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생님 오늘 찾아뵌 것은 남북협상 70주년을 맞아 그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서입니다. 먼저, 남북협상을 추진해 온 것이 어떤 분들인지 먼저 말씀해 주시죠.

 

: 민족사회의 위기를 막아내지 못한 못난 선배의 이야기를 들으려는 것은 우리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뜻이겠지요. 우리가 잘한 일보다 잘못한 일을 잘 밝힘으로써 그 뜻에 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12월에 김규식, 홍명희 선생 등을 중심으로 민련(민족자주연맹)을 결성했습니다. 그 목적이 이남 단독선거를 막는 데 있었고, 가장 큰 노력을 들인 일이 남북협상이었죠. 민련은 민족주의자들의 뜻이 집약된 움직임입니다.

 

: 남북협상의 목적이 단독선거를 막는 데 있는 것이라면 이남 단독선거의 위험이 어떻게 제기된 것인지 독자들께 먼저 설명해 드려야겠네요. 제가 아는 대로 설명한 뒤에 선생님께서 보충하고 바로잡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해방 후 미-소의 조선 분할점령으로 시작된 일이죠. 점령의 공식적 목적은 일본의 통치권을 넘겨받았다가 정당한 정권에게 넘겨주는 것인데, 넘겨받을 정당한 정권을 찾아낼 수 없었기 때문에 점령기간이 길어졌고, 그 동안 두 점령국은 각자의 점령지역에서 자국에 유리한 정치정세를 빚어내는 데 노력했죠. 그 결과 이남과 이북은 갈수록 격리가 심해져 다른 나라처럼 되어 갔고, 양쪽 지역에서 주도권을 쥐는 정치세력 간에 적대적 관계가 굳어져 왔습니다.

애초에 분단점령은 일본을 항복시킨 연합국의 합의에 의한 것이었고, 두 나라 점령군이 공동위원회를 만들어 그 위원회가 통치권을 넘겨줄 임시정부를 세우도록 194512월의 모스크바 외상회의에서 결정되었죠. 그에 따라 바로 미소공위(-소 공동위원회)가 만들어져 1946년 봄과 1947년 여름에 회의를 열었지만 이견을 해소하지 못하고 교착상태에 빠졌습니다.

1947년 후반 들어 미국이 미소공위를 포기하고 유엔으로 조선 건국 문제를 가져가려는 움직임을 시작했죠. 미국은 유엔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유엔에서 결정한다는 것은 곧 미국 마음대로 하겠다는 뜻이었고, 따라서 소련은 유엔 회부를 거부했습니다. 그 결과 3-8선 이남 미군 점령지역에는 유엔 결정에 따라 하나의 국가가 만들어지고 이북 소련 점령지역에는 별도의 국가가 만들어질 분단건국의 위협이 구체화된 것으로 이해합니다.

선생님께 특별히 묻고 싶은 것은, 분단의 위협은 미-소 양군의 점령 초기부터 꾸준히 커져 온 것인데 민련 결성에 이르기까지 민족주의자들이 이 위협에 어떻게 대응해 왔는지 하는 것입니다.

 

: 잘 파악하고 있군요. 분단건국의 위협이 제기된 상황의 설명에는 내가 별로 덧붙일 것이 없습니다.

미국과 소련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대표하는 나라들 아닙니까? 종전 전부터 두 나라 사이의 긴장관계는 알려져 있었고, 그 분단점령에 따라 뭔가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지요. 민족주의자들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좌우합작에 뜻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자유를 중시하는 자본주의와 평등을 강조하는 공산주의에는 양쪽 다 취할 가치가 있습니다. 정상적인 국가에서는 두 이념이 선거 등 정치과정을 통해 경쟁하게 되어 있지요. 그런데 아직 국가를 세우지 못하고 점령을 통해 두 나라 영향을 받게 된 상황에서, 두 이념 사이의 대립에 특별히 조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민족주의자들 중에 자본주의를 좋아하는 이들도 있고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불안한 상황에서는 각자의 취향을 잠시 접어두고, 함께 가진 민족주의에 입각해 나라를 우선 세워놓은 다음에 제대로 이념경쟁을 펼치자는 것이 좌우합작이지요. 오스트리아를 보세요. 우리랑 비슷한 입장에서 종전을 맞은 후 좌우합작을 통해 신탁통치를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오스트리아는 십여 년 전 내전까지 겪을 정도로 좌우대립이 심한 나라인데, 좌우합작이 왜 필요한 것인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좌우합작 노력이 충분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이유를 얘기하려면 한나절은 걸릴 텐데, 오늘 관심은 남북협상에 있다니 그냥 넘어가죠. 점령군의 존재 때문에 그 위세를 등에 업은 세력들의 분단 고착 책동을 막기 힘들었다는 정도만 말해 두겠습니다.

지난 7월 좌익 쪽에서 합작 노력을 이끌던 여운형 선생의 저격으로 좌우합작의 길이 막혀버렸습니다. 합작을 외면하는 남로당 측이 좌익을 장악하게 되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제는 이남 좌익과의 대화 대신 이북 지도부와 협상을 서둘러야겠다는 결정을 하면서 종래 좌우합작의 통로였던 정협(각정당협의회)을 해산하고 우익만으로 민련을 결성하게 된 것입니다.

 

: 좌우합작의 실패에 관해서는 입맛이 써서 언급도 하기 싫으실 것을 이해합니다. 그래도 지금의 남북협상 국면과 연관된 문제들은 좀 짚어둬야죠. 분단건국을 원하는 이승만과 한민당 측은 그렇다 치더라도, 남로당 측이 좌우합작을 외면해 온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남로당은 이번 남북협상에도 역할이 있으니 그 입장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요.

 

: 남로당의 입장에 관해서는 나도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가 많습니다. 아무리 공산주의자라 하더라도 지금 단계 조선에서 공산혁명보다 민족국가 건설을 앞세울 필요를 인식하지 않을 수 없을 텐데.

합리적 이해가 되지 않으니 그 드러내지 않는 속셈을 의심하게 되는데... 남로당 지도부가 헤게모니에 너무 집착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아요. 남로당-북로당으로 개편하기 전의 공산당에서는 지금의 남로당 지도부가 당 중앙이었지 않습니까? 분단점령 상태의 필요에 따라 공산당에 북조선분국을 만들고, 그 분국이 북조선공산당으로 불리게 되어도, 11당의 원칙에 따라 서울의 당 중앙에 종속된 위치였지요.

북쪽에서는 김일성 집단이 점령군의 지원 아래 실력을 키워 왔는데 남쪽의 당 중앙은 점령군의 탄압 아래 위축되기만 하다가 북로당-남로당 창당으로 대등한 관계가 되었지요. 북로당-남로당 창당 시점에서 박헌영이 이북으로 넘어간 것은 신변의 안위 때문이 아닙니다. 미군정의 위협이 심각하지 않을 때였어요. 소련의 지원을 놓고 이북 지도부와 경쟁하려는 목적이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헤게모니에 정신이 팔리면 이웃의 이익이 내 손해라는 느낌을 갖죠. 좌우합작이 좌익에게 이익을 가져오더라도 다른 파벌의 이익이 내 이익보다 클까봐 안절부절하고, 민족에게 이익을 가져오더라도 우익에게까지 이익이 돌아가는 것을 봐줄 수가 없지요. 그런 사람들은 누구랑 어떤 합작도 할 수 없어요. 집에서 부부간에도 합작이 안 될 겁니다.

 

: 부부간의 합작까지 들먹이시는 걸 보니 얼마나 속이 상하셨는지 알겠습니다. 남로당의 그런 태도가 지금의 좌우협상에도 문제가 되고 있나요?

 

: 되다마다요. 협상 방법에서 남측은 양심적인 민족 지도자들 사이의 영수회담을 제안했습니다. 남측 대표로 김구, 김규식 선생을 내고 북측 대표로 김두봉 선생과 김일성 씨를 지목했지요. 그런데 북측에서 제안하는 정당-단체 연석회의는 남측 대표권을 좌우익으로 가르자는 겁니다. 남측 좌익이라면 여운형 선생도 없는 이제 민전(민주주의민족전선)을 앞세운 남로당이 장악하고 있지 않습니까? 북측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이남 좌익이 1/4 지분을 가져가고 이남 민족주의자들이 1/4 지분만을 갖고는 대등한 협상이 이뤄질 수 없지요. 그런 조건의 회담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협상이 아니라 투항입니다.

남로당 지도부가 분단건국을 막아야겠다는 목적의식을 갖고 있다면 이 장면에서는 자기네 지분을 접어놓음으로써 남북협상이 유엔위원단(유엔조선임시위원단)에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그런데 남로당이 지분에 집착하니 북측이 제안하는 연석회의를 남측이 묵살하고 남측이 제안하는 영수회담을 북측이 무시하는 상황을 피할 수 없는 것이지요.

 

: 남측이 제안한 4김 영수회담만 하더라도 북측의 김두봉 선생은 공산주의자보다 민족주의자로 볼 수 있으니, (김두봉은 여러 해 동안 중국공산당 지원 하에 독립동맹을 이끌면서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지 않고 있다가 해방 후 귀국 직전에야 가입한 것은 감사의 표시로 이해된다.) 좌우익이 모두 대표되는 셈입니다. 남북협상이 고른 대표성을 가지려면 이남 좌익도 참여해야 한다는 북측과 좌익의 주장이 합당한 것으로 들리기는 하는데요.

 

: 남북협상의 성격과 목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대표성 문제도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이 협상이 통일정부 수립의 구체적 방안 마련에 목적을 둔 것이라면 남북, 좌우가 빠짐없이 참여하도록 해야겠지요. 그러나 유엔의 가능 지역 선거를 통한 이남의 단독건국을 막는 당면의 과제를 위해서는 대표성을 엄밀히 따지기보다, 유엔위원단과 접촉해 온 이남 우익과 사태 해결의 큰 열쇠를 쥐고 있는 이북 지도부끼리만 만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북측에서 주장한 연석회의는 넓은 대표성에 입각해서 모든 과제를 처리하자는 것이고 남측이 제안한 영수회담은 당면 과제에 치중하자는 것이죠. 당면 과제를 얼마나 절박하게 느끼느냐 하는 데 차이가 있습니다. 북측의 답장에 김규식 선생이 분노한 것은 북측이 분단건국 저지라는 당면의 과제를 경시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남에서 단독건국이 이뤄질 경우 이북도 따로 단독건국을 하면 된다는 배짱을 읽은 것이지요.

 

: 알겠습니다. 선생님 말씀으로 민련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김구 선생의 입장은 아무래도 석연치 않은 점들이 있어요. 지난 12월 초에 이남 지역 총선거를 지지한다고 발표하지 않았습니까? 그 무렵에 (단독선거를 반대해 온) 정협의 한독당 대표들을 당에서 제명까지 했고요. 그 시점에서 그분은 이승만 씨와 뭔가 합의가 되어 이 씨의 단독선거 노선을 지지하고 나선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두 달이 지난 210일 발표한 글 삼천만동포에게 泣告에서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는 결연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김규식 선생과 연명으로 김두봉, 김일성 양씨에게 편지를 보내고 남북협상에 적극적 태도를 보여 왔습니다. 지난 2년간 극단적 반탁운동으로 미소공위를 통한 통일건국의 길을 어렵게 해온 그분의 최근 노선 변경이 너무 갑작스럽게 느껴집니다.

 

: 그분의 귀국 후 2년 반 동안 쓰라린 실망을 거듭거듭 겪어 왔습니다. 귀국 이튿날 친일파 청산을 건국 후로 늦춰도 된다는 말씀을 하실 때 시작되었지요. 한 달 후 반탁운동 시작 때 나는 국민총동원회 부위원장으로 나섰지만 방향이 잘못된 것을 깨닫고 바로 물러났습니다. 그리고 국민당을 헌납하다시피 한독당에 합당시키기도 했으나 한독당이 반탁을 빌미로 미소공위를 계속 방해하는 바람에 결국 도로 떨어져 나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분에게 개인적으로는 환멸을 많이 느꼈습니다. 하지만 민족사회의 지도자로서 그분의 역할은 받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말씀하신 210일의 글, 그처럼 인민의 심금을 깊이 울리는 글을 아무나 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평생을 민족에 바쳐온 분의 말씀이기에 감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난 2년간의 방황이 없으셨다면 더욱 좋았겠지요. 그분이 이제 방황을 벗어나 진면목을 되찾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다시 온 마음으로 지지합니다.

지난 연말의 곡절을 간단히 설명하죠. 김구 선생은 미군정과의 관계에 수완을 가진 이승만 씨를 앞세워도 실권을 당신이 지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 씨의 반탁노선을 지지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이승만 씨가 조직한 민족대표자대회(민대)를 자기 조직인 국민의회에 통합하는 합의가 이뤄지면서 이남 지역 총선거 지지를 발표했는데, 마침 바로 그때 터진 장덕수 저격사건에 연루되어 군정재판에 불려나가는 수모까지 겪고 민대 통합도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그 결과 단독선거 반대의 입장을 결정한 것입니다.

 

: 지금까지 말씀으로 남북협상의 배경은 대개 이해됩니다. 이제 협상의 현장을 살펴보죠. 연석회의는 460개 정당-단체의 7백 명 가까운 대표가 참석해서 419일에서 26일까지 열렸는데 남측 대표는 남로당-민전 계열만 참석했습니다. 회담보다 군중대회 성격이었죠. 김구 선생은 회의장에 잠깐 들어가 인사만 했고 김규식 선생은 아예 들어가지도 않았죠.

남측이 제안한 4인 영수회담은 비공식 간담회처럼 한두 차례 자리가 있었고, 그보다는 27일부터 30일까지 열린 남북요인회담에 실질적인 협상의 의미가 있었던 셈입니다. 김구·김규식·조소앙·조완구·홍명희·김붕준·이극로·엄항섭·김일성·김두봉·허헌·박헌영·최용건·주영하·백남운의 15인이 참석했고 다음과 같은 통일정부 수립방안이 작성되었죠.

 

첫째, “소련이 제의한 바와 같이 우리 강토에서 외국군대가 즉시 철거하는 것이 조선문제를 해결하는 유리한 방법이다.”

둘째, “남북정당사회단체지도자들은 우리 강토에서 외국군대가 철퇴한 뒤에 내전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

셋째, “외국군대가 철퇴한 이후 다음 연석회의에 참가한 모든 정당사회단체들은 공동명의로써 전조선정치회의를 소집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통일적 조선입법기관을 선거하여 통일적 민주정부를 수립해야 한다.”

넷째, “위의 사실에 의거하여 이 성명서에 서명한 모든 정당사회단체들은 남조선단독선거의 결과를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 지지하지도 않을 것이다.”

 

참석자 중 김일성·김두봉·최용건·주영하 4인만이 북측 인사였고 11인이 남측이었지만 남측 11인 중 홍명희·이극로·허헌·박헌영·백남운 5인이 회담 후 이북에 남았으므로 남쪽으로 돌아온 것은 6인뿐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요인회담의 성과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 내용이야 좋지요. 하지만 이 시점에서 그 가치를 크게 평가할 수는 없네요. 214일에 김구, 김규식 선생이 편지를 보내고 3월 말에 답장을 받았는데, 그 사이에(226) 유엔 소총회에서 미국의 가능 지역 선거제안을 채택해 버렸어요. 뒤이어(314) 유엔위원단도 그 제안에 따를 것을 결정했어요. 단독선거 저지라는 당면 과제는 회담이 너무 늦어지는 바람에 현실적으로 어렵게 되어 버린 겁니다.

어렵게 된 과제를 되살려내려면 민족사회의 결의를 더 적극적으로 표명해야 합니다. 이북 지도부가 소련의 허수아비 노릇을 하려는 게 아님을 분명히 하고 민족사회를 위해 뭐든 양보하는 자세를 보여줄 필요가 있어요. 그런데 소련의 외군 즉각 철수주장만 되풀이하고 있으니 유엔위원단 대표들을 설득하는 데도 미흡할 수밖에.

무엇보다 마지막 항, 단독선거 거부 조항은 혹 떼려다 혹 붙인 꼴이 되기 쉽습니다. 단독선거를 저지할 수 있으면 물론 좋지만, 끝내 시행될 경우 거부하면 안 되죠. 선거에 참여해서 분단건국을 절대 반대하는 민심을 확인해야 합니다. 지금 단계에서 단독선거 시행을 막지 못하더라도 다음 단계에서 어떻게든 최선을 다하겠다는 성실성이 필요한 상황인데, 단독선거를 막지 못했을 때 참여를 거부한다면 이민을 가겠다는 겁니까, 뭘 하겠다는 겁니까?

 

: 말씀을 들으니 과연 문제가 있는 조항이군요. 후세의 우리는 선배들의 결연한 태도를 보여주는 조항이라 생각해서 공경하는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는데, 현실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되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군요. 그런 자승자박의 조항이 왜 들어갔을까요?

 

: 북측의 속셈은 짐작이 갑니다. 분단건국을 기정사실로 내다보고 북측이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려는 뜻이죠. 이남 정권에 민족주의자들이 참여를 거부하면 정통성도 약해지고 정치도 엉망이 되기 쉬울 테니까요. 나는 좌익의 가장 보편적인 폐단이 패권주의 경향에 있다고 봅니다. 모든 일을 투쟁의 관점에서만 보기 때문에 협력의 필요가 빤히 보일 때도 딴 궁리에 바빠요.

 

: 단독선거 불참 방침은 이남에서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요. 38일 민련 상무회의에서 불참 방침을 결정했다는 310일자 <동아일보> 기사가 있었고, 며칠 후(12)에는 김구, 김규식, 김창숙, 조소앙, 조성환, 홍명희, 조완구 7인 지도자의 총선거 불참 성명서가 나왔지요. 단독선거 거부는 꼭 북측의 요구에 따른 것으로 볼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 홍명희 선생이 2월 하순 이북에 다녀왔지요. 김구-김규식 선생의 편지에 답장을 받지 못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홍 선생이 북측의 선거 거부 요구를 받아왔다는 말씀을 직접 듣지는 않았지만 정황으로 보아 분명합니다. 그분의 원래 생각은 그런 일에서 나랑 차이가 없는데 선거 거부로 나가야 한다고 하는 그분 주장이 민련 결정에 절대적으로 작용했어요.

34일 민련 상무위원-정무위원 연석회의에서 불참 문제로 격론이 있었고 한독당에서도 지도부의 선거 거부 방침에 반발이 있어서 양쪽의 선거 참여파가 따로 모여 새 단체를 만들 것이라는 추측이 나돌기도 했답니다. 내가 그 단체를 주도할 것이라는 추측도 나오고요. 나는 민련과 한독당의 선거 거부 방침이 남북회담의 성사를 위한 양보였다고 생각합니다.

 

: 요인회담에 참석했다가 북에 남은 5인 중 허헌·박헌영·백남운 제씨의 경우는 좌익 입지가 사라진 이남 형편 때문이지만 홍명희, 이극로 같은 투철한 민족주의자들이 북을 택한 것은 뜻밖입니다. 분단건국 추진세력이 발호하는 이남에서 민족주의자들이 답답한 형편에 처해 있기는 하지만 상황 개선을 위한 정치활동을 펼칠 수는 있는 상황 아닙니까? 이남 상황을 아주 절망적인 것으로 보았기에 그런 선택을 한 것일까요?

 

: 홍 선생과 이 선생 외에도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남북협상을 계기로 북쪽을 택했지요. 두 가지 원인을 생각합니다. 첫째는 여운형 선생의 저격에서 보듯 극우테러가 너무 심해요. 그런 당당한 지도자가 백주대로상에서 저격을 당했는데 범행의 배경도 제대로 밝혀지지 못하고 있어요.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는 사람이라 해서 본인과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지 말라는 법이 없죠. 나는 그분들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둘째로는 북측 지도부가 그분들을 모시는 데 공을 많이 들였습니다. 이남 양심세력의 단독선거 거부를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분단건국 후의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려는 뜻이지요. 북측의 공산주의자들이 김두봉 선생 이하 민족주의자들을 협력 상대로 존중하는 것까지는 좋지만, 남측 인사들까지 포섭하려 드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봅니다. 남쪽 사람들은 남쪽에서 할 일을 찾아서 해야죠.

설령 체제 경쟁을 하게 되더라도 양측이 좋은 정치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경쟁이어야 좋은 결과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운동경기에서 양측이 최선을 다해야 관중이 만족하는 것처럼, 체제 경쟁도 정당한 방식으로 해야 민심을 충족시키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 북측의 오만과 남측의 무능이 어우러져 민족사회의 손해를 빚어내는 일이 최근까지 계속되어 왔습니다. 남한은 미국이 주도하는 북한 봉쇄정책에 얽매여 민족사회의 득실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북한은 미국에 대항할 군사무기를 장만하느라고 민생을 돌볼 여유가 없는 채로 여러 해를 지내 왔지요. 남측은 미국의 단독건국 전략을 물리치지 못하고 북측은 목전의 득실만 따지다가 분단의 길을 벗어나지 못했던 70년 전의 상황이 너무나 오랫동안 되풀이되어 왔습니다. 먼저 겪으신 입장에서 가르침을 베풀어주시기 바랍니다.

 

: “가르침이라뇨. 첫 단추를 잘못 꿴 우리가 무슨 자격으로? 그래도 들어주겠다면 한두 가지 절실하게 생각되는 말씀을 드리죠.

첫째, 좋은 정치를 위해서는 튼튼한 정치공동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정치공동체가 건강하지 못하면 아무리 자유가 많아도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는 데 자유가 쓰이게 되고, 아무리 경제가 풍족해도 빈자들이 질곡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튼튼한 정치공동체를 위해 민족국가가 필요한 것이므로 민족국가 복원을 위해서는 소소한 정치적 가치들을 넘어서는 비상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좌우합작에 실패한 우리 세대를 타산지석으로 삼으세요.

둘째, 외부세계와의 관계를 늘 깊이 생각하기 바랍니다. 지금 외부세계를 대표해서 유엔위원단이 서울에 와 있습니다. 그 대표들의 출신국이 어떤 곳인지, 그곳에서는 조선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 우리가 너무 몰라요. 위원단의 어떤 결정이 있을 때마다, 그들이 조선 사정을 제대로 이해하도록 우리가 이끌어주었다면 더 바람직한 결정을 바라볼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까운 마음이 들곤 합니다. 식민지 상태로 오래 있는 동안 우리는 외교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나라들의 입장을 이해하면서 함께 갈 좋은 길을 함께 찾는 외교를 실행하는 것이 민족사회의 진로를 찾는 데도 꼭 필요한 일입니다.

 

: 여러 말씀 고맙습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또 찾아뵙겠습니다.

 

: 나도 고맙습니다. 실패한 우리를 돌아봐 주는 것이, 이제 그 실패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여 기쁩니다.

 

 

Posted by 문천

A mile-odd length of the Berlin Wall is preserved along the bank of the Spree. The surface of the wall is filled with drawings and writings that depict the pains of division and the joys of unification. They testify to the agonies and sacrifices of the German people during the years of division. I strolled along the wall, reading some of them.

 

"A man's thought, like a bird's flight, is free." It recounts to me the futility of trying to divide the World. Even if they appear to have divided the land, they will never be able to divide the air. Somebody has written in Korean: "We too will be one." [Shenzi]

 

To a snail, the flight of a sparrow may appear to be free. But is it really free? While we are not allowed to fly, we are unable to perceive fully how gravity works. The flight is not guaranteed by the removal of the cage only. The 'will' to fly, amongst other things, is also required to take us off into the air. [Or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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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몇 달 전 어느 자리에서 홍세화 선생을 "대한민국 지식분자 중 내가 '형님'으로 부르는 유일한 분"이라고 소개한 일이 있다. 살아 오면서 "형님"이라 부른 분이 꽤 있었고, 그중에는 지금이라도 마주치면 "형님" 소리 나올 분들이 없지 않다. 그러나 자주 보며 "형님"으로 대하는 분은 지금 홍 선생 한 분뿐이다. 이 점을 생각하면 내가 근년 살아온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는 생각도 든다. 편안한 관계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여유가 너무 없었다는 생각.

 

홍 선생도 그냥 기억 속에 묻어놓고 30년을 지냈던 분이다. 그분이 대봉산업 파리 주재원으로 출발하던 전날인지 당일인지 만난 것은 마침 나도 그 회사에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분 귀국하고도 굳이 볼 일이 없어서 여러 해 그냥 지내다가, 역시 오랜만에 만난 정세현 선배과 앉았다가 홍 선생 생각이 났고, 생각이 나자 이야기 나누고 싶은 마음이 크게 일어나 곧 찾아뵙게 되었다. 그게 근 10년 전의 일이다.

 

오랜만에 만나자 생각 나눌 것도 줄줄이 떠올라 종종 보게 되었는데, 몇 해 전 마침 우리 동네로 이사 오시는 바람에 아주 자주 보게 되었다. 이사 오실 무렵까지도 이 양반과 마주치면 긴장된 마음이 꽤 들었다. 그분이 내 책 <페리스코프> 추천사에 이런 대목 쓴 걸 보면 긴장된 마음이 어떤 건지 누구라도 이해해 줄 거다.

 

“그가 바탕을 두고 있는 현실 논리에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바꾸어야 할 현실’을 지나치게 압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은데, 스스로 ‘피할 수 없는 현실’을 지키려고 보수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그런데 자주 보다 보니까 긴장이 풀린다. 아마 근년 들어 내가 "퇴각"의 길에 접어들어 있다는 자각도 여기 작용한 것 같다. 만나서 꼭 뭔가 뾰족한 얘기를 나눠야겠다는 강박이 없이, 그냥 같이 노는 게 편안한 것이다. 바둑도 두고, 당구도 치고, 놀다가 뭔가 떠오르는 생각이 있으면 몇 마디 나누기도 하고, 그럴 뿐이다.

 

설날 우리집에 건너와 떡국을 함께 먹었다. 부인이 프랑스 가 계실 때는 "독거노인"이라고 엄살하는 분을 방치할 수 있나. 점심을 함께 하고는 댁으로 건너가 바둑을 두 판 뒀는데, 얼마 전 석 점으로 한 판 따내고는 두 점으로 올라갈 열망에 들뜬 분에게 찬물을 끼얹고 넉 점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넉 점은 말도 안 되지!"

 

"겪어보지 않으니까 엄두가 안 나시겠지만, 막상 해보면 재미있으실 거예요. 새로운 경지로 한 번 나아가 보시지요~"

 

그 경지로 당장 나아갈 마음은 도저히 들지 않으시는 듯, 당구장으로 가자신다.

 

"잘 생각하셨어요. 형님은 머리보다 몸이죠~"

 

천하의 홍 선생에게 몸 칭찬 해드리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재미있어 할 분들도 계실 것 같아서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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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