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부 출발점은 바다에 Beginnings at Sea

 

제 1장 남중국해를 건너 Across the South China Sea

 

나는 우리가 있어야 할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자라났다. 부모님이 나를 이포로부터 중국의 고향으로 데려가기만 하면 내 삶이 달라질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1936년, 내가 여섯 살 때 결행하려 한 일이다. 그런데 일본의 침략이 임박한 때였고, 조부모님이 아버지에게 가족 부양을 계속할 수 있도록 말라야에서 그냥 살라고 했다. 부모님은 7년 만의 귀향이었고, 나를 데려가 가족들에게 보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짧은 여행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고향 방문 계획을 그대로 추진했다.

 

우리는 기차로 이포를 떠나 싱가포르에서 남중국해를 건너 상하이로 가는 배를 탔다. 부모님은 많은 가족에게 아들을 보여주는 의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어머니는 내 준비를 열심히 해주고 내가 친척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중국 아이의 모습을 대체로 잘 지키는 데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할아버지는 좋아서 어쩔 줄 몰랐고 할머니는 자애로웠다. 사촌들과 노는 것이 즐거웠고 헤어지기가 아쉬웠다. 같은 바다를 건너 이포로 돌아왔다.

 

몇 주일 사이에 남중국해를 두 차례 건너면서 그보다 10년 전 아버지가 그 바다를 처음 건너던 이야기를 어머니가 해주었다. 1926년에 아버지는 싱가포르에서 교편을 잡기 위해 영령 말라야로 왔다. 3년 후 고향에 가서 어머니와 결혼했다. 그리고 수라바야의 중국인 중학교 교장을 맡아 어머니와 함께 남중국해를 다시 건넜다. 아버지에게는 세 번째였고 어머니에게는 처음이었다.

 

2년 후인 1931년에 두 분은 아기인 나를 데리고 그 바다의 한 모퉁이를 건너 페락의 이포로 갔다. 아버지가 그곳의 중국인학교 부장학사로 부임하는 길이었다. 어머니에게는 두 차례 항해가 어두운 바다 위를 지나가는 것일 뿐 아니라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캄캄한 곳으로 가는 길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 그분이 우리가 있는 곳에 관한 말씀보다 있어야 할 곳에 관한 말씀을 훨씬 더 많이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중국에서 본 "남양" Nanyang as a Chinese frame

 

앞선 책 <집 아닌 곳에서>에서 나는 영국식 식민지 학교에 다닌 일을 이야기하고 이포에 서로 다른 두 개 도시가 병존하던 사실, 그리고 중국과 유럽에서 퍼져나간 전쟁이 사람들의 삶에 끼친 영향을 설명했다. 1941년에 일본은 전쟁을 남중국해에 몰고 왔고 그 바다는 3년 반 동안 일본의 호수가 되었다.

 

남양 중국인들은 1945년 일본의 패배에 안도감을 느꼈으나 서양 제국들의 귀환에 대해서는 불안한 마음이었다. 일본 통치가 남중국해 모든 해안 지역을 하나의 권력이 통제한 최초의 사례였다는 사실을 오랜 후에 음미하게 되었다. 그런 상황이 다시 펼쳐지기 바라는 사람은 이 지역에 없을 것이다.

 

전쟁 때문에 내 영국식 학교교육은 중단되었다. 일본 점령기 동안 아버지는 내게 고전한문만 가르쳤다. 나는 손 닿는 대로 책을 읽었는데, 해외 영국인 주부들이 좋아할 만한 영문 소설이 대부분이었다. 그밖에 일상생활에 관한 내 교육은 이포의 구시가와 신시가를 돌아다니며 새로 얻은 다양한 출신의 친구들에게 광둥어와 하카어로 배우는 것이 위주였다.

 

전쟁이 끝나고 영국인이 돌아오자 아버지는 원래 직장으로 돌아갔다. 일본인 밑에서 일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 점령기간에 대한 보상이 있어서 중국 귀환을 위한 자금이 되었다. 그런데 내가 중학교를 다니지 못해서 대학 입학자격이 안 되고, 중국에서 원만한 진학의 길을 찾기가 어려울 전망이었다. 그래서 내가 케임브리지 졸업시험을 칠 때까지 이포에서 1년 더 지내기로 했다. 1947년 시험 합격 후 세 식구가 중국으로 떠났다.

 

그렇게 해서 남중국해와 다시 만났다. 나는 열일곱 살이었고, 엄격한 영국 지배와 가혹한 일본 통치를 겪은 뒤였다. 남중국해를 다시 건너며 이번에는 집에 돌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졸업시험 합격증 덕분에 난징의 국립중앙대학 입학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그 시험에도 합격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가족의 귀향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버지의 심각한 건강 문제 때문에 난징의 추위를 피해 말라야로 돌아갈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되지 않았다면 내 인생은 전혀 다른 길로 펼쳐졌을 것이다.

 

2학년의 첫 학기가 끝날 무렵 공산군이 난징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대학 문을 닫고 학생들을 집에 돌려보내기로 정부가 결정했다. 수도 방어 전투를 벌일 것이 예상되었다. 걱정이 된 부모님은 내게 얼른 이포로 돌아오라고 재촉했다. 1948년에 나는 남중국해를 다시 건넜다. 슬프게도 이 항해가 중국이라는 집과의 작별이었다. 그 후 부모님은 우리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자는 말씀을 다시 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남중국해의 이미지는 내 마음속에 생생히 남았다. 열 살 때 알아낸 사실이 다시 기억났다. 아버지가 세계지도를 사주었을 때 나는 세계를 뒤덮는 붉은색으로 표시된 제국 안에서 내 위치를 확인했다. 지도에는 모든 바다가 표시되어 있었다. 영어책과 잡지에서 읽은 모든 것이 그 지도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전쟁 후에 본 수백 편 영화도 그 뒤를 이었다. 고향과 연관된 남중국해는 더 큰 세계질서 속의 핵심적 요소가 되어있었다.

 

이포로 돌아온 나는 말라야연방, 남중국해로 튀어나온 반도국가에 관해 배우기 시작했다. 페락에서 산 기간 덕분에 나는 연방 시민증을 땄고, 케임브리지 졸업증서도 가진 나는 1949년 싱가포르에 세워진 말라야대학에 입학해 문학사 자격을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떠나가고 있던 식민지체제 속에서 새 출발점을 찾은 나는 말라야를 새 집으로 삼는 길에 나섰다.

 

남중국해는 내 공부에 계속해서 자극을 주었다. 입학 다음 해에 그 바다를 건너 마닐라의 작가 워크숍에 참석했다. 그 후에는 콜롬보와 뉴델리의 행사에 참석하러 벵골만을 비행기로 두 차례 건넜다. 그 여행을 통해 인도양이 믈라카해협을 통해 남중국해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절실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1년 후 학문의 길로 나설 결정을 하면서 영문학 대신 역사학을 택한 것은 역사학 담당 CN 파킨슨 교수의 격려 덕분이었다. 그는 말라야에서 구할 수 없는 원사료를 볼 수 있도록 홍콩 여비를 주선해주었다. 남중국해를 또 한 차례 왕복하는 길이었다.

 

홍콩에 간 것은 남양을 중국 근대화의 발판으로 삼으려던 개혁가와 혁명가들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쑨원을 따르던 사람들이 찾아간 항구마다 중국인 교민사회에 마주치던 과정을 공부했다. 그들은 중국 남부 지역에서 일으킬 반란을 위한 인력과 자금을 교민사회에서 찾았다. 다른 곳 대학에서 온 학생인 나는 홍콩에서 화교, 즉 해외중국인으로 간주되었다. 부모님은 수십 년 동안 인정하지 않던 신분인데, 이제는 인정해야겠다고 말씀했다.

 

개혁 시기와 혁명 시기 사람들에 관해 아는 것을 기꺼이 이야기해 주는 학자, 언론인과 활동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분들이 보여준 문서 중에는 내 졸업논문 “1900-1911년간 해협식민지의 중국 개혁가와 혁명가들”(1953) 작성에 도움이 된 것들이 있었다.

[해협식민지(Strait Settlements)는 페낭, 믈라카, 싱가포르 등 일찍부터 영국 식민지가 된 믈라카해협의 항구도시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아시아 진출 초기에 영국은 항로 장악에 집중하며 주요 항구도시만을 식민지로 삼다가 19세기 들어 영토를 확장했다. 새로 영국 지배를 받게 된 말레이반도의 다른 지역들은 대개 술탄국의 형태를 지키며 영국과 보호조약을 맺었다. 보호조약의 법적 내용은 1905-1910년 대한제국의 을사보호조약과 비슷한 것이었다.]

 

남양-남중국해 지역의 활동이 매우 활발했다는 사실을 나는 알아냈다. 그로부터 말라야와 인도네시아, 마닐라, 사이공, 하노이 등 항구도시, 그리고 방콕과 랑군 등지의 해외중국인 조직들에 관해 읽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과연 남양을 말라야의 중국인 해외 근거지의 배경으로 제시할 수 있을지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Posted by 문천

 

왕겅우(1930~ ) 교수의 회고록 <No Borders>(2026)의 번역 원고를 올리기 시작합니다. 그의 소년기 회고록 <집 아닌 곳에서>와 청년기 회고록 <있는 곳이 집>은 중앙일보 연재를 거쳐 지난 6월 글항아리에서 출판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중앙일보가 새 연재를 시작하기 힘든 형편이라서 블로그에 올리게 되었습니다.

 

앞의 두 책과 이번 책이 회고록 3부작처럼 보이지만, 저자 본인은 이번 책만을 "회고록(memoir)"이라고 부릅니다. 책의 성격 차이를 보면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앞의 두 책은 가족과 후손에게 보이기 위해 수시로 작성한 글을 묶은 "사적 기록"의 성격을 가지는데, 이번 책은 90대 나이에 접어든 후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작성한 "공적 기록"의 성격이 강합니다.

 

지난 3월 싱가포르의 댁으로 찾아가 만났을 때 그분이 당신 글의 한국 출판을 각별히 반기는 이유를 들었습니다. 국가-민족-문명 정체성 문제를 예민하게 의식해 온 그분이 보기에 한국인의 경험과 처지가 자신의 문제의식에 쉽게 공감해 줄 만한 여건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제가 그분 글을 열심히 옮기는 까닭도 대략 같은 것인데, 그분의 기대감이 더 큰 것 같습니다.

 

인간적 공감은 차치하고, 1970년대 이후 중국을 둘러싼 세계의 변화에 대한 빼어난 관점을 담은 책입니다. 물론 한 개인의 관점으로서 시야에 한계가 있겠지만, 그의 관점이 어느 한 쪽에 쏠리지 않은 "울타리" 위에 세워져 있다는 데 그 빼어난 점이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의 중국을 보는 데도 세계정세를 보는 데도 왕 교수의 글이 많은 도움이 되기 바랍니다.

 

 

질서와 무질서의 엇갈림은 평생 나를 따라다녔다. 어떤 극심한 혼란 속에서도 역사학도로서 나는 언제나 구조 비슷한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살아온 경로를 통해 나는 서로 다른 사회들이 안정을 지키기 위해 선택하는 서로 다른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훈련을 받았다. 나는 또한 여러 문명이 근대화의 도전 앞에서 각자의 질서를 추구하는 길을 공부했다.

 

내게 가장 익숙하고 깊이 얽혀 있는 문명은 중국문명이다. 중국은 보편주의 이념의 전파력으로부터 방어에 필요한 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두 차례 혁명을 겪었다. 하나의 혁명을 연구하고 또 하나의 혁명을 관전하면서 내가 얻은 것은 현재와 미래를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설명하기 위해 과거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가 하는 통찰력이다.

 

나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 쉬운 길이 아니었다. 내가 처음으로 감정의 격동을 느낀 것은 아버지가 이포의 영어 소학교에 나를 보냈을 때였다. 어머니는 중국의 가족 이야기를 해주는 노력을 갑절로 늘렸다. 내 마음이 다른 세상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분의 노력은 따져보면 20세기 전반기에 우리 집안 배경을 뒤덮은 무질서에 대한 계속 확장되는 항쟁의 일환이었던 셈이다.

 

부모님은 청나라 말년에 장강(長江) 삼각주에 가까운 두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분들 자라나는 주변에는 혼란이 끝없이 자라났다. 민국 초기, 십 년간의 내전 속에서였다. 그 시기에 쑨원의 혁명당인 국민당은 국가 통일을 위해 십여 개 군벌과 싸움을 벌였다. 두 분은 군대가 오락가락하고 삶에 불확실성이 넘치는 환경 속에서 자라났다.

 

아버지의 왕씨 가문은 청나라가 끝날 때까지 성실하게 관리 노릇을 바라보며 지냈고, 그 후에는 다른 길을 찾아 나섰다. 민국 시대의 군벌 시기에 아버지는 전통적 방식의 공부로 시작했다가 근대적 대학에 입학했다. 교사직을 택했고, 싱가포르와 믈라카의 중학교에 교사로 초빙받았다. 그렇게 해서 영국과 네덜란드 식민지에서 혼란스러운 시기를 피해 지냈다.

 

아버지는 수라바야의 교장직 초빙을 받자 집에서 정해 준 신부인 어머니와 결혼하고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함께 갔다. 어머니의 딩(丁)씨 집안은 왕씨 집안보다 복잡했다. 사업에 관계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계속되는 혼란의 시대에 잘 적응하지 못한 결과 어머니 결혼 때는 가세가 기울어 있었다. 바다 건너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자바에서 나를 낳으실 때 어머니 심정이 어땠을지 나는 궁금해하곤 했다.

 

부모님의 주변만이 아니라 온 세상이 혼란에 빠져 있었다. 서유럽에서 일어난 민족제국들은 미개인에게 근대문명을 전파해 준다는 명분 아래 영토와 권력을 확장하기 위해 지구 전체를 투쟁의 무대로 만들었다. 그 결과인 2차대전은 그 제국들을 자멸의 길로 몰고 갔다.

 

영령 말라야의 한 말레이국가에 광산도시로 만들어진 이포에서 자라난 것은 내게 행운이었다. 부모님은 중국에 할아버지, 할머니, 아저씨, 아주머니, 사촌들로 이루어진 가족 질서가 있다는 사실을 내게 확실히 가르쳐주었다. 두 개 전쟁의 발발로 곧 무너지게 될 질서였다.

 

전쟁 하나는 중국을 토막낸 일본의 침략이었고, 그 때문에 우리는 이포를 떠날 수 없었다. 또 하나는 일본군이 말라야에서 영국군을 몰아낸 전쟁이었고, 그 때문에 아버지가 직장을 잃었다. 그런 상황을 겪으며 나는 차츰 무질서를 정상으로 여기게 되었다.

 

1945년 유엔 창립으로 표방된 민족국가 독립의 이념은 평화로운 미래의 약속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이념이 반가웠고, 학교에 다시 다니게 되었고, 우리 가족이 중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1947년 중국의 대학에 들어갔을 때, 혼란 중에도 특히 질이 나쁜 혼란, 중국인이 중국인을 해치는 혼란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때문에 우리 가족은 말라야로 돌아가야 했고, 나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그러나 근대성을 대표한다고 각자 자처하는 세력들이 중국을 찢어발기던 상황은 잊을 수가 없게 되었다. 부유해지는 길을 찾는 자본주의와 소비에트식 국가 관리 방식 사이의 선택 때문에 수백만 명 인간이 죽어가야 했고, 결국 국민당 민족주의가 패퇴했다.

 

1949년 싱가포르에 새로 생긴 대학에 들어간 것은 행운이었다. 말라야대학에 다니며 나는 독립된 주권국가들로 이뤄지는 새로운 세계질서 안에 새 국가를 세우는 과업에 참여할 전망에 흥분했다. 런던에서 대학원을 다닌 후 독립된 말라야연방에 돌아와 1957년부터 쿠알라룸푸르 캠퍼스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십년 동안 아내 마거릿과 세 아이와 함께 국가건설의 장래를 내다보며 살았다.

 

내가 되고자 하던 역사학자, 현재의 이해에 과거를 활용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역사학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결국 깨닫게 되었다. 중국문명에 관해 내가 배운 가장 좋은 것을 모두 배척하는 마오쩌둥의 문화혁명을 연구하고 싶었다. 그런데 세계가 이념의 냉전으로 갈라져 있었고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에서는 근현대 중국에 관한 책이 모두 금서가 되었다.

 

1968년에 캔버라의 오스트레일리아국립대학(ANU)에서 극동사 교수직을 맡아달라는 초빙이 왔다. 내가 중국 연구를 제대로 하기 위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이해하는 마거릿은 캔버라에서 몇 해 지내며 내 연구를 확충하는 것이 좋겠다고 동의해주었다.

 

말라야에서 공부하고 가르치는 생활을 20년 가까이 했을 때였다. 우리 지역의 분위기가 점점 혼란스럽고 난폭해지고 있었다. 그 분위기가 내 연구 활동에 가하는 제약을 외면하거나 맞서 싸우기보다 캔버라로 옮겨가서 내 공부를 계속하기로 한 것이다. 그로부터 18년간이나 캔버라가 안정된 조건을 보장해 준 것은 놀라운 일이다.

 

18년간 키워낸 기초체력과 방향감각을 가지고 홍콩대학의 초빙에 응할 수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 편입을 앞두고 홍콩에는 불확실성이 넘쳐나고 있었다. “영구조차”로 시작했다가 “99년 조차”로 바꾸고 “50년 후 귀환”으로 방향을 바꾼 불가피한 결과였다. 내게는 20세기와 작별을 고하는 기묘한 방식이 되었다.

 

우리는 1996년 싱가포르로 옮겨가 그 국제도시에서 새천년을 맞았다. 정면 객석에서,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세계질서”가 새로운 도전들을 맞는 상황 속에 두 섬이(홍콩과 싱가포르)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을 보았다. 싱가포르는 우리에게 낯선 곳이 아니었다. 마거릿에게는 자라난 도시였고, 내게는 마거릿을 만난 곳이었다. 그리고 또한 수십 년간 우리를 따라다닐 말라야에 관한 우리의 꿈이 시작된 곳이었다.

 

우리는 싱가포르에서 그리 오래 지내게 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어느 도시보다 이곳에서 더 오래 살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어둡고 신비로운 바다와 오래된 대륙들 사이의 섬들로 이루어진, 경계선이 없는 지역의 질서를 위한 이 새 국가의 노력에 그 답이 있는 것 아닐까?

 

Posted by 문천

 

Deep Structures Traced to Central Asia / 중앙아시아에서 유래한 심층구조

 

이런 형세를 되돌아보며, 해상의 힘과 육상의 힘 사이에 비교적 균형이 유지되던 근대 이전의 역사가 과연 장래의 역사 진행을 내다보는 데 여전히 큰 참고가 되는지 의문을 느낍니다. 언어학에서 말하는 “심층구조” 개념이 이 의문을 살펴보는 데 도움이 되겠습니다. 프랑수아 지풀루의 책 <아시아의 지중해 The Asian Mediterranean>에 이 구조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인도양과 태평양에는 지중해세력의 진입 전에 형성된 심층구조가 있었습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섬이 모여 “지중”해의 성격을 가진 동남아시아 해역에도 안정된 관계망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서 심층구조는 어떤 것이었나요? 수천 년에 걸쳐 유라시아대륙의 여러 부분을 연결하는 관계망이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16세기까지의 모든 역사기록에서 확인되는 존재입니다. <아시아의 지중해>는 이런 관계망을 보여줍니다. 이 관계망이 지중해의 것과 다른 점은 제국의 해군들 사이의 지속적 해상 충돌이 없었던 데 있습니다. 그리고 대등한 세력 간의 적대관계가 1,500년간 계속된 일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페르시아만에서 동중국해에 이르기까지 어느 곳에서도 지중해에서 벌어진 그리스 대 페르시아. 로마 대 헬레니즘 세계, 또는 십자군 대 투르크-아랍 세력 사이의 대결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인도양-태평양 지역의 두드러진 현상은 인도문명이든 중국문명이든 대륙의 힘이 해양을 압도한 것입니다. 이 틀에서 벗어난 예외는 동북쪽 끝의 일본 정도였습니다. 일본은 자기 자리에서 상당한 힘을 키우면서도 오랫동안 대륙을 넘보지 않고 지냈습니다. 16세기 후반 유럽인의 해상력이 그곳에 미치기 전까지는 힘을 밖으로 과시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요약하자면, 인도양-태평양 해역에는 지중해에서와 같은 힘의 대립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수천 년간 두 해역의 연안을 따라 대체로 평화로운 교역활동이 진행되었고, 첨예한 갈등 없이 상품의 이동과 문화의 전파가 이뤄졌습니다. 해상전쟁을 통해 결정된 일도 없고 해군력의 우열이 역사의 진로를 바꾼 일도 없습니다. 갈등은 항구도시와 강 유역의 왕국들 사이에서 처리되었고, 그 지도자들이 협상과 교역활동, 그리고 때때로 일어나는 분쟁의 관리에 나섰습니다. 큰 폭력사태 없이 진행된 이런 활동을 통해 중국과 일본과 한국, 그리고 말레이 섬들을 지나 인도와 페르시아만까지 해안 지역이 연결되었습니다.

 

15세기 초에 명나라 영락제가 거대한 정화 함대를 일곱 차례 원정에 내보낸 일은 있습니다. 태평양과 인도양 사이에 나타난 최초의 강력한 해군력이었습니다. 중국에게 해군을 키울 힘이 있음을 보여준 일이지만, 중국의 역사에서는 하나의 돌연변이였습니다. 바다 쪽에는 경계할 만한 적대세력이 없다는 사실을 정화 함대를 통해 확인하자 명나라 조정은 함대를 해산하고 중국 해안선 밖의 세계에 다시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후로 해안을 벗어난 해상활동은 남쪽 푸젠성과 광둥성의 상인들에게만 맡겨졌습니다.

 

이런 무관심에서 심층구조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중국 역사의 심층구조는 대륙에 기반을 둔 것입니다. 역사의 초기부터 줄곧 그래 왔기 때문에 동쪽과 남쪽의 바다에 관심이 적었습니다. 10세기 이후 중국의 인구 분포가 남쪽으로 쏠리고 왕조국가의 수도가 쫓겨오면서 교역에 관심이 늘어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륙국가로서 자급자족적 성격은 끝내 변하지 않았고, 대륙 중심부로부터 오랑캐의 위협도 계속해서 작용했습니다.

 

남아시아의 상황은 이와 달랐습니다. 인도문명권에는 통일된 관료국가체제가 없었고, 해안 지역의 왕국과 항구들은 중앙의 통제에 묶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정치조직이 각자 해상교역을 펼치며 자기네 사이에, 그리고 밖에서 오는 상인들과 사이에 협상을 진행했습니다. 홍해와 페르시아만 방면에서 오는 상인이 많았고 동쪽에서 오는 상인은 그보다 적었습니다. 그러나 인도가 중국과 공유한 것은 대륙 중심부로부터 육상의 위협이었습니다. 초원의 기병대가 비교적 통과하기 쉬운 서북방이 늘 위협의 방향이었습니다. 그래서 수천 년에 걸쳐 인도의 지배자들에게는 육상의 국경선을 지킬 육군 병력의 확보가 늘 급선무였습니다.

 

동남아시아 도서 지역과 해안 지역에서는 상황이 또 달랐습니다. 이곳에서는 대륙 쪽 이해관계와 바다 쪽 이해관계가 엇갈려 특이한 역사를 빚어냈습니다. 인도와 중국의 힘에 맞서는 힘이 이곳에서 자라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앞에 이야기했습니다. 차이가 나타난 것은 지역 내에서 교역에 의지하는 섬-해안 지역과 대륙에서 오는 압력을 맞아야 하는 내륙 지역 사이였습니다. 토착의 몬-크메르 왕국들과 북쪽에서 오는 타이인과 버마인 세력들 사이의 긴장 관계로 육상에 관심이 집중되는 시기가 많았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이 지역의 육상국가와 해양국가 모두 대체로 자급자족적인 상태를 유지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아 인도양과 서태평양 지역의 권력구조를 만들어낸 중요한 역사적 요인들은 유라시아대륙 중심부에서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중국과 인도, 그리고 지중해 지역에 작용한 힘과 같은 방향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세 개 문명권을 육상으로 연결하는 공격적이고 불안정한 힘은 역사 속에서 많은 어려운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이른바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에는 수많은 세력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서, 전면전 상태가 아닌 평시라도 국부적 분쟁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바다를 통한 교역은 이와 달리 정치적 투쟁을 불러오는 일이 거의 없어서, 교역이 당사자들에게 가져다주는 혜택을 굳이 기록하는 일도 별로 없었습니다. 남겨진 기록에는 계절에 따라 배가 오고간 이야기가 있을 뿐, 극적인 사건에 관한 이야기가 많지 않습니다.

 

 

The Importance of Continental-Maritime Superiority / 대륙과 해양의 득실

 

16세기 이후 세계적 해상활동의 발전에 따라 유라시아대륙 중심부를 육상으로 가로지르는 교역 활동은 대폭 줄었고, 지난 300년간 세계사의 전개에서 그 지역의 역할도 작아졌습니다. 그 지역의 지정학적 의미도 줄어든 것일까요? 심층구조가 바뀌지 않은 이상 그렇지 않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 대륙 중심부의 정치조직들과 연계된 심층구조는 세 방향 모두를 향해 아직도 힘을 쓰고 있습니다. 세계의 경제구조를 바꾼 해양 세계화를 통해 번영을 누리고 있는 대양과 접한 지역에도 이 힘은 작용하고 있습니다. 18-19세기를 통해 유럽의 근대화가 러시아의 동진을 초래하고 중앙아시아의 상황에 따라 청나라의 서진이 진행된 사실에서 이 힘의 존재가 확인됩니다. 대륙 중심부에서 일어난 러시아와 중국의 충돌이 같은 시기에 진행된 해양 세계화처럼 눈에 확 들어오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 충돌의 의미는 작은 것이 아니었고, 1945년 이후 냉전 상황에서 다시 크게 드러났습니다. 해양 세계화의 힘에 밀리던 대륙 세계화의 힘이 회복되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소비에트 진영은 대륙세력의 성격이었습니다. 냉전기를 통해 해군력이 강한 나라들은 모두 자유민주주의 (또는 자본주의) 진영에 속했습니다. 그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고, 해양세력의 대륙세력에 대한 승리를 보여준 일이었습니다. 냉전의 승리는 세계경제에 대한 해양의 힘을 크게 키워주었습니다. 해군력이 이 승리의 열쇠였습니다. 대륙에 갇힌 소비에트 진영의 경제발전을 봉쇄한 것입니다. 이 진영이 바다로 열린 길은 중국 쪽뿐이었는데, 중국에게는 20세기 내내 변변한 해군력이 없었습니다.

 

중국은 수백 년 동안 해군력을 경시해 온 대가를 혹독하게 치렀습니다. 해군을 새로 키우려고 노력은 했으나 1894-95년 일본에게 꺾이고 말았습니다. 1911년 이후의 중화민국은 치열한 내전을 겪고 일본의 침략을 당하면서 해군 건설에 손댈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1949년 인민해방군의 승리는 전적으로 내륙에서 이뤄졌습니다. 군함 한 척도 없는 군대였습니다. 인민해방군에서 해군 이야기가 처음 나온 것은 1948년 장강을 건너기 위해서였습니다. 승전 후에도 동맹을 맺은 것이 대륙국가뿐이어서 해군력의 양성에 도움을 받을 곳이 없었습니다. 해군력을 가진 나라는 모두 반대 진영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초강대국이 존재하는 1990년대 이후 상황에서도 중국이 마주하는 것은 예전의 영국보다도 더 압도적인 해상력을 가진 해양국가입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