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역사의 판단’을 빼앗겼던 민족

 

근대민족주의가 ‘민족’이라는 현상의 한 형태인 것처럼, 근대역사학도 ‘역사’라는 현상의 한 형태다. 역사란 한 사회의 지내온 자취이며, 그 자취에 대한 탐구와 사색을 ‘역사학’이라 할 수도 있고, 그 또한 그냥 ‘역사’라 할 수도 있다. 역사학과 역사를 엄격하게 구분해서 생각하는 것은 역사를 객체화하는 근대역사학의 풍조다.

한 사람의 정신활동에서 과거의 반성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처럼 한 사회의 문화활동에서 역사의 성찰이 가지는 역할이 있다. 이 점을 나는 이렇게 적은 일이 있다.

 

역사 서술은 인류 문명 초창기부터 정치적 의미를 가진 활동이었다. 문자가 없던 선사시대에도 과거사의 기억은 주술사의 푸닥거리에 담겨 있었다. 한 부족이 공유하는 과거의 기억은 푸닥거리를 통해 부족 정체성의 바탕이 되었고, 이 과정에서 주술사가 발휘하는 영도력이 제정일치 체제의 근거였다.

 

문자 발생 후 역사 서술은 지배계층의 교양이 되었다. 정보의 대량 축적이 가능하게 되면서 푸닥거리 단계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사회가 역사를 공유하며 정체성을 함께하게 되었다. 문자를 향유하던 지배계층은 역사의 거울을 통해 자신의 위상과 소명을 확인했다.

 

인쇄술 발전으로 정보의 축적만이 아니라 유통까지 대형화된 단계에서 근대역사학이 나타났다. 피지배층까지 문자를 향유하게 되면서 국민 통제수단으로 국민교육이 개발되고 역사교육이 그 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역사교육의 내용을 확보하고 담당자를 양성하기 위해 직업적 역사학자들이 대학에 자리 잡고 분과학문으로서 근대역사학을 키워냈다.

 

근대역사학은 종전보다 정치적 무기로서의 기능을 더욱 강화했다. 민족과 문명들 사이의 접촉이 늘어난 상황 때문이었다. 국민국가들은 국민에게 민족의 영광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는 ‘역사’를 경쟁적으로 개발했고, (...) (<밖에서 본 한국사> 10-11쪽)

 

‘근대’의 중요한 특성 중 하나가 ‘경쟁’의 강화다. 그 와중에 역사까지 경쟁의 한 부문이 되었다. 한 사람의 겪어온 과정이 종전에는 개인적 성찰의 대상에 그쳤는데, 이제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훌륭한 과정을 겪어왔다고 ‘스펙’으로 내놓아야 취직에 유리한 세태가 된 것과 같은 변화였다. 훌륭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라야 남에게 침략당하지 않을 권리, 그리고 남을 침략할 권리를 가지는 세상이 되었다.

 

일본의 조선 침략에도 역사가 무기의 하나로 동원되었다. 조선 역사를 다룬 첫 일본 책은 管原龍吉의 <啓蒙朝鮮史略>(1875)인데, 조선 사서를 요약한 내용으로, 조선에 대한 일본인의 관심 증가를 보여주는 정도 의미의 책이다. 침략의 성격이 뚜렷한, 조선 역사를 폄하하는 책은 1890년대 들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애초에 이 책들은 일본 독자들을 상대로 조선 침략정책의 홍보를 거드는 용도였는데 청일전쟁 후에는 조선어로 번역되어 친일파 양성의 교재 역할도 하게 된다. (조동걸 <현대한국사학사> 제4장 “식민사학의 성립과 확산”)

 

1890년대 이래 개별 저자들의 저술에서 동조동근론, 정체성론, 당파성론 등 식민사학의 내용이 모습을 나타내는 동안 1887년과 1889년 설치된 동경제대의 사학과와 국사학과 등을 거점으로 체계적 식민사학도 빚어지고 있었다. 조동걸은 특히 1905년 동경제대 사학회에서 낸 <弘安文祿征韓偉績>을 주목한다.(위 책 260-261쪽) ‘弘安’은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을, ‘文祿’은 임진왜란을 가리키는 것이다. 일본의 근대역사학 성립기에 대륙, 특히 조선을 겨냥하는 ‘進出’ 의지가 드러난 사례다.

 

1905년 이후에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가, 1910년 이후에는 조선총독부가 일본 식민사학의 전진기지 역할을 시작했다. 만철에는 1908년 만선지리역사조사실이 설치되고, 총독부에는 1919년 조선사편찬위원회(1925년 이후는 조선사편수회)가 설치되어 식민사학 체계화를 더욱 진전시켰고, 1924년 설치된 경성제대가 또 하나의 거점이 되었다.

 

식민사학의 스펙트럼은 노골적인 파시스트 선전에서 치밀한 ‘실증’사학까지 폭넓게 펼쳐졌는데, 그 기본 프레임을 19세기 말 제국주의시대에 유행한 ‘우승열패(優勝劣敗)’의 사회진화론에 두고 조선 역사의 열등함을 논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반발로 민족사학이 일어났는데, 프레임은 그대로 두고 조선 역사의 우수함을 주장한 것이었다. “싸우면서 닮아간다”는 현상이었다.

 

해방 당시 조선의 역사 연구와 서술의 큰 흐름으로 식민사학과 민족사학,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의 유물사학이 있었다. 식민사학과 민족사학은 같은 틀로 정면 대립하는 관계였다. 역사의 보편적 원리를 신봉하는 유물사학은 정치와의 지나친 관련 때문에 학문으로서의 성격에는 문제가 있었다.

 

세계대전 종료와 민족 해방이라는 내외의 조건 변화를 계기로 조선의 역사학도 변화의 계기를 맞았다. 일본 제국주의에 근거를 두었던 식민사학의 퇴진은 당연한 일이었고, 민족사학은 피지배민족의 민족사학에서 독립민족의 민족사학으로 진화가 필요하게 되었다. 유물사학도 지하운동 단계의 교조주의 수준을 벗어난 발전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런데 남북 분단과 독재정권 수립으로 인해 이 발전이 가로막히고 말았다.

 

해방 직후 일부 국학자들이 ‘신민족주의’를 제창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초판(1990)에는 안재홍의 주장만이 “신민족주의” 조에 설명되어 있는데 2010년판에는 손진태, 이인영, 조윤제 등의 활동이 함께 설명되어 있다. 그 “의의와 평가”가 이렇게 적혀 있다.

 

신민족주의사학은 문헌고증을 위주로 한 실증사학에서 벗어나 뚜렷한 이념이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지는 못하였다. 또한, 신민족주의사학은 민족주의의 관념성과 도덕적 해석에 기초함으로써 역사 발전에 대한 이해가 없어 사관으로는 구조적인 취약성이 있는 것으로 비판받았다. 문화나 외교 관계를 중심으로 한 세계사와의 관련성 주장이 식민사학에 대한 불철저한 비판으로 해석되기도 하였다. 게다가 해방공간의 이데올로기 대립 속에서 계급 간 갈등 해소와 민족의 화합만을 강조해 도덕적 이상론에 그치는 등 한계를 보였다. 그러나 신민족주의사학은 계급과 민족의 문제를 직접 역사 속에서 다루면서 민족의 역사를 보편적이고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접근하여 민족주의사학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다.

 

‘신민족주의’라는 말이 당시 여러 사람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식민지시대의 기존 민족주의 그대로는 해방된 상황에 적합지 않다는 인식을 보여준다. 위 비평에서 지적한 신민족주의의 한계는 이 인식에 바탕을 둔 신민족주의가 충분히 자라날 기회를 갖지 못하고 맹아 단계에서 삼제되어 버린 현실 때문이다. 해방 한 달 후 탈고한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 도입부에서 안재홍이 한 말에 이 인식이 나타나 있다.

 

근대에 있어 국제적 협동연관성을 무시하는 고립배타적인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는 배격되어야 하겠지만, 민족자존의 생존협동체로서의 주도이념인 민족주의는 거룩하다. 이에 특히 신민족주의가 제창되는 이유이다. (<민세 안재홍 선집 2> 16쪽)

 

이 글에서 안재홍이 말한 ‘신민주주의’는 사회주의 이념 역시 과거의 교조주의에서 벗어나 현실에 맞춘 발전을 이루기 바란 것이다. 우익은 신민족주의로, 좌익은 신민주주의로 진화함으로써 화합이 원만히 이뤄지기 바란 그의 뜻은 좌우합작에 매진한 그의 정치적 입장과 부합하는 것이었다.

 

분단건국 후 남북의 독재체제 강화에 따라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 모두 발전의 길이 막히고 말았다. 이북 사정은 자세히 알지 못하거니와, 이남의 독재정권이 사회의 역사인식을(그리고 민족의식을) 제국주의시대 프레임에 묶어놓은 것은 발전된 역사인식이 필연적으로 독재정권 비판에 나설 것을 꺼린 때문이었다. 그리고 미국에 대한 종속이 일본에 대한 예속보다 별로 약하지 않은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었기 때문에 민족주의 담론이 식민지시대의 틀을 벗어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냉전이 끝난 이제야 신민족주의 담론에 발전의 여건이 마련되었다고 생각하며 5년 전 나는 <밖에서 본 한국사> “서언”에 이렇게 썼다.

 

억눌린 민족 주체성을 선양하려는 뜻에 일방적으로 매인 민족사관은 억압자의 관점을 방향만 뒤집고 틀은 그대로 본뜬 것으로, 식민지 상황에 어울리는 역사관이다. 반세기가 넘도록 독립민족다운 자신감을 가지고 이 틀을 바꿔치우지 못한 것은 ‘해방’ 후에도 실질적 식민지상태가 오랫동안 계속된 상황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

 

민족주의 사관은 냉전에 앞선 패권의 시대, 제국주의 시대에 빚어진 것이다. 이웃에 대한 적대감을 영양분으로 삼아 자라난 것이 민족주의 사관이다. 패권의 시대가 물러가고 있다면,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을 우리가 바란다면, 민족주의 사관은 점검되어야 한다.

 

1945년의 ‘해방’은 이민족 통치로부터의 해방이기는 했지만 억압체제로부터의 해방은 되지 못했다. 독재체제는 한국 역사학계에 두 가지 멍에를 씌웠다. 한편으로는 현대사 연구를 실질적으로 금지했고, 또 한편으로는 배타적 민족주의로 몰고 간 것이다. 이것은 식민지시대의 멍에와 내용은 달라도 틀은 같은 것이었다. 식민지체제든 독재체제든 억압체제는 역사의 자유로운 탐구를 막고 통치에 이용하려는 속성을 가진 것이다. 한국의 역사학은 근대역사학이 도입된 이래 최근까지 내내 억압체제 아래 묶여 있었다.

 

현대사 연구의 금지는 억압자의 직접적 작용인 반면 배타적 민족주의 양성은 피억압자의 행위보다 의식을 조종하는 간접적 작용이다. 이 간접적 작용은 억압체제의 메커니즘을 피해자에게 내면화시키는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서, 겉으로 드러나 보이지 않으면서 실제로는 더 큰 피해로 남는 것이다. 독재체제의 직접적 억압이 25년 전에 사라졌는데도 일반 한국인의 역사인식에는 억압체제의 흔적 정도가 아니라 그 틀이 상당량 남아있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가해자보다 오히려 피해자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살필 필요가 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