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이라고 합니다.  중국사 전공자인데(학위논문은 마테오 리치) 학계에서 활동 끊은 지 20년 가량 되고, 언론에 글 쓰며 혼자 공부해 온 사람입니다. 몇 해 전부터는 거의 프레시안만을 통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부터 이 선생님 글 재미있게 읽고 있는데, 읽을수록 관심 범위와 기본 시각, 그리고 어느 정도 공부 취향에서도 공유하는 것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학계를 떠난 이래 다른 사람 공부를 크게 의식할 일이 없고, 내 공부에 관해서도 동료로서 이야기 나눌 사람 마주칠 기대 없이 지내 왔는데, 이 선생님과는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군요.
 
나는 지금 2013년 8월까지로 예정된 "해방일기"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2008년 3월 <밖에서 본 한국사>를 낸 이래 한국근현대사의 늪에 빠져서 지냈는데, "해방일기"를 끝으로 이 방향 작업에서 빠져나오려 합니다. 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 밀려 있어서.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이 선생님도 흥미롭게 여기지 않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혹시 정말 흥미를 느끼신다면 의견 주시기 바랍니다. 흥미를 너무 많이 느껴서 "그런 일은 내가 하고 싶은데요." 하신다면 기꺼이 맡겨놓고 나는 딴 짓 하겠습니다. 주제를 더 키워서 힘을 합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제일 좋겠지만, 그런 가능성은 억지로 바랄 것이 아니겠고요.
 
내가 지금 구상하고 있는 작업이 세 가지 있습니다.
 
(1) "유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와 (2) "중국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는 현대문명의 두 축을 바라보는 기본 시각을 정리해 보려는 겁니다. (1)의 "유럽"은 물론 지리적 영역이 아니라 근대문명을 대표하는 "근대유럽"을 말하는 거죠. 로마제국 이후 지중해문명이 기독교문명과 이슬람문명으로 갈라지는 데서부터 시작해서 기독교문명이 이슬람문명과의 관계를 통해 근대문명을 빚어내는 과정을 살펴보는 겁니다.
 
(2)의 "중국"은 천하체제를 대표하는 "중화제국"을 말하는 겁니다. 춘추 말-전국 초 천하 사상의 출현에서부터 19세기 말 만국공법 체제에 유린되기까지의 과정을 화이관계를 중심으로 살펴보려는 겁니다. 오늘 올리신 글의 "제국" 개념으로 연장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되어 특히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그리고 (3) "동아시아의 20세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지금까지 하고 있는 한국근현대사 작업에서 연장되는 것이므로 (1), (2)보다 먼저 해치우고 싶은 것이었는데, 지금까지 내가 해온 작업방식으로 효과적인 수행이 가능할지 미심쩍은 면이 있어서 뒤로 미루게 되었습니다. 처음 구상할 때는 엄청난 작업이 될 것 같았는데, 마침 이와나미강좌로 <동아시아 근현대통사>  11책이 나온 것을 보니 기반이 많이 닦여져 있어서 자신감을 갖게 되었죠.
 
"근대"라는 것에 대해 포괄적인 관점을 세우고 싶은 생각을 오랫동안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아시아 지역 20세기사는 근대화에서 시작해 탈근대화로 끝난다는 느낌이에요. 근대의 시대적 특성을 부각시키는 목적 아래 동아시아 20세기사를 정리해보고 싶은 겁니다.
 
더 길게 늘어놓고 싶지만 듣고 싶어 하시는지도 모르는 채 독백을 너무 길게 하기가 좀 거시기하군요. 흥미 느끼시면 내 블로그 orunkim.tistory.com 의 "뭘 할까?" 카테고리를 살펴봐 주세요. 나는 생각나는 걸 거기다 대개 적어둡니다.
 
이 선생님 공부 잘 펼쳐지기 바라며 불쑥 보내는 글 맺습니다.
 
김기협 드림
 

 

 

 
 

김기협 선생님.

메일을 받고, 무척 기뻤습니다.

제가 즐겨 읽고 신뢰하는 선생님이 '애독자'라 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이미 선생님 블로그도 종종 훔쳐 보곤 했던,

저야말로 진짜 '애독자'임을 밝혀둡니다.

 

선생님의 관심사는 저와 통하는 구석이 매우 큽니다.

다만 공동 작업을 하기에는 제가 너무 모자랍니다.

전 아직 박사 논문도 제출 못한 학생에 불과합니다.

작년부터 이곳에 머물며 논문 작업 중에 있습니다.

정식 소속은 연세대 동양사 박사 과정이고요.

논문은 '냉전기 중국과 아시아'로 범범하게 쓰고 있습니다.

이와나미 동아시아사에도 이 부분은 좀 취약했지 싶습니다.

 

한때는 지금 연재하고 계신 '해방일기' 비슷한 주제도 염두에 뒀습니다.

1945-1949년 사이의 동아시아의 중도파/합작파 들이라고 할까요.

그들의 '가지 못한 길'을 거두어서 헌정하고 싶었더랬죠.

이미 선생님이 충분히 하고 계셔서, 한국은 더 손 델 여지가 없겠더군요.    

헌데 저도 체질적으로 아카데미에 딱 들어맞지는 않아서,

즐거운 일 하나는 하자 싶어 프레시안 연재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차, 선생님 메일을 받고 신이 나 있네요.

 

전 올해 말까지는 논문 마치고,

아시아-캘리포니아에 대해 조사 좀 해볼까 싶었습니다.

기왕 여기 머무르는 김에, 이곳에서만 할 수 있는 작업을 해보자 싶어서요.

차이나타운, 코리아타운, 리틀도쿄, 리틀사이공 등등을,

태평양을 넘나드는 시각으로 재조명하면 재밌겠다는 두리뭉실한 생각입니다.

그리고 내년 중반부터는 베트남에 갈 계획입니다.

동아시아 공부 하면서, 베트남어도 익혀야 겠다 싶어서요.

지금 학위 논문 주제가 냉전기 중국이 바라 본 아시아라면,

다음 작업에서는 그 동시기에 주변/아시아가 바라본 중국을 짚어볼까 합니다.

저로서는 특히 옛 조공국이었던 북조선, 북베트남 등에 흥미가 갑니다.

 

말씀하신 세 주제 가운데,

1)은 제 역량으로 직접 감당하기는 벅차 보입니다.

남들이 해둔 것 활용해서 생각을 정리하는 정도겠지요.

2)와 3)은 저도 욕심이 마구 솟는 주제인데, 

당장 어떤 묘안이 떠오르지는 않네요.

힘도 합치라면 양 쪽이 균형이 맞아야 하는데,

저에게 선생님은 말 그대로 '선생님'입니다.

제가 묻고, 선생님이 답해 주시는 것은 가능하겠지요.

 

혹 '동아시아를 묻다' 작년 글도 보셨는지요?

친구 윤여일 군과 주고 받는 식으로 전개했다가, 결과적으로 실패 했는데요.

제 주변머리로 떠오르는 방식은 그 정도 뿐입니다.

어차피 지금은 '해방일기' 작업이 으뜸 이시니,

학생 하나 앉혀두고 묻고 답하며 선생님의 생각을 정리해 가실 수는 있지 않을까 해서요.

제 역할은 그런 방향으로 일조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을까 싶습니다.

 

반가움과 감사함을 담아 인사 드립니다.

건필하시고, 건강하세요.

 

-이병한 드림

 

 

 

 

강양구 기자에게 이 선생 주소 달라니까 "통할 줄 알았어요." 하면서 웃던데, 한 차례 메일 받아보니 "역시~" 싶군요. (연세대 동양사 박사과정 직계 후배시라니까 "이 선생" 뒤에 "님" 자가 슬그머니 없어지네요.)
 
2009년 말 <망국의 역사> 작업을 시작하면서부터 남의 글을 많이 못 보게 됐어요. 정리돼 있는 자료 보기 바빠 새로 나오는 글 읽을 틈이 별로 없게 되었죠. "동아시아를 묻다"를 서신 형식으로 올릴 때 역시 제목 때문에 두어 번 봤는데 꼭 다 찾아 읽어야겠다는 생각은 안 들었습니다. 그러다 혼자 정리해 올리는 글을 어쩌다 한 번 보고는 다 찾아 읽게 됐죠. 처음에 꽂혔던 게 유구-오키나와 얘기였던 거 같습니다.
 
내가 구상하는 작업 중 (1) "유럽"과 (2) "중국"은 과제의 성격상 취향이 작용할 여지가 크고, 최소한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준비를 내가 대충 갖춰놨다고 생각합니다. 어렵게 생각하는 것이 (3) "20세기"죠. 욕심이 커서 어렵게 생각되는 면이 있겠죠. "유럽"과 "중국"이 한국 독자들에게 좋은 설명을 제공하기 위한 기능적 과제라면 "20세기"는 21세기 전 세계인에게 하나의 관점을 제공하는 이념적 과제가 되기 바라는 욕심입니다.

 

"20세기" 같은 과제는 이제 보니 이 선생 같은 이도 어느 단계에서는 시도할 만한 것 같군요. 어차피 나도 본 작업을 2015년 이후로 생각하고 있고 이 선생도 학위논문 이후의 일이 될 테니 천천히 얘기를 나눠봅시다. 이 선생 도움을 받아 내가 하는 길, 내 도움을 받아 이 선생이 하는 길, 함께 힘을 합쳐 하는 길 모두 열어놓고 생각해 보죠.
 
젊은 분인 줄은 알았지만 이번에 알아보고 너무 젊은 분이라 깜짝 놀랐어요. 미국과 유럽의 동아시아학 풍토를 웬만큼 아는데, 어떤 배경에서 저런 선수가 나왔는지... 기본 개념들에 대한 관점을 내가 이만큼 깊이 공감할 만한 방향으로 전수해 줬을 만한(이 선생 나이로 봐서 짧은 기간에) 배경이 떠오르지가 않거든요. 나 자신은 남들 하는 일 않고 남들 안 하는 짓만 하는 다년간의 딜레탄티즘을 통해 겨우 터득한 건데... 이 선생 공부해 온 이력이 무척 궁금합니다.
 
내가 하고 싶다, 내지 해야겠다고 생각해 온 방향의 일을 꼭 내 손으로 하지 않아도 이 선생 같은 분들이 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기쁩니다. 연부역강하신 것이 부럽기도 하고요. 말 튼 김에 앞으로 얘기 많이 나누기 바랍니다.
 
쓰다 보니 생각나는데, 우리 메일을 내 블로그에 올려도 괜찮을까요? 내 블로그에 들어와 보셨다니 알겠지만, 나는 중요한 생각과 행동을 가급적 모두 블로그에 올리려고 애쓰거든요. 앞으로 얘기 나누다가 주제가 뚜렷이 세워질 때는 프레시안 지면에 올리게 될 수도 있을 텐데, 그냥 만연히 나누는 얘기도 일단 블로그에 올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공개에 적합치 않은 내용은 먹칠해서.

 

답장 아주 반가웠습니다. 객지에서 건강 잘 살피세요.
 
 
 

 

김기협 선생님,

메일 감사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알아주고 인정해주는게 공부하는 사람의 낙이지요.

덕분에 큰 기쁨을 누리게 되었음을 전합니다.

 

박사 논문이 겨우 공부의 출발점인데,

공부 이력까지 늘어놓을 것은 없습니다.

학부때 사회(과)학 공부만 들입다 하다가,

하버드 옌칭 도서관 가서는 정작 제가 읽어낼 자료가 거의 없음에 충격을 받았더랬습니다.

정작 동아시아 출신인데, 동아시아 도서관에서 막막해졌던 경험이,

저 나름으로 '동학'으로 회심하는 계기였습니다.

그때부터 한국 근현대사 공부를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일본, 중국 등으로 관심이 넓어지지 않을 수 없더군요.

부모님 이름도 한자로 쓰지 못하다가,

중국어, 일본어 시작한 것도 '21세기'가 지나고 나서입니다.

도쿄와 상하이에서 1년씩 머물면서,

동아시아의 '실감'도 갖출려고 했었고요. 

 

제 지도교수는 백영서 선생님입니다.

지금 국학연구원 원장이고, 창비 주간도 하시지요.

아무래도 그 분의 영향이 없을 수 없습니다.

'탈제국'을 외치는 동아시아 좌파 또한 백 선생님을 포함한,

창비 그룹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고요.

창비에서 펴낸 <동아시아의 지역질서>라는 책에서,

 제국의 교체라는 시점으로 동아시아사를 다룬 바도 있습니다.

 

선생님 블로그의 백미는,

그런 단상과 일상을 적는 곳이던데요.

이곳에 오면서 챙겨온 책 중에 <역사 앞에서>도 있습니다.

기록하는 습벽도 유전인가 싶더군요. ^^ 

저도 블로그의 한 줄 끼어들 수 있다면, 영광으로 삼겠습니다.

 

제가 쓰는 글에 부족한 지점이 있으면,

언제든 한 수 가르쳐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스승 겸 선배를 얻은 것이라 여기고 있겠습니다.

 

건필, 건강하세요.

 

-이병한 드림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