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여러분과 이야기할 시간을 갖게 되어 기쁩니다.
의례적인 인사말씀이 아닙니다. 원래 공부하는 일은 가르치는 일과 짝을 이룰 때 제대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오랫동안 가르치는 일을 않고 공부만 해왔습니다. 재물도 나누고 돌리는 데서 효용이 일어나는 것인데, 공부도 쌓아놓기만 해서는 가치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6년 전부터 글쓰기를 열심히 한 것이 이 때문입니다. 교실 안에서 가르치는 일을 못하는 대신 글을 통해서라도 내 공부를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글을 통한 가르침에는 한계가 크지요. 그래서 나는 교사들을 부러워하면서, 교사 분들의 일에 도움을 드림으로써 내 공부가 교육 현장에서 간접적으로라도 활용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내 글쓰기의 대부분은 누구보다 교사님들에게 읽히기 바라는 마음으로 쓰는 것입니다.
광복 68주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나는 20세기 전체를 우리 민족의 어두웠던 시기로 봅니다. 그 중간에 한 차례 한반도가 빛에 휩싸였던 순간이 68년 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순간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이전의 반세기 암흑은 일본의 침략 때문이었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 순간 이후의 암흑은 무엇으로 설명할까요? 20세기 민족사회의 불행은 더 큰 문제에 원인이 있었던 것이고, 일본의 침략은 그 문제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나의 모습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20세기 초입에 한민족은 국가를 잃었습니다. 잃어버린 국가를 1945년에도 제대로 되찾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는 2010년에 경술국치 100주년을 맞아 조선 망국의 의미를 따져보는 작업으로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를 냈습니다. 그 작업을 끝내자마자 1945년의 해방에서 1948년의 정부 수립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보는 <해방일기> 작업에 착수, 3년 만에 이제 마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이들 작업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민족’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 현실적 의미를 역사의 연장선 위에서 바라보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 소득을 글에 담을 수 있는 대로 담아 왔습니다만, 오늘 모처럼의 기회에 말씀으로 설명해보고자 합니다.
1. 민족주의 비판은 한민족의 실체를 부정하지 못한다.
약 20년 전 ‘세계화’란 말이 부각되면서 ‘국가’와 ‘민족’을 낡은 개념으로 보는 풍조가 일어났습니다. 세계화는 거스를 수 없는 변화의 추세이며, 이에 저해되는 국가와 민족의 틀을 벗어나는 것이 이 변화 속에서 성공을 거두는 길이라는 인식을 많은 사람들이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속한 사회를 아끼는 마음을 가진 양심적 지식인들 중에도 ‘탈민족’을 바람직한 진보를 위한 과제로 여기는 이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상상의 공동체”니 “발명된 전통”이니 하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둘 다 1983년에 출간된 책에서 나온 말입니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Imagined Communities 와 에릭 홉스봄이 테렌스 레인저와 함께 엮은 책 The Invention of Tradition 을 말하는 겁니다.
앤더슨 등의 민족주의 비판은 매우 중요한 담론입니다. 우리가 민족주의를 생각할 때도 꼭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비판의 대상과 비판의 논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받아들일 경우 폐단이 클 수 있습니다. 이들 서양 학자들의 비판이 서양 민족주의를 대상으로 한 것이라는 사실을 무엇보다 먼저 생각해야겠습니다.
근대 이전의 유럽에서는 ‘민족’에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국가’라 할 만한 대형 정치조직은 봉건적 계약관계로 맺어진 것이어서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민족’과 별 관계가 없었습니다. 중세유럽의 최대 제국인 신성로마제국의 경우 비엔나의 황실에서는 독일어를 쓰는데, 제국 내에는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네덜란드어 등을 쓰는 지역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잉글랜드, 프랑스 등 다른 큰 나라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6세기 들어와 성서가 각국 언어로 번역되면서 비로소 ‘민족문화’란 것이 궤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민족보다는 ‘기독교인’이란 정체성이 유럽에서는 더 중시되었습니다.
그런데 17세기 이후 근대적 민족국가가 급속히 발달하면서 각 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서둘러 정비할 필요가 일어났습니다. 국가권력이 이 정비작업을 급속히 이끌어가는 과정에서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발명’에 비슷한 무리한 작업이 진행되었지요. 무리하게 빚어진 민족주의가 제국주의시대에 들어와 많은 갈등의 촉매가 되고 심지어 유태인 대학살과 같은 비인도적 현상까지 일으키자 그에 대한 반성으로 민족주의 비판이 일어나게 된 겁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여기에 비교해 보세요. 정복자 윌리엄이 잉글랜드로 건너갈 무렵 한반도에는 민족국가 고려가 자리 잡고 있었고, 이 민족국가는 천년 가까이 한반도 전역에 안정된 질서를 유지했습니다. 13세기 중엽 이후 백여 년간의 몽골지배기가 그중 국가체제가 약화되었던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길고 튼튼한 민족국가를 누려온 민족입니다.
이 민족국가의 존재가 민족문화의 발전을 뒷받침해 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15세기 초의 한글 창제에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나는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문자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장 일찍 만들어진 ‘근대적 민족문자’라고 생각합니다. 인구의 대다수가 문자를 향유하게 한다는 점에서 근대적인 것이고 민족문화를 담는 민족 고유의 문자라는 점에서 민족문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민족의 문화는 ‘세계 최고’의 문화가 아닙니다. 그러나 민족문화로서 뚜렷함과 단단함이 매우 뛰어난 문화입니다. 근대에 들어와 갑자기 “발명된 전통”이 아니고, 이 문화를 공유하는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오래된 전통이고 실존의 공동체입니다.
2. 개항기의 과제 ‘개화’는 부국강병형 근대화를 바라본 것이었다.
이제 백여 년 전 망국의 상황을 한 차례 돌아보겠습니다. 망국의 원인으로 우리 사회에서는 흔히 쇄국정책 등 ‘개화’의 부진을 지목해 왔습니다. 개화, 즉 서양식 근대화가 당시의 절대적 과제였는데 우리 선조들이 그 과제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잘 수행한 일본의 침략을 당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우리 사회를 지배해 왔습니다.
그런데 서양식 근대화에 대한 반성이 1970년대 이후 서양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나 왔습니다. 위에 소개한 앤더슨 등의 민족주의 비판도 그 맥락 속에서 일어난 것이죠. 특히 주목할 만한 것으로 사이드의 <오리엔털리즘>이 있습니다. 근대유럽의 가치기준이 지나치게 위세를 떨쳐온 현상을 지적한 것인데, 이 가치기준이 침략 대상자의 의식 속에 내면화되어 ‘거울 속의 오리엔털리즘’을 일으킨 현상까지 지적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개화를 절대적 과제로 생각해 온 것도 이 현상에 포함되는 것이겠지요.
유럽의 근대화는 산업혁명을 주축으로 일어난 변화입니다. 산업혁명은 제조업, 즉 2차산업의 폭발적 발달을 중심으로 하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근대화’란 것이 꼭 그런 식이어야만 하는 걸까요? ‘근대화’란 중세적 질서의 해체에 대응하는 변화입니다. 꼭 산업혁명 방식이 아니더라도 중세적 질서를 대치하는 새로운 질서의 형성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맹아론’이란 연구 분야가 있습니다. 중기 이후의 조선에서도 자본주의적 원리의 발달 현상이 일어났다는 연구 결과가 제시된 바 있는데, 유럽의 침략을 당했던 다른 지역에서도 자본주의적 현상이 많이 지적되었습니다.
‘자본주의체제’란 자본의 힘이 질서의 중심축 노릇을 맡는 체제입니다. 극단으로 갈 경우 신자유주의체제처럼 자본의 힘이 사회질서의 거의 유일한 근거처럼 보일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사회형태 안에서는 자본의 힘이 사회질서를 구축하는 여러 힘 중 하나로서 다른 힘들과 어울리는 관계를 통해 작용하게 됩니다.
산업혁명 후의 서양사회에서는 자본의 힘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커져서 자본주의체제가 성립했습니다. 10-11세기의 중국이나 12-13세기의 이슬람세계에서도 자본의 역할이 상당히 커진 일이 있었습니다. 유럽의 근대자본주의와 같은 정도로 압도적인 역할에 이른 것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탈중세’의 의미를 가진 현상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변화는 한 마디로 유동성의 증가입니다. 문명 발달은 인구 증가를 몰고 오는데, 사회열역학 원리에 따르면 인구밀도가 높아질수록 더 많은 사회유동성이 필요합니다. 말하자면 사회구조가 고체 상태에서 액체 상태로 옮겨갈 필요가 생깁니다. 자본의 역할은 사회구조를 액체화하기 위한 ‘용매’와 같은 것입니다. 일본의 중국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가 당나라를 무력국가, 송나라를 재정국가로 보는 관점을 제시한 바 있는데, 10세기를 전후한 중국사회의 탈중세 현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런데 고체의 액체화에도 여러 등급이 있는데, 1천 년 전 중국이나 이슬람세계에서 일어난 일은 뻑뻑한 반죽에 물을 조금씩 더 넣어 서서히 유동성을 늘리는 정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반면 3백 년 전 유럽에서 산업혁명을 앞세워 일어난 근대화는 훨씬 격렬한 변화였습니다. 반죽에 물을 넣는 게 아니라 물에 반죽을 넣는 셈이죠.
중세체제에서 근대체제로 옮겨가는 여러 방법 사이에도 경쟁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는데, 유럽의 ‘산업혁명형 근대화’는 단기적 경쟁에서 압도적 우위를 보였습니다. 그 방법의 채택 여부에 따라 생산력에서나 군사력에서나 엄청난 차이가 일어났기 때문에 지구상의 모든 사회가 패망과 순종 사이의 양자택일을 강요받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부국강병’을 내세우는 산업혁명형 근대화가 근대화의 유일한 방법처럼 인식되기에 이르렀고요.
개항기 조선의 절체절명의 과제처럼 여겨지는 ‘개화’도 이 산업혁명형 근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일본은 개화에 성공해서 강국이 되었고 조선과 중국은 실패해서 침략 대상이 되었다는 인식이 아직까지도 강고하게 남아있습니다.
완전히 잘못된 인식이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단기적으로는 그런 개화가 분명히 중요한 과제였지요. 그러나 시각을 더 넓혀본다면 개화의 성패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많아요. 제국주의 시절 일본 인민이 겪은 피해와 고통은 침략 대상인 조선과 중국 인민보다 덜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뒤늦게 근대화에 ‘성공’한 한국의 경우, 바로 그 ‘성공’ 때문에 더 큰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런 역설적 현상의 근본적 원인이 자본주의체제의 모순에 있습니다. 유동성의 극대화를 위해 개인을 파편화하고 그 사이의 경쟁을 극한으로 몰고 가는 자본주의 원리는 낭비적 속성을 가진 것입니다. 적정 수준을 넘어서는 경쟁은 낭비를 일으키니까요. 산업혁명의 기술 발달로 인해 자원 공급이 급격히 늘어나는 상황에서는 이런 낭비적 구조가 허용되었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자원과 환경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는 것은 그 한계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화의 큰 굴곡을 살피면서 백 년 전의 망국을 단순한 우발적 사고처럼 볼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을사오적이니 뭐니 매국노 몇 놈에게 책임을 지울 일도 아니고 일본인의 침략성만 탓할 일도 아닙니다. 세상이 변해가고 있는데, 그 변화가 어떤 변화인지 제대로 파악을 못하고서야 왕인들 왕 노릇 제대로 할 수 있고 신하인들 신하 노릇 제대로 할 수 있었겠습니까? 어찌 보면 세상의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해 길을 잘 찾아나가지 못하는 문제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3. 문명 전통의 단절은 소유의 상실을 넘어 존재의 상실이었다.
백 년 전의 망국이 우리 민족사회에 실제로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한 번 따져보죠. 당시 사람들에게는 조선이라는 왕조의 멸망이 제일 크게 보였겠죠. 왕조가 수백 년 동안 국민 생활의 모든 면에 작용해온 역할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합방 당시 제일 뚜렷한 저항은 ‘대한제국’을 지키려는 방향으로 나타났죠.
그런데 10년 후 3-1운동에서는 ‘대한민국’이 독립의 주체로 나타납니다. 사실 대한제국은 국가 노릇을 별로 잘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문을 닫자마자 사람들 마음속에서도 사라진 겁니다. 왕조가 제 노릇 못해서 문 닫는 것은 동아시아문명권에서 자주 있는 일은 아니라도 응당 있을 수 있는 일로 누구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왕조의 멸망이란 당장 충격은 커도 그리 큰 의미를 가진 일은 아닌 셈입니다.
왕조 멸망보다 후세의 우리 눈에 더 크게 보이는 것은 이민족 지배입니다. 민족국가 성립 이래 한민족은 이민족 지배를 받은 일이 거의 없어요.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이 큰 침략이었는데, 이민족 군대가 들어왔지만 군사활동을 벌였을 뿐이지 지배체제를 만들지는 않았죠. 이민족 지배에 가장 가까운 경험이라면 13-14세기의 몽골지배기인데, 간접지배에 그친 것이기 때문에 ‘지배’가 아니라 ‘간섭’이란 말을 굳이 쓰기도 합니다.
그런데 일본의 조선 지배는 철저한 직접지배였습니다. 같은 시기에 세계의 절반 이상이 식민 지배를 겪고 있었어도, 통치기구의 밑바닥까지 일본인 손에 장악하고 있던 조선처럼 철저한 직접지배는 유례가 없었습니다.
조선은 일본이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식민지가 되었을 것이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나는 두 가지 의미에서 궤변이라고 합니다. 첫째, 일본처럼 조선을 먹고 싶어 하는 나라가 없었어요. 가장 비근하게 지목하는 것이 러시아인데, 러시아도 만주의 이권을 위해서는 조선을 일본에게 서슴없이 양보했습니다. 조선에서 아관파천으로 얻은 유리한 입장을 활용하려 하지 않았어요. 러일전쟁은 일본이 만주를 넘보면서 일어난 겁니다.
그리고 둘째, 설령 다른 나라 식민지가 됐더라도 일본 지배처럼 지독한 지배를 받지 않았을 겁니다. 대개의 식민지배국은 피지배국 사정을 잘 알지 못해서라도 웬만한 일은 현지인에게 맡깁니다. 조선처럼 통치기구의 과장급까지 현지인이 거의 배제되는 식민통치는 문명수준이 훨씬 낮은 곳에서도 없었던 일입니다.
조선이 일본 통치 아래 근대화를 이뤘다고 하는 주장이 있는데, 근대화의 객체가 된 것이지 주체가 된 것이 아닙니다. 식민지배의 협력자집단을 서발턴(subaltern)이라 하여 근년 중요한 연구대상이 되고 있는데, 조선의 친일파는 협력자라도 아주 수준 낮은 협력자였던 셈입니다. 친일파 중의 친일파로 꼽히는 박흥식이 천황 한 번 (단체로) 배알했다고 방방 뜨는 꼴을 보고 다른 곳 서발턴들이 웃었을 겁니다. 해방 당시 근대적 제도의 운영 경험을 가진 사람이 드물었다는 것이 그 후 발전에 큰 족쇄가 되었습니다.
이런 면을 살피다가 왕조의 멸망과 이민족 지배에 이어 망국의 세 번째 의미를 생각하게 됩니다. 문명 전통의 단절이라는 문제입니다.
어떤 문명이든지 나름의 질서를 갖고 있습니다. 그 질서의 유지와 발전에 일차적 역할을 맡는 엘리트계층이 어떤 형태로든 존재합니다. 학식과 재산을 가진 엘리트계층은 자기 사회 안에서 특권을 누리기 때문에 그 특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질서의 유지와 발전에 공헌할 동기를 가진 계층입니다. 엘리트계층의 역할이 제도와 관습으로 안정되어 있는 사회는 어떤 변화 앞에서도 뛰어난 적응력을 발휘합니다.
우리 전통사회에서는 ‘선비’ 또는 ‘양반’이란 이름의 엘리트계층이 있었습니다. ‘양반’이란 이름은 특권을 누리는 측면과 흔히 결부된 것이므로 ‘선비 정신’의 측면에 중점을 둡니다. 선비의 전통은 중국과 상당부분 공유한 것인데, 송나라의 범중엄(范仲淹)이 선비 정신을 잘 요약한 말이 있습니다. “선비는 천하의 걱정을 남보다 앞서서 걱정하고 천하의 즐거움을 남보다 뒤에 누린다.” 권리보다 책임을 먼저 생각하는 자세를 말한 것이죠.
선비의 일차적 기준은 학식입니다. 학식은 생업의 경쟁에서도 유리한 조건입니다. 그런데 학식이 많은 사람은 세상일을 넓고 깊게 보는 눈도 가졌습니다. 그래서 개인적 욕심을 채우는···· 데만 골몰하지 않고 세상이 잘 돌아가도록 하는 데도 힘을 쓰게 되죠. 크게 보면 그것이 자기 이익을 제대로 지키는 길이기도 합니다.
물론 현실에는 학식을 갖고도 자기 이익만 생각하려 드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런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관습과 제도가 작동했습니다. ‘독서인(讀書人)’이란 말도 선비와 비슷하게 쓰였습니다.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그 행실에 훌륭한 점이 있어야 한다는 관념이죠. 요즘 표현으로 하자면 선비는 안보의 주체요, 공공성의 수호자였던 겁니다.
조선 후기의 정치 퇴화는 선비 정신의 침체를 가져왔습니다. 정치투쟁이 목숨을 건 전쟁처럼 되면서 웬만큼 좋은 품성을 가진 사람들도 패거리 의식을 벗어나기 힘들게 되었어요. 절박한 문제를 해결한 뒤에야 공공성을 생각할 여유를 가질 텐데 그런 여유를 가질 상황이 자꾸 줄어들기만 했습니다. 19세기 들어서는 심지어 임금까지도 정치투쟁의 마당에서 선수로 뛰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모든 국가권력이 사유화의 대상이 되어 공공성이 증발한 상태를 매관매직의 성행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국가기능이 쇠퇴하면 왕조는 망하게 되고, 얼마동안 혼란을 겪다가 선비계층의 풍토가 쇄신되면서 다음 왕조가 들어서는 것이 중국과 조선에서 반복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것도 문명 전통의 일부로 볼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이 때 일본의 침략을 받으면서 정상적 경로를 벗어나 식민지로 전락한 것입니다.
일본의 식민지배가 일으킨 해악이 여러 가지 지적되어 왔는데, 나는 선비정신의 억압이란 문제가 민족사회에 일으킨 해악을 특히 중시합니다. 선비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도태당하고 그것을 안 가졌거나 버린 사람들이 혜택 받는 상황이 수십 년간 계속되었고, 우리가 ‘친일파’란 이름으로 떠올리는 유형의 집단이 그 속에서 재산과 고등교육을 집중적으로 향유하게 되었습니다.
선비정신이 한 차례 쇠퇴해도 혼란을 겪다 보면 다시 되살아나는 것이 문명의 흐름입니다. 달이 기울었다가 다시 차는 것과 마찬가지죠. 그런데 조선 후기에 침체한 선비정신은 식민지시대를 겪으며 빈사상태에 이르러 버립니다. 문명 전통의 단절은 소유의 상실을 넘어 존재의 상실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 사회의 생명의 원리를 잃어버리는 겁니다.
4. 우리는 근대화의 주체였던가, 객체였던가?
‘전통’의 의미에 생각을 모아 보겠습니다. 전통을 근대화의 장애물로서 척결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생각이 많이 퍼져 있었습니다.
근대화를 무조건 좋은 것으로만 보는 관념은 한국인만 가졌던 것이 아닙니다. 산업혁명이 시작된 이래 부국강병에서 나타나는 그 놀라운 효과를 보며 그것을 따라가는 것을 유일한 활로로 여기는 근대화의 태풍이 유럽에서 일어나 전 세계로 퍼져 나갔습니다.
근대화의 진행과정에서 선발국과 후발국의 대비가 계속해서 나타났지요. 후발국은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서두를 필요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근대화된 체제를 빨리 세우기 위해 기존 체제를 마구 때려 부수는 풍조가 일어났습니다. 도시재개발을 위해 옛 시가지를 뭉개버리는 것과 같은 일이죠.
근대화의 선발국인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든 자본주의든 자기네 필요에 따라 자연스럽게 펼쳐진 현상이었습니다. 이웃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이 악물고 억지로 한 일이 아니죠. 그래서 영국의 근대체제에는 전통의 연장이라는 측면이 크게 남아 있습니다.
바로 그 뒤를 이은 프랑스나 네덜란드 같은 서유럽국가의 근대화 진행에는 영국에 뒤졌다는 조바심 때문에 다소 서두른 면이 있지만 그래도 전통의 연장이 꽤 이뤄졌습니다. 그보다 뒤진 독일, 그리고 더 뒤진 미국, 러시아, 일본 등 후발국으로 갈수록 전통의 연장이라는 측면이 더욱더 좁아지게 되었죠.
20세기로 넘어올 무렵까지 ‘열강’의 명단이 작성되었습니다. 이 명단에 든 나라들은 선발국을 쳐다보며 열등감과 초조감에 쫓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 주변을 굽어보며 우월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존심을 지킬 여지가 있었던 거죠. 막차를 탄 일본의 메이지유신 과정에서 유행한 ‘탈아입구(脫亞入歐)’ 구호가 전통 부정의 자세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몇 십 년 후 그 일본을 부러워한 중국 지식인들의 신문화운동이 유교 전통의 부정을 중심으로 펼쳐진 것과 비교하면 큰 차이가 있습니다.
열강 대열에 들지 못한 나라들은 정복의 일방적 대상이 되었습니다. 피정복자들은 정복자들의 압도적 힘 앞에서 자기네 전통에 대한 자부심을 지키기 힘들었고, 정복자들은 지배를 쉽게 하기 위해 피정복사회의 전통을 열심히 파괴했습니다. 물질적 정복과 정신적 정복이 나란히 진행된 거죠. 식민지 조선에서도 일어난 일입니다.
일본의 세계대전 패전으로 한국인은 일본인의 지배에서 벗어났지만 이질적 문명의 정복에서 벗어난 것이 아닙니다. 남한을 점령한 미국은 영향력 확보와 강화를 위해 당시 한국인이 염원하던 민족주의-민주주의-사회주의 노선에서 벗어나는 정권을 세워주었고, 그 결과 한국인은 전쟁과 독재를 겪어야 했습니다.
독재정권은 지식인의 양심적 활동을 억압하는 일본 식민지배의 민족탄압 정책을 이어받았습니다. 독재정권 아래 특권을 누린 집단은 식민지시대의 친일파 집단과 거의 같은 속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전자의 집단이 후자 집단의 직계 후예라는 주장이 무성한 것은 그 동일한 속성 때문입니다. 사실관계를 엄밀히 살펴보지 않았으나, 정신적 후예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독재정권 종식 이후 특권 집단은 식민지배나 독재권력에 의지하지 않고도 자기 특권을 지키기 위해 사회 변화를 가로막는 역할을 계속해서 맡고 있습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처럼 자기가 속한 사회를 보호하려는 유산계층과 유식계층의 노력이 미약한 사회는 인류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현상입니다. 이와 같은 엘리트계층의 부재는 패망을 피할 수 없는 조건입니다. 근로자와 사업가들이 아무리 생산에 힘을 써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은 국부 유출이 지금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왜 전통의 의미를 돌아볼 필요가 있는지 생각을 돌려보겠습니다. 우리 사회가 당해 온 침략과 정복은 ‘개인의 파편화’를 통해 이뤄져 왔습니다. 개항기 때 만국공법의 ‘만국평등’ 원리를 내세워 동아시아 천하체제를 해체시킨 일을 생각해 보세요. 일본 침략의 첫 번째 구호가 ‘조선 독립’ 아니었습니까? 매국노 이완용이 독립문 현판을 쓴 사실이 그 사정을 단적으로 보여주죠. 허구의 평등을 내세워 현실의 차등을 가려놓음으로써 천하체제의 결속력을 해체하고 손쉽게 각개격파에 나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유동성 증가가 근대화의 기본 과제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이라 해서 꼭 한 순간에 몽땅 해치워야 하는 것은 아니죠. 유기체인 사회는 유동성을 늘리더라도 적절한 속도로 적절한 수준까지 늘려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유동성 증가에는 부담이 따릅니다. 힘이 강한 사회는 이 부담을 힘이 약한 사회에게 떠넘깁니다. 자기는 견딜 만한 정도로 완만하게 유동성을 늘리면서 다른 사회에게는 주체성을 지킬 수 없는 급격한 유동화를 강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정복’이죠. 정복당하는 사회에서도 근대화가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근대화를 ‘당하는’ 겁니다. 근대화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인 것입니다.
허구의 평등으로 현실의 차등을 감추는 것은 ‘만국평등’만이 아니라 ‘만인평등’의 구호를 둘러싸고도 벌어진 일입니다. 피정복사회의 정복에 대한 저항력을 꺾기 위해 그 내부질서를 무너뜨리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수법으로 평등의 이념이 이용된 것입니다. 오해 없기 바랍니다. 나는 평등한 사회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다만 그 평등이 사회 구성원들의 꾸준한 노력을 통해 이뤄지기 바라며, 외부의 정복자가 던져준 평등이 내부질서 붕괴에 이용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20세기를 통해 우리 민족사회가 외부세력에게 당해 온 침략의 중요한 본질이 성숙과정 없는 유동성 증가에 있었다고 나는 봅니다. 파편화된 개인이 각자의 권리만을 주장하는 비생산적이고 불건강한 사회풍토, 안보의 주체와 공공성의 수호자로서 엘리트계층의 부재가 모두 그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민족사회의 생명의 원리로서 전통이 꺾여버린 것입니다.
5. 지금까지의 ‘근대’란 ‘가(假)근대’가 아니었을까?
산업혁명은 농업혁명에 이어 인류 역사상 두 번째 맞는 존재양식의 큰 변화입니다. 농업혁명 이전의 인류는 먹을 것을 자연에게서 ‘얻어먹는’ 단계에 있었습니다. 주면 먹고, 안 주면 굶고. 농업혁명으로 ‘찾아먹는’ 단계에 들어섰습니다. 자연이 던져주지 않아도 재주껏 먹이를 찾아 허기를 달래게 된 거죠. 그러다가 산업혁명은 ‘뺏어먹는’ 단계를 열어주었습니다. 자연을 변형-훼손시키면서 식량과 에너지를 뽑아내 욕심을 채우게 된 것입니다.
존재양식의 변화에 따라 사회의 조직 원리에도 변화의 필요가 일어납니다. 농업혁명 이전 인류의 개체수는 지구상에 1천만 이하였다고 추정됩니다. 몇 억이 되었을 때 산업혁명이 시작되어 지금은 70억에 이르렀습니다. 말 그대로 세계가 ‘좁아지는’ 변화입니다. 좁아진 공간 안에서 어울려 살려면 사람들 사이에 관계를 맺는 방식도 달라져야 합니다.
중세 농업사회로, 그리고 근대 산업사회로 넘어오면서 유동성 증가가 필요하게 된 것은 이 까닭입니다. 농업혁명으로 채집-수렵사회에서 농업사회로 넘어올 때도 체제 변화가 필요했던 것은 물론입니다. 그런데 농업사회에 적합한 체제가 안정되는 데는 무척 긴 시간이 걸렸죠. 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안정된 체제가 형성된 것으로 이해됩니다.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변화에 따른 체제 변화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근대체제’로 이해해 온 자본주의-민주주의체제가 사실은 산업사회에 가장 적합한 체제가 아니라 더 안정성 있는 체제를 모색하는 과정의 하나의 시행착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1972년 로마클럽보고서 <성장의 한계>로 환경과 자원의 한계 문제가 부각된 이래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 개념에 관심이 모이고 있습니다. 그 후 40년 동안 파국을 늦추기 위한 노력은 늘어나 왔지만, 확실한 해결책은 나타나지 않았죠. 기존의 근대체제로는 해결이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탈(脫)근대’(postmodern)란 말을 흔히 하는데, 나는 ‘본(本)근대’를 생각할 필요도 있다고 봅니다. ‘근대’가 ‘중세’처럼 상당기간 인류사회의 안정된 상태를 보여주려면 지금까지 생각해 온 근대보다 훨씬 지속성 있는 체제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근대를 ‘가(假)근대’(pseudomodern)로 볼 수도 있다는 겁니다. 아직까지 이런 제안을 본 일이 없습니다만, 이 자리에서는 지금까지 겪어온 ‘가근대’와 가상적인 ‘본근대’를 구분해서 말해보겠습니다. 산업사회의 안정된 운영에 적합한 ‘본근대’체제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인류사회의 지속을 길게 장담할 수 없습니다.
20세기 후반에 ‘탈근대’란 이름으로 시작된 변화를 ‘근대화’의 본 단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펼쳐진 근대를 완성된 근대로 보기 때문에 ‘탈근대’란 생각을 한 것인데, 돌이켜 생각하면 이 3백년의 시기에는 인류사회가 안정된 체제를 구축한 것이라고 보기 힘듭니다. 농업문명 시작 때도 오랜 시간에 걸쳐 대형화된 전쟁이 세상을 휩쓸던 상황을 여러 문명권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농업사회 체제 정착에 그런 과도기가 필요했던 것처럼 산업사회 체제 정착에도 수백 년의 과도기가 필요했던 것 아닐까요?
과연 지금의 변화가 ‘탈근대’란 이름대로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흘러가 또 하나의 격변의 시대를 인류가 겪게 될지, 아니면 지금까지의 시행착오를 넘어선 진정한 ‘근대화’로 안정된 세계체제를 이룩하게 될지, 지금으로서는 단정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나는 한 차례 생각을 ‘본근대’ 쪽으로 모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탈근대라면 ‘근대 이후’가 어떤 것이 될지 판단할 근거가 박약한 데 반해 ‘본근대’의 방향은 지금까지의 궤적에서 이어나가는 것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근대화의 본질은 사회유동성의 증가에 있습니다. 중세체제가 한계에 접근하며 유동성 대폭 증가의 필요가 느껴질 때 그 대책은 여러 방향으로 강구되었겠지요. 그중 유력한 대책으로 떠오른 것이 산업혁명을 앞세운 유럽식 근대화였습니다. 유동성을 일거에 급증시키는 극단적 대책인데, 어떤 변화든 변화 초기에는 온건한 대책보다 극단적 대책이 유리한 조건을 누리게 되어 있죠. 기존 체제 파괴라는 단기적 과제에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움직이는 시계추가 중간에 머물지 않고 반대편 끝까지 가는 것과 마찬가지 현상입니다.
유동성의 급격한 증대는 많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유럽식 근대화가 궤도에 오르자마자 문제들이 인식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공산주의, 사회주의, 제도주의 등 그에 대한 대응책이 나왔죠. 그러나 시계추가 관성을 가진 것처럼 기존 ‘근대화세력’이 반동력을 발휘했고, 그 결과 20세기 전반기 동안 두 차례 세계대전과 대공황이 일어났습니다.
20세기 후반 공산주의 확장은 유동성 억제 필요에 따른 현상이었는데, 이 역시 시계추가 지나치게 반대쪽으로 간 결과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유동성을 너무 줄였던 거죠. 그에 비해 일부 유럽국에서 자본주의체제에 사회주의 원리를 가미하는 중도적 정책이 상당한 성과를 거뒀습니다. 환경 보호와 자원 절약을 지표로 하는 중도적 정책이 유동성을 적정선에 조정함으로써 산업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최대한 확보하는 기본 방향으로 보입니다.
이 기본 방향에 거스르는 반동 노선이 신자유주의입니다. 신자유주의는 유동성의 극단적 증대를 제창합니다.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규정함으로써 파편화하는 것이 그 출발점이고, 모든 인간적 가치를 자본의 가치로 환원함으로써 자본의 지배에 대한 일체의 저항을 없애는 데 목적을 둔 노선입니다. 소수 기득권 집단의 이익을 위해 세계가 움직여가는 방향의 반대쪽으로 매달리는 것이기 때문에 ‘반동 노선’이라고 하는 겁니다.
국내에서 ‘뉴라이트’의 이름으로 발표되어 온 신자유주의 논설을 보면 해외의 신자유주의자들에 비해 표현이 노골적입니다. 식민지시대를 겪은 사회에서 식민지 경험을 미화하는 주장이 이렇게 당당하게 횡행하는 것은 별난 일입니다. 타이완의 경우 식민지로서 한국보다 훨씬 유리한 조건을 누렸지만, 그런 주장이 공론의 무대에 나서지는 못합니다. 신자유주의 반동 노선에 대한 한국사회의 저항력이 매우 약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저항력이 약한 문제는 문명 전통의 단절이 심한 데서 오는 것입니다. 단적인 문제가 엘리트계층의 부재 현상입니다. 재산과 고등교육을 비교적 많이 누리는 계층이 한국사회처럼 바깥만 쳐다보는 것은 정상적 현상이 아닙니다. 이 사회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너무 적습니다.
6. 아인슈타인이 말한 ‘세계정부’의 실현을 바라본다.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해 온 ‘근대화’가 산업사회 초입에서의 한 차례 방황이라고 본다면, 본 단계의 근대화는 어떤 방향의 변화일까요? 나는 두 가지 지표를 생각합니다. 하나는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이고 하나는 인간사회의 조직방법입니다. 물론 두 가지 지표는 서로 얽힌 것입니다.
종래의 근대화에서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아무런 절제나 균형을 생각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일방적 지배만 생각했지요. 이 관계에서는 인간의 권리만 생각하고 그 책임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근대적 인간관에서는 인간의 책임보다 권리만 생각하게 되었고, 이에 입각한 근대사회 조직방법에서는 조화와 균형을 추구하는 메커니즘이 취약하게 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라는 관념 자체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 때문에 성립되는 것”이라는 환경론자 머레이 북친의 말에 나는 공감하는데, 이 말을 뒤집어서 해도 역시 큰 뜻이 담길 수 있다고 봅니다. 자연과의 관계에서 균형감각을 잃은 것이 인간사회의 가치관 획일화와 극단적 분화현상을 불러온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1945년 원폭 투하에 충격을 느낀 아인슈타인은 “인류와 문명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세계정부의 창설에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현실성 없는 발언이란 비판에 이렇게 대꾸했다고 합니다. “세계정부라는 생각이 그다지 현실적이지 않다면 우리 미래에는 단 하나의 현실적 전망만 있을 뿐이다. 바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전면적 파괴다.”
아인슈타인이 말한 ‘세계정부’란 지금까지의 국가정부가 국가 내의 질서에 책임을 가졌던 것처럼 세계적 질서에 책임을 가지는 ‘정치적 세계화’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우리가 지난 20여 년간 이야기해 온 ‘세계화’는 ‘경제적 세계화’만을 뜻한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 진정한 ‘세계주의(globalism)’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 국가의 파괴를 통해 ‘개인주의’를 확장하는 데 목적을 둔 것이었죠.
국가가 국민의 권리와 책임을 규정하고 보장해주는 것처럼 모든 구성원의 권리와 책임을 관리하는 세계정부의 존재가 인류문명의 지속을 위해 필요하다고 하는 아인슈타인의 주장은 지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근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무정부상태가 계속된 가장 중요한 이유가 그 동안 초강대국의 위치를 누려온 미국의 역할에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무정부상태 지속이 자국에 유리하다고 본 미국의 정책을 견제할 만한 힘이 지구상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 문제에 관한 미국의 입장을 설명해주는 두드러진 특징 두 가지만 지적하겠습니다. 하나는 미국의 1인당 에너지 소비량(11.2kw)이 세계 평균(2.1kw)의 다섯 배가 넘는다는 사실이고(2011년 기준), 또 하나는 개인의 총기 보유가 허용된다는 사실입니다. 미국은 세계체제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는 턱없이 높은 자원소비 수준을 수십 년간 계속해 온 나라고, 무리한 사회구조를 힘의 원리로만 버텨 온 나라입니다.
2008년의 금융공황은 미국 패권주의 중심의 세계적 무정부상태가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신호로 보입니다. 중국의 정책 선택이 미국의 정책 선택에 상당한 제약을 가하는 상황이 그 시점부터 시작되었죠. 그 제약의 수준은 냉전시대의 소련에 비해 훨씬 심대한 것이고, 지금도 힘이 계속 커지고 있습니다. 세계적 변화의 추세를 외면하는 미국의 정치적 관성 때문에 대안으로 떠오르는 중국의 입장이 반사적 이익을 얻는 형국입니다.
중국 역시 힘을 키우면 패권주의 성향을 나타낼 걱정이 있다고도 합니다. 이미 패권주의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패권주의와 비슷한 것이 될 염려는 없다고 봅니다. 미국이 전 세계를 상대로 ‘갑을관계’를 맺은 것 같은 압도적인 힘을 가지게 될 것 같지도 않거니와, 중국은 미국과 달리 문명의 전통을 가진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유럽식 근대화의 시작 무렵에 만들어진 미국이라는 나라는 유동성 과잉 시대의 산물로서 절제의 메커니즘이 취약한 사회였습니다. 중국이 설령 큰 힘을 갖게 되더라도 홉스봄이 말한 ‘극단의 시대’를 답습하려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세계정부’는 이미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근대국가처럼 꼭 확고한 체제를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조약과 협약의 집합체 형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자원과 환경에 관한 협약의 확대와 강화를 위한 노력에 대해 지금까지 미국의 저항이 뚜렷했지요. 미국의 저항력은 그 동안 약해져 왔고, 앞으로도 계속 약해질 것이 전망됩니다.
68년 전 아인슈타인이 말한 ‘당위’가 이제 ‘현실’이 되고 있다고 나는 믿습니다. 얼마나 뚜렷한 현실이 될지는 지금 장담하지 못해도, 지금까지의 전 지구적 무정부상태와는 다른 상황이 펼쳐질 것은 분명합니다. 무조건적 절대자유가 누구에게도 허용되지 않고, 자연과의 관계에서나 인간관계에서나 ‘절제’가 보편적으로 요구되는 상황을 내다봅니다.
7. 민족사회 복원이 세계적 변화에 대한 최선의 대응책이다.
정치적 세계화를 바라보는 움직임은 ‘국제주의(internationalism)’란 이름으로 나타나 왔습니다. 그 이념을 아인슈타인은 ‘세계정부’로 표현했지만 그보다 ‘세계연방’이란 말이 더 많이 쓰입니다. 국제주의는 민족주의와 맞서는 것도 아니고 기존 주권국가의 폐지를 주장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민족주의와 주권국가를 부정하는 것이라면 국제주의가 아니라 ‘사해동포주의(cosmopolitanism)’의 범주에 들어갈 것입니다.
앞으로 나타날 세계정부가 형태에 있어서는 지금의 유엔을 넘어서는 치밀한 조직을 당장 필요로 할 것 같지 않습니다. 유엔이 탄생한 때가 바로 국제주의가 한껏 고양된 시점이어서 세계정부의 전망이 유엔 조직에 많이 담겨 있기 때문이죠. 그 후 미국의 패권이 부각됨에 따라 유엔의 세계정부 조직이 공동화(空洞化)하고 만 것입니다. 세계정부 형성은 유엔을 중심으로 국제적 조약과 협약이 확대-강화되는 과정을 통해 진행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형태가 어떠하든 세계정부 형성이란 전 지구적 차원의 공공성 확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문명 어떤 사회에서든 지속가능성은 공공성에 바탕을 둡니다. 주먹의 힘이든 돈의 힘이든 정보의 힘이든 힘의 작용에 절제를 가하는 것이 공공성입니다. 절제 없이 힘이 날뛰는 정글 상태에서는 문명도 사회도 오래갈 수 없습니다.
농업혁명이나 산업혁명처럼 거대한 변화에는 상당 기간의 과도기가 필요합니다. 새 체제의 건설보다 옛 체제의 파괴에 주력하는 기간입니다. 이 기간에는 대형전쟁 등 낭비적이고 불합리한 현상이 많이 일어나는데, 자원 공급의 급격한 증가 덕분에 가능한 현상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공공성이 약화됩니다.
자원 공급 증가 추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완화하게 되어 있고, 그에 따라 공공성이 회복된 안정적인 체제가 자리 잡게 됩니다. 토머스 쿤의 패러다임이론에 따르면 하나의 믿음 체계가 오랫동안 ‘정상상태(normal state)’에 머물러 있다가 단기간의 급격한 변화인 ‘패러다임 전환(paradigm shift)’을 겪는다고 합니다. 사회체제의 변화도 같은 틀이 아닐까 나는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가근대’를 패러다임 전환의 시기로 볼 수 있는 거죠.
근대적 현상의 핵심 요소로 꼽혀 온 개인주의가 이 패러다임 전환기의 특징입니다. 개인주의는 원자론적 세계관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공공성의 확충은 원자론적 세계관으로부터 유기론적 세계관으로 옮겨가는 것을 뜻합니다. 원자론적 세계관이 뒷받침하는 절대적 자유와 절대적 평등의 관념이 유기론적 세계관으로는 상대화의 대상이 됩니다. 자유도 평등도 현실의 인간관계 속에서 제한된 의미를 갖게 되는 겁니다.
계몽주의시대 이래 믿어져 온 ‘천부 인권’도 절대적 의미가 부정됩니다. 문명과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필요한 억압이라면 모든 개인과 집단이 감수해야 하는 체제, 그것이 공공성의 확충이 가져올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좋은 세상으로 여겨 온 ‘장밋빛 세상’을 잃고 ‘회색세계’, 심지어는 ‘암흑세계’로 전락하는 것처럼 느껴집니까?
그렇다면 ‘인간’이 역사를 통해 실제 어떤 형태로 존재해 왔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전제체제니 봉건체제니 하여 억압 속에 살던 상태를 근대인은 미개한 것이었다고 깔보지만,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물종이 상당한 억압 속에서 살아갈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특성을 진화시키지 않고서는 자연조건의 억압 속에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요.
절대적 인권과 절대적 자유는 마치 인간이 자연조건의 억압에서 완전히 탈출한 것처럼 생각한 환상의 산물입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그 환상에 빠져 문명 발생 이래 사회를 보호해온 공공성의 원리를 잊어버렸을 때 힘을 가진 집단들이 아무 견제 없이 힘을 휘두를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대형전쟁을 비롯한 온갖 ‘근대적’ 참극이 일어났습니다.
환상을 버리고 억압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문제는 어떤 성격, 어떤 수준의 억압을 어떤 방법으로 받아들이느냐 하는 겁니다. 적합한 방법을 찾지 못하면 공공성이 확충된 새 체제가 지옥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고, 적합한 방법을 찾는다면 인간의 본성을 지키면서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생존과 생활의 양식을 추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단, 환상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최악의 결과를 가져올 것이 분명합니다.
근대화 시작 이래 파기 대상이 되었던 ‘전통’의 재발견이 중요한 일입니다. 근대화 이전 긴 시간에 걸쳐 농업사회가 운영되어 온 원리가 바로 전통입니다. 이제 산업사회의 정상상태를 내다보는 데는 농업사회의 정상상태를 참고로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상상태’라는 공통점 때문에 ‘전환기’와의 차이점을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세계정부 체제는 지금까지의 근대국가처럼 하나의 정부가 모든 국민을 개인으로 상대하는 체제가 아닐 겁니다. 봉건체제처럼 지지와 보호를 교환하는 계약관계가 중층적으로 맺어지는 유기적 관계가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 유기적 관계 속에서는 파편화된 개인으로 존재하는 구성원보다 안정된 공동체를 가진 구성원들이 유리한 조건을 누릴 것입니다. 유럽 통합운동에는 세계정부 체제 구축을 촉진하면서, 또 그 체제 안에서 유리한 조건을 누리려는 목적이 함께 들어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새로운 상황 속에서 우리 민족이 가진 1천년 민족국가의 역사가 어떤 의미를 나타내게 될까요? 한반도가 가진 자연자원보다, 지금까지 쌓아온 국부보다, 그리고 20세기 동안 갈고닦아온 근대적 기술보다도 더 큰 가치를 가진 우리의 자산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20세기 이전 1천년 동안 우리의 민족국가는 이웃을 깔아뭉개는 큰 힘을 키운 일이 없습니다.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천하체제 속에서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자세로 천하 질서에 제 몫을 공헌하면서 같은 시기 어느 곳에서보다도 대다수 인민이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조건을 안정되게 마련해준 것이 우리의 민족국가였습니다.
더구나 장래의 세계체제가 동아시아 천하체제를 중요한 모델로 삼을 공산이 크다는 점을 생각해야겠습니다. 물론 천하체제가 그대로 복원될 것도 아니고, 천하체제에서 중국이 맡았던 것과 같은 중심 역할을 특정국이 맡을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원자론적 세계체제가 유기론적 세계체제로 옮겨간다면 동아시아 천하체제가 참고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역사적 경험입니다. 우리 민족사회가 오랫동안 실천해온 화이부동의 원리가 유기론적 세계체제에서는 유리한 적응방법이 될 것입니다.
생각을 넓게 펼치다 보니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결론은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가르치시는 학생들이 영어공부보다 국어공부 더 많이 하고, 기술만이 아니라 역사에 대한 생각도 많이 하게 이끌어주세요. 지금까지 내 말씀이 타당한 것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역사 공부가 얼마나 생산적인 활동인지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경쟁보다 협력을 중시하던 우리 조상들의 화이부동 정신을 다음 세대가 많이 이해하게 된다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세상보다 더 좋은 세상을 그들이 살게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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