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게으름을 누리며 며칠 지내다 보니 내게 '게으름'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고딩 때까지는 게으름에 대한 죄의식을 모르고 살았다.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시키는 일이 벅차게 느껴질 때도 별로 없었고, 주변 애들 둘러봐도 나보다 엄청 부지런해서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일이 별로 없었다.
대학입시에서 황당하게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편안한 마음을 잃었다. 내가 특별한 인재라는 환상에 빠지면서 뭔가 늘 열심히 해야 한다는 강박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런 참에 남이 시키는 것 적고 내가 알아서 할 것 많은 대학생활을 하게 되었으니 친구들이랑 한참 당구 치고 카드 치며 놀다 보면 "이래도 되는 건가?" 불안한 마음이 수시로 들게 되었다.
불안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놀 것 다 놀기 위해서는 자기변명이 필요했다. 뭔가 목표를 정해서 공부해 볼 생각이 들어도, "이게 정말 그렇게 중요한 건가?" 스스로 물어보아 절대적인 답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확실한 목표가 설 때까지는 그냥 이렇게 지내지 뭐." 하면서 편안한 게으름에 머물곤 했다. 마음은 좀 불안해도.
설렁설렁 지내면서도 공부를 넓혀나가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영어와 한문의 독해력 등 기술적 능력 덕분이었다. 그렇게 넓혀나가다 보면 언젠가 집중할 만한 방향이 저절로 떠오르리라는 생각을 막연히 하고 지냈다.
그런 생각이 학부에서 지도받던 민두기 교수와 맞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그분과 나는 학문에 대한 생각이 달랐다. 내 인생에 후회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분에게 말려들지 않은 일 하나는 스스로 대견하다. 그분은 제자들이 충실한 보병처럼 열심히 전진하기를(그분이 원하는 방향으로) 바라고, 자기가 지휘관 노릇을 하고 싶어했다. 그런데 나는 자유로움과 자발성이 학문의 첫 번째 요건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석사과정을 경북대로 도망가서 했다. 그리고 석사논문을 참 열심히 썼다. 중국 역법이 집중할 만한 공부 방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중국사상사의 중요한 열쇠를 담은 주제고, 세계 어느 학자 못지않게 내가 잘 탐구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민 교수의 엄격한 지도를 피해 도망온 것이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 자신에게 확인시킬 필요도 느꼈다.
석사과정까지는 그렇게 해서 꽤 성실한 공부 자세를 지켰다. 그런데 박사과정에 입학해 놓고 군에 입대해 3년을 지내는 동안 생각이 크게 바뀌었다. '특별한 인재'로서의 책임감을 내다버린 것이다. 내가 정말 사회에 대해 큰 책임을 가진 인재라면, 그렇게 무의미한 생활을 3년 씩이나 한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세상이 어떤 덴지 알기 위해 서너 달 정도 겪어보는 거면 몰라도.
1977년 12월에 제대하고 1980년 3월에 박사과정에 복학했다. 학문 말고 다른 직업 갖고 살 수는 없을까, 2년 남짓 모색했으나 뾰족한 길을 찾지 못한 결과였다. 그때의 학계 복귀에 대해서는 과학사학회 송상용 선생님에게 고마움을 잊을 수 없다. 내가 다른 길 보고 있는 동안 그분이 학회활동 계속과 시간강사를 권해주지 않았다면 복학 결심을 하기가 훨씬 어려웠을 것이다.
이렇게 박사과정에 복학하고 이듬해 전임강사가 되어 '학자' 노릇을 하게 되었는데, '학문'의 본질에 대해 한국 학계에서는 드문 관점을 갖게 되었다. '사회에 대한 책임'을 무시하는 관점이었다. 학자는 자기 만족을 위해 공부를 하는 것이고, 그 공부의 성과를 사회가 활용하는 것은 학자 본인이 신경 쓸 필요 없는 부차적인 문제라고 보았다. 1985년 처음으로 유럽에 가 지낼 때 내 또래 그곳 학자들에게는 그런 관점이 일반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자 더욱 자신감을 갖고 학문을 취미활동으로 여기게 되었다.
1990년 교수직을 떠나자 게으름 문제가 학생 시절과 다른 차원에서 떠올랐다. 생계와 얽힌 문제가 된 것이다. 아무리 책을 많이 읽고 공부를 넓혀도 그 결과가 돈의 형태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일을 제대로 한 게 아니다. 40대 나이가 되어 비로소 사회와의 구체적 관계가 시작된 셈이다. 책을 읽더라도 돈 안 되는 공부는 취미생활일 뿐이니 일을 한 것이 못 되고, 내 게으름에 대한 죄의식을 벗어나기 힘들게 되었다.
그러다가 2007년 저술활동을 시작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많이 팔려 생계를 뒷받침해 주지 못하더라도 내 글이 책으로 묶여 나오는 것은 생산활동에 틀림없다. 그 동안 쌓아놓은 공부밑천 덕분에 출판사나 프레시안에서 환영할 만한 작업을 얼마든지 기획할 수 있었고, 오랜 딜레탕트 시기를 벗어나 모처럼 생산적인 인간이 되었다는 보람에 들떠 6년간 글쓰기에 파묻혀 지냈다. 그래서 원고지 2만여 매 분량의 글을 써냈으니 다른 허물은 몰라도 게으르다는 소리는 안 듣게 됐다.
생산활동의 절정이 <해방일기>였다. 그 집필 종료를 8개월 앞둔 시점부터 다음 작업 구상을 시작했다. 맹렬한 생산활동에 너무나 길들여진 결과, 부지런한 글쓰기를 계속하지 않는 나 자신을 상상하기 힘들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이런저런 작업을 구상한 경위가 "뭘 할까" 카테고리에 단속적으로나마 적혀 있다.
그런데 <해방일기> 연재 종료 시점이 되자 게으름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떠올랐다. 내가 글 쓰는 기곈가? 무슨 작업을 하고 무슨 글을 쓸지에 앞서 조금이라도 더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조차 생각할 겨를 없이 작업에 매달려 지내는 상태가 너무 오래되었다. 너무 들떠서 지냈다. 이것보다는 내가 더 익숙한 상태로 돌아가 나 자신이 6년 전과 어떻게 달라졌는지 차분히 관찰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연변으로, 저술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지내던 곳으로 돌아오면서 체류기간을 가급적 길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여기서 뾰족히 할일도 없다. 읽으려고 구해두었다가 아직 못 읽은 책 5권(주경철 <대항해시대>, 프랑크 <리오리엔트>, 가라타니 <세계사의 구조>, <자연과 인간>, 아부-루고드 <유럽 패권 이전>)과 다시 읽을 책 2권(홉스봄, The Age of Extremes, 미야지마 <나의 한국사 공부>)만 들고 왔는데 와서 열흘이 되도록 아직 펼쳐보지 않았다. 가벼운 추리소설과 판타지소설로 소일을 하고 있다. 들고 온 책 꼭 다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없다.
할 수 있는 대로 게으르게 지내려 한다. 그러기엔 여기가 참 좋은 곳이다. 앞으로 한 달 남짓 이렇게 지내다 보면 앞으로 무슨 일을 어떻게 할지, 생각이 꽤 정리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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