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대선의 결과에는 내게 현실적 득실도 걸려 있었다. 문재인 후보가 당선될 경우 앞으로 내 작업에도 '제도적 지원'을 받을 만한 여건이 형성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문재인 정권에서 발언권이나 영향력을 가질 사람들 중에 내 작업의 가치와 의미를 이해하고 지지해 줄 이들이 꽤 있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하고 싶은 일 두 가지가 뚜렷이 떠올라 있었다. (1) "(근대)유럽은 어떻게 만들어졌나?"와 "중국(전통)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세트와 (2) "동아시아의 20세기"였다. (1)은 상품가치가 분명히 내다보이면서 시간과 노력이 크게 들 일이 아니라서 적당한 출판사 잡아서 진행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2)는 상품가치보다 공적 가치가 큰 일이고 많은 노력이 들 일이기 때문에 제도적 지원을 얻고 싶었다. 그 작업의 가치를 이해해 줄 만하다고 본 한 대학에 지원 가능성을 비공식적으로 알아보다가 부정적 반응을 얻고는 더 알아보지 않고 있었다.

 

대학의 제도적 보호가 너무 지나쳐서 내가 생각하는 학문활동을 하기에 불건강한 환경이라고 생각해서 떠났다. 그 후 어떤 활동도 시장에서 가치를 인정받는 기준에 맞춰서 펼치려고 노력했다. 실질적 가치가 별로 없는 학술논문을 쓰면서 많은 봉급을 받기보다 박한 원고료-번역료를 받으면서라도 확실한 가치가 있는 일에 노력을 들여야 내 학문이 실질적 기반을 갖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 기준에 따라 20여 년을 지내 왔다. 그 동안 작업을 통한 내 수입은 대학에 버티고 있었을 경우의 5분의 1 정도였던 것 같다. 스스로 택한 길이니까, 하면서 마음 편하게 먹으려 하지만 더러 속 쓰릴 때가 있다. 지난 주 서중석 선생 만났을 때 그분이 올 여름 정년퇴직을 맞는다는 얘기 끝에 "교수 봉급 참 너무 많이 받아." 한탄조로 말했다. 평소의 나라면 "지금 저 놀리려고 그 말씀 하시는 거죠?" 받아치고 지나갔을 텐데, 그 순간 내 마음이 별로 편하지 못했다.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에 관해 이야기 나누던 뒤끝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잠깐 동안 어두운 생각에 잠겨 입을 떼지 못했다.

 

대선 결과는 앞으로 5년간 내 작업에 제도적 지원을 얻기가 어려우리라는 것이다. 그러니 "동아시아의 20세기"는 접어놓고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작업으로 나아가야 할 형편이다. 그런데 그 시점에서 "대한민국 실록"을 떠올린 것은 공적 가치가 큰 일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을 것이다.

 

<밖에서 본 한국사>를 낸 것이 꼭 5년 전의 일이다. 그때부터 번역 일을 제쳐놓고 저술작업에 매달려 왔다. 지내놓고 생각하면, 2007년까지 내 공부가 준비단계였고, 2008년부터 본격적인 일에 들어선 셈이다. 준비단계의 나는 제도적 지원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지 못했다. 그러나 2008년 이후의 작업은 제도적 지원을 받을 만한 공적 가치를 가진 것이었고, 나 자신 공적 가치가 큰 일 쪽으로 더 많이 끌리는 마음을 갖고 있다.

 

그 동안 공적 지원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해방일기>에 대한 프레시안의 지원은 공적 지원의 성격을 가진 것이다. 출판사의 지원이 영리를 기준으로 하는 비즈니스 차원을 벗어날 수 없는 것과 다르다. 프레시안 식구들이 "같이 연명이라도 하며 버팁시다." 하는 뜻으로 최소한의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면 <해방일기> 작업 수행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무리 하고 싶은 일이라도 "팔릴 책" 범위 안으로 내 작업이 제한되었을 것이다.

 

대선 결과를 보고 "동아시아의 20세기" 당장 진행하기가 어렵겠다는 생각을 할 때 "대한민국 실록"이 떠오른 것은 "이거라면 뭔가 지원의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속셈이 있기 때문이었다. 당장 프레시안만 해도 그렇다. "대한민국 실록"이라면 <해방일기> 지원받던 것과 같은 취지에서 계속 지원을 바랄 수 있고, 지면을 채우는 공헌도 어느 정도 유지된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20세기"는 명분에서나 효과에서나 차이가 있다. 그리고 프레시안만이 아니라 국민 48퍼센트의 허탈감을 채워주는 의미를 가진 일이라는 점에서 지원의 길을 더 찾을 여지도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일단 떠올려 놓고 보니 그 일이 정말 내가 함직한 일이라는 생각이 갈수록 굳어진다. "동아시아의 20세기"도 내 '운명적 과제'라는 느낌이 드는 일인데, 이제 "대한민국 실록"에서 그 느낌이 더 절실해졌다.

 

이번 일은 출판사보다 프레시안을 파트너로 삼고 나가기로 바로 마음먹었다. 연재를 10월에 시작하기로 하고, 출판사는 연재 시작 후에 잡기로 했다. 프레시안과 나, 양자의 힘으로 작업을 궤도에 올려놓고 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으로 프레시안과의 의논부터 진척시키려고 데스크인 강양구 기자와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의외의 반응에 마주쳤다. 일단, 반응이 활발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서 다그쳤더니 어렵게 실토를 한다. 요컨대 프레시안 자체의 전망이 불투명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경영상의 어려움이 갈수록 걱정스러워지고 있어서, 내 작업을 지원할 의지가 있어도 뜻대로 실행할 만한 형편이 될지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든든한 출판사를 먼저 잡는 편이 좋을 것이라고 조언도 해준다.

 

프레시안의 <해방일기> 지원에 공적 지원의 성격이 들어 있기는 한 것이었지만 정규적인 제도적 지원에 비해서는 미약한 수준이었다. 대선 결과로 인해 정규적인 제도적 지원은 바라보지 못하게 되었더라도, 지금까지 누려온 프레시안 수준의 공적 지원은 계속 받을 길이 있으려니 했던 것이 너무 안일한 생각이었나? 내가 끌리는 방향의 일에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정규적 제도만 막히는 것이 아니라 프레시안 같은 주변적 제도까지 말라붙어 버리는 상황에 이른 것인가?

 

출판사만을 바라보고 일을 해나간다... 참 싫다. 지금까지 일을 함께 해온 발행인이나 편집자 중에 좋은 사람 참 많다. 내 작업의 가치와 의미를 존중해주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그들은 추구하는 가치의 실현보다 사업의 성공을 앞세워야 하는 입장이다. 내 작업 구상을 모두 아는 출판인이라면, "대한민국 실록"보다 "어떻게 만들어졌나?"를 먼저 하라고 권할 것이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뻔하다.

 

다행히 건강은 좋다. 앞으로 10년가량은 웬만큼 강도 높은 일을 해나갈 수 있겠다. 그러나 그 이상은 장담할 수 없다. 이런 단계에 와서까지 '팔릴 책'의 기준에 밀려 공적 가치를 크게 보는 작업을 뒤로 미뤄야 하나? 정말 내키지 않는다.

 

<해방일기> 연재가 반년 남았다. 하고 싶은 일 쪽으로 길을 뚫을 수 있을지 그 동안 모색해 봐야지. 내멋대로 길을 찾고자 하는 것은 20여 년 전 대학 떠날 때와 마찬가지지만, 그 의미는 다르다. 그때는 넓은 곳으로 뛰쳐나가는 의미였지만 지금은 좁은 곳으로 파고들겠다는 의미다. 바둑의 고수가 되려면 '큰 곳'보다 '급한 곳'을 잘 찾아야 한다는데, 그때는 '큰 곳'을 찾는 마음이었다면 지금은 '급한 곳'을 찾는 마음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