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20일, (금) 오후 2:01
 

 

20여 년 전 유럽에 자주 다닐 때 그곳 지식인사회의 '친구' 관계를 무척 부러워했죠. 사제간에도 퍼스트네임으로 서로 부르며 친구 관계를 바탕에 깔아놓고 지내다가 스승 노릇이나 제자 노릇을 더러 하게 되면 그 바탕 위의 무늬처럼 받아들이는 거죠. 어제 메일 끝에 '스승', '선배' 같은 말을 쓰셨는데, 나는 일단 '친구'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에 관해 이 선생처럼 가까운 생각과 느낌을 함께 가진 '친구'와 만난다는 것이 무척 반갑습니다.
 
백 선생이 지도교수라는 사실로 약간은 이해가 됩니다. 이 선생 관점이나 태도에 그분의 보탬이 얼마간 있었겠죠. 우리 세대에서는 나도 백 선생 담론에서 참고되는 것을 많이 얻는 편이지만 다소의 거리를 느끼는데, 이 선생에게서는 그 거리가 훨씬 적게 느껴집니다. (백 선생 얘기 나온 김에... 1993년 내가 논문 심사받을 때 백 선생이 막 연세대에 부임했어요. 하마트면 내 논문을 심사하는 불편한 위치에 설 뻔했다고 백 선생이 말하며 웃곤 했죠.)
 
첫 답장에서 "유럽" 프로젝트에 대해 "남들이 해둔 것 활용해서 생각을 정리하는 정도겠지요."라고 하셨는데, 사실 나는 "중국"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이에요. 그래서 그 두 가지를 "기능적 과제"로 생각하는 거죠. 이 선생은 더 창조적인 작업으로 끌리는 모양인데, 그 점에서는 나랑 차이가 있군요. 나는 꼭 해야 할 일이란 기준으로는 "20세기"보다 "유럽"과 "중국"을 앞세웁니다. 꼭 하고 싶은 일이란 기준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述'과 '作'의 차이로 생각합니다.

 

사실 "기능적 과제"라곤 해도 학계의 통상적 기준으로는 엄청 독창적인 작업이 되겠죠. 공부해 오는 과정에서 중요한 모델로 삼은 두 사람이 Jacque Gernet 와 Jonathan Spence 인데, 내가 생각하는 "기능적 과제"란 것이 제르네의 업적을 모델로 한 겁니다. 자기가 중국 문명에 들이댔던 것 같은 큼직한 좌표계를 끄집어내 유럽에 들이대는 꼴을 그분이 보면 뭐라 할지...  (자기 아버지한테 고자질하지 않을까? 루이 제르네는 당대의 고전학자였다고 들었어요.)
 
통하는 게 많은데 모처럼 뚫리니 매일 쓰게 되네요. 하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겠죠. 블로그에 올리기로 하길 잘한 것 같습니다. 두 사람 사이의 관계로 끝나는 게 아니라 우리 공부와 일을 좋게 봐주는 분들의 시선도 의식하면서 그분들께 잘 해드릴 수 있는 게 뭘까 늘 생각하는 게 좋을 거 같거든요. 아마 이런 식으로 얘기를 나누다 보면 주제를 정해서 프레시안에 내놓을 만한 형식의 글을 쓰거나, 생산적인 교류 방법을 잘 찾아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혹시 알아요? 구경꾼 훈수도 들어올지. ^^
 
피차 상대의 글을 상당 범위 읽어놓은 게 있으니 이야기가 잘 이어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생각나는 게 있으면 서슴없이 털어놓으세요. 교신이 안정된 단계에 이르면 매주 1-2회 이 선생에게 생각 정리해 보내는 시간을 나는 갖고자 합니다.
 
김기협 드림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멀리서 벗이 오면 반가운 법이죠.

세 번째 소식도 기쁘게 받았습니다.

'친구'로 격상시켜 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

 

 '선생', '선배' 운운하는 건 딱히 위계적인 뜻은 아니었습니다.

전 시간의 축적에서 우러나는 내공의 힘을 믿는 편입니다.

먼저 나고, 살고, 공부해온 어른들에 대한 예의의 표현입니다.

'새로움'의 태반이 치기를 가장한 '가벼움'인 경우가 많으니까요.

무식해서 용감했던 20대의 반성이기도 하고요.

 

저도 기질적으로 중후하지 못한 구석이 큽니다.

20대부터 시사잡지 기획하고, 잡글 쓰는 재미가 들려서,

긴 호흡을 요하는 작업을 버거워하는 편입니다.

백영서 선생님이 중심을 잡는 역할을 해주셨죠.

한때 붕붕 떠다니던 저의 '저널/너절리즘'을 가혹하게 비판하고,

아는 것의 8할만 말하라는 엄격함도 매번 새기고 있습니다.

얼치기 감각에 학구를 채워 넣는 데, 그 분의 공이 컸습니다.

일종의 제 안의 검열자인 셈입니다.

밖으로 나가더니 또 프레시안 연재 시작한 걸 보고,

혀를 끌끌 차셨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헌데 백 선생님 담론과 제 글의 '거리 차'는 무엇이고, 왜 이는 것일까요.

제가 궁금해지는 대목입니다.

 

얼핏 저는 선생/선배들과 퍽이나 다른 세계로 진입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제가 태어난 해에 중국이 죽의 장막을 걷어 치웠습니다.

물론 스스로 쳐둔 장막도 아니었지만요.

얼추 일흔까지는 정신줄 놓지 않고 산다고 생각하면,

2050년의 중국, 동아시아, 세계를 목도하게 되는 것이지요.

1950년에 한국전쟁이 있었고,

그 백년 전에 아편전쟁이 있었습니다.

그 200년의 역사가 뒤집히는 것이로구나.

제 삶의 궤적을 그 변화와 포개어서 상상력을 발동해 보면,

나는 "반전시대"를 살게 되겠구나 싶었던 것입니다.

신/구의 반전이기도 하고, 동/서의 반전이기도 할테고요.

서세가 정점이었던 시절에 태어난 선생/선배 세대와,

그 끝물에 때어나 반전기를 살아가는 세대의 차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근대(성)에 대한 컴플렉스 없이, 좀 더 과감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할까요.

 

지중해 문명권의 기독교/이슬람 분기와,

그로부터 말미암은 유럽(근대)문명의 발흥은 흥미로운 구도라고 생각합니다.

헌데 유럽-중국이라는 큰 구도 또한,

자칫 20세기의 반복에 그치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2050년이면 인도와 이슬람도 (예전처럼) 우람해 지겠지요.

요즘 글로벌 히스토리가 뜨는 이유이기도 할 테고요.

아프로-유라시아의 큰 맥락에서 유럽도 제 자리와 제 몫을 찾게 되지 싶습니다.

이웃 일본만 하더라도 문부성 차원에서 중국-인도-이슬람 연구에 집중 투자하던데,

그런 기초체력이 부족한 한국 상황이 참 아쉽고 안타까운 지점입니다.

 

'술'이 '작'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지도 않습니다.

본래 큰 얘기에 매혹을 느끼기도 하고요.

하지만 아직 '작'을 이룬 것도 없을 뿐더러,

'술'이야말로 대가들의 몫이라는 생각입니다.

언급하신 두 분도, 경지에 들어서야 '술'이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요.

타고난 재능도 있겠지만, 역시나 '술'은 온축의 결과라고 보입니다.

인문학은 신동을 허락치 않는 학문 같고요.   

저도 오십 줄은 넘어 문리가 좀 트이면 '술'도 해볼만 하지 않을까요.

선생님의 '역사 에세이' 같은 게 좋은 참조 사례가 되리라 여겨집니다.

그렇게 '술술' 풀어내는게 거저 이루어진게 아니시겠죠.

 

그런 욕심은 있습니다.

예수도, 공자도, 부처도 다 '문답식'으로 가르치고 (그 자신들도) 배웠습니다.

작금의 강의와도 판이하고, 저술과도 또 다르지요.

기왕 서신 왕래가 시작되었으니,

저는 모처럼 묻고 답하는 과정 자체를 즐거움으로 삼는,

본래의 학문을 수련하는 기회의 장으로 여기겠습니다.

 

매주 주실 편지들이 벌써부터 궁금해 지네요.

 

-이병한 드림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