이 놀라운 것이다. 추측일 뿐이지만 “미 정보부 자료”에 근거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추측’ 아닌 ‘정보’로 보이는 것이다. 북한 대표부가 “사실무근”이라고 부인한 대상은 이 추측이다. 자기 능력을 부풀려 과시하려는 경향을 가진 북한은 자기네가 안 가진 능력을 가졌다고 서방 언론이 떠들 때 능력 유무를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

 

관료들은 일거리를 필요로 한다. 너무 많으면 지겨워하지만 일거리가 없어서 자기 자리가 없어질 걱정처럼 무서운 것이 없다. 몇 해 후 북한의 NPT 탈퇴선언 때의 상황을 국무부 코리아데스크에서 일하던 케네스 퀴노네스가 설명하는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다.

 

당시 핵전문가들은 북한이 필요했다. 소련이 붕괴하자, 군축국과 군사정치국, 핵문제담당 특별보좌관실 그리고 국방부와 중앙정보국이 북한 문제를 수중에 넣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했다. 자신들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다. 1993년 1월[3월], 북한이라는 작은 나라가 소비에트 연방을 대신하여 미국 정부의 광대한 핵확산금지체제의 관심의 초점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2평 빵집에서 결정된 한반도 운명>(노순옥 옮김, 중앙M&B 펴냄) 113쪽)

 

1989년 당시 핵무기와 관련한 북한의 문제는 그 전 해 12월까지 IAEA와의 협상을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 하나뿐이었다. 미국 과학자들이 새로운 발견이 있을 때 이런 말을 한다는 우스개가 있다. “이거 암이랑 무슨 관계 없을까?” 암과 관계가 있으면 거의 무제한 연구비 지원을 바랄 수 있기 때문이다. 1989년 초 미국 정부 일각의 관리들과 언론인들은 이런 질문을 떠올리고 있지 않았을까? “이거 핵무기랑 무슨 관계 없을까?”

 

‘북한의 핵무기 위협’! 많은 미국 관리들과 언론인들에게 매력적인 주제였다. 수십 년간 증오와 경멸의 대상으로 선전되어 온 미지의 작은 나라가 미-소 대결이 해소되고 있던 그 시점에서 문젯거리로 떠오르는 것은 ‘세계경찰’의 새로운 역할을 위해 적절한 소품이었다. 석유자원에 대한 야욕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이라크 때리기’에 비해서도 ‘북한 때리기’는 자유와 평화의 사도로서 미국의 역할을 내세우기에 더 좋은 주제였다.

 

1993년 3월 NPT 탈퇴선언을 계기로 북핵문제가 국제사회의 정식 의제로 등장하게 된다. 탈퇴선언 자체가 북한 ‘핵 야욕’의 증거가 된 것이다. 그 시점 이전 북한의 핵무기 개발 시도는 미국의 막강한 정보력과 집요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뚜렷이 밝혀진 것이 없다. 의혹이 처음 제기된 1989년은 물론이고 1993년까지도 핵무기 개발 작업은 구체화되지 않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NPT 탈퇴선언이 나오게 된 경위를 살펴보면 그 선언이 핵무기 개발의 진정한 의지를 담은 것인지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정욱식과 김종대의 “한반도 군축과 군비통제의 새로운 접근"(진보신당 정책용역보고서, 2011) 35쪽에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어렵게 합의된 남북기본합의서는 미국의 북한 핵개발 의혹 제기 및 국내 보수파들의 호응, 대선을 앞둔 민자당 정권의 대북 지연 전술, 대선 2달 전에 발표된 ‘남한조선노동당’ 간첩 사건 발표 등이 맞물리면서, 기본합의서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사문화될 위기에 처하기 시작했다. 결정적 이유는 팀스피리트 훈련 재개에 있었다. 1991년 12월 말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선언이 채택될 수 있었던 결정적 배경 가운데 하나는 한미 양국이 1992년 팀스피리트 훈련을 중지할 수 있다는 입장에 있었고, 실제로 92년 1월 7일 노태우 정부는 중지 방침을 공식 발표했다. 북한도 같은 날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가입해 핵사찰을 받겠다는 입장을 공식 천명했다.

 

그러나 한미 양국은 10월 8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연례안보협의회의에서 “남북 상호핵사찰 등 의미있는 진전이 없을 경우 1993년 팀스피리트 훈련을 실시하기 위한 준비조치를 계속해나갈 것임”을 천명했다. 이는 안기부 간첩단 사건 발표 이틀 후이자, 통상 팀스피리트 훈련 발표 보다 3개월 정도 빠른 것으로, 이에 따라 발표 시점에 대한 의혹이 제기됐다. 11월 초로 예정되어 있었던 남북공동위원회 개최를 저지하려는 의도에서 나왔을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이 훈련의 재개 발표는 한국측의 요청으로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의 반발은 예견된 것이었다. 발표 수위는 점차 높아지면서도 거기에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담겨 있었다. 10월 12일에는 한미 양국의 발표를 비난하면서 철회를 요구했고, 12일 후에는 팀스피리트 훈련 강행시 남북대화의 동결을 경고했다. 11월 2일에는 이 훈련 재개시 “핵안전조치협정 이행에 새로운 엄중한 난관이 조성되게 될 것”이라며 IAEA 사찰 거부를 경고했고, 11월 3일에는 남북공동위원회 제9차 회의 불참을 통보했다. 그러면서도 11월 말까지 팀스피리트 훈련 재개 방침을 철회하면 12월에 공동위원회 회의를 열 수 있다고 말했다. 11월이 지나도 한미 양국 입장에는 변함이 없자, 12월 15일을 새로운 시한으로 제안했고, 그래도 호응이 없자 이듬해 1월 29일 남북대화 중단을 선언하고 말았다.

 

1991년 9월에서 연말까지 한반도 긴장 해소를 위한 조치가 잇달아 이뤄졌다. 남북 유엔 동시가입에 이어 9월 28일 미국의 ‘해외 배치 전술핵무기 철수 및 폐기 선언’이 나오고, 이를 뒷받침하는 노태우의 ‘비핵화선언’이 나왔다. 그 발판 위에서 12윌 13일 남북기본합의서가, 12월 31일에 ‘한반도 비핵화선언’이 채택되었다. 그리고 이에 호응하듯 북한은 12월 28일 ‘나진-선봉 자유무역지대의 설치’를 발표했고, 1월 7일 남한은 팀스피릿 훈련 중지 방침을 공식 발표했다.

 

정례적 한미 합동 군사훈련이 1969년 ‘포커스레티나’란 이름으로 시작한 것은 주한미군 감축에 대비한 조치였다. 1976년 ‘팀스피릿’으로 이름을 바꾼 후 10만 명 이상 병력이 참가하고 중폭격기와 미사일 등 핵공격 능력을 갖춘 부대가 참가하는 세계 최대의 군사훈련이 되었다. 한-미 측에서는 이것을 방어훈련이라고 주장하지만 북한은 침공훈련으로 간주하고 엄청난 경계심을 보인다. 이 훈련 때마다 경제활동에 큰 지장이 있을 정도로 비상태세를 갖춘다고 하니 단순한 비방으로만 볼 수 없다. 그리고 핵공격 능력의 훈련은 NPT 조약이 금지하는 ‘미보유국에 대한 핵 위협’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중단 없이 계속되어 오던 훈련이라면 한 차례 더 한 뒤에 중단될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중단됐던 훈련을 재개한다니, 어떤 조건을 충족시켜야 이것을 다시 중단하겠다는 것인가? 더구나 통상적 발표보다 석 달이나 빠른 시점에서 발표했다는 사실에도 강력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북한은 팀스피릿 중단을 대화의 필요조건으로 여겼다. 때문에 그 재개 발표는 북한을 대화의 장에서 쫓아내기 위한 충분조건이었다. 시한을 연장해 가며 재개 방침의 취소를 구걸하다시피 요청했다. 북한의 협상 자세로 선전되어 있는 ‘벼랑 끝 전술’이 전혀 아니다. 이런 애절한 요청을 무시하니까 남북대화 중단과 핵사찰 거부를 경고한 것이다.

 

연재를 시작하면서 1992년 9월에 있었던 ‘훈령 조작 사건’을 소개했는데, 팀스피릿 재개 방침 발표는 그 직후에 나온 것이다. 남북대화를 중단시키려는 의지를 누군가가 드러낸 것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미국 쪽보다는 한국 쪽에 의심이 간다. 훈령 조작은 물론, 팀스피릿 재개의 결정권도 한국 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미 합동 군사훈련은 애초 한국 쪽 요구에 따라 시작되었고 미국은 안보동맹에 따른 의무로 받아들인 것이었으며, 1992년의 중단도 한국 쪽 요청에 따른 것이었으므로 재개 역시 한국 쪽 요청 없이 미국이 일방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한완상은 <한반도는 아프다>(한울 펴냄)에서 몇 차례에 걸쳐 이인모 씨 북송 발표 직후에 북한의 NPT 탈퇴선언이 나온 사실에 아쉬움을 표하며 뒤통수를 맞은 것 같다는 배신감까지 토로한다. 그로서는 통일원장관에 취임한 지 겨우 보름 만에 북한의 강경한 조치를 맞았다는 것이 무척 안타까웠을 것이다. 이인모 씨 무조건 북송이라는 모처럼의 결단을 무색하게 만든 것이 더욱 안타까웠을 것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이인모 씨 북송과 NPT 탈퇴선언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북측은 팀스피릿 재개에 대한 대응책으로 탈퇴선언을 이미 준비해 놓고 있었다. 김영삼 정부 출범 보름 후까지 팀스피릿과 남북대화에 대한 남측의 태도 변화를 기다려본 다음에 발표한 것이다. 그 보름 동안 남측이 보낸 메시지가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탈퇴선언이 발표된 것이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