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 초부터 1905년 7월 사이에 한국인 7,226명이 65척의 이민선을 타고 하와이에 도착했다. 이로써 인접국이 아닌 나라로는 미국이 가장 큰 교민집단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 재미 교민집단은 그 후 해방 때까지도 크게 늘어나지 않았다. 정병준의 <우남 이승만 연구> 213쪽에 인용된 <MIS 비망록>(1943. 3. 19)에 따르면 1940년 미국에는 하와이의 6,851명을 포함해 모두 8,562명의 한국인이 거주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었다.


2백만에 이르던 중국 교민, 수십만에 이르던 러시아 교민에 비하면 아주 작은 교민집단이었지만, 미국의 정치적-경제적 여건 때문에 민족운동의 에너지가 쉽게 발산될 수 있었다. 1908년 스티븐스 저격사건을 계기로 국민회(대한인국민회)가 결성된 이래 미국 교민사회는 해외 민족운동의 한 중요한 기지가 되었다. 미국 교민사회의 임시정부 지지는 임정의 권위에 큰 뒷받침이 되었을 뿐 아니라 중요한 재정적 기반이던 시기도 있었다.


미군이 남한을 점령하자 재미 교민집단은 미국 한국 사이에서 가교의 역할을 맡을 잠재적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1941년 4월 재미 교민의 통일 기관으로 설립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대표 6인이 하지 사령관의 초청으로 11월에 국내에 들어와 제반 사정을 살펴본 끝에 시정 방침 건의안을 군정청에 제출했다. 대표단 활동에 관한 기사 중 눈에 띄는 것이 있다.


在美 韓族聯合委員會 대표단 金秉煥은 明年 1월 10일 국민대회와 임시정부 계획인 特別政治委員會에 대한 태도를 다음과 같이 언명하였다.

“우리 대표단이 귀국후 약 2개월간에 국내정세와 민간여론 파악에 노력하여 왔던 것이다. 우리는 一黨 一派의 주의주장에는 추종할 수 없다. 따라서 明年 1월 10일 개최될 국민대회에도 우리 태도는 분명하다. 즉 韓國民主黨 측에서 개최한다는데 우리는 이 대회에 참석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特別政治委員會는 臨時政府에서 국내 국외 인사들과 국가독립촉성을 목표로 협의한다고 하니 우리는 미약한 힘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참석할 것이다.”  (<자유신문> 1945. 12. 27)


한민당과 이승만이 기획하고 있던 국민대회에 불참하면서 임정 중심의 사업에는 협력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재미 교민사회를 발판으로 30여 년간 활동해 온 결과 해방 후 국내에서 한 개인으로서는 최대의 정치적 권위를 가진 위치에 올라가 있었지만, 교민사회를 대표하는 입장에는 한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대표성의 한계 정도가 아니었다. 미국의 한국인 민족주의자들 중에는 이승만을 민족반역자로 규탄하는 극단적 반대자들까지 있었다. 이승만이 임정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자격으로 미국인 업자에게 이권을 팔아넘겼다는 ‘광산 스캔들’을 1946년 초에 터뜨려 민주의원 의장직에서 낙마시킨 한길수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승만 자신의 처신과 행적에 반대를 불러일으킨 면이 크다. 그는 도덕적 실천으로 지도력을 키우기보다 책략을 통한 영향력 확보에 몰두해 왔고, 그 책략은 혼란과 분열의 수단을 흔히 취한 것이기 때문이다. 초년의 행적은 차치하고, 그의 활동이 저조했던 1930년대를 지나 외교활동을 재개하는 1938년 이후의 일을 살펴보겠다.


재미 교민사회의 민족운동은 1920년대를 지나는 동안 열기가 식었다. 지나친 분열상에서 이유를 찾기도 하지만, 더 기본적인 조건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대공황에 이르는 경기 침체로 교민사회의 여력이 줄어든 것이고, 또 하나는 교민집단의 고령화였다. 재미 교민집단에는 신규 이주자가 극히 적었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초기 이주자들은 활동력이 줄어드는 반면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청소년층은 민족의식이 높지 않았다.


중일전쟁 개전 이후 일본의 침략전선이 확장됨에 따라 재미 한국인의 민족운동이 새로운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일본의 패전 가능성이 떠올랐고, 또 미국 사회에 반일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1939년 3월 하와이를 떠나 워싱턴으로 옮겨가고, 이어 임정에 구미위원부의 부활을 요청했다. 구미위원부는 1919년 4월 이래 이승만의 활동 근거였다가 1925년 봄 이승만 탄핵-면직과 함께 폐지된 기관이었다. 임정은 이 요청을 거부했다. 재미 민족운동이 다시 활성화되어 1941년 4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연합회)가 출범하면서 이승만을 대미외교위원으로 선정하자 임정은 비로소 주미외교위원부를 승인했다.


주미외교위원부를 둘러싼 파란은 이승만이 위원부를 개인 조직처럼 활용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되었다. 미-일간 개전으로 한국인의 민족운동이 활기를 더함에 따라 위원부의 할 일도 많아졌는데 이승만은 자기 계열 이외 사람의 위원부 참여를 거부했다. 1943년 1월 국민회가 항의를 제기했으나 이승만이 독단적 태도를 고치지 않아 결국 1943년 10월 연합회에서 임시정부에 이승만의 소환을 정식으로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외교위원부가 형식적으로는 임시정부 산하기관이지만 실제로는 연합회의 지원으로 성립-유지되는 조직이었다. 그런데 중경 임정은 1년 이상 계속된 이 분규에서 모든 원칙을 어겨 가며 이승만을 지지했고, 이로 인해 연합회가 분열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그러나 김구가 이승만에 대해 이 시점에서 “전폭적인 신뢰”를 갖고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신뢰가 없더라도 김구가 이승만 편을 들어야 할 이유가 있었다.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와의 관계 때문이었다.


미국에는 집중화된 정보기관이 없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루스벨트 대통령이 그 필요성을 느끼고 윌리엄 도노반 대령에게 설치 계획을 맡겼다. 도노반은 1941년 7월 우선 COI(Co-ordinator of Information)를 만들었고, 이것이 1942년 6월 OSS로 확대되었다. 다시 CIG를 거쳐 CIA에 이른 것은 1946년의 일이다.


이승만은 COI 시절부터 도노반의 2인자 프레스턴 굿펠로우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한국인 요원 몇을 OSS 대원으로 추천하기도 했다. 1943년 들어 OSS가 특수부대 훈련 등 중국에서 활동을 늘리자 이승만은 자기가 추천한 OSS 대원들과 통신시설을 이용해 중경 임정과 긴밀한 연락을 취할 수 있었다.


임정은 유명무실한 광복군을 만들어놓고도 그 지휘권을 중국군에 맡겨놓은 상황에서 광복군 확충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OSS에 대한 영향력을 과시하는 이승만을 김구는 긴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1945년 들어 장준하와 김준엽 등이 참여하는 광복군 국내 투입 작전도 OSS에 의지해 진행시킨 것이었다.


이승만은 김구와 임정의 절대 지지를 발판으로 외교위원부를 장악하고 있으면서 임정의 뒤통수를 치는 공작을 진행하기까지 했다. 외교위원부 안에 ‘협찬부’라는 이름으로 내무, 경제, 교육, 정치 등 여러 부서를 설치하려 한 것이다. 1944년 5월 24일 그는 이들 부서에 임명한 측근 인사들에게 친비(親秘) 서신과 함께 사업계획서를 보냈는데, 계획서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새로 수립한 정치 기관의 각 위원부는 완전히 외교위원부의 지명하는 권력 범위 아래 제한되었으며 (...) 새 정치조직체는 한국의 내무와 경제와 교육과 정치와 전쟁 노력을 현시 전쟁 기간과 전쟁 후에 공히 지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우남 이승만 연구> 234쪽에서 재인용)


제2의 임시정부를 만들려 한 것이었다. 요즘 한국 정치계에서 ‘양파’론이 유행하는데, 이승만의 음모와 책략이야말로 까도까도 끝이 없는 ‘원조 양파’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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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지난 1129일 몽양심포지엄의 주제는 여운형, 김규식, 안재홍의 좌우합작운동이었다. 나는 안재홍에 관한 발표를 맡았는데, 준비 중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냉전시대에 관한 우리 사회의 통념을 바꿔볼 여지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냉전시대를 역사 진행상의 필연적 현상으로 보는 통념이 있다. 새로 떠오른 생각은 이것을 변이(變異) 성격의 하나의 반동(反動) 현상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냉전은 1990년대 초에 끝났는데, 그 흔적은 4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지워지지 않고 있다. 특히 우리 사회에는 흔적 정도가 아니라 구조가 버티고 있다. 냉전시대의 필연성을 뒤집어 본다면 그 청산에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그 생각이 떠오른 것은 안재홍이 19356월에 쓴 글 한 편을 읽으면서였다.

 

20세기 현 단계의 인류문화의 특징은, 각개민족의 세계적 大同의 방향, 즉 국제주의적 방향에 향하여 자동적 求心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 하나이요, 그 반면에 각개민족이 이 세계적 즉 국제적 영향 하에 있으면서 오히려 각각 각자의 민족문화로서 純化 深化하려는 의욕 및 그 노력 중에 있는 것입니다. , 가장 온건타당한 각 국민 각 민족의 태도는, 민족으로 세계에, 세계로 민족에, 交互되고 調合되는 민족적 국제주의 - 국제적 민족주의를 형성하는 狀勢이니, 이를 세분하여 말한다면, 가장 핍근하게 상대되는 1국가 1국민과의 관계에 그러하여, 주면서 받고 다투면서 배우는 연속하는 途程에서, 자기의 향상과 발전이 있고 획득과 생장이 있는 것이요, 전 세계 전 국제에 처해서의 1국민 1민족으로서도 그러한 것입니다. 인류의 문화가 그 교통 통신의 급속한 발달에 따라 멀지 않은 미래에 국가와 민족의 界線을 철폐하는 시기가 있음이 미래의 形相이라고 치더라도, 금일에 吾人은 우선 세계의 1민족으로서의 문화적 순화 향상의 길을 강맹하게 걸어 나아가고 있어야 할 일입니다. (미래를 지나 금일에”, <민세안재홍선집> 1, 512)

 

안재홍의 아호 민세(民世)”는 민족주의와 세계주의를 결합시키는 민세주의를 제창하면서 쓰게 된 것이고, 이것이 해방 후에는 신민족주의로 나타났다. 안재홍을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의 민족국가 건설 염원이 좌절되고 분단건국의 결과를 맞은 까닭은 한 마디로 냉전에 있었다. -소 대립의 격화에 따라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한 두 점령국의 협력이 사라진 결과가 한반도의 분단건국이었다.

그러면 안재홍 등 민족주의자들에게 세계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한 허물을 물어야 할까? 나는 원래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위 글에서 말하는 국제주의적 방향은 너무나 타당한 관점으로 보인다. 교통 통신 등 기술조건의 변화는 인간의 활동을 국가나 민족의 울타리에서 풀어내는 방향으로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근래 우리에게 익숙한 용어로 세계화(globalization)’20세기 과학기술의 발전이 가리키는 방향이 틀림없다. 1945년 아인슈타인이 원자폭탄 투하 앞에서 세계정부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도 세계화의 추세를 바라본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화는 경제적 세계화다. 정치제도를 그대로 둔 채 경제적 장벽만을 제거한다는 것은 국가 간, 지역 간의 착취체제를 강화시킬 뿐이므로 오히려 진정한 세계화에 역행하는 사이비 세계화라 할 것이다. 자오팅양은 <천하체계>에서 정치적 세계화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근대정치학이 국가정치만을 다루고 세계정치를 도외시해 온 경향을 지적한다.

 

중국의 정치철학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의 정치적 세계관, 즉 내가 말한 천하체계의 이론을 창조하려고 했다. 이것의 이론의 틀과 방법론은 서양의 정치철학과 매우 다르다. 먼저 이론의 틀에서 살펴보면 중국의 정치철학은 천하를 가장 높은 단계에 위치한 정치 분석의 단위로 간주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딴 것에 앞서는 분석의 단위로 간주했다. 이것은 국가의 정치 문제를 천하의 정치 문제에 종속시켜 이해하려고 한 것이자 천하의 정치 문제는 국가의 정치 문제가 근거하는 것임을 의미했다. (29-30)

 

철학의 이념이 없는 곳은 반드시 혼란스럽고 무질서하다. 서양의 정치철학이 주도하는 세계는 반드시 혼란스러운 세계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오늘날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제도가 있고 관리가 있고 질서가 있는 세계는 아직도 존재하지 않지만, 지리나 물리적인 의미에서의 세계는 사람들이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짊어지지 않아도 되는 황무지가 되거나 멋대로 약탈하고 쟁탈할 수 있는 공공 자원이 되거나 정복을 일삼는 전쟁터가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세계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난제이다. 즉 전체적으로 무질서한 세계이자 정치적 의미도 없는 세계는 단지 폭력이 주도하는 세계일 뿐이다. (...) 한 마디로 말해서 세계는 세계가 되지 못한다. 마치 국가는 국가 제도 때문에 국가가 되는 것처럼 세계는 세계 제도 때문에 세계가 되는 것이다. (31-32)

 

문명의 기반조건인 과학기술의 발달은 20세기 들어 국민국가의 벽을 낮추고 약화시키는 세계화의 길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 결과가 두 차례 세계대전이었다. 1930년대에 안재홍의 민세주의 제창은 세계사의 흐름에 부합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냉전체제를 하나의 반동체제로 봐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비슷한 맥락에서 반동체제의 예로 19세기 전반의 비엔나체제를 생각할 수 있다. 그 시대의 과학기술 발달은 민족국가의 강화와 공화정의 확산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런데 나폴레옹전쟁의 충격 속에서 빚어진 비엔나체제는 반세기간 시대의 흐름을 가로막고 있었다. 같은 틀에서 2차 대전의 충격 속에서 빚어진 냉전체제가 반세기간 시대의 흐름을 가로막은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19세기 전반의 경우, 비엔나체제가 유럽 정치계를 고착시켜 놓고 있는 동안에도 시대의 흐름은 바닥에서 계속 흘러가다가 1860년대 들어 봇물처럼 터져 나왔기 때문에 그것을 반동체제라 하는 것이다. 과연 20세기 후반의 냉전시대에도 그런 복류가 있었던가? 냉전체제의 반동성을 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지표일 것 같다.

그래서 제3세계의 비동맹주의 노선을 살펴볼 생각이 났다. “비동맹은 바로 냉전체제의 블록화를 거부하는 깃발이었으므로, 냉전체제의 구속을 받지 않는 자연스러운 시대의 흐름을 찾는다면 그쪽일 것 같다.

   제3세계의 민족주의 운동을 위키피디아로 더듬어보기 시작하는데 인도네시아의 "삔찌실라(Pancasila)’가 눈에 들어왔다. “5대 원칙이라는 뜻의 빤짜실라는 19456월 수카르노가 발표한 선언인데 인도네시아 헌법의 기본정신으로 채택된 것이니, 우리의 기미년 독립선언문과 비슷한 위상을 가진 것이다.

   2차 대전 전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의 독립운동가들은 일본군의 진주를 반기고 협력관계를 맺었다. 일본의 패전이 가시화되고 있을 때 일본 남방군사령부는 인도네시아 독립운동을 방조했고,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네덜란드의 복귀 전에 진도를 나가 놓기 위해 건국 작업을 서둘렀다. 그 과정의 뚜렷한 고비 하나가 빤짜실라의 선포였다.

그런데 5대 원칙의 내용이 안재홍의 신민족주의와 너무 흡사하다는 점이 놀라웠다.

 

1. 유일신에 대한 믿음

2. 하나의 인도네시아

3. 국제주의

4. 인도네시아 전통 속의 민주주의(무샤와라, 무파깟)

5. 정의와 복지

 

안재홍의 민세주의는 이름대로 민족주의와 세계주의(국제주의)의 결합이므로 빤짜실라의 제2, 제3원칙에 상응한다. 그리고 해방 후의 신민족주의는 여기에 민주주의를 결합한 것이고, (19459월에 발표한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 그 민주주의가 흔히 다사리주의라 불리는 전통 속의 민주주의 원리다. 제4원칙과 닮은꼴이다. 제5원칙은 상식적인 내용이라 할 것이고, 제1원칙만이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이것을 보며, 민족주의와 세계주의의 결합, 그리고 계몽주의적 기준이 아닌 고유한 전통 속의 민주주의 원리를 발굴하는 것이 당시 비()서양 세계가 일반적으로 바라본 노선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한국은 냉전의 직격탄을 맞았기 때문에 그 노선을 추진할 수 없었던 반면 인도네시아는 냉전의 압력이 덜했기 때문에 그 노선에 따라 나라를 세우고 키울 수 있었던 것 아닐까?

냉전시대 동안 세계의 표면적 움직임은 군사력과 경제력을 장악한 제1세계와 제2세계, 그중에서도 제1세계, 그리고 그중에서도 미국의 정책에 크게 좌우되었다. 세계 인구의 대다수를 옹유한 제3세계는 수세에 몰려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어느 단계, 예컨대 물질의 힘이 퇴세에 접어들고 상대적으로 마음의 힘이 더 부각되는 단계에 이르면 세상을 뒤덮을 흐름이 제3세계에서 복류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지금까지 사회과학 등 학술 연구도 제1세계에서 주도해 왔고 따라서 제1세계의 관점에 제한받아 온 측면이 있다. 물질 중심의 학문적 관점에 가려져 있던 다른 관점들이 자라난다면 지금까지 우리에게 익숙하던 것과 다른 모습의 20세기 후반기를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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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일본인의 횡령과 독직에 관한 기사가 종종 나오고 있다. 간부급이 연루된 규모로 보아 평상시의 산발적 현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스템 붕괴에 따른 모럴 해저드 현상의 확산 정도가 아니라, 구 지배체제 핵심부에 의한 전면적 조직범죄로까지 보인다.


(1) 매일신보 1945년 10월 08일

 

종로 보안서에서는 6일 전 경기도 지사 生田淸三郞을 비롯하여 경기도청 내의 일본인 부장과 각 과장 20명을 검속하고 취조 중인데 사건의 진상은 아직 모르나 업무횡령과 독직사건이라고 한다.


(2) 매일신보 1945년 10월 16일

전 경기도경찰부장 岡久雄 이하 일인 경찰관과 일부 반역자들이 결탁하여 영등포 鍾紡창고에서 막대한 수량의 광목을 빼앗아 내어 혼란기에 있는 경제 상태를 더욱 혼란시키고 사사로이 배를 불렸다는 사건은 기보한 바이다. 종로 보안서에서는 그 동안 이들을 엄중 취조하던 중 여죄 일절도 판명되었으므로 16일 공갈 수뢰의 죄명으로 원 경기도 경제과 小野寺完爾, 谷本義國, 猪狩利喜三, 西村復雄을 구속하여 송국하였다. 그리고 平林幸一, 川面均은 기소유예, 李英介는 불기소로 되었고 자취를 감추고 있는 원 경기도 경제과장 淸水는 뒤이어 그 행방을 수색 중이다.


(3) 중앙신문 1945년 12월 07일

군정청 법무국장 매트 테일러 소좌의 5일 발표에 의하면 전 일본인 관리가 공금을 부당하게 사용한 사건을 조사하기 위하여 법무국내에 특별범죄수사위원회가 새로 설치되었다 한다. (...) 지금까지 조사한 결과는 전 일본인관리의 공금횡령사건이 30여건이나 되어 동위원회 보고에 의하여 서울지방법원에서 판결되리라고 한다.


(4) 서울신문 1945년 12월 16일

전 총독부 체신국장 伊藤泰吉과 전 경무국위생과장 阿部泉 이하 다섯 명의 업무횡령사건의 공판은 작 15일 오전 10시 서울대법원 대법정에서 李仁 대법관 주심 아래 개정되었다. 이날 법정 방청석에서는 왜놈 관리들의 최후까지 착취를 꾀하여 사복을 채우려는 단말마의 발악의 죄를 우리들의 손으로 처단하는 광경을 보고자 아침부터 밀려든 방청객으로 초만원을 이루었는데 더욱이 培材中學校 학생 50여 명이 특별방청하여 종시 이 통쾌한 광경을 보고 있음이 눈에 띠었다. 먼저 위생과장 阿部의 죄상을 심리하고 阿部의 증인으로서 鍋田 외 1명에 대한 심문이 있은 후 대법관으로부터 심리는 끝났으나 무슨 할 말이 있거던 말하라는 말에 阿部는 눈물을 흘려가며 관대한 처분을 내려 달라고 애원하자 방청석에서는 이 가긍하고도 통쾌한 것에 웃음소리가 나오곤 하였다. 이어서 전 체신국장 伊藤이와 체신부 회계과장 이하 4명에 대한 업무행정의 범죄를 추상같고 준열한 대법관의 질문 앞에 심리가 오후까지 계속되어 일단 심리를 마치었는데 언도는 머지않아 하리라 한다.


(5) 동아일보 1945년 12월 19일

40년 동안 우리 3천만동포를 쥐어 짜 먹기에만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총독부 일인 고급관리들은 한사람의 예외도 없이 단말마적인 발악을 하다가 속속 우리 검찰의 손에 검거되어 방금 엄중한 취조를 받고 있는데 또한 전 총독부 회계과장 上野武雄과 동 출납계장 上山敏雄은 6,400만원을 횡령한 사실이 발각되어 17일 特別犯罪審査委員會에 검거 구속되었다. 이제 영어의 몸이 된 上野는 上山과 결탁하여 가지고 일본이 항복하자마자 공금 6,400만원을 38도 이북에 있는 일인관리에게 지불할 특별위로금이라 하고 9월초에 安田銀行을 통하여 일본에 송금한 후 아무 일도 없는 듯이 경성에 체류하고 있으면서 기회를 보아 일본으로 비밀히 탈출하려는 직전에 이 사실이 탄로되어 체포되고 만 것이다.


일본의 한국 지배는 1945년 8월 15일 정오 천황의 항복 방송과 함께 끝난 것이 아니었다. 38선 이북에서도 소련군 민정부가 설치되는 9월 하순까지 일본인의 역할이 계속되었고, 이남에서는 11월 중순까지 미군과 일본인의 공동지배 상황이 계속되었다. 식민지배의 유산 중에는 8월 15일 이후에 만들어진 것도 적지 않았다.

 


식민지배가 끝나는 시점에서 일본인의 무책임한 파괴와 범죄 행위를 “나쁜 놈들이니까 끝까지 나쁜 짓을 했군.” 정도로 막연히 넘어가기 쉽다. 그러나 혼란을 틈탄 범죄 행위에 미군과 한국인의 몫도 있었다는 사실이 가려져서는 안 되겠다.


예컨대 경제 혼란의 대표적 현상인 식량난을 놓고 일본으로의 미곡 밀수출을 문제 삼곤 했다. 일본 쌀값이 국내의 열 배 이상 되기 때문에 모리배들이 쌀을 빼돌려 국내에 식량난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사실이 그랬다면 그것이 어찌 모리배들만의 잘못이겠는가. 농민들에게 쌀값을 제대로 지불하지 않는 국내 시장 운영에 먼저 문제가 있는 거지.

 

식량난을 몰고 온 직접 원인은 미곡시장의 일체 제한 규정을 철폐하고 자유매매를 선언한 10월 5일의 군정청 일반고시 제1호였다. 조선의 식량정책은 1939년 말부터 전시체제에 들어가고 1943년 8월 ‘조선식량관리령’ 발포 이후로는 엄격한 배급체제에 들어가 있는 상태에서 해방을 맞았다. 10월 들어 군정청은 이남 지역의 작황을 낙관하면서 미곡의 자유시장화를 선언했다. 이것이 미곡시장의 투기화를 불러와 엄청난 혼란을 일으킨 다음 이듬해 1월에 ‘미곡수집령’을 발포해야 했다.


점령한 지 한 달이 안 된 시점에서 미곡시장 자유화처럼 민생에 영향이 큰 사안에 섣불리 손댄 까닭이 무엇일까? 이로부터 큰 이익을 얻을 한민당계 지주-자본가 집단의 로비 가능성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미국식 자유시장의 우월성을 확인한다는 명분이 따랐을 것이다.


자금력이 대규모 폭력을 정치에 끌어들인 문제를 어제 지적했는데, 폭력이란 인간사회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폭력이 다른 인간관계를 압도할 만큼 대규모로 조직되는 데는 특별한 조건이 필요하다. 해방 직후의 한국에 엄청난 규모의 유휴자금이 존재했다는 것이 그런 조건이었다. 이 시기 한민당 측에서 보여준 현금동원 능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일본인에 대한 채권이 동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모든 사업이 정체되어 있던 상황에서.


해방을 전후한 통화량의 급증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략 50억원대에 머물러 있던 조선 통화량이 몇 달 사이에 30여억원 늘어났다고 한다. 강준만은 이것을 “패전한 일본인들이 미군 진주가 지연된 기간을 이용하여 재한 일본인들의 귀국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돈을 마구 찍어낸 탓에 빚어진 일”로 보았다. (<한국현대사산책 1> 184쪽)


정병욱의 논문 “해방 직후 일본인 잔류자들 - 식민지배의 연속과 단절”(<역사비평> 64호, 2003 가을)과 “8-15 이후 ‘融資命令’의 실시와 무책임의 체계”(<한국민족사연구> 33호, 2002. 12)에서 이 돈의 출구를 살펴보았지만 메워지지 않는 구멍이 너무나 컸다. 그런데 맨 위의 인용 기사 중 (5)번에서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정병욱의 연구는 ‘합법적’ 출구를 찾는 데 제한되어 있는 것 같은데, 그와 다른 ‘불법적’ 출구도 있었던 것이 아닐까?


총독부 회계과장과 출납계장 둘이 공모해서 6천4백만원을 빼돌렸다고 한다. 전국 통화량의 1%에 육박하는 이 금액을 “38도 이북에 있는 일인 관리에게 지불할 특별위로금이라 하고 9월초에 야스다은행을 통하여 일본에 송금”했다고 한다. 특별위로금으로 지출했으면 괜찮을 것을 착복하려고 빼돌려서 죄가 되었다는 말인가?


회계과장과 출납계장의 개인적 착복인지, 아니면 윗사람들 시키는 대로 했다가 총대를 멘 것인지도 이 기사만으로는 판별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평소에 상상하기 힘든 엄청난 규모의 돈이 황당한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개인적 착복이더라도 자금의 불법 유출이 횡행하는 상황에 편승한 것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이 시점에서 돈의 움직임을 좌우할 수 있는 위치의 일본인 고위 관리의 입장에 내가 있었다면 어떤 짓을 할 수 있었을까? 몇몇 나치 거물처럼 거금을 챙겨 남아메리카로 도망갈 길도 없었다. 싸 들고 고향에 돌아갈 길도 없었다.


나 같으면 내가 아는 조선인들 중 능력은 우수하되 품성이 저열한 인간들에게 돈벼락을 때려줬겠다. 그래야 우리가 떠난 뒤 조선 정치가 개판이 되고, 조선 백성들은 구관이 명관이었다고 생각하게 될 테니까.


정병욱의 논문 “해방 직후 일본인 잔류자들”에 따르면 초기 미군정의 재정 정책은 일본인의 조언에 따라 이뤄졌다고 한다. 군표 대신 조선은행권을 계속 사용함으로써 미군정의 은행권 남발을 유발, 이전의 통화 증발을 물타기한 것이다. 덕분에 고위 책임자들이 모두 아무 처벌 없이 귀국할 수 있었다.


당시 미군정청 재무국 촉탁으로 통역을 담당하느라 잔류했던 한 조선식산은행원 출신자의 회고에 따르면, 자신은 재무국장 고든과 두 명의 보좌관 로빈슨, 스미스로 구성된 미국측과 미즈타(총독부 재무국장), 호시노(조선은행 부은행장), 야마구치(조선식산은행 이사)로 구성된 일본측의 통역에 전념했다고 한다. 해방 직후 이 6명 사이에서 한국 재정과 금융에 관한 지배의 인수인계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호시노는 미군정의 군표발행 계획을 혼란만 줄 뿐이라며 반대하고 필요하다면 조선은행권을 찍으라고 권유했다. 이후 은행권 남발을 통한 미군정의 재정자금 확보가 일상화되었다. (1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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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