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천하체제 안의 민족국가.

 

한국에서는 20년 전 ‘세계화’란 말이 부각되면서 ‘국가’와 ‘민족’을 낡은 개념으로 보는 풍조가 일어났다. 세계화는 거스를 수 없는 변화의 추세이며, 이에 저해되는 국가와 민족의 틀을 빨리 벗어나는 것이 이 변화 속에서 성공을 거두는 길이라는 인식을 많은 사람들이 갖고 ‘탈민족’을 바람직한 진보를 위한 과제로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상상의 공동체”, “발명된 전통” 같은 말이 유행했다. 1983년 출간된 두 권의 책(Benedict Anderson의 Imagined Communities와 Eric Hobsbawm과 Terrence Ranger가 엮은 The Invention of Tradition)에서 나온 말이다. 서양에서는 2차 대전 이래 민족주의 극복이 지식층의 대세가 되어 있었는데, 그 담론을 완성했다고 할 수 있는 책들이다.

 

이들의 민족주의 비판은 민족주의를 생각할 때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담론이다. 그러나 이들의 비판 대상이 ‘근대민족주의’에 국한된 것이라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유럽에서 근대민족주의가 일어나기 전부터 존재해 온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더 많은 생각이 필요하다.

 

John K Fairbank는 The Chinese World Order에서 전통중국의 중화주의는 민족주의가 아니라 ‘문명주의’의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고 말했다. 중국이 오랫동안 다민족국가로 존재하면서 혈통이 아니라 ‘요순지도’, 즉 문명의 수용 여부로 중화와 이적을 구분하는 사상을 발전시켜 온 사실을 가리킨 것이다.

 

중국 역사에서 근대민족주의와 가장 비슷한 양상을 보인 것은 전국시대였다. 유럽 주민들이 기독교문명과 알파벳문자를 공유하면서 각자 내세우는 역사 전통과 조금씩 다른 언어를 갖고 민족정체성을 주장한 것, 그 앞에서 교황의 정치적 권위가 소멸한 것은 전국시대 중국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진시황의 통일을 계기로 중화주의가 자리 잡았다. 중화주의는 천하체제를 배경으로 한 것이다. 천하를 중화와 이적으로 구분하고 중화 내에서는 종래의 민족주의를 배제한 체제였다. 그러나 이적의 영역에서는 중국문명을 받아들인 각 지역 주민들이 민족국가라 할 수 있는 국가체제를 형성했다. 그런 지역의 하나가 한국이었다.

 

한국에서는 10세기에 고려 왕조가 세워진 후 한반도를 영토로, 그 주민을 국민으로 하는 민족국가가 1천 년 동안 계속해서 존재했다. 그 존재 덕분에 한반도 주민은 1천 년간 세계 어느 지역 주민보다도 전란을 덜 겪고 안정된 질서를 누릴 수 있었다. 또한 중국의 기술과 문화를 효과적으로 수용해서 생활수준도 향상시킬 수 있었다.

 

10~19세기 한반도의 민족국가가 근대 민족국가와 다른 점은 ‘화이부동’의 원리에 있었다. 근대민족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명확한 경계선과 완벽한 주권에 있다고 Anderson은 말했다. 원자론적 세계관이 투영된 것이다. 한반도의 전통적 민족주의는 유기론적 세계관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래서 천하체제에 순응하고 중국문명을 적극 수용하면서 제한된 범위 내에서 개별성을 지켰다. 천하체제를 거부한 이적은 정복당하고 전면적으로 받아들인 이적은 중국에 동화되고 만 데 비추어 ‘화이부동’은 민족정체성을 오래 지킬 수 있는 길이었다.

 

한편 근대 이전의 유럽에서는 ‘민족’에 큰 의미가 없었다. ‘국가’라 할 만한 대형 정치조직은 봉건적 계약관계로 맺어진 것이어서 한 왕실이 여러 언어 쓰는 여러 민족을 지배하는 것도, 같은 언어 쓰는 같은 민족이 서로 다른 왕실의 지배를 받는 것도 중세유럽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민족보다는 ‘기독교인’이란 정체성이 더 중시되었다.

 

17세기 이후 유럽에서 국민국가의 급속한 발달은 경제적 상황의 급격한 변화에 따라 지역 간 경쟁이 격화된 결과였다. 그에 따라 각 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서둘러 정비할 필요가 일어났고, 국가권력이 이 정비작업을 이끌어가는 과정에서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발명’에 비슷한 무리한 작업이 진행되었다. 무리하게 빚어진 민족주의가 제국주의시대에 들어와 많은 갈등의 촉매가 되고 심지어 유태인 대학살 같은 비인도적 현상까지 일으키자 그에 대한 반성으로 민족주의 비판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2. 근대화의 완만한 길과 가파른 길.

 

19세기 중반 이후 근대화(개화)의 과제가 중국과 한국에서 절박해졌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걸쳐 두 나라 역사가 치욕의 길을 걸은 이유가 근대화의 실패에 있다고 보는 관점이 오랫동안 두 나라 안팎에서 통설이었다. 부국강병을 목표로 한 서양식 근대화를 절대적 과제였다고 보는 관점이다.

 

근년 이 관점에 수정 가능성이 떠오른 것은 1970년대 이후 ‘근대’의 성격에 대한 반성이 서양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Edward Said의 Orientalism이 중요한 출발점이었다. 그 후 Janet Abu-Lughod의 Before European Hegemony, Andre Gunder Frank의 Reorient 등 새로운 시각을 풍부하게 하는 연구가 늘어나 왔다.

 

1990년대 이후 활발해진 새로운 연구는 근대성의 핵심 요소인 자본주의가 10-11세기의 중국이나 12-13세기의 이슬람권에서 상당한 발달을 이뤘던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이에 따라 산업혁명을 배경으로 하는 서양식 근대화를 유일한, 절대적 근대화의 길로 보아 온 기존 통념이 흔들리게 되었다.

 

근대화란 농업사회 단계의 중세적 질서가 한계에 이르러 산업사회로 전환하는 변화다. 그런데 중세적 질서는 중국, 한국 등 동아시아 지역에서 유럽보다 더 빨리, 더 높은 수준까지 발전했다. 근대화의 필요성도 동아시아 지역에서 먼저 제기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0-11세기 중국의 자본주의 발달은 이 필요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완만한 발전의 길이 채택되었다. 항해활동과 군사기술(화약 등)의 발달을 오랜 기간에 걸쳐 정책적으로 억제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이 두 요소가 유럽의 근대화에서 맡은 중요성에 비추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중국이 완만한 발전의 길을 택한 것은 질서를 중시한 것이다. 반면 유럽의 대항해시대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는 질서 유지의 목적이 정책 결정에 크게 작용하지 않았다. 중국의 조정과 같은 질서 유지의 뚜렷한 주체가 존재하지 않았고, 천하체제와 같은 안정적 체제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유럽의 급격한 변화는 18세기 말 하나의 임계점(critical point)을 넘어 일종의 도미노효과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영국이 대량생산과 자본주의를 결합한 근대적 체제를 갖추자 프랑스를 비롯한 이웃나라들이 경쟁적으로 벤치마킹하게 된 것이다. (영국 근대화의 부국강병 효과는 1805~1815년 나폴레옹전쟁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영국에서 시작된 근대화의 물결은 19세기 말까지 서유럽에서 중부유럽을 거쳐 러시아에 이르고, 대서양 건너 미국과 지구 반대쪽의 일본까지 그 물결을 받아들였다. 산업화된 국가의 대량생산 체제는 규모의 경제에 의존하기 때문에 국내의 원료 공급과 소비시장만으로는 지탱될 수 없어서 식민지 등의 형태로 영향권(sphere of influence)을 필요로 했고, 19세기 말까지는 영향권 획득 경쟁이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에 제국주의시대를 맞게 되었다.

 

동아시아와 일부 이슬람권처럼 15세기 이전에 유럽에 앞서 자기 식의 완만한 근대화를 시작했던 지역들은 산업화된 열강의 부국강병 위세 앞에 ‘서세동점’ 현상을 맞게 되었다. 아편전쟁 이래 열강의 도전에 패배를 거듭한 중국에서는 20세기 들어 유교문명의 전통을 부정하는 신문화운동이 지식층을 휩쓸기에 이른다. 한국을 비롯한 다른 침략 대상 사회도 모두 마찬가지로 서양 물질문명 앞에 무릎을 꿇었다.

 

 

3. 지난 3백 년은 근대화의 과도기?

 

‘근대화’의 본질적 의미를 생각해 본다. 중세체제는 농업사회의 발전 끝에 이뤄진 상당한 안정성을 가진 체제였다. 안정성 덕분에 인구가 계속 늘어나 농업사회로서 포화상태에 이르면서 산업다각화 등을 통한 체제 변화가 필요하게 된다. 산업다각화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고, 유럽의 산업혁명처럼 제조업을 앞세우는 발전은 그중 하나다. 그런데 이 유럽형 근대화가 가진 부국강병 효과 때문에 서세동점 현상이 일어나고, 패망과 순종 사이의 양자택일에 직면한 ‘후진’ 사회는 이것을 유일한 근대화의 길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구 포화가 근대화의 전제조건이라면 근대화의 과정은 곧 사회유동성 증가의 과정이 된다. 사회구조가 고체 상태에서 액체 상태로 옮겨가는 셈이다. 이 변화에서 액체화를 도와주는 용매의 역할을 자본이 맡는다. 미야자키 이치사다가 당나라를 무력국가, 송나라를 재정국가로 본 것은 10세기를 전후한 중국사회의 탈중세 현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1천 년 전 중국이나 이슬람권에서 시작된 근대화가 뻑뻑한 반죽에 물을 조금씩 더 넣어 서서히 유동성을 늘리는 방식이었다면, 3백 년 전 유럽에서 일어난 근대화는 훨씬 격렬한 변화였다. 반죽에 물을 넣는 게 아니라 물에 반죽을 넣는 격이었다.

 

변화의 필요가 감지될 때 시계추처럼 적정 수준을 넘어 반대쪽 극단으로 달려가는 과격한 노선이 변화 초기에는 유력하다. 유럽형 근대화가 위세를 떨친 것은 과격한 노선이기 때문이었다.

 

반대쪽 극단에 갔을 때 그쪽 극단의 문제점이 나타나면서 시계추가 되돌아온다. 유럽형 근대화의 문제점은 19세기 중엽부터 이미 나타나기 시작했으나 관성 때문에 멈추지 못하고 문제를 계속 증폭시킨 결과 제국주의시대와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었다. 그 문제점이 극한으로 드러난 것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통해서였다. 1970년대 이후 자원과 환경의 한계가 분명해진 것이다. 그러면서 ‘탈(脫)근대’(postmodern)란 말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근대성의 한계를 느꼈다 해서 바로 ‘탈근대’를 말하기 전에 ‘본(本)근대’를 생각해 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 ‘근대’가 ‘중세’처럼 상당기간 인류사회의 안정된 상태를 이루려면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해 온 근대보다 훨씬 지속성 있는 체제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근대를 ‘가(假)근대’(pseudomodern)로 볼 수 있다.

 

지금까지 펼쳐진 근대를 완성된 근대로 보기 때문에 ‘탈근대’를 말하는 것인데, 산업혁명 이후 3백년의 시기에는 인류사회가 안정된 체제를 구축한 것이라고 보기 힘들다. 농업문명 시작 때도 오랜 시간에 걸쳐 대형화된 전쟁이 세상을 휩쓸던 상황을 여러 문명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중국의 전국시대가 그런 예의 하나다. 농업사회 체제 정착에 그런 과도기가 필요했던 것처럼 산업사회 체제 정착에도 수백 년의 과도기가 필요했던 것 아닐까?

 

Thomas Kuhn의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에서 제시한 패러다임의 틀에 맞춰 생각해 볼 수 있다. Kuhn은 학술계의 상태를 장기간의 정상상태(normal state)와 단기간의 패러다임 전환기(paradigm shift)로 구분했는데, 산업 변화에 따른 사회체제의 변화도 정상상태와 전환기로 구분해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안정된 농업사회가 중세체제고 안정된 산업사회가 근대체제라면, 인류는 지금까지 3백 년간 그 사이의 전환기를 겪어온 것이고 진정한 근대체제는 이제부터 펼쳐질 것으로 볼 수 있다.

 

 

4. 원자론적 세계관과 유기론적 세계관.

 

지금까지의 전환기와 앞으로의 정상상태 사이의 차이가 무엇일까? 여러 지표가 있겠으나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원자론적 세계관과 유기론적 세계관의 차이다. 빠른 변화를 겪는 전환기의 사람들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갖기 쉽다. 세상의 모든 이치를 완전히 파악할 수 있다는 생각, 사회 조직의 보편적 원리를 세울 수 있다는 생각이 이런 믿음에서 나온다. 원자론과 개인 자유주의는 그런 생각의 결과다.

 

19세기 후반 동아시아 천하체제는 만국공법의 도전 앞에 무너졌다. 천하체제는 ‘사대-자소’의 구체적 관계가 중첩되는 유기론적 체제고 만국공법 체제는 각국 주권의 평등한 관계를 주장하는 원자론적 체제였다.

 

열강은 동아시아에 만국공법 체제 수용을 강요함으로써 ‘후진’ 사회의 각개격파를 쉽게 했다. 만국공법은 허구의 평등을 내세워 현실의 강약 차이를 감추고 강자의 도덕적 책임과 약자 보호의 필요를 부정한 ‘정글의 법칙’이었다. 자유주의가 유기적 인간관계를 묵살함으로써 강자의 지배를 쉽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현대세계의 가장 큰 폭력수단인 핵무기 만드는 데 중요한 공헌을 한 아인슈타인이 막상 1945년 원폭 투하에 충격을 느끼고 “인류와 문명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세계정부 창설에 달려 있다”고 한다. 현실성 없는 발언이란 비판에 이렇게 대꾸했다고 한다. “세계정부라는 생각이 현실적이지 않다면 우리 미래에는 단 하나의 현실적 전망만 있을 뿐이다. 바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전면적 파괴다.”

 

국가정부가 국민의 권리와 책임을 규정하고 보장함으로써 국가의 지속을 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류문명의 지속을 위해 구성원의 권리와 책임을 규정하고 보장하는 세계정부가 필요하다는 것이 아인슈타인의 주장이다. 이치로 보아 지당한 주장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근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무정부상태가 계속되어 온 가장 중요한 이유가 그 동안 초강대국의 위치를 누려온 미국의 역할에 있다. 무정부상태 계속이 자국에 유리하다고 미국은 판단했고, 그러한 미국의 정책을 견제할 만한 힘이 지구상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문제에 관한 미국의 입장을 보여주는 두드러진 특징 두 가지만 지적한다면 하나는 미국의 1인당 에너지 소비량(11.2kw)이 세계 평균(2.1kw)의 다섯 배가 넘는다는 사실이고(2011년 기준), 또 하나는 개인의 총기 보유가 허용된다는 사실이다. 인류문명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는 턱없이 높은 자원소비 수준을 계속해 온 나라고, 야만의 힘이 절제 없이 횡행하도록 방치하는 나라다.

 

한국의 산업화는 1960년대 이후 “잘 살아 보세!” 구호 아래 진행되었다. 그 목표는 미국의 에너지 소비 수준에 접근하는 것이었다. 중국 역시 경제발전을 통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전 인류가 미국의 에너지 소비 수준을 따라가면 지구가 오래 견뎌낼 수 없다. 인류문명의 지속을 위해서는 미국의 소비 수준부터 끌어내려야 한다. 바로 그런 역할을 위해 세계정부가 필요한 것이다.

 

자연과 인간을 포괄하는 이 세상에는 유기론적 측면이 있다. 유럽형 근대화는 유기론적 측면을 무시했고, 그런 상태가 3백 년간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은 저개발 지역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21세기에 들어와서는 더 이상 그럴 여지가 없다. 책임의 주체보다 권리의 주체로서만 개인을 내세우던 원자론적 인간관이 지배하는 세상은 끝나가고 있다.

 

2008년의 금융공황은 미국 패권주의 중심의 세계적 무정부상태가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신호였다. 중국의 정책 선택이 미국의 정책 선택에 상당한 압박을 가하는 상황이 그 시점부터 시작되었다. 지금도 계속 커지고 있는 그 압박은 중국의 힘 이전에 3백 년간 억눌려 온 자연의 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 인간 사이의 관계를 모두 유기론적으로 보는 방향으로 바뀜에 있어서는 중세체제가 중요한 참고가 될 것이다. 농업사회와 산업사회라는 차이가 있지만, 유기론적 세계관에 입각한다는 점이 같기 때문이다. 세계 각 지역의 중세체제가 모두 참고가 되겠지만, 그중에서도 동아시아 천하체제가 가장 중요한 참고가 될 것이다.

 

 

5. 원교근공에서 근교원공의 시대로.

 

전국시대 후기까지도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끼리 전쟁을 벌이는 일이 많았다. 생산력 발달에 따라 군대가 커지고 군량이 쌓여 전쟁 벌일 여력이 생기기는 했지만 전면전이 되기 쉬운 이웃나라끼리의 전쟁은 꺼리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제한된 규모의 원정군을 보내 제한된 범위의 전쟁을 벌이는 이런 경향을 ‘근교원공(近交遠攻)’이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진(秦)나라가 ‘원교근공(遠交近攻)’으로 정책을 바꿨다. 소양왕(기원전 307~251)이 범수(范睢)의 헌책을 받아들인 것으로, 먼 나라와의 전쟁을 삼가면서 이웃나라 공략에 국력을 집중하는 정책이었다. 진나라가 이 정책을 채택한 후 50년이 안 되어 천하를 통일하기에 이른다.

 

전쟁은 파괴적이고 소모적인 사업이다. 가용자원에 한계가 있으면 전쟁을 쉽게 벌일 수 없고, 벌여도 오래 계속할 수 없다. 춘추시대의 ‘계절존망(繼絶存亡)’은 전쟁을 적게 하고 작게 하는 질서의 원리였다. 전국시대의 급격한 생산력 발전이 ‘전국(戰國)’시대를 가능하게 하고, 마침내 정복전쟁을 통한 천하통일로 전국시대를 끝내기에 이른 것이다. 그 마지막 단계가 ‘원교근공’, 즉 총체적 전면전의 시기였다.

 

그런데 진시황의 통일로 안정된 평화가 바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 백년 후 한 무제(기원전 141~87) 때 흉노 정벌을 거쳐 어느 정도 안정된 천하체제가 자리 잡았다. 전국시대를 벗어나고도 새로운 안정을 얻기까지 백년의 시간이 걸린 것이다.

 

중국의 전국시대 3백년과 비슷한 것이 지금까지의 근대 3백년이다. 전쟁이 많아지고 커지다가 결국 총체적 전면전의 시기까지 겪었다. 산업혁명의 생산력 발전이 가능하게 해준 일이다. 이 유추를 더 이어나간다면, 제2차 세계대전으로 미국의 패권이 세워진 것을 진시황의 통일과 비슷한 단계로 볼 수 있고, 냉전시대 소련의 역할을 한나라 초기의 흉노와 비겨볼 수 있을 것 같다.

 

원교근공은 지극히 소모적인 정책이었다. 패권 추구 세력이 방대한 자원을 동원할 수 있을 때 이 정책을 구사할 수 있었고, 그 결과는 문자 그대로 ‘우승열패’, ‘적자생존’을 통한 패권 통합이었다.

 

멀리 떨어진 나라들끼리 손잡고 이웃나라들과 전면전을 벌인 세계대전은 원교근공의 양상이었다. 세계대전이 끝난 후 냉전 단계에서도 이 양상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냉전체제 안에서도 근교원공의 양상으로 바뀌는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냉전 종식을 계기로 그 흐름이 커지고 강해졌다. Samuel Huntington이 The Clash of Civilizations에서 말한 문명권의 통합 추세가 바로 근교원공의 원리에 따라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런 추세에서 유럽 통합이 가장 앞서 나가는 것은 원교근공의 폐단을 가장 철저하게 겪은 지역으로서 근교원공의 실익(實益)을 가장 투철하게 인식하기 때문이다.

 

문명권 통합의 추세는 한국과 중국 사이에도 진행되어 왔다. 한국사회는 냉전시대의 의식 상태를 벗어나는 데 뒤졌기 때문에 근교원공의 원리를 능동적으로 추구하지 않은 채 목전의 경제적 이익만을 보고 중국과의 교류를 늘려 왔다. 지구 반대쪽과의 무역보다 이웃나라와의 무역에 이로운 점이 많다는 자명한 사실은 그 과정에서 스스로 드러나 왔다. 이제 와서야 ‘인문(人文) 유대’ 같은 이야기가 한국에서 나오고 있다. 이웃과의 긴밀한 관계를 능동적으로 추구할 필요가 비로소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6. ‘봉건적’ 전통이 이제 학습의 대상.

 

근대화를 무조건 좋은 것으로 보고 전통을 그 장애물로 여기는 관념은 한국인과 중국인만 가졌던 것이 아니다. 산업혁명의 시작 이래 부국강병에서 나타나는 그 놀라운 효과를 보며 그것을 따라가는 것을 유일한 활로로 여기는 근대화의 풍조가 유럽에서 일어나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전통을 대하는 태도에서 선발국과 후발국 사이의 차이가 있었다. 열세 만회를 위해 서두르던 후발국에서는 근대화된 체제를 빨리 세우기 위해 전통 체제를 마구 때려 부수는 현상이 일어났다. 반면 선발국에서는 보수와 진보가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는 가운데 변화가 진행되면서 전통 파괴를 최소화하는 비교적 연속적 발전을 이뤘다.

 

가장 선발국인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든 자본주의든 자기네 필요에 따라 자연스럽게 펼쳐진 현상이었다. 바로 그 뒤를 이은 프랑스나 네덜란드 같은 서유럽국가는 영국에 뒤졌다는 조바심 때문에 다소 서두른 면이 있지만 그래도 전통의 연장이 꽤 이뤄졌다. 그보다 뒤진 독일, 그리고 더 뒤진 미국, 러시아, 일본 등 후발국으로 갈수록 전통의 연장이라는 측면이 더욱더 좁아진다.

 

20세기로 넘어올 무렵까지 ‘열강’의 명단이 한 차례 작성되었다. 이 명단에 든 나라들은 선발국을 쳐다보며 초조감에 쫓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주변을 굽어보며 우월감을 느꼈다. 자존심을 지킬 여지가 있었던 것이다. 열강 대열에 들지 못한 나라들은 정복 대상이 되었다. 피정복자들은 정복자들의 압도적 힘 앞에서 자기네 전통에 대한 자부심을 지키기 힘들었고, 정복자들은 지배를 쉽게 하기 위해 피정복사회의 전통을 열심히 파괴했다.

 

파괴의 일차적 대상이 전통의 주체라 할 수 있는 엘리트계층이었다. 중국과 한국의 전통적 엘리트계층인 선비의 일차적 기준은 학식이었다. 학식은 모든 경쟁에서 유리한 조건이다. 그런데 학식이 많은 사람은 세상일을 넓고 깊게 보는 눈도 가진다. 그래서 개인적 욕심을 채우는 데만 골몰하지 않고 세상이 잘 돌아가도록 하는 데도 힘을 쓴다. 크게 보면 그것이 자기 이익을 제대로 지키는 길이기도 하다.

 

물론 현실 속에는 학식을 갖고도 자기 이익만 생각하려 드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런 사람들을 압박하는 관습과 제도가 작동했다. 예기(禮記)에 “형벌은 대부에게 미치지 않고(刑不上大夫) 예법은 서인에게까지 내려가지 않는다(禮不下庶人)”고 했다. 피지배계층이 형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통제되는 반면 지배계층은 명예를 아끼는 마음에 따라 움직인다는 뜻이다. 중국에서나 조선에서나 선비는 안보의 주체요, 공공성의 수호자였던 것이다.

 

침략을 당하던 시절 중국에서는 한간이, 한국에서는 친일파가 외세를 등에 업고 부와 권력을 장악했다. 선비 정신은 공권력의 옹호를 잃으면서 사회의 외면을 받고 외세의존적 집단이 사회 상층부를 점령하면서 민중은 외세가 제시하는 가치기준에 따라 움직이게 되었다. 1945년 이후 중국에서는 공산당이 주체적 엘리트계층의 역할을 어느 정도 회복한 반면 한국은 회복의 기미가 미약한 상태에서 20세기 후반부를 지냈다.

 

근대화 과정에서 ‘봉건적’이라고 매도당해 온 개별적 유대관계의 의미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 이뤄질 정치적 세계화의 결과는 지금까지의 근대국가처럼 하나의 정부가 모든 국민을 개인으로 상대하는 체제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중세 봉건체제처럼 지지와 보호를 교환하는 계약관계가 중층적으로 맺어지는 유기적 관계가 될 것이다. 그런 유기적 관계 속에서는 파편화된 개인으로 존재하는 구성원보다 안정된 공동체를 가진 구성원들이 유리한 조건을 누릴 것이다.

 

공동체의 가치가 자본주의체제 안에서도 부각되기 시작하는 추세가 있다. Adam Smith는 The Wealth of Nations에서 자본의 네 가지 형태로 토지, 건물, 기계와 함께 ‘인간 자본’을 꼽았다. 이 인간 자본이 인간 자체가 아니라 생산에 공헌하는 인간의 능력, 즉 그 물질적 측면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랫동안 해석되어 왔는데, 근년의 ‘사회적 자본’ 탐구는 인간 자본의 의미를 점점 더 넓게 바라보고 있다.

 

Robert Putnam의 Bowling Alone은 사회적 자본으로서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사회적 자본의 형태를 '본딩(bonding)'과 '브리징(bridging)'으로 구분한 점이 이 책에서 특히 주목을 끈다. 본딩은 동질적 집단 내의 유대감이고, 브리징은 이질적 집단들 사이의 연대감이다. 두 가지 조직력의 적절한 배합이 사회적 자본의 확충을 위해 바람직한 것이라고 한다. 각 집단 내에 적정 수준의 본딩 조직력을 가지면서 다른 집단들 사이에도 집단이기주의를 뛰어넘는 브리징 조직력을 가지는 것이 개인, 집단, 사회의 이해관계를 잘 조화시킬 수 있는 조건이며, 또한 경제 발전을 순조롭게 해주는 조건이라는 것이다.

 

어느 집단이든 조직력을 가진다는 것은 구성원들이 조직의 목적을 위해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양보할 때 가능한 것이다.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에 어긋나는 양보를 잘 끌어내는 방법이 무엇일까?

 

근대화 단계에서 ‘봉건적’이라고 매도해 온 중세체제 속에는 오랜 시도와 노력을 통해 만들어진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보장하는 효과적인 제도와 관습이 많이 들어 있었다. 그중에는 농업사회만이 아니라 산업사회에도 적용할 만한 것이 꽤 있었다. 이런 시각에서 전통의 가치를 새로 음미하는 것이 미래의 진로를 찾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