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위원단 메논 위원장의 1월 21일 방송은(서울중앙방송국) 위원단 활동의 본격적 출범을 고하는 것이었다. 여러 신문에 긴 전문이 게재되었는데 요점만 인용한다.

 

“국제연합조선임시위원단은 10일간 그 업무를 이행하였습니다. 본 위원단은 방금 그 업무의 준비단계를 완료하였다고 말할 수 있으며 당분간 본인을 임시의장으로서 선출하여 본인으로 하여금 남북군사령관을 예방할 것을 가결하였습니다. (...) 본 위원단의 위원 9명 중 7개국 대표는 현재 조선에 와 있으며 엘살바도르대표는 불원간 내조할 것으로 기대되며 나머지 미착한 우크라이나대표에 관해서는 하등의 통첩도 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

 

본 위원단의 업무는 아직 본격화하지 않았으나 그 업무가 본격화될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 본 위원단에서는 3 분과위원회를 설치하여 제1분과위원회에서는 선거를 위하여 자유로운 분위기를 보장할 방도를 강구하고 제2분과위원회에서는 조선 인사의 의견 진술을 검토하고 제3분과위원회에서는 선거법을 검토할 것입니다. (...)

 

우리 위원단은 38선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38선은 마땅히 철거하여야 할 것이며 정치적 분규를 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중에는 조선은 단일체이며 결코 분단되어서는 안 될 나라입니다. 이렇게 단언하면서 본인은 조선 사람의 가슴에 품고 있는 염원을 반드시 반영시킬 각오를 가지고 있습니다.

 

더욱 중대한 것은 기구보다 정신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선거를 위하여 자유로운 분위기를 보장할 목적으로 제1분과위원회를 설치한 것입니다. 만약 선거를 원만히 실시하려면 자유롭고 속박 없는 환경이 보장되어야 할 것입니다. 본 위원은 틀림없이 이 기본원칙을 선거 시뿐만 아니라 선거 전에도 준수할 것입니다. 우리는 무실(無實)한 선거의 구경꾼이 된다면 차라리 짐을 싸가지고 단연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 소련은 선거 실시 전에라도 철병의 용의가 되어 있으며 타면 미군은 확고한 정부가 수립되고 그 보안군이 조직된 후에 철병함이 가하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사전 철병이나 사후 철병의 가부를 막론하고 나는 이 군대의 존재가 선거과정에 있어서 하등의 영향을 주리라고는 생각지 않으며 또 주려고 하더라도 그것은 허용되지 못할 것을 보증할 수가 있습니다. (...)

 

여러분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귀국은 권력의 압박을 받아왔고 또 이 권력 이상으로 더 강력한 미소 양대국의 상이한 2개 이념으로 인하여 충격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우리 위원단의 구성으로 보아 안심과 희망을 가질 수 있고 또 본 위원회 이외에 현재 귀국에서 머물러 있는 2대 강국의 역사와 전통으로 미루어 보아도 여러분은 넉넉히 안심과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

 

(...) 양국은 전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어떤 이유가 존재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세계는 넓어서 양 주의를 넉넉히 포섭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본인은 이 두 제도를 체험한 조선은 장차 쌍방의 장단을 취하여 그 전통과 문화에 적합한 조선적인 조직을 육성시킬 수 있다고 믿는 바입니다. 그리하여 조선이 군사기지로 존재하지 말고 양대 세력 간의 황금의 다리(橋)가 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여러분! 이 황금교는 우리 안전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의 최종 목적은 조선의 독립 달성 외에는 없습니다. 5개월 전 우리나라가 독립할 시에 자유주의 개척자인 마하트마 간디와 공동명의로 자와하랄 네루는 본인에게 격려사를 보내어 인도와 중국의 우호관계를 수립하도록 명하였습니다. 그 서신에 “금일 아세아의 수평선에는 자유의 신성(新星)이 나타났다”고 말하였습니다. 본인의 동료와 본인은 수개월 후에 아세아의 수평선에 다른 신성 즉 자주독립의 조선의 별이 나타날 것을 기구하는 바입니다.” (<동아일보> 1948년 1월 23-24일)

 

훌륭한 연설이다. 그럴싸한 말을 그냥 나열한 것이 아니라 인도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새 이웃과 연대감을 나누려는 뜻이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미소 양국과의 경험을 주체적으로 활용하라는 권유에는 인도가 주도해 나갈 제3세계주의의 취지도 비쳐 보인다.

 

자유로운 선거분위기 보장을 임무로 하는 제1분과위는 자비 시리아 대표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선거법을 맡은 제3분과위의 임무는 기술적인 것이므로 복잡한 문제가 예상되지 않는다. 문제는 조선인의 의견 수렴을 맡은 제2분과위였다. 미소공위 파탄의 직접 원인이 되었던 문제를 맡은 것이 제2분과위였다. 제2분과위는 그 전날의 회의를 계기로 본격적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제2분과위원장 잭슨은 21일 하오 기자단과 회견했다.

 

(문) 공보로 보면 1월28일 전까지 조선인의 의사를 듣기로 되어 있는데 북조선에 있는 사람들과 만날 수가 있을까?

(답) 일을 속히 처리하기 위한 조치이다

 

(문) 북조선과는 통신 곤란으로 지연될 것인데 이에 관한 문서는 보냈는가?

(답) 아직 안 보냈다. 이는 전 조선에 관한 것이며 남조선에도 아직 다 알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가급적 속히 알리도록 하겠다.

 

(문) 분위에서 출석을 요구하는 조선인은 어떻게 정하는가?

(답) 일부 단체에 대해서는 초청장을 준비했으나 발송은 아직 안 했다. 그리고 초청에 있어서는 좌우에 편파함이 없이 동등 평균히 취급할 방침이다.

 

(문) 그런데 현재 형무소 소재자는 어찌하나?

(답) 될 수 있는 한 이와도 역시 협의하려 한다.

 

(문) 초청장이 준비되었다면 그 대상이 된 인물은 누구인가?

(답) 그 성명은 말할 수 없다.

 

(문) 초청장을 발송할 인물은 결정하였는가? 미군 당국에 의뢰한 것인가?

(답) 우리는 우수한 서기국을 가지고 있다. 조선 사정은 잘 연구하여 온 것이다.

 

(문) 그러면 의견서는 어디로 제출하기로 되어 있나?

(답) 본 위원단의 제2분과위원회로 보내면 된다. 그리고 1월28일 이후에는 전연 협의치 않을 것이 아니라 다만 사무 처리상 결정이므로 그 후에도 의견을 제출할 수 있는 것이다. (<경향신문> 1948년 1월 22일)

 

미소공위에서는 두 구성원인 미국과 소련 사이에 협의 대상 범위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지 못했다. 이제 9개국으로 이뤄진(한 나라는 보이콧하고 한 나라는 대표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지만) 유엔위원단에서는 이 합의가 이뤄지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참여국들이 직접 이해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국제사회를 대표한다는 유엔의 권위가 공정성을 보장해 주기 때문에 사무국원들의 조사를 근거로 쉽게 합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위원단의 이북 방문을 위한 노력도 진행되고 있었다. 메논 의장은 호세택 사무국장과 함께 1월 20일 하지 사령관을 예방했다. 미-소 양군 사령관에게 협력을 청하며 예방을 알리는 편지를 보냈고, 하지의 회답을 받은 후 예방한 것인데 소련군 쪽 회답은 아직 없었다.

 

UN임시위원단은 그 사업 실천을 위하여 남북 조선군 사령관에게 협력을 구하는 정식 서한을 발송하였고 이에 대하여 미주 둔군사령관 하지 중장은 이미 회답을 보내어 20일 상오10시 위원단 임시의장 메논은 사무총장 호세택과 동반 24군사령부인 반도호텔에 하지 중장을 방문하고 약 1시간 동안에 긍하여 위원단 사업실천에 관한 정식 인사를 마치었거니와 북조선사령관으로부터는 아무 회한도 없어 그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고 한다.

 

위원단 수원(隨員)의 언명에 의하면 위원단이 발송한 서한에는 그 회답기일이 전연 언급되지 않았다 하며 회답을 기다리는 기간의 장단에 관하여서는 아직 별다른 고려가 없다 한다. 즉 위원단은 기(旣) 조직 3분과위원회의 활동을 사정이 허락하는 환경 내에서 그대로 추진할 것이며 선거 실시를 위한 준비 추진에는 북조선의 회답 여부가 근본적 영향을 미치는 일은 없을 것이라 한다. 그리고 위원단이 여사한 준비사업 즉 적당한 선거법을 결정하는 일이 완료될 때까지 북조선에서 아무 회답이 없는 경우에는 위원단은 그가 적당하다고 인정하는 선거안을 남조선에서만 실시할 것인가의 여부에 관하여 총회와 연락하게 될 것으로 추측된다 한다.

 

그리고 우크라이나가 무기한 보이콧하는 경우에 위원 1개국을 더 보선하여 구성단 수를 9개 멤버로 채우느냐의 여부도 총회의 소관사항으로서 아직 분명치 않으나 당지 각국대표의 의견은 우크라이나가 원래 소련 측 의견을 대표할 수 있도록 선임되었던 만큼 동국의 보이콧이 소 블록 전체의 의사를 표시하는 이상 조위의 현 결원은 여타의 국가에서 보선하는 일은 무의미한 것이며 따라서 조위는 8개국으로서 사업을 추진할 것으로 보고 있다. (<서울신문> 1948년 1월 22일)

 

유엔총회에서 보였던 소련의 분명한 보이콧 방침은 유엔위원단에도 적용될 것이 확실했지만 위원단은 소련의 협력을 전제로 업무를 진행하고 있었다. 1월 18일 메논 의장이 보낸 편지에 하지가 즉각 회답하자 바로 찾아가 만나고 위원단 활동의 본격 시작을 라디오방송으로 조선인들에게 알렸다.

 

소련이 반응을 보인 것은 메논 방송의 다음날이었다. 소련군사령관의 답신이 온 것이 아니라 소련의 유엔데표 그로미코가 리 사무총장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서였다.

 

[레이크썩세스 14일발 AP 합동] 22일 UN에서는 소련이 UN조선위원단의 소 점령 하의 북조선 입경 요구를 거절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사실에 있어 남조선 미군 점령 하에 있어서의 위원단의 노력을 제한하는 소련의 태도는 소련 외상대리 그로미코로부터 UN사무처장 트리그브 리 보좌 안드류 코이어에 대하여 전달된 1월22일부의 서한 중에 표명한 것으로서 동 서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북조선소련군사령관 방문의 희망을 표명한 조선위원단 임시의장으로부터 서한 원문을 전달한 1948년1월18일부의 서한에 관련하여서는 우리는 귀하에게 1947년의 제2차 UN정기총회 석상에서 UN조선위원단 수립에 대하여 이미 소련정부에 의하여 표명된 부정적 태도를 상기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조선일보> 1948년 1월 25일)

 

소련의 협조 거부에 대한 유엔의 대응은 이런 방향으로 전망되고 있었다.

 

[레이크썩세스 24일발 AP 합동] 소련이 조선위원단의 북조선 방문을 거절한 데 대하여 당지에서 즉시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 일반적 관측이다. UN의 결의안에 의하면 동 위원회는 UN소총회에 협의하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평상적 코스로는 동 위원회는 소총회에 대하여 소련 태도로 말미암아 사명의 수행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고하고 원조를 요청할 것이다. 목하 년중 개회 예정으로 개최중의 소총회는 총회 특별회의를 소집할 권한이 있다. (<서울신문> 1948년 1월 25일)

 

서울의 유엔위원단은 그로미코가 리 사무총장에게 보낸 편지를 확정적인 거부로 보지 않고 위원단 앞으로 정식 통보가 올 것을 기다리며 업무를 계속 진행하기로 했다. 1월 22일에는 공보 제17호로 업무 진행 상황을 발표했다. 그 발표 중 제2분과위에서 작성 중인 “협의를 희망하는 조선인 대표의 명부”를 언급했는데, 유엔본부에서 입수한 자료와 조선 입국 후 수집한 자료를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이승만, 김구, 김규식, 김성수, 조만식, 김일성, 허헌, 박헌영, 김두봉의 아홉 사람 이름을 발표 속에 넣었는데, 위원단이 만날 사람의 범위는 이것보다 넓을 것이라고 그랑 정보관이 밝혔다. (<경향신문> 1948년 1월 24일)

 

특히 제3분과위의 업무 진행이 빨랐다. 1월 23일 금요일에 구체적 토의를 시작했는데 26일 월요일까지는 윤곽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임무 수행을 최대한 서두르려는 노력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소식통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조위 제3분과위원회에서는 연일 선거법 급 선거시행세칙에 관한 심의를 계속하여 오던 바 거주(去週)로서 일단락을 지었으므로 26일 오후에는 입의 사무총장과 회견하고 세부에 관한 토의가 있으리라고 한다. 그리고 제3분과위원회의 업무 진행 상태로 미루어 보아 대개 금월 내에 선거법 및 기타에 관한 심의가 완료되리라고 하며 한편 국민회의 구성원의 수에 관하여서는 조선인의 의견을 듣기 위하여 제2분과위원회에 대하여 자문하기로 하였다 한다. 선거구역 문제도 세간에 여러 가지 설이 유포되고 있으나 옵서버 측의 관측에 의하면 조선 내의 실정으로 보아서 행정구역에 별로 상위(相違)되지 않으리라고 한다. (<동아일보> 1948년 1월 27일)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