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1.16 23:36

 

I believe in simple life. All the simpler in jail, so I could leave it amy time with ease. It embarrassed me to find myself burdened once more with a heap of petty things, which I would like to do without, on this transfer to another prison.

 

On the way to the new prison, as well as the heavy bundle on the shoulders, a weighty thought kept pressing on my mind. A thought about the Old Master who told the attendant boy to prepare a clean gown and a walking stick for a long, long jouney tomorrow morning. At dawn the next morning the Master breathed his last, wearing a crispy gown, slighly leaning on the stick, by the entrance to the hermitage. The sublime posture of his departure was reproving me all the way.

 

[Shenz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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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우익 진영과 삼상회의를 지지하는 좌익 측 각 정당은 其間 미묘한 움직임으로 개별적 회합이 누차 속행되고 있던 바 7일 시내 모처에서 人民黨代表 李如星·金世鎔·金午星, 韓國民主黨 代表 元世勳·金炳魯, 國民黨 代表 安在鴻·白泓均·李承複, 共産黨 代表 李舟河·洪南杓 諸人이 회집하여 간담회를 열고 현하의 긴급 제 문제를 신중 토의한 결과 의견의 일치를 보아 별항과 같은 人民黨, 韓國民主黨, 國民黨, 共産黨의 4당 공동성명서를 발표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러 혼돈하던 정국은 통일일로의 노선을 걷게 되어 이 서광은 박두하는 미소공동위원회를 앞두고 자못 관심을 끌고 있다.

 

즉 공동성명서의 내용 중 탁치문제를 단적으로 해명하면 신탁통치라는 제도는 배격하되 연합국의 우의의 협조는 거절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한다. 이같이 4당회의 관계로 7日 夜 임시정부에서 개최할 예정이던 5대정당 대표회의는 하루나 이틀 연기될 것으로 보이며 이상 4黨에서는 8일 新韓民族黨을 참가시켜 5대 정당이 계속하여 시내 모처에서 민족통일 촉성에 관한 토의를 계속 중이다.

 

◊ 4당 공동 코뮤니케

 

1) 모스크바 三相會議의 조선 문제 결정에 대하여: 조선 문제에 관한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의 결정에 대하여 조선의 자주독립을 보장하고 민주주의적 발전을 원조한다는 정신과 의도는 전면적으로 지지한다. 신탁(국제헌장에 의하여 의구되는 신탁제도)은 장래 수립될 우리 정부로 하여금 자주독립의 정신에 기하여 해결케 함.

 

2) 테러행동에 대하여: 정쟁의 수단으로 암살과 테러행동을 감행함은 민족단결을 파훼하며 국가독립을 방해하는 자멸행동이다. 건국의 통일을 위해서 싸우는 애국지사는 모든 이러한 반민족적 테러행위를 절대 반대하는 동시에 모든 각종 비밀적 테러단체와 결사의 반성을 바라며 그들이 자발적으로 해산하고 각자 진정한 애국운동에 성심으로 참가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1946년 1월 8일 朝鮮人民黨 / 國民黨 / 韓國民主黨 / 朝鮮共産黨 (<조선일보> 1946년 1월 9일)


임정 귀국 후 ‘민족통일전선’ 결성이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해방 후 몇 달 동안 정치적 분열 추세의 강화에 대한 우려가 짙어지고 있었다. 임정은 분열 추세를 막을 가장 강력한 구심력을 가진 존재로 널리 기대를 모았다.


민족통일전선을 놓고 임정 안에는 두 가지 태도가 있었다. 한국독립당(한독당)을 배경으로 한 우익 성향 주류는 좌익과의 합작에 큰 기대를 걸지 않고 임정의 법통을 중심으로 한 우익의 통합을 중시했다. 한편 조소앙, 김원봉 등 비주류는 좌우합작을 중시하고 이를 위해서는 임정의 법통도 어느 정도 양보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12월이 지나가는 동안 좌우합작의 중요성이 더욱더 부각되었고, 이에 따라 비주류가 적극적 정치 통합을 위해 주도하는 ‘비상정치회의’가 임정 지도부의 승인과 지지를 받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모스크바 외상회의 결정이 알려지자 독단성이 강한 극단적 반탁 노선에 임정 지도부가 휩쓸리고 공산당이 이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서면서 정국이 대결 분위기로 흘러가게 되었다. 임정 비주류 등 합작을 중시하는 정치인들이 이에 위기감을 느끼고 대응을 서두른 결과가 1월 7일의 ‘4당 코뮤니케’였다.


간결한 내용의 4당 코뮤니케에는 두 개의 현안이 언급되었다. 3상회의 결정 문제는 ‘태풍의 눈’으로 떠오른 문제였고, 정치테러 문제는 심각성이 꾸준히 늘어나 온 문제였다. 11월 20-22일 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에서 크게 드러난 테러 문제가 12월 29일 조선인민보 습격과 그 이튿날의 송진우 저격으로 정치계의 중심 문제로 부각되었다. 4당 코뮤니케가 나오던 시점에서도 국군준비대 탄압, 대동일보와 자유신문 습격 사건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정치테러 문제는 원론적인 얘기밖에 나올 수 없는 것이었지만, 신탁통치 문제에 대해서는 4당 코뮤니케가 효과적인 해법을 제시할 수 있었다. 3상회의 결정은 지지하되 신탁통치 문제는 “장래 수립될 우리 정부”가 주체적으로 대응한다는, 중층적인 접근방법이었다. (많은 연구 문헌에서 ‘중층적’ 대신 ‘이중적’이란 말을 쓴 것을 보는데, 마치 같은 차원에서 이율배반을 품은 것 같은 인상을 주는 말이라서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 취지에 대한 지지와 방법에 대한 비판은 다른 차원의 일이므로 ‘중층적’이란 표현이 적합하다고 본다.)


이 중층적 접근방법을 가장 일관되게 제창한 것이 여운형의 인민당이라고 서중석은 본다.


(여운형은) 조선의 지도자를 신랄히 비난하고, 삼상회의 결정은 지지할 점도 있고 배척할 점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덮어놓고 지지한다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고 조공을 비판했다. (...) 여운형은 이 기자회견에서 신탁통치 문제를 정확히 파악치 못하고 대중을 어지럽게 하고 신탁통치를 이용해 민족을 재분열시킨 것은 중대한 과오라고 반탁투쟁을 비판했다. 사실 1월 14일 이전인 1월 7일 4당회의를 앞두고 나온 이여성의 담화도 여운형의 의사를 전달한 것이다. 이여성은 이날 삼상회의 의도는 감사하지만 신탁통치라는 용어는 절대 찬성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좌우가 공동 코뮤니케를 발표하자고 역설했다. (<지배자의 국가, 민중의 나라> 160-161쪽)


서중석은 여운형의 입장이 “좌우합작에 의해서만 통일국가 건설이 가능하다고 확신했고, 좌우합작으로 삼상회의 결정에 주체적으로 대응해 반드시 임시정부 수립이 성사되도록 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으로 높이 평가했지만, (같은 책 166쪽) 그 입장이 투영된 4당 코뮤니케는 불발탄으로 끝났다. 안재홍이 1948년 6월경에 쓴 회고를 보면 1차적으로 한민당에, 2차적으로 공산당에 책임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1946년 1월 6일, 탁치안으로 인한 좌우분열의 기세를 완화하고 결합 협동의 길을 열고자, 국민당-인민당-한민당-공산당 등 4대 정당의 대표와 임정 대표들이 회동하여 십수 시간 철야 토의한 결과, 소위 ‘4당 코뮤니케’란 자 성립되었으나, 그 제3항에서 “국제 헌장에 의하여 의구되는 소위 탁치안은 임시정부 수립된 후 독립정신에 준하여 해결키로 함”으로 약정한 것이 그 어구 철저치 못하다고 하여, 일반의 반대 높았고, 국민당 내에서도 반대의 소리 있고, 한민당에서는 그 당 대표 김병로-원세훈 양씨를 심히 비난하고 취소를 발표하는 등 사정 있어 결국 폐기되었다. 이즈음 공산당 측에서는 이로써 마치 4당 전부가 3상 결정 전면 지지에 기울어진 것처럼 선전하여, 더욱 민중의 의혹 불만을 조장하였다. (“기로에 선 조선 민족” <민세 안재홍 선집 2> 266-267쪽)


끝에서 언급한 공산당의 선전 활동에 관한 구체적 자료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당시 공산당의 체질이나 분위기로 보아 그럴싸하게 들리는 말이다. 4당 코뮤니케 작성에 참가한 사람들은 우익 정당 소속이라도 좌우합작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중도파 성향의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3상회의 결정의 제한적 수용을 통해 합작의 근거를 지키려 했지만, 극우파의 반탁운동과 정면대결을 펼치려는 공산당에서는 4당 코뮤니케가 제한적 수용이 아니라 전면적 수용인 것처럼 선전해서 중도파와 극우파 사이를 이간하려 했으리라고 생각된다.


4당 코뮤니케가 발표된 이튿날 이를 거부한 한민당의 성명서는 이런 내용이었다.


“昨 1월 7일 하오 1시에 시내 모처에서 회합한 4대 정당 회의에서 결정하였다는 공동성명서 중 신탁통치에 관한 조항은 신탁통치 반대의 정신을 몰각하였기 때문에 본당에서는 8일 긴급 간부회담에서 此 조항을 승인치 않기로 결정하고 종래의 신탁통치의 반대 태도를 일관 주장함”

1946년 1월 8일 韓國民主黨 (<동아일보> 1946년 1월 9일)


이 성명서에서 “신탁통치에 관한 조항”이란 “국제 헌장에 의하여 의구되는 소위 탁치안은 임시정부 수립된 후 독립정신에 준하여 해결키로 함”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것이 “신탁통치 반대의 정신을 몰각”한 것이라고 어떤 근거로, 어떤 기준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일까? 한민당의 반탁운동이 정말 신탁통치를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략적 목적을 위한 것이었음을 이 억지에서 알아볼 수 있다.


한민당 대표로 4당 회담에 나간 김병로와 원세훈은 창당 때 감찰위원장과 총무를 맡았던 같은 1887년생의 원로급 중진이었다. 그들은 8월 하순 안재홍의 권유에 따라 건준에 참여하려다가 공산주의자들이 건준을 장악하면서 안재홍마저 건준을 떠나는 바람에 한민당에 합류한 민족주의자들이었다. 한민당에도 이들처럼 극우파가 아닌 민족주의자들이 있었다. 그들이 1946년 10월 한민당을 대거 탈퇴하는 사태도 원세훈이 대표로 나선 좌우합작 노력을 한민당 주류가 뒤집은 데 따른 일이었다.


1월 7일의 4당 코뮤니케는 신탁통치안을 극복하기 위한 합리적 대책이었다. 이 시도가 실패한 이유를 서중석은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정치훈련이나 정치적 견식을 갖지 못했다는 점도 작용했겠지만, 대국적 견지에서 풀어나가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았고 계급적 이해관계와 주도권 의식이 아주 강했다.”고 하여(<지배자의 국가, 민중의 나라> 166쪽) 정치인들의 자질과 태도 문제로 설명했는데, 나는 극좌와 극우의 ‘적대적 공생’을 향한 노력이 일체의 합작을 봉쇄하는 쪽으로 작용한 점을 더 부각시키고 싶다. 물질적 자원을 가진 한민당과 이념적 자원을 가진 공산당이 서로 적대하는 것 같으면서도 중도파가 주도하는 합작을 막는 데 서로 호응한 구조적 문제를 중시하는 것이다.

 

Posted by 문천


‘댄스홀 사건’이라고도 불린 김계조 사건이 터졌다.


40년간 조선을 착취무대로 착취한 악마의 전당 전 총독부는 무조건 항복 후에도 그래도 무엇이 부족한지 놀랠만한 음모를 세워 우리 조선을 영구히 그들의 식민지화하려던 사실이 백일하에 폭로되었다. 前 朝鮮鑛業會社 사장 金桂祚(39)를 중심으로 한 횡령장물 수수에 관한 사건은 그간 검사국의 金洪燮 검사의 담임 아래 취조를 전부 끝마치고 사건 일체를 서울지방법원으로 넘기었는데 동 법원에서는 머지않아 공판에 부치기로 되었다는 바 사건 내용의 개략은 다음과 같다.

 

금차 대전이 일본의 무조건항복이라는 확정적인 단계로 들어가게 됨을 알게 되자 8월 9일 후 총독부의 총독 이하 각 수괴자들은 자기들이 조선을 철거한 후 조선에 친일정부를 수립할 음모를 세웠으나 그것이 수포로 돌아가게 됨을 염려하여 8월 15일 후 또 다시 그들은 조선인으로 된 정치음모 비밀단체를 조직하고자 일본인 세화회 회장 穗積眞六郞(37), 전 경무국장 西廣忠雄, 전 조선신탁회 사장 石田千太郞, 전 재무국장 水田直昌, 전 광공국장 鹽田正洪 등은 전기 김계조에게 기밀자금으로 현금 250만원과 물자설비 500만원 이상 700만원 총계 1,000만원을 제공하여 國際文化社를 조직하고 표면으로는 극장, 댄스홀, 요리집, 여관 등을 경영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그 실은 (1) 장래 조선정부에 친일파를 잠재시켜 친일적 시정을 하도록 하며 (2) 배일 친미파를 암살하며 (3) 조선정부 비밀정책을 탐지하며 (4) 조선과 미국과의 이간을 책동하고 (5) 조선국내 치안 교란 등……. 조선 독립발전의 방해와 일본인의 생명 재산을 보호할 목적으로 탐정과 정치모략을 꾀하게 하였다는 것으로 이들에게는 많은 무기와 악질적 폭력단까지 배치하였다는 사실이 폭로된 것이다. (<조선일보> 1946년 1월 5일)


“친미파 암살”, “미국과의 이간” 등 목적은 미군정의 전개 양상에 따라 필요하지 않게 되었지만 8-15 직후 상황에서는 점령군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것이 물러나는 일본 식민지배자들이 바라는 것일 수 있었다. 구체적 목적에 앞서 중요한 사실은 식민지배집단의 핵심부에서 자기네 정치적 목적을 위해 39세의 조선인 기업가에게 거액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 1월 18일자 <동아일보>의 공판 기사에서 알아볼 수 있다.


문: 재산은 얼마나 되는가?

답: 동산 부동산 합하여 이백만원 가량 됩니다.

 

문: 학력은?

답: 소학교 4년에 중도퇴학 하였습니다.

 

문: 일본에는 몇 살 때에 갔는가?

답: 19세 시에 일본 구주로 갔다가 다시 광도로 가서 돈벌이를 하였습니다.

 

문: 광도에 가서 일인 정치가들과 교분을 맺었다지?

답: 그렇습니다. 망월칠랑과 민정당의 목원 씨와 알게 되었으며 물정 양면으로 도움을 받았습니다.

 

문: 광도에서 귀국한 후는 무슨 일을 하였는가?

답: 회문탄광을 발견하여 회사를 조척한 후 탄광개발비로 동척(東拓)으로부터 120만원의 대여를 받아가지고 석탄을 파는 사업을 하였습니다.

 

문: 김정목과는 언제부터 알게 되었는가?

답: 4년 전에 알았습니다.

 

문: 피고가 관계한 8회사 자금은 2천만원이라는데 그 자금의 출처는?

답: 안전은행과 동척에서 얻은 게 1천만원, 개인에게서 얻은 게 6,7백만원 가량 됩니다.

 

문: 피고는 일본인들과 교제 시에는 배구자를 통하여 많이 하였다는데?

답: 그렇지 않습니다.

 

문: 원등 정무총감과 수전, 서광 국장과는 언제부터 알았는가?

답: 원등은 작년 5월에 김정목의 소개로, 서광은 경전 사장 수적의 소개로 알게 되었으며, 수전과 염전은 광산 관계로 알게 되었습니다.

 

문: 8-15 후 그들과 처음 만난 날짜는?

답: 8월 20일경에 딴스홀을 설립할 생각으로 서광을 방문하고 자금을 융통하여 달라고 교섭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등과 교분이 깊은 김정목을 시켜 매일같이 원등을 방문케 하여 자금을 운동하였습니다.

 

문: 딴스홀 경영비로 서광 경무국장에게서 받은 50만원을 각 단체에 주었다는데?

답: 그렇습니다.

 

문: 일인세화회장 수적이 무상으로 60만원을 준 것은 이해키 어려운데?

답: 서광이는 제가 빌려준 50만원을 받기 위하여 60만원의 대여를 알선한 것입니다.

 

문: 기록에 의하면 위정자인 총독관리가 조선의 부녀자를 위하여 극력 거액을 대주었다는 것은 이해키 어려우며 딴 의사가 있지 않은가?

답: (대답이 없었다.)

 

문: 피고는 극력 부인하지만 김정목의 말에 의하면 친일 세력을 부식 유지시키는 동시에 정치적 음모를 세우는 소굴을 계획하였다는데?

답: 그렇지 않습니다.

 

문: 김정목은 피고와 어떤 원한이 있는가?

답: 딴스홀 경영에 있어서 경영권을 3분하자는 데에 피고가 응치 아니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 일본군사령부 연회는 항상 피고의 집에서 하였다는데?

답: 1년에 1,2회씩밖에 한 일이 없습니다.

 

문: 딴스홀 장소에 대하여 강(岡) 경기도 경찰부장이 힘을 썼다는데?

답: 그렇습니다.

 

문: 그 장소의 교섭은?

답: 다 여의치 못하고 우선 삼월(三越) 4층으로 하였습니다.

 

문: 딴스홀 수입은?

답: 한 달에 30만원 정도였습니다.


학력도 재산도 없는 한 19세 청년이 1925년경 돈 벌러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일본 정치인들과 교분을 맺었다고 한다. 정치주먹 역할이 얼른 떠오른다. 귀국해서 탄광 설립으로 사업을 시작하고 총독부 고관들과 가까이 지냈다. 동척, 은행과 개인으로부터 거금을 대여받아 사업자금으로 썼다. 일본군사령부 연회를 자기 집에서 열어줄 정도로 가까이 지냈다.


이런 사람이 해방 직후 현금 250만원을 포함한 1천만원대 재산을 일본인 고관들에게 기밀자금으로 받아 댄스홀 등 유흥업소를 경영하며 무기를 모으고 폭력단을 조직했다는 것이 사건 내용이었다. 극우파 자금으로 활용될 성질의 돈이었다.


2월에 기소된 화신 사장 박흥식(1903-1994)의 횡령 혐의 역시 내용이 다르면서도 틀이 비슷한 사건이었다. 1946년 3월 20일자 <동아일보>의 공판 기사로 이 사건을 살펴본다.


문: 재산 정도는?

답: 8월 15일 현재 평가로 약 1천만원 가량 됩니다.

 

문: 교육 정도는?

답: 학교는 다니지 아니하였습니다.

 

문: 피고는 조선비행기회사를 설립하였다는데?

답: 제가 설립한 게 아니고 군부와 총독부가 설립한 회사에 사장으로 취임만 하였습니다.

 

문: 이 회사는 일본의 침략전을 조장하는 회사인 만큼 우리 조선사람이라면 이런 회사의 사장에 취임할 수는 없을 것인데?

답: 동감입니다. 그러나 그 때 정세가 당국의 사장 취임 권유를 거부한다면 도저히 조선서는 살 수 없는 형편이어서 그들의 압력으로 부득이 취임하였습니다.

 

문: 군부로부터 8월 27일 후 수차에 걸쳐 총액 4850만원의 돈을 받았다는데 사실인가?

답: 상월(上月) 군사령관에게 애원하여 4800만원을 받았습니다.

 

문: 상월에게서 위로금으로 2천만원을 받았다고 하나 그것은 거액이어서 위로금으로 보기는 어려운데?

답: 처음에 상월 군사령관이 1천만원을 주면서 그대의 입장이 곤란할 터이니 일본으로 가자고 하였으나 거절하였습니다. 그 후 생각하여 보니 이 돈을 받아가지고 건국사업에 쓰면 유효할 것 같아서 2천만원을 갱생자금으로 받았습니다.

 

문: 그러면 2천만원은 어떤 사업에 쓸 계획이었던가?

답: 5천만원의 재단을 설립해 가지고 지도자 양성(구미 각국에 유학생 파견), 대학 설립, 고아원, 병원 등 자선사업을 계획하고 군정 당국과도 상의 중이었습니다.


일제 말기까지 조선은행권 발행고가 50억원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는데 해방 직후 석 달 동안 35억원이 증발되었다. 다른 문제가 없더라도 그 자체로 조선의 경제 구조를 충분히 뒤엎을 만한 문제였다. 늘어난 돈이 어디로 갔는가? 김계조와 박흥식 외에 일본 당국자들로부터 뭉칫돈을 받은 사람이 더 없었으리라고 볼 수 없다.


자기 재산 2백만원이라는 김계조는 1천만원을 받았고 자기 재산 1천만원이라는 박흥식은 5천만원을 받았다. 이런 사람들이 재력을 키워 조선의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물러가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는 바람직한 일이었나보다. 박흥식이 조선비행기회사 투자를 5천만원으로 보상받았다면 경성방직 김연수의 만주 방직공장은 어떤 보상을 받았을까?


박흥식은 지도자 양성, 대학 설립과 자선사업에 그 돈을 쓸 계획이었다고 진술했다. 듣기 좋은 사업들이다. 그러면서 또한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기에도 좋은 사업들이다.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기에 좋지만 듣기에는 별로 좋지 않은 사업도 있었을 것 같다. 청년단체 조직이라든가, 극우정당 후원이라든가. 그런 사업은 공판정의 진술에서 물론 빼놓았을 것이다.


박흥식 한 사람이 5천만원을 거머쥐었다면,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친일파 인사들이 받은 뭉칫돈의 총액은 얼마나 되었을까? 10억원은 넘었겠지. 당시 통화량의 10%가 넘는 돈이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주체하기 힘들 정도의 돈벼락을 맞는 동안 민중 전체는 통화량 증가만으로도 곱절 가까운 물가상승을 겪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미군정의 잘못된 정책, 이승만의 야욕, 한민당의 반동성, 공산당의 독단 등 해방공간 역사의 흐름을 험한 길로 이끌어간 요인들은 여러 가지 있다. 그러나 그런 인적 요인들의 파괴력은 엄청난 규모의 ‘검은 돈’에 비하면 오히려 약소한 것 아니었을까? 몇 달 사이에 통화량의 70%가 늘어나고 그 3분의 1이 소수 반사회적 집단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는 상황을 상상해 보라. 돈이 그렇게 괴상한 형태로 깔려 있다면, 아무리 의인이 많고 악인이 적은 사회라도 무너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