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undations Of Confucian-Chinese Civilisation / 유교-중국문명의 기초

 

이들과 기원도 다르고 역사적 발전의 궤적도 다른 또 한 종류의 문명을 살펴보도록 하지요. 긴 세월을 통해 다른 문명들과의 접촉을 계속 가지면서도 고유한 특성을 지킨 것으로 보이는 유교-중국 문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교문명의 특성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문명의 성격을 살피는 데 특별히 중요한 하나의 영역이 종교입니다.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에 퍼진 유일신의 종교가 있고 샤머니즘과 조상숭배에서 세속적 백가(百家)사상으로 넘어간 중국이 있습니다. 그 사이에는 다신교적 신앙과 관습을 가진 인도-유럽 세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된 무신론적 불교 경전도 있습니다.

 

각 문명의 발생에 결정적 역할을 한 지식의 원천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 양쪽 다 바이블이든 코란이든 성서(聖書)가 모든 사상의 출발점이고 지혜의 그릇이었습니다. 두 종교 모두 그리스-로마 세계관과 교섭을 가졌습니다. 기독교 쪽은 그 교섭 단계를 잊어버렸고, 이슬람 쪽은 얼마동안 살펴보다가 결국 버리고 말았습니다. 천년이 지난 후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로마 고전을 흡수할 새로운 계기를 가졌고, 그로부터 우리 현대문명이 빚어져 나왔습니다.

 

중국 문명의 출발은 이와 달랐습니다. 수십 개 국가가 수백 년간 전쟁을 벌이며 지내다가 결국 통치의 정당성은 전쟁으로 결정된다는 법가 원리를 진나라가 세웠습니다. 그러나 진나라는 오래가지 못하고 지속적 중앙집권 체제를 세운 것은 그 뒤의 한나라였습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어떤 문헌을 경()으로 삼을지에 대해서도 합의가 없었습니다. 여러 계열 사상이 법가의 딱딱함을 완화하는 데 활용되다가 백년이 지난 한 무제 때에야 유가 사상이 가장 효과적인 통치수단으로 낙착되었습니다.

 

한나라 멸망 후 4백 년간 분열기에 통치술의 여러 가지 실험이 있었습니다. 중앙아시아에서 온 유목민이 유가-법가 구조를 물려받아 강화하려 하기도 했고, 인도에서 수입한 불교도 활용되었습니다. 차츰 유가의 효용성이 가장 뛰어난 것으로 판명되면서 그쪽 경전이 전면에 나서고, 통치에 참고할 역사서도 그쪽에서 고르게 되었습니다. 당나라 초기에 유가 문헌이 공교육의 필수 교재로 자리 잡고 송나라 때인 11세기에는 6(六經)이 학문의 기본 텍스트로 정해졌고 13세기까지 13경으로 늘어났습니다.

 

경전의 범위를 정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사실이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지식이 인위적인 것이며 그 평가에 시간이 걸린다는 믿음을 보여줍니다. 11-12세기 송나라 황제들은 유가의 세련된 가르침을 최고의 성취로 보았습니다. 그 가르침이 몽골족의 정복을 막아주지는 않았지만, 14세기에 명나라가 한족 통치를 회복하자 그 원리를 재확인하고 모든 지식을 네 개 범주로 정리했습니다. (, 유가 경전), (, 역사기록), (, 철학과 기술), (, 글 모음)의 순서로 중요성을 가졌습니다.

 

중국 문명이 이슬람 문명과 같은 식으로 유럽 문명과 대립한다고 보는 헌팅턴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뿌리를 함께하는 상대와 수백 년간 대립을 겪어 온 이슬람 세계와 달리 중국은 19세기까지 기독교 세계와 별 접촉이 없었습니다. 중국인이 유럽의 과학과 군사력과 경제 능력이 우월함을 인정하고 배우러 나서면서 관계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중국인이 경탄한 이 기술들이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이 공유하는 유일신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세속적 그리스-로마 유산의 산물이라는 것이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Can Civilisations Be Borderless? / 문명에는 경계선이 꼭 있는 것일까?

 

이제 문명들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문명들 사이에 경계선이 없어서 지속적 접촉으로 혜택을 얻을 수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언제나 확고한 경계선이 있어서 마주치기만 하면 충돌하게 되어 있는 것일까요? 거대한 도전 앞에서 문명을 지키려 애쓴 근대중국의 경험에서 문명의 경계선 없는 속성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의 영역에서 참고가 되는 사례들을 뽑아 보겠습니다.

 

오래전부터 중국 학자들은 <시경>, <서경>, <예기>, <춘추><역경>십익(十翼)” 등이 중국의 초기 역사를 담은 것으로 여겨 왔습니다. “는 좋은 정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의 고전에는 보편적 원리들이 정착되었고 의 역사서는 제도적 기억방법과 정치의 구조를 제공했습니다.

 

중국이 다민족 국민국가로 모습을 바꾸는 오늘날에는 고전의 보편적 타당성에 대한 믿음을 지켜가기 어렵습니다. “의 고전은 이제 중국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 가치가 보편적인 것이 아니고 국가적인 것이라면 문명의 규범이 아니라 배타적 이데올로기일 것입니다.

 

그래서 중국의 사상가들은 고전의 보편적 타당성 앞에 자가당착의 입장에 빠졌습니다. 참으로 중국을 위대한 문명을 가진 현대국가로 내세우고 싶다면, 중국의 포부를 표현하는 데 의 영역을 계속 활용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고대세계에서 정치절서를 세우던 과정의 요약 설명으로 고전들을 본다고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한 왕조의 기초가 된 경험들이 고전들에 담겨 있습니다. 그 후의 경험들은 ”, 역사서에 편입되어 2천 년간 중국의 구조와 형태가 결정되어 온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 경-사 연속체를 오늘날의 인문학과 사회과학에 비교할 수 있겠는데 다만 중국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 뿐입니다.

 

경전을 세속적인 시각으로 살펴보는 길을 통해 중국은 그 필요에 맞는 근대성이 어떤 것인지 결정할 수 있습니다. 중국인은 과거 경험의 총합 위에 세워진 실제적 지식의 거대한 영역들을 마음껏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 경험의 총합에는 여러 사상과 제도, 정책 결정의 기록, 법률과 규칙, 토지와 자원의 보고서 등 오랜 세월 동안 정치의 수준을 높여준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중국의 지식 유산에는 사이의 전일론적 관계가 들어 있습니다. 수천 년간 지도자들이 경계선 없는 제국을 운영하게 해줌으로써 문명에 도움이 된 측면입니다.

 

2015년 베이징 포럼 "문명의 조화와 만인의 번영" 개막 강연 내용.

 

Posted by 문천

 

모든 인간집단은 각자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문화는 기술 발전과 결합해서 문명이 되기도 했습니다. “civilisation”은 인간이 야만 상태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가리키는 말로 17세기 유럽에서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고대세계에서 교양을 빚어낸 도시생활과 시민집단을 묶어준 가치관과 물질조건의 출현을 가리키는 뜻으로도 쓰이게 되었습니다.

 

동아시아에는 문화나 문명과 같은 뜻의 말이 없어도 깨인 집단과 깨이지 않은 집단 사이의 구별은 늘 있었습니다. 위계질서의 인식에 중점이 있었는데, 한쪽에는 친족집단 내의 혈연관계가 있었고, 다른 쪽에는 국가구조의 안정성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19세기부터 변화가 일어난 것은 산업화된 서양에서 문명의 새로운 기준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접촉 초기 유럽인들은 동아시아문명의 위대함을 인정했으나 19세기에 계속 군사적 승리를 거두면서 그 문명은 이제 쇠락한 것이 되었다고 판단했습니다. 중국인들은 자기네 문명에 자신감을 보이면서도 필요한 점은 서양문명에서 뽑아 배울 자세를 취했습니다. 중국 지도자들은 서로 다른 문명 사이의 경계선이 문명과 야만 사이처럼 쉽게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반응의 과정을 되짚어보며 과연 우리가 경계선 없는 문명의 시대에 접어든 것인지 살펴보겠습니다.

 

 

Perspectives From Two Political Scientists / 후쿠야마와 헌팅턴의 관점

 

짧은 강연으로는 문명이라는 주제를 제대로 논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는 문명의 역할을 논한 미국 사회과학자 두 사람의 주장을 검토해 보겠습니다. 하나는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론이고 또 하나는 그 반응으로 나온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론입니다.

 

후쿠야마의 결론은 현대문명의 한 갈래가 완전한 승리를 거뒀다는 것이고, 인간의 궁극적 성취가 어떤 조건 위에서 이뤄지는 것인지 이제 알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과학혁명 위에 세워진 자유민주주의 국가와 자본주의 세계경제 등 서양에서 유래한 제도들이 궁극적 승리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경쟁하는 문명들로부터 좋은 사상과 제도를 받아들이는 포용력에 그 성공의 열쇠가 있었고, 그 틀을 전 세계가 따라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헌팅턴은 종점이 아직 멀리 있고 우리 앞에는 문명의 충돌에 따른 투쟁의 시대가 기다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많은 문명이 이 세상에 존재했고, 그중 적어도 둘, 유교문명과 이슬람문명은 지금의 권력체제에 도전하는 중대한 위협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헌팅턴이 불러온 논쟁에서 중요한 질문은 문명이란 것이 충돌하게 되어 있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문명들이 서로에게 배워가며 인류의 발전 기반을 확충해 온 많은 사례를 헌팅턴의 비판자들은 지적했습니다. 호전적인 일부 인간들의 충돌이지, 문명 자체의 충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후쿠야마와 헌팅턴 모두 과거로부터 미래에 관해 배울 것이 많다는 관점을 보여주었습니다. 후쿠야마는 나아가 정치질서의 기원을 탐색했습니다. <정치질서의 기원 The Origins of Political Order>(2011)에서 그는 인간 질서의 열쇠가 국가에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양대 세력 사이의 중앙 균형이 하나의 초국가로 대치된 후 유일한 슈퍼파워 미국은 어떤 방법으로 얼마나 오래 그 지배적 위치를 지켜나갈까요?

 

그 질문에 바로 대답하기보다는 문명의 기원과 속성을 질문에 연결해 보겠습니다. 문명이 성공할 수도 있고 죽어갈 수도 있다는 아놀드 토인비의 생각에 수긍하면서, 문명이 탄생하고 쇠퇴하고 사망하는 이유를 찾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성공한 것으로 널리 인정받는 문명들을 살펴보면서 그 역사적 발전 과정에 어떤 특이점이 있는지 따져보겠습니다.

 

지금 세계에서 서양문명이 가장 강한 문명임을 인정합니다. 두 개 문명이 그 서양문명에 도전할 수 있고 실제로 도전을 시도하고 있다는 헌팅턴의 생각도 받아들이겠습니다. 유교-중국 문명과 이슬람문명입니다. 저는 오늘의 세계적 문제에 대한 보다 분석적인 시각을 통해 문명 간 교섭을 지금 가로막고 있는 것이 한편으로는 동족상잔 성격의 전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뿌리 깊은 오해라는 견해를 제시하겠습니다.

 

 

Common Roots Of Christianity And Islam / 같은 뿌리에서 나온 기독교와 이슬람

 

서양문명의 핵심 요소들이 이슬람문명과 비슷한 일신교적-초월적 신앙에 뿌리를 둔 것이라는 사실을 먼저 지적합니다. 서양문명과 이슬람문명은 유대교와 지중해권 고대문화의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유대교로부터 기독교의 여러 교파와 이슬람의 순니파와 시아파가 갈라져 나왔습니다. 그 교파들이 다신교 적대세력을 어떻게 상대했는지, 기독교가 어떻게 그리스-로마 문명에 승리를 거두었는지, 그 후 분열된 기독교 집단들이 예언자 마호메트의 영성으로 뭉친 아랍인에게 세력권의 절반을 정복당하기에 이르는지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슬람 학자와 사상가들은 그리스 사상을 소화해 초기의 과학 발전을 이뤘습니다. 그러나 후에 합리적 분석과 과학적 방법론을 거부하고 자기네 성서를 모든 지혜의 유일한 원천으로 여겼습니다. 그 문명은 치명적인 역주행을 통해 기도와 칼에만 의지한 독점무역으로 마호메트 혁명의 영광을 지키는 데만 매달렸습니다.

 

그들의 적 기독교인들은 십자군으로 반격했으나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자기네가 우월한 문명이라는 공허한 주장만 되풀이했습니다. 자기네가 심각한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후에야 나르시시즘에서 깨어나 상황을 새로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인도와 중국 등 다른 문명권과 육로가 막혀 있던 유럽인은 힘과 자신감을 되찾을 길을 찾아 바다로 눈을 돌렸습니다. 해로 개척 성공에 이어 놀랍도록 왕성한 활동으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펼치면서 열세에 몰려있던 유럽이 압도적인 무력과 재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기독교인과 무슬림 사이의 싸움이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누구 신이 진짜 신이냐 하는 다툼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이 싸움이 격화된 것은 그리스-로마 문명을 적극 받아들인 세속파와 이를 신성모독으로 배격한 근본주의적 신앙파 사이의 대립 때문입니다. 이 대립은 산업자본주의와 세속적 근대국가를 출현시킨 근대문명과 격렬한 성전(聖戰)을 통해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복고파 사이의 대결로 이어졌습니다. 헌팅턴이 문명의 충돌을 본 것이 이 장면입니다. 양측의 영성이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고, 피차의 역사가 그렇게 뒤얽혀 있고, 지난 1500년간 양측의 성쇠를 좌우한 사상과 제도를 서로에게서 배워온 사이인데, 어떻게 그 충돌의 주체가 문명 자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Posted by 문천

 

Impact of the Rise of a New China / ()중국의 충격

 

이런 상황에서 동방학적 중국학은 쇠퇴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다가 1956년 파리 회의에 중화인민공화국의 원로-중견 학자 네 사람이 참석하면서 흥미로운 장면이 펼쳐졌습니다. -식민주의 의식으로 동방연구 자세에 불신이 일어나던 시점이었죠. 오래지 않아 유럽의 중국학자들은 유럽 중국 연구자협회(European Association for Chinese Studies)”라는 새 간판을 내걸고 현대중국 연구를 연구 분야에 포함했습니다.

 

신중국의 성립 때문에 일어난 변화였습니다. 중국을 냉전의 적국으로 여기던 1950년대 말의 미국에서 시작된 변화입니다. 새 세대 연구자들이 신중국이라는 현상을 연구하도록 연구비가 제공되었습니다. 중국도 세계 안에서 그 역할을 새로 설명하기 위해 과거의 역사를 활용하고 나섰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고전적 중국학 연구자들도 태도를 바꾸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중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설명하지 못한다면 쳐다볼 사람이 없게 될 형편이었지요.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중국의 여정에 중단과 연속의 단계들이 반복되었다는 사실을 그들이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통적 한학과 현대적 중국 연구를 통합하는 협력의 길이 열렸습니다.

 

중국학이 동방학의 한 분야일 때는 근대 들어 문명의 보편적 기준이 세워졌다고 하는 유럽인의 믿음에 따랐습니다. 진보를 위해서는 무조건 이 기준에 맞춰야 한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과학혁명과 산업자본주의를 앞세운 유럽인의 주장에 일리가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이데올로기는 아니었습니다. 지난 150년간 중국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보면 지금의 중국인들이 자기네 풍부한 유산의 일부라도 지키고 싶어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초기의 중국학 연구자들은 중국을 문명의 비교연구 영역으로 끌어들였습니다. 그들은 중국 문명이 지중해 지역 문명들과 어떻게 다른 것인지, 그리고 중국의 가치관이 인도나 중앙아시아-북아시아 유목사회의 가치관과 어떻게 비교될 수 있는지 밝혀냈습니다. 오래된 문명들의 연구를 체계적으로 연결해 중국 문명의 독특한 성격을 밝혀낸 것입니다. 고대 중국의 문화적 정치적 성취를 진심으로 존중하는 마음에서 출발한 이 방향의 연구는 당시 유럽에 많은 영향을 끼치기도 했습니다.

 

1793년 매카트니 사절단의 건륭제 방문 이후 찬탄이 실망으로, 그리고 불신과 경멸로 옮겨갔습니다. 청나라가 그리 강하지 않고 그 백성들도 가난하고 불만이 많다는 사실을 제국주의 세력들이 알게 되면서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청나라 황제는 곧 자리를 잃을 동방 군주의 하나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19세기 말이 되자 서양 열강들은 중국의 사상과 제도가 승승장구하는 자기네 가치관에 따라 모두 바뀔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연구자들은 중국의 국가와 사회를 연구하는 데 과학적 방법을 쓰게 되었고 전통적 중국학은 힘을 잃었습니다.

 

 

Chinese Scholars Respond / 중국 학자들의 반응

 

중국의 학자들은 새로운 상황에 대한 대응에서 방향을 잘못 잡기도 했습니다. 해외유학생들이 돌아올 때 첫 번째 착오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통적 학문을 비판하고 원하는 진보를 이룰 다른 방법들을 찾았습니다. 하나의 두드러진 예가 1840년대 아편전쟁을 중국근대사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 이전의 역사를 모두 고대사, “봉건적인 것으로, 심지어 퇴행적인 것으로 보면서 중국 몰락의 원인을 찾는 대상으로만 여긴 것입니다.

 

두 번째 착오는 내전과 일본의 침공 앞에 국민당 정권이 무너질 때 나왔습니다. 중국학-한학과 경쟁하기 위해 나온 근대적인 국학(國學)”은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했습니다. 국학을 대신한 것은 마르크스-레닌주의 틀에 맞춘 이데올로기 역사서술이었습니다.

 

그후 1950년대에서 70년대까지 30년 동안 서방 연구의 전면적 배척으로 인해 중국 연구가 혼란에 빠졌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 안에서는 볼 만한 연구 성과가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한편 서양에서 일하는 중국인 연구자들은 서양 연구자들과 협력하기 시작했습니다. 홍콩과 타이완으로 밀려난 중국 학자들이 근대적 중국학 연구자들과 협력을 통해 국학의 전통을 쇄신하고 나섰습니다.

 

덩샤오핑 개혁을 계기로 새 단계가 시작되었습니다. 학술교류가 재개되면서 인민공화국 학자들이 사회과학자들의 공헌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중국 내 연구자들은 제쳐두었던 국학을 되살려내는 작업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수백만 해외 중국인 중에서도 모국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일어났습니다. 다른 종족과 문화들 사이에서 생활하고 일하면서 중국이 어떤 나라이며 중국인이라는 사실의 의미가 무엇인지 독특한 시각을 키우게 된 것입니다. 그들의 자아인식으로부터 새로운 종류의 한학이 나타나 중국 연구의 영역을 더욱 넓혔습니다.

 

 

Defining Pluralist Sinology / 복합적 중국학이란 어떤 것인가?

 

1980년대의 어느 시점에서 복합적 중국학이 나타났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중국의 흥기로 인해 외부의 관심이 늘어나고 대륙의 연구 활동이 확장된 것이 그 조건입니다. 1980년대 국제학회에서 타이완과 홍콩 학자들이 자기네 작업을 한학이라고 부르자고 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서양 학자들은 대륙 학자들과 힘을 합쳐 한학을 발전시키자고 했고, 대륙 학자 중에도 이 제안에 호응하는 기색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중국 연구의 중요한 방향을 몇 갈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참혹한 몰락을 겪은 후 다시 일어나는 한 오래된 문명의 연구입니다. 서방의 지배에 도전하는 한 새로운 세력의 연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과거에 존중받던 위치를 되찾고자 하는 한 민족국가의 연구이기도 합니다. 중국 연구에는 이 여러 가지 뜻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의미를 놓고 본다면 복합적 중국학의 넓은 길이 역시 적합한 방향 같습니다..

 

여기서 복합성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세 개 층위의 협력을 통해 지난 여러 세대 중국학의 가장 뛰어난 성과를 활용할 수 있으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초기의 한학 내지 동방학적 중국학이 하나의 층위이고, 백년 간의 국학 연구가 또 하나, 그리고 사회과학의 성과를 포괄하는 새로운 중국학이 또 하나의 층위입니다.

 

중국 내에서 일어난 국학은 서양 학자들의 한학과 다른 것이었습니다. 중국 학자들이 보기에 한학은 골동(骨董)의 취미인 반면 자기네 국학은 경세(經世)의 전통에 입각한 진지한 노력이었습니다. 여기서 사회과학의 역할이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사회과학은 물질적 진보라는 현세적 문제를 다루는 학문으로, 서양식 경세학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유럽과 일본의 대학을 모델로 19세기 말에 만들어진 중국 대학들은 처음에 중국을 제대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중국 고전을 섭렵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젊은 학자들은 중국의 발전을 위해 현대적 연구방법이 필요하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경제학, 법학과 행정학, 사회학, 지리학과 심리학이 매력을 끌었고, 그 본석적 방법론을 받아들인 연구자들은 전통적인 전체론의 관점이 비과학적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렇다 해서 전체론적 관점이 아주 사라지지는 않았으나 새로운 종류의 협력관계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중국의 학문은 그런 방향으로 폭과 깊이를 더해 갔습니다. 여러 분야의 기술과 관점을 자발적으로 조합해 내는 과정을 통해 학문의 복합성이 형성되었습니다. 전통적 한학의 연구방법을 현대적 국학의 연구방법과 함께 활용하게 된 것입니다. 중국 안팎의 고전 연구자들이 이제 사회과학 연구방법을 익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복합성에는 반갑지 않으나 피할 수도 없는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강하고 의욕적인 중국이 유일한 슈퍼파워인 미국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두 강대국의 경쟁 속에서 복합적 중국학은 방어를 위해서든 공격을 위해서든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연구자들은 자기 작업에서 직업윤리에 충실할 뿐 아니라 빗나간 견해나 정략적 의도로 불을 지르는 방화범들을 진압해야 할 것입니다. 학문적 지식의 오-남용을 바로잡고 반박하는 일입니다.

 

2020년 탕장(唐獎)상 수상 기념강연 내용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