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언어는 흔히 ‘공식 언어’(lingua franca)와 ‘지역 언어’(vernacular)로 구분되어 있었다. 공식 언어는 문명의 상부구조에 쓰인 것이므로 하나의 문명권에 공통되는 언어였고, 지역 언어는 각 지역 주민들의 생활에 쓰이는 언어였다. 중세문명은 상부구조와 주민의 일상생활 사이의 거리가 컸기 때문에 두 가지 언어가 따로따로 사용되었다.


근대화는 문명의 상부구조와 일상생활 사이의 간격을 줄이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으므로 공식 언어가 퇴화하고 지역 언어가 공식화하는 변화를 수반했다. 유럽에서는 16세기에 종교개혁을 계기로 성서가 지역 언어로 번역되면서 지역 언어가 발전의 계기를 맞았고, 18세기 들어 외교와 학술을 비롯한 많은 분야에서 공식 언어였던 라틴어를 밀어내기에 이르렀다.


15세기 중엽의 훈민정음 제정도 지역 언어의 공식화로서 근대화의 의미를 가진 일이었다. 공식 언어인 한문으로 수용하기 어려운 기층문화의 성장과 발전이 훈민정음 제정을 촉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근대화’는 물론 급격한 산업화를 중심으로 한 유럽식 근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중세 농업사회 체제가 포화상태에 이르러 나름대로 중세 체제의 해체 현상이 일어난, 넓은 의미의 근대화를 말하는 것이다.


조선시대를 통해 시조와 소설 등 한글 문학이 자라난 과정을 보면 한글 공식화의 필요에 대한 세종의 판단은 충분한 근거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민간의 한글 사용은 늘어나는 반면 한글의 공식화 작업은 세조 이후 지체되었다. 중세적 천하체제의 핵심 원리인 성리학이 지배층의 담론을 독점한 데 따른 현상으로 보인다.


개항기에 이르러 국어(國語)로서 지역 언어의 역할이 갑자기 부각되었다. 급격히 늘어나는 새로운 문물과 사상을 담기 위해 기능성이 뛰어난 언어가 필요했기 때문에 한문의 본고향인 중국에서도 백화문의 역할을 키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글이라는 ‘준비된 근대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근대화의 충격 속에서도 한국인의 민족 정체성이 흔들리지 않은 중요한 조건이 되었다.


주시경(1876~1924)이 1896년 독립신문 교정원으로 일하며 한글 연구에 착수하게 된 것이 의미심장한 일이다. 독립신문의 한글 사용에는 그 전과 다른 수준의 엄밀성이 필요했던 것이다. <국문문법>(1905), <대한국어문법>(1906), <국어문전음학>(1908), <말>(1908?), <국문연구>(1909), <고등국어문전>(1909?), <국어문법>(1910), <소리갈>(1913?), <말의 소리>(1914) 등 주시경의 연구업적이 한글의 현대적 발전을 위한 기초가 되었다.


주시경의 영향을 받은 다음 세대 한글 연구자들이 1921년 조선어연구회를 세움으로써 한글 연구와 보급의 조직적 활동이 시작되었다. (조선어연구회는 1931년 조선어학회로, 1949년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꿨다.) 조선어연구회-조선어학회의 가장 큰 사업이 “우리말광”이란 이름의 사전편찬 작업이었다. 1929년 조선어사전 편찬회의 결성으로 시작된 이 작업이 완성을 바라보던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사건이 일어났다.


일본 식민통치자들은 1930년대까지 조선어 사용과 연구를 별로 탄압하지 않았다. 1924년 설립된 경성제대에 조선어-조선문학과를 두어 연구 기반을 만들어주기까지 했다. 이것은 당시의 식민통치가 종속주의였기 때문이다. 서중석은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역사비평사 펴냄) 37쪽에 이렇게 썼다.


일본의 학자 야나이하라 타다오는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정책을 종속-동화-자주의 3주의로 나누고, 종속주의의 전형을 18세기 말 대혁명 이전의 프랑스의 식민정책에서 찾았는데, 한국은 야나이하라가 말한 동화주의와 자주주의의 범주에 들기는커녕, 종속주의의 경우에도 가혹한 예에 속할 것이다. 야나이하라는 종속주의를 식민지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만 식민활동을 하는 주의로 정의하였지만, 일제는 시종일관 경찰과 군대에 의한 직접통치 아래 수탈정책-‘동화주의’-황국식민화정책을 강행하였다.


종속주의 식민통치에서는 동화를 중시하지 않기 때문에 수탈의 효율성에 도움이 되는 통치 대상의 연구를 꺼릴 필요가 없다. 그런데 1937년 이후 전면적 전쟁 상태로 접어들면서 갑자기 동화를 강조하게 된다. 원론적인 동화주의도 못 되고, 극한적 동원을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창씨개명과 일본어 사용을 강제하는 상황 속에서 조선어학회의 사업을 탄압할 필요가 떠올랐고, 조그만 빌미를 잡아 한글 연구자와 그 협력자들을 일망타진한 것이 조선어학회사건이었다.


1945년 1월 함흥지방재판소에서 11명에게 내린 내란죄 등 명목의 판결문에는 “고유언어는 민족의식을 양성하는 것이므로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은 조선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운동의 형태이다.”라는 대목이 있었다. 이 사건은 일제 말기 식민통치의 폭력성과 혼란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이 사건 와중에 압수되었다가 종적을 감췄던 사전 원고가 뜻밖의 장소에서 발견되었다. 1929년부터 1942년까지 13년간 여러 한글학자들이 애써 만든 원고의 일부는 영영 찾지 못했지만 대부분이 발견되었고, 이를 발판으로 1947년 10월 <조선말 큰사전> 첫 권이 발간되었고, 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10년 후인 1957년 10월까지 여섯 권이 모두 나왔다. 현대 한글의 모습이 처음으로 정리되어 나타난 것이었다. 조선어학회의 김병제는 원고 발견 당시의 감격을 이렇게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만 3년 전 즉 1942년 10월 1일에 李允宰, 한승, 李克魯, 崔鉉培, 李熙昇, 鄭寅承, 金允經 제씨를 함경남도 洪原경찰서에서 검속하였습니다. 이분들 외에도 조선어학회에 관계하고 있던 여러분이 같이 검속되었는데 그 때 증거물로 말광 원고를 압수하였던 것입니다. 그 후 함흥 지방법원 검사국에 송국된 후 재판결과는 최고 6년 최하 2년의 극형이었습니다. 그 동안 이윤재와 한승 두 분은 잔인무도한 학대로 인하여 우리말광의 완성을 보시지 못하고 원한의 눈을 감지 못한 채 옥사하였습니다.

 

그러나 남은 여러분은 가진 곤경을 참아 가며 학자로서의 정의를 밝히고 초지관철을 위하여 경성고등법원에 상고를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말광원고는 증거물로 금년 7월 28일에 서울로 전송되었습니다. 그러자 우리에게 해방과 자유의 길이 열린 8월 15일에 석방되어 상고 중이던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제씨는 서울로 올라오자 말광원고를 전력을 다하여 찾았습니다. 그러나 미군이 진주하기 전까지도 일본관헌의 방해로 찾을 길이 아득하여 일시는 매우 염려되던 차에 정성과 이 꾸준한 노력의 보람으로 10월 2일 만2년에 경성역에 있는 조선운송주식회사(朝運) 창고에서 발견하였습니다. 만약 상고하지 않았더라면 찾을 수 없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김윤경 제씨와 내가 주간이 되어 완성을 기하기로 되었는데 4·6배판으로 약 6,000 페이지나 되는 것으로 일본제국주의 하에 된 것인 만큼 註釋에 수정할 것도 있어 좀 시일이 걸리겠습니다. 그러나 인쇄가 원활하면 넉넉잡고 2년 만에는 출판되리라고 믿습니다." (매일신보 1945년 10월 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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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김: 작년 9월 22일에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라는 글을 발표하셨죠. 원고지 2백 매 가량, 길지 않은 글이지만 많은 내용을 담으셨더군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신 중에 그런 글까지 쓰신 것을 보고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해방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이뤄나갈 독립의 과업에 이념적 지표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정말 있는 힘을 다해 쓰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글의 4개장이 (1) ‘국제적 개관과 신민족주의’, (2) ‘조선 정치철학과 신민족주의’, (3) ‘결론으로서의 신민족주의’, (4) ‘신민주주의 건국이념’으로 되어 있습니다. 제목에는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를 나란히 놓았는데, 내용에서는 신민족주의를 3개장에 걸쳐 논한 뒤에 신민주주의 한 장을 붙여놓은 모양새입니다. 이런 불균형의 이유가 무엇인지, 두 주의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설명해주십시오.


안: 일본의 패망을 내다보면서부터 이런 글의 필요를 생각하고 준비해 왔습니다. 그런데 해방 전 몇 달 동안 신변의 위협 때문에 집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지낸 데다 해방이 예상 외로 빨랐기 때문에 준비를 제대로 못 했습니다. 해방이 되고는 건준 일로 정신없이 바쁘다가 8월 말 건준에서 물러난 뒤 몇 주일 동안 만사 제쳐놓고 이 글에 매달렸죠.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해 사람들이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해방이 닥치니까 나 같은 독서인까지도 행동에 쫓겨 생각에 잠길 생각을 많이 가지기 힘듭니다. 사람들의 생각에 도움이 될 글을 어서 내놓기 위해 서둘러 작성했습니다.

 

내 공부가 사회과학보다 역사에 치중한 것이기 때문에 민주주의보다 민족주의에 이야기가 쏠리기도 한 것이지만, 실제로 신민족주의 쪽 얘기 필요가 더 큽니다. 신민주주의 노선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꽤 정리되어 있고, 상당한 합의가 은연중에 이뤄져 있어요. 민주주의 본산인 영국에서 시작해 ‘자유민주주의’라고도 불리는 자본적 민주주의가 있는데, 산업화가 안 된 조선 같은 나라에서는 형식을 중시하는 자본적 민주주의보다 내용을 중시하는 인민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합의입니다.

 

나는 조선인이 추구하는 민족주의와 민주주의가 별개의 사상이 아니라 하나의 이념이 가진 두 측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신(新)’ 자를 붙였지만, 우리 역사와 전통에 품겨 있는 정신을 되살리는 것입니다. 신민족주의의 내용을 밝히는 것이 신민주주의의 의미를 분명히 하는 길이기도 하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김: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국제협력의 필요성이 크게 부각되었고, 특히 제2차 대전 동안 추축국의 국수주의 풍조가 격렬한 비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민족주의가 세계평화의 걸림돌로 지탄받는 마당에 민족주의를 강조한다는 것이 바람직한 일일까요?


안: 민족주의라 하면 흔히 근대자본주의 시대의 산물로 생각합니다. 그런 통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차원의 민족주의를 생각하자는 뜻에서 ‘신’ 자를 붙인 것이죠.

 

민족과 민족의식은 옛날부터 있던 것입니다. 서양의 자본주의 시대를 맞아 전부터 있던 민족의식이 ‘민족주의’로 모습을 나타낸 것이 서양식, 근대식, 자본주의식 민족주의입니다. 이 근대식 민족주의가 배타적 투쟁성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제국주의 문제를 일으킨 것이고, 우리 조선인은 이와 다른 민족주의를 일으켜야 합니다.

 

근대세계의 발전에 낙오하지 않기 위해서는 근대적 문화와 제도를 발전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회든 그 문화와 제도가 자기 체질에 맞는 것이라야 진정한 발전이 가능합니다. 체질에 맞지 않는 방향으로는 발전을 이루기 어렵고, 억지로 발전을 이룬다면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결과가 되기 쉽습니다. 일본이 겉보기로는 눈부신 발전을 이루는 것 같으면서 그 본질이 망가진 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합니다.


김: 일본의 실패는 대단히 극적인 것이기도 하고, 또 조선인들이 함께 겪어온 것이기도 합니다. 그 실패의 경험에서 조선인들도 많은 교훈을 얻어야 하겠죠. 일본의 실패가 어떤 것이었는지 선생님 생각을 말씀해 주십시오.


안: 서양의 근대식 민족주의는 원래 배타적 투쟁성이라는 문제를 가진 것입니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그 문제가 극심하게 나타났지만, 연합국인 영국, 프랑스, 러시아도 제국주의 단계에서 그 문제를 보여 왔습니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그 문제가 특히 심했던 까닭을 생각하면, 두 나라가 근세까지 민족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편협한 지역주의가 강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민족의식이 민족주의로 비교적 순탄하게 발전해 나온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극단적인 배타성을 띠게 된 것이지요. 일본이 섬나라로서 대외교섭 경험이 적었다는 점이 비슷한 조건이 되었습니다. 서양에서 받아들인 배타적 민족주의를 더욱 편협하게 키워냈지요.

 

일본이 자기 역사와 전통을 스스로 아끼는 자세를 지켰다면 이토록 엄청난 파국에 이르는 길을 피할 수 있었을 겁니다. 메이지시대의 개혁까지는 좋았습니다. 혁신으로서의 복고(復古)와 발전으로서의 서양문명 수입이 잘 어울린 것은 ‘지양회통(止揚會通)’의 성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이쇼시대 이후 모방과 나열, 확대와 방만의 풍조에 휩쓸려 자기반성의 자세를 잃는 바람에 파멸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입에 걸고 살던 ‘대화혼(大和魂)’을 생각해 보세요. 민족의 발전을 위해 좋은 영감을 일으켜줄 수 있는 훌륭한 전통입니다. 그러나 쇼와시대의 대화혼은 일본의 전통적 정신이 아니라 서양에서 배워온 투쟁성을 극단화시킨 이름일 뿐이었습니다. 전통의 왜곡이었죠.


김: 선생님 글을 요즘 사람이 볼 때 추상적 용어들이 많이 나와서 관념적이라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지금도 ‘지양회통’이란 말을 쓰셨는데, 이런 말을 무슨 뜻으로 쓰시는 건지 저도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지양’은 독일철학의 변증법을 들여오면서 일본에서 만든 말이고, ‘회통’은 불가에서 중시해 온 개념인데요. 배경이 다른 두 말을 합쳐서 쓰시는 것이 어리둥절합니다. 선생님 글에서 핵심적 용어로 보이는데 어떤 뜻인지 좀 풀어서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안: ‘지양’은 무엇을 받아들이든 겉보기만 받아들이지 말고 본질을 파악한다는 뜻이고, ‘회통’은 서로 다르게 보이는 것들이 공유하는 본질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독일철학과 불교의 용어를 나란히 놓은 것이 김 선생 눈에는 혼란스럽게 보이는 모양인데, 이런 혼란이 바로 문화적 생산력의 바탕이 됩니다. 출신이 다른 개념이라도 ‘지양’이나 ‘회통’ 같은 한자어로 포착될 때, 한자문화를 키워주면서 그 안에서 새로운 맥락을 가지게 되는 것이죠. ‘지양회통’ 같은 말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곧 한자문화의 성장 과정입니다.

 

‘지양회통’은 한 사회의 문화적 성장 원리일 뿐 아니라 한 생명체의 생장 원리이기도 한 것입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 변화를 겪되 원래의 내 본질을 잃어버리지 않고 변증법적, 유기적 변화 과정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예전에 동양인들이 말하던 ‘동도서기’, ‘중체서용’, ‘화혼양재’가 모두 이 원리를 가리킨 것인데, 이 원리의 구체적 성격을 더 분명히 보여주는 말로 ‘지양회통’을 쓴 것입니다.


김: 60여 년 후의 독자들이 읽기 힘든 또 한 가지 문제가 어원에 대한 선생님의 집착에 있습니다. 숫자, 계절 이름 등 우리말 기본 어휘에 담긴 의미를 통해 우리 전통철학의 요점을 밝힌다는 것인데, 언어학적 근거가 든든한 것인지 미심쩍은 대목이 더러 있습니다. ‘하나’에서 ‘하늘’을, ‘셋’에서 ‘씨앗’을 찾아내는 데서는 저절로 무릎을 치게 되지만, ‘둘’에서 ‘들’을 통해 ‘땅’으로, ‘넷’에서 ‘나다(出生)’를 통해 ‘나’와 ‘나라’로 이어진다는 말씀은 그리 석연치 않습니다.

 

그런데 읽다가 깜짝 놀란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성숙한 여성의 생식기를 ‘씨입(種口)’으로 풀이한 대목인데요, 1945년 시점에서 선생님 같은 분이 그런 말을 이런 글에 올린다는 것이 너무 뜻밖이에요. 선생님의 어원 탐구가 가벼운 말장난이 아니라 얼마나 진지한 작업인지 이런 대목에서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1980년대에 제 어머니께서 어원 연구에 몰두하실 동안(이남덕, <한국어 어원 연구>, 4책, 이화여대 출판부 펴냄) 얼굴만 뵈면 어원 이야기를 들으며 지냈습니다. 그래서 어휘 변화의 음운학적 조건을 조금 이해하기 때문에 선생님의 어원 이야기에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대목도 꽤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선생님 세대에서 우리말 어원에 많은 관심을 쏟던 데 비해 지금은 그 관심이 줄어든 것이 전통에 대한 신뢰와 애착이 줄어든 세태를 보여주는 것 같아서 서글픈 생각도 듭니다.


안: 어원 탐구에 음운학 같은 과학적 방법까지 활용하게 되었다니 반갑군요. 그러나 어원에 대한 사회의 관심이 줄어들었다니 안타깝습니다. 언어는 민족문화의 본체(本體)입니다. 민족문화의 본질을 가장 분명히 찾아볼 수 있는 길의 하나가 어원 탐구입니다.

 

육당(최남선)을 친일파로 비난하는 데 내가 동의하지 않는 까닭도 거기에 있습니다. 그의 활동 가운데 친일적인 것은 잔가지일 뿐이고, 몸통은 민족문화 연구였습니다. 어원 탐구만 하더라도 그의 업적은 민족문화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기에 족한 것입니다.


김: 종래의 민족주의와 선생님 말씀하시는 ‘신’민족주의의 다른 점을 간단히 설명해 주시지요.


안: 한 마디로 투쟁적 배타성을 벗어나자는 겁니다. 한 개인이 자존심을 갖고 당당하게 살아가려면 남들과 다른 자신의 특성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남들의 특성을 꼭 모두 깔봐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과 나의 ‘다름’을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평화로우면서도 떳떳한 삶이 가능한 것입니다.

 

민족과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인들이 이웃 민족들을 깎아내림으로써 자존심을 세우려 했기 때문에 이웃들을 괴롭혀 왔고, 이제 그 업보가 자기네에게 돌아왔습니다. 이기고 있을 때는 그들 마음이 통쾌했을지 몰라도 영원한 승리란 없습니다. 평화를 등지는 민족주의는 이웃을 괴롭히고 결국 자기 자신이 고통을 겪게 되는 길입니다.

 

내게 민족주의를 가르쳐준 단재(신채호) 선생이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규정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이 일본 하나만을 ‘비아’로 인식하던 식민지시대의 역사 인식이라고 나는 봅니다. 수천 년 중국과의 관계를 훑어보면 투쟁도 있었지만 협력도 있었습니다. 한 개인이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들과 싸우기도 하지만 돕기도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의 지배를 벗어나 여러 연합국의 도움을 받게 된 이제, ‘비아’와의 투쟁만이 아니라 협력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김: 연합국의 도움은 지금의 조선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이 중요한 것입니다. 해방 자체도 우리 독립운동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연합국의 힘에 대한 일본의 항복으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많은 도움이 필요합니다. 일본 지배가 끝난 기쁨의 이면에는 지금까지 조선 사회를 지탱해 온 체제가 무너져 식량 문제, 산업 문제부터 시작해 벅찬 과제들이 쌓여 있습니다. 연합국의 도움 없이는 당장의 민생부터 엄청난 고통이 예상됩니다.

 

그런데 과연 연합국으로부터 어떤 도움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솔직히 말해서 그들이 조선인의 행복을 위해 일본을 항복시킨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자기네 권리를 지키고 이익을 키우기 위해 전쟁을 한 것이고, 조선의 해방은 부수적으로 일어난 일 아닙니까?

 

일본을 항복시켜서 큰 문제를 해결해 놓은 이제 그들이 자기네 이익을 도외시해 가면서 조선인을 도와줄 것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자기네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이북에서는 소련군의 약탈이 개인적 악행을 넘어 기계류의 조직적 반출까지 소문이 들리고 있고, 이남의 미군도 착한 마음을 보여주는 일이 많지 않습니다.

 

“미국을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말자”는 동요가 나오고 있습니다. 소련과 미국이 일본에게서 조선을 빼앗아 일본 대신 지배하겠다는 욕심이 아닌가, 의심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카이로선언 등 조선을 독립시킨다는 약속은 일본을 약화시키기 위한 전술적 선전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독일 항복 후 런던에 있던 폴란드 망명정부가 소련군 때문에 귀국하지 못했고, 미군은 일본에도 실시하지 않는 군정을 조선 남반부에 시행하고 있습니다.

 

쓸 데 없는 의심을 삼가고 상대방의 선의를 최대한 믿어줌으로써 선의를 더 북돋워줄 수 있다는 것은 압니다. 그러나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過猶不及)”는 말처럼 지나친 믿음에도 믿음의 부족과 다르지 않은 문제가 있습니다. 선생님은 연합국, 특히 미국과 소련에게 어떤 근거로 어떤 도움을 기대하는지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


안: 1882년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제1조에 조선과 제3국 사이의 갈등이 있을 때 미국이 거중 조정한다고 했습니다. 1905년 포츠머스강화조약 때 미국은 이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이 위약이 당시로서는 부득이한 일이었고, 카이로선언 이래 미국은 뒤늦게나마 그 약속의 정신을 되살리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소련은 조선에 대해 제국주의적 야심을 보였던 러시아를 이어받은 나라이지만, 1917년 혁명 후 피압박 민족의 해방을 제창해 왔습니다. 폴란드 사정을 전해 듣고 나도 의아한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억압체제 철폐를 국시(國是)로 지켜온 소련이 어느 연합국보다도 공명정대한 자세로 조선 문제에 임할 것을 나는 기대합니다.

 

각국이 자기 이익을 앞세우는 풍조가 세계대전 종결을 계기로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나친 이기주의가 어떤 참극을 불러오는지 세계대전은 큰 교훈을 남겼습니다. 평화와 공영을 받드는 풍조가 크게 일어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조선의 역사를 보면 조선의 평화가 한반도만이 아니라 주변 지역의 평화를 위해서도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여실히 알아볼 수 있습니다. 조선이 몽골군에게 짓밟힐 때 일본이 침략의 위협에 떨었고, 풍신수길이 조선을 침략했을 때 중국이 전화에 휘말려들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이 식민지가 되었을 때 동양 전체가 평화를 잃었습니다.

 

어느 나라에서든 평화를 원하는 사람들은 조선의 독립을 도와주고 싶어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국인도 소련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각국의 정책이 이런 사람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더 많이 결정되도록 우리가 노력할 일이 있습니다. 독립 조선이 세계평화에 이바지하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믿음을 전 세계인의 마음에 심어주는 것입니다.


 

김: 이번에는 신민주주의에 관한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절차를 중시하는 자본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인민의 복리라는 목적에 충실한 인민민주주의가 신민주주의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원리와 통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선생님은 좌익을 지지하는 것입니까?


안: 장기적 관점에서는 나도 사회주의를 지지합니다. 자본적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라고 흔히 부르는데, 자유가 민주주의의 중요한 본질이기는 하지만 자유의 가치를 절대화하는 데는 문제가 있습니다. 자유에는 강자의 힘을 더 키워주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지나친 자유는 사회의 불평등을 늘리고 안정을 해칩니다. 어느 사회에나 약자가 강자보다 다수인 만큼, 약자의 입장을 지지하는 사회주의가 장기적으로 자본주의보다 좋습니다.

 

미국 같은 나라는 자본적 민주주의를 시행할 수 있습니다. 자원이 풍부해서 아무리 약자라도 생존의 벼랑 끝에 내몰리지 않도록 최소한의 보호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나라에서는 힘의 집중을 국제관계에서 유리한 조건으로 활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처럼 가난한 나라에 자본적 민주주의를 시행한다는 것은 뱁새가 황새 따라가겠다는 격입니다.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사회주의를 지지하지만, 그 원리를 즉각 실현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다고 봅니다. 민생 안정을 위한 최소한의 물질적 조건이 확보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사회주의 원리가 사치일 수 있습니다. 지금의 조선에서는 자본과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우대받아야 합니다. 민생이 안정된 뒤에라야 사회주의 원리를 향한 민심이 자라날 겁니다.

 

그리고 공산주의 계급투쟁은 조선에 필요 없습니다. 온 민족이 계급-계층 구분 없이 통째로 일제 마수에 떨어졌다가, 또 계급-계층 구분 없이 함께 해방을 맞았습니다. 해방의 기쁨을 함께 나누며 민족의 장래를 위해 힘을 합쳐도 벅찬 과제가 널려 있는데, 왜 일부러 내 편 네 편 갈라 싸울 궁리부터 해야 되겠습니까?


김: 계급투쟁을 피할 수 있다면야 좋겠지요. 그러나 조선의 경제사회 구조가 일본 지배 35년 동안 큰 변화를 겪지 않았습니까? 농지 소유구조만 하더라도 조선시대에 비해 집중도가 높아져서 소작농의 비율이 엄청나게 커졌습니다. 광공업 분야의 노동자도 많이 생겼습니다. 계급 모순도 지금의 조선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자본과 기술의 보유자들이 우대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지금 큰 재산과 높은 학력을 가진 사람들은 대개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한 사람들 아닙니까? 선생님 주변을 둘러보세요. 식민 지배에 저항한 사람들은 재산이 꽤 있던 사람들도 재산을 잃었고, 능력 있는 사람들도 능력을 펴지 못하고 지냈습니다. 그 자제들은 고등교육 받기가 힘들었습니다. 자본과 기술에 대한 우대는 바로 친일파의 옹호가 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안: 두 가지 다 일리 있는 지적입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는 더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35년 동안 조선에서도 계급 모순이 상당히 자라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모순의 대부분은 이민족 지배에 기인한 것입니다. 농지 문제만 하더라도 조선인 사이의 모순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농지의 20%를 일본인과 일본 회사들이 탈취한 것이 문제의 몸통입니다. 그들의 농지만 몰수해서 영세농에게 분배해도 문제는 충분히 해결됩니다. 조선인 지주의 경우, 극소수 악질 친일파 외에는 건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협력’ 문제도 너무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해방 전에 관리를 지낸 사람들, 사업해서 재산 모은 사람들을 모두 친일파로 몰아붙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처럼 미련하게 살아온 사람까지 그 시대에 신문사 사장 해먹었다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유불급’이란 말이 여기에도 적용됩니다. 기준을 너무 넓게 잡아 그 시대에 숨 쉬고 산 것까지 친일로 몰아붙이면 비판의 실질적 의미가 사라집니다. 기준을 좁혀 아주 악질적인 경우만 철저히 처단함으로써 ‘일벌백계(一罰百戒)’의 효과를 얻어야 합니다.

 

‘보통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좋은 정치가 아닙니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자기 가족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약간 찜찜한 채로 시키는 짓 한 것을 너무 엄하게 다스릴 필요 없습니다. 지나친 욕심을 가지고 시키지도 않는 짓을 찾아 저지른 놈들만 잡아내도 혼낼 놈들 얼마든지 많습니다.

 

탁월한 도덕가도 아니고 형편없는 패륜아도 아닌 보통사람들, 심지가 약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을 포용해 주면 과거의 행적에서 반성할 점은 반성하며 더 훌륭한 역할을 맡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견디기 힘든 비판에 직면하면 이를 악물고 눈을 흘기며 더 나쁜 길로 찾아갈 수 있습니다. 내 도덕적 기준을 남에게 강요하기보다 이 사회를 위해 어떤 기준이 바람직한 것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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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며칠 전(9월 27일) 해방 직후 통화량의 급격한 증가에 관한 생각을 적은 후 한 독자께서 그 분야를 많이 살펴온 연구자가 있음을 알려주었다. 그래서 급히 정병욱의 논문 “해방 직후 일본인 잔류자들 - 식민지배의 연속과 단절”(<역사비평> 64호, 2003 가을)과 “8-15 이후 ‘融資命令’의 실시와 무책임의 체계”(<한국민족사연구> 33호, 2002. 12)를 찾아서 읽어보았다. 거기서 배운 것을 가지고 수정할 것은 수정하고 보완할 것은 보완한다.


정병욱은 당시의 총독부 재무국장 미즈타(水田直昌)의 추산에 의거해 8월 15일에서 9월 28일 사이의 화폐 추가발행액을 33억5천만 원으로, 그중 예금인출로 지불된 액수를 19억2천만 원으로 파악했다. 나머지 14억3천만 원의 대부분은 퇴각자금과 대출금 등으로 파악했다. 예금인출 중에도 고객들의 단순한 재산권 행사 의미를 넘어서는 '돈 퍼주기'가 많았겠지만, 그 밖의 돈은 전적으로 정치적 목적을 위해 풀려나간 것이다.


두 논문에서 정병욱이 초점을 맞춘 문제는 정치적 대출의 배경이 된 ‘융자명령’이다. 전쟁이 어떻게 되든 은행은 은행 노릇을 해야 하는 것이다. 대출을 주려면 융자 목적의 타당성과 상환 가능성을 검토해야 한다. 그런데 모든 원칙과 상식을 무시하는 ‘돈 퍼주기’에 나서려니 은행의 업무처리 방식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다. 그래서 총독부가 나서서 융자명령이라는 비상수단을 동원해준 것이다.


융자명령이란 1938년 4월 제정된 국가총동원법에 의거해 일본 대장대신이 생산력 확충 등 시국에 긴요한 자금의 원활한 공급을 위해 은행에게 자금 융통 등을 명령하는 조치다. 행정 권력을 절대화하는 전시법령의 대표적인 사례다. 8월 21일 미즈타 재무국장이 융자명령을 발동한 것은 전쟁이 끝난 상황에서 전시법령을 활용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을 뿐 아니라 전시법령의 시행 요건마저도 충족시키지 못한 자의적 조치였다. 그러나 상부의 감독이 없고 은행 경영자들과 배짱이 맞았기 때문에 그냥 시행된 것이다.


융자명령에 따른 대출은 총독부와 은행 양쪽의 심사를 거쳤는데, 어느 쪽 심사도 책임감이 없는 것이었으므로 정병욱이 “무책임의 체계”라 한 것은 아주 적절한 표현이다. 총독부 재무국은 고위층의 지시에 따라 일을 처리했고, 은행에서는 총독부의 결정에 기계적으로 따랐다. 총독부 고위층은 이 조치를 통해 마음대로 화폐를 세상에 풀어낼 수 있었다.


미즈타 재무국장과 조선은행의 호시노(星野喜代治) 부은행장, 조선식산은행 야마구치(山口重政) 이사 등 은행 간부들은 미군정 하에서 몇 달 동안 한편으로 군정에 협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금유용, 경제교란 등 혐의를 조사받았다. 빙산의 일각 정도였겠지만 상당한 범위의 혐의가 확인되었으나 아무도 기소되지 않고 1945년 말에서 1946년 초 사이에 모두 일본으로 돌아갔다.


드러난 빙산의 일각 중에는 ‘댄스홀 사건’이란 것이 있다. 김계조라는 사람이 융자명령에 의거해 조양광업 대표로 식산은행으로부터도 대출을 받고, 조선석탄주식회사를 통해 조선은행으로부터도 대출을 받았다. 그런데 조선은행 대출금 250만 원으로 서울 시내에 몇 군데 댄스홀을 만든 것이다.


미즈타 등 관계자들은 미군의 ‘여성 수요’를 댄스홀로 충족시킴으로써 민간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뜻이었다고 변명했단다. 전숙희의 <사랑이 그녀를 쏘았다>에 낙랑클럽 활동무대의 하나로 나오는 미츠코시 백화점 댄스홀도 그렇게 만들어진 모양이다. 몇 개 댄스홀이 6만 미군 장병의 ‘여성 수요’를 충족시키는 데 얼마나 효과를 거뒀는지는 몰라도, 후임 지배자를 편안하고 즐겁게 해주려는 전임 지배자의 노력은 눈물겹도록 알뜰하다.


새로 찍은 조선은행권이 해방 후 조선의 이곳저곳에 뭉칫돈으로 존재하며 권력의 성격을 띠고 있었으리라는 내 추측은 이 논문들을 보며 더욱 굳어진다. ‘융자명령’은 당시 ‘돈 퍼주기’의 전형적 양상을 예시하는 것이지만 돈 움직임의 윤곽에는 접근하지 못한다. 융자명령에 따라 집행된 대출금 규모는 1억 원 남짓에 불과하다. 1945년 9월에 유통되고 있던 조선은행권의 20% 가량이 최근 한 달 동안 어떤 경로로 해서 어디로 풀려나갔는지 밝혀지지 못하고 있다.


해방 후의 조선처럼 생산력이 저하된 상태의 사회에서 현금은 매우 큰 힘을 가진다. 숙식만 제공해도 수많은 유민을 조직할 수 있고 약간의 용돈만 쥐어줘도 수많은 시위대를 동원할 수 있었다.


극우 학생조직의 지도자 이철승이 "꼭두새벽이면 일어나 김성수 댁을 거쳐 전용순 댁에 가서 활동자금을 타내고, 김구 댁인 경교장, 조소앙, 신익희 등 임정요인들이 묵고 있는 한미호텔을 방문하는 것이 일과였다.”고 한다.(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333쪽) “인촌(김성수)의 주머니가 바로 이철승의 주머니”라는 말도 있었다. 1945년 연말부터 나타난 반공 조직의 배경에는 강한 자금력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 유행한 정치형태였던 ‘사랑방정치’의 비용에서 명월관, 국일관의 수많은 잔치들까지. 그리고 이승만과 김구 등이 귀국했을 때 제공된 정치자금까지. 아무리 재력가 그룹이라도 당시 상황에서 보여준 현금 동원능력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해방 후 몇 주일 동안 총독부는 막대한 금액의 돈을 풀었고, 그 후에 뛰어난 현금력을 보인 그룹이 있었다. 그 사이의 연결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조선에 있던 일본인 지도부의 퇴각 계획이 상당히 잘 준비되어 있었다는 인상을 받는 대목이 많다. 화폐 발행과 관련해 특히 강한 인상을 받는다. 통화량의 확대는 퇴각하는 일본인에게 여러 모로 유리한 것이었고, 조선 사회에는 여러 모로 큰 상처를 남긴 일이었다. 종래의 연구에서 조선의 국부(國富) 유출 문제를 지적해 왔는데, 그보다도 조선 사회의 권력구조에 끼친 영향이 더 큰 문제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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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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