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7. 13:01
 

어제는 아내가 두 번 출근하는 날이었다. 아내는 많은 조선족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식당에서 '주방시다' 일을 한다. 12시간 근무에 월 3일 휴식으로 2년간 해 오다가 어머니를 가까이 모시면서 계속할 수 없게 되었는데, 마침 6시간 일하는 자리가 가까운 데 있어서 옮겨 시작한 지 1년이 되었다. 그런데 전에 일하던 닭갈비집의 후임자가 한 달 동안 중국 다녀올 일이 있고, 그 집에서 파출부 새로 부르기보다 일에 익은 아내가 도와주기를 원해서 "돈에 눈이 뒤집혔구먼" 하는 내 비아냥에도 아랑곳없이 형편 되는 대로 그 집에도 다녔다. 주말이 바쁜 집이라 토요일은 지금 다니는 추어탕집을 쉬며 하루종일 하고, 금-일요일은 저녁때만 갔다.

자전거로 출퇴근하는데, 어제는 워낙 강추위라 내가 차로 모셔드렸다. 저녁 출근 시켜주고 그 길에 병원에 가리라 하고 나서는데, 온 세상이 눈이다. 조심조심 차를 몰아 후곡단지에 아내를 내려놓은 뒤, 그쪽까지 간 김에 일산시장의 중국상점에 들렀다가 병원으로 갔다. 현대식 빌딩 8층의 병실에서 밖에 뭐가 오는지 어두운 밤에 알아볼 수도 없지만, 그럴싸하게 느껴서 그런지 다른 날보다 아늑하고 호젓한 느낌이었다.

통 말씀이 없고 주의를 잘 돌리려 하지 않으신다. 오늘따라 통 말씀이 없으셨다고 여사님들도 보고한다. 그러나 표정이 어느 날 못지 않게 편안하신 것을 보면 신체 조건이 나빠서 그러신 것 같지 않다. 뭔가 깊고 긴 생각에 빠져 계신 것 같다. 이따금 입가의 웃음이 깊어지곤 한다. 간혹 울상으로 찡그려지기도 하지만, 웃음이 더 많으시다. 무슨 생각에 잠기신 것일까, 곁에 앉아 나도 생각에 잠긴다.

그분의 평생에서 편안하고 즐거운 때가 언제였을까? 아버지와 함께 하신 7년? 즐겁기는 하셨겠지만 그리 편안하지는 않으셨을 것 같다. 1942년 경성제대 강의실에서 만난 두 분이 1944년 충청도 봉양에서 피난살이 분위기로 살림을 시작하셔서부터 1951년 부산의 피난살이 중에 아버지가 세상 떠나시기까지, 그 기억이 즐거움만으로 떠오르지는 않으실 것 같다.

그 시절 두 분 생활의 상당 부분이 <역사 앞에서>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그 일기를 어머니께서 내게 넘겨주신 것이 1987년 말의 일이었다. 5년 후 책으로 내기에 이르렀지만, 그 시점에서 내게 넘겨주신 까닭, 아니 그 시점까지 혼자 꿍쳐두고 계셨던 까닭을 놓고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어머니 말씀은 반공 독재 상황에서 자식들에게 짐이 될까봐 혼자 지켜오셨다는 것이다. 그 전 해에 퇴직하셨고, 그 해에 군사정권의 종식을 보았으니 말이 되기는 한다. 그러나 아들들 대가리가 굵을 만큼 굵은 뒤까지 혼자 지키고 계셨다는 것은 그런 이유만으로 석연하지 않다.

너무나 아깝게 떠나보낸 분의 내밀한 기억에 대한 독점욕도 은근히 작용했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돌아가신 분을 완벽한 인격자로 받들고 당신께서 그분을 알뜰하게 모셨다는 '신화'를 지키기 위해, 굴곡이 없을 수 없는 일상을 드러내고 싶지 않으셨을 수도 있다. 어느 쪽도 단정해서 말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7년간의 결혼생활이 어머니에게 즐거움 못지 않게 괴로움의 기억이기도 하리라는 것은 일기를 혼자 지켜 오신 36년의 세월에서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자식들을 모두 대학에 진학시킨 후 어느 날 어머니께서 자식들을 모아놓고 하신 말씀이 아직도 귓전에 생생하다. "내가 너희를 혼자 키우느라 내 본성을 감추고 20년간 지내 왔다. 이제 너희가 다 컸으니 나는 이제 점잖고 엄숙한 시늉을 그만두고 편안하게 살련다. 행여 지금까지와 다른 내 모습을 본다 해서 놀라지 말거라. 변하는 것이 아니라 본색을 드러내는 것뿐일 테니."

그리고는 이태 뒤 학교를 휴직하고 일본에서 1년, 유럽에서 1년 지내셨다. 그 때가 어머니께 최고로 편안하고 즐거운 시기가 아니었을지. 이메일은 물론, 국제전화도 어렵던 시절이었다. 한 달에 한두 번 엽서로 모니터링이 되면 얼마나 되었겠는가? 어머니의 일생 가운데 내게 가장 큰 공백으로 남아있는 시기다. 공백으로 남아있으니 즐거운 시기였을 수도 있다고 희망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희망적인 생각을 뒷받침해 주는 것은 어머니의 그 시기와 연상되어 떠오르는 한 친구분의 존재다. 김초열 여사님. 이화여전 시절 친구인 김 여사님은 어릴 때 우리 눈에 어머니와 대조적으로 화려하고 발랄한 분이셨다. 그 부군께서 당시 주 모로코 대사로 계셔서 어머니가 유럽 가는 길에 그곳부터 들러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가지셨던 일은 당시에도 엽서로 알려주셨다. 후에 생각하면, 모로코 체류만이 아니라 유럽에서 즐겁고 편안하게 지내는 노하우를 김 여사님께 많이 전수받으셨을 것 같다.

본성과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 행복의 조건일까? 어머니는 그런 생각에 많이 매달리셨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뿐만 아니라 결혼생활 7년 동안에도 본성과 본색을 억눌러야 한다는 피해의식을 가지셨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자식들을 성년까지 키워내셨다 해서 본성과 본색을 되찾는 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 후 긴 세월 동안 절감하셨을 것 같다. 퇴직하면서 이제 학문과 교육을 돌아보지도 않겠다고 선언하실 때도 본성과 본색에 대한 그리움을 놓지 않고 계셨을 것이다. 그러나 절 생활 하시면서도 탐구심에서 벗어나지 못하셨고, 수필 쓰시면서도 교육의 의미를 손에서 놓지 못하셨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희미해진 의식으로 병상에 누워 계시는 것이 평생 누리지 못하신 호강일 수도 있다. 무슨 생각에 잠기시는 것인지 속속들이 살펴볼 길은 없다. 그러나 아쉬움이 많으셨던 평생을 어떤 식으로든 반추하실 수 있다는 것은 그 아쉬움을 풀지는 못하더라도 그로 인한 아픔을 다독일 수 있는 기회려니 생각한다. 그래서 생각에 잠기실 만한 건강 조건을 유지하시는 것이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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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