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낮에 대덕화 보살님이 다녀간 이야기를 간병인 여사님들께 들었다. 이름을 남기지 않았어도 몇 마디 들으니 그분이 틀림없다.
어머니와 인연이 참 공교로운 보살님이다. 작년 6월 하순 설현 거사가 기사 노릇을 해 주어 암자로 찾아뵐 때 같이 계신 것을 보았다. 어머니가 태안사 떠나신 뒤에 그 절에 다니다가 어머니 이야기를 듣고 뵙고 싶어 찾아왔다고 들었다.
어머니는 늦게 절 살림에 드셨지만, <불광>에 싣던 수필을 좋아하는 이도 많고 청화 큰스님과 서로 받들고 아끼시던 인연을 흠모하는 이들도 많아서 외진 데 계셔도 찾아오는 분들이 꽤 있었다. 그런데 그 날 본 두 분 보살님, 대덕화 님과 그 올케 되는 성진행 보살님은 잠깐 봐도 어머니 대하는 태도가 은근하고도 편안해서 각별히 고맙게 느껴졌다.
서울로 돌아온 이튿날 오후에 어머니가 쓰러지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공주 어느 병원에 모셔놓았는데 큰 병원으로 곧 옮겨 모셔야 할 상황이라고 했다. 몇 차례 통화로 상황을 파악해 보니 당장 위급하신 것은 아니지만 병원 신세는 크게 져야 할 형편인지라, 일산 백병원으로 모셔오기로 했다.
절 살림을 오래 계속하시기 힘들겠다 생각해서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 있던 차였다. 암자에서 큰절까지 포행도 힘들 만큼 기력이 떨어지신 것은 최근의 일이지만, 그보다도 기억력 감퇴가 큰 문제가 되어 있었다. 그 날 일산으로 모셔오도록 결정을 내린 데는 절 생활 끝내실 계기일 것 같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백병원에서 며칠간 검사를 받으신 후 보아두었던 파주의 요양병원에 모셔 인생의 마무리 단계에 순조롭게 접어들었으니, 그 날 쓰러지신 일에는 다행스러운 면도 있었던 셈이다.
백병원에 모신 이튿날 대덕화 보살님이 찾아왔다. 쓰러지실 당시 상황도 설명해 주었다. 두 분 보살님이 공주 시내로 모시고 나와 점심 대접을 한 후 걸어가는 도중에 갑자기 벌러덩 쓰러져서 머리에서 피가 날 만큼 바닥에 짓찧으셨다는 것이다. 퇴행성 치매가 이미 한참 진행되고 있었으니 언제 어디서라도 깜빡 하실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 같은데, 당시 곁에 있던 분들은 얼마나 놀랐겠는가. 검사 결과를 설명해 드려도 좀체 편안치 못한 마음을 털어내지 못하다가, 몇 달 지나 요양병원에서 새로운 생활이 안정되시는 것을 보고야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요양병원에 계시는 17개월 동안 성진행 보살님도 몇 번 와 뵈었지만, 대덕화 님은 한 달에 한두 번씩 꾸준히 뵈러 왔다. 쓰러지실 당시 모시고 있던 책임감이라면 남매간이 같을 텐데, 대덕화 님은 특별히 애틋한 정을 키우게 된 것 같다. 딸 하나 있는 것이 딸 노릇 못하는데, 대덕화 님이 정말 딸 노릇 해드리는 셈이다. 튜브 피딩을 시작한 반 년 전까지, 어머니의 마지막 음식 호강은 그 분 덕분이었다. 공이 드는 음식을 어쩌면 그렇게 알뜰하게 마련해 오는지, 번번이 놀랄 뿐이었다.
한 번 병원에서 만났을 때, 대덕화 님이 친정어머님과 시어머님 병 수발하던 이야기를 하며 자기는 노인 모시는 이력이 있나보다며, 또 한 분 어머님 모시는 것이 기쁘다고 했다. 정말 예쁜 마음이다. 모습도 50대는커녕 40대로도 보이지 않는 미인이지만, 그 밑에 깔린 마음은 사춘기도 겪어보지 않은 아이처럼 밝고 따뜻하기만 하다. 그 분과의 인연은 어머니 말년의 큰 복이시다.
대개는 내가 없을 때 다녀가기 때문에 다녀간 이야기만 곁의 여사님들께 듣는데, 몇 주일 전 한 번은 어머니를 뵙고 싶어 하는 스님이 나도 보고 싶어 하신다는 연락을 해 와서 시간을 정해 만났다. 기력이 영 안 좋으실 때였는데, 그래도 알아보시는 기색이 있으니 얼마나 좋아하던지. 어제 왔을 때는 정신이 훨씬 더 맑으신 것을 보았을 테니, 얼마나 기뻐했을까 생각하며 나도 마음이 흐뭇하다. 고맙습니다, 대덕화 보살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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