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가을, 4개월간의 파리 체류를 끝내며 약간의 여유시간을 가졌다. 1984년 초 타이완 구경으로 해외 나들이를 처음 시작한 이래 부지런히 다니기는 다녔지만, 연구 목적의 여행이기 때문에 다니는 곳이 뻔했다. 이제 귀국하면 학교도 그만뒀겠다, 밖으로 나다니기도 힘들어질 텐데, 좀 못 보던 것을 며칠이라도 보고 싶었다. 이름난 관광지보다 그냥 시골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 주말에는 어느 곳에서 바둑대회가 있는지 알아보았다. 같이 다닐 사람도 없는데, 바둑대회를 쫓아가면 고수라고 대접을 해주니까 지내기 좋을 것 같았다. 지방의 바둑대회에서는 외부 선수들, 특히 고수들 참가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에 참가비까지 따로 주지는 않아도 최대한의 편의를 제공하는 관습이 있다.

캉. 노르망디의 중심도시다. 과히 멀지도 않고 시골은 확실한 시골일 것 같고 괜찮다. 토요일 점심때 파리 발 기차가 캉 역에 도착하니 주최측에서 마중나와 있다. 지역 회원들이 모처럼의 큰 행사에 신이 나서 열심히들 일해주는 가운데 대회는 편안한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두 판씩 둔 뒤에 야외파티로 저녁을 함께 하고 주선해 준 모텔에 일찍 들어와 쉬었다. 대회 임원에게 부탁해 놓았다. 내일 대회 끝난 뒤 부근에서 이틀쯤 쉬다가 가고 싶은데, 좀 더 시골스러운 숙소를 알아봐 달라고.

일요일 오전에 세 판씩 두고 점심때 대회가 끝났다. 나는 오전 첫 판에 앙드레에게 지고, 맥없이 두다가 또 한 판 날려서 입상은 못했다. 그래도 앙드레와 함께 정상급 고수로 대접받는 기분이 괜찮았다.

점심 먹을 때 어제 부탁해 둔 임원이 지역 회원 한 사람을 소개시켜 준다. 이분이 선생님을 자기 집에 모시고 싶어 하는데, 가 보고 불편하시면 다른 숙소를 구해 드릴 거라고. 내 또래로 보이는데, 뼈대가 굵직굵직하고 표정이 순박한 것이 농사꾼 같다. 그런데 임원은 "독토르 콜송"이라 해서 좀 어리둥절했다. 좋은 친구가 될 피에르 콜송과의 만남이었다.

피에르의 차에 타서는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큼직한 밴인데, 차 뒷칸이 어지러운 창고 같았다. 한참 둘러보고서야 싱크대도 있고, 침대도 있고, 자기 손으로 만든 모바일 홈이란 사실을 알아볼 수 있었다. 열살쯤 되어 보이는 아들 푸랑수아도 입성이나 행동거지나 구김살 없는 촌 아이지, "독토르 콜송"댁 자제분으로 보이지가 않았다. 계속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나를 싣고 차는 어느 낡고 아담한 집 앞마당으로 들어갔다. 말끔한 집안은 어지러운 차 안과 달리 확실한 인텔리겐챠 중산층 분위기였다.

차츰 알게 되었다. "독토르 콜송"은 의사였다. 집의 옆 필지에 진료소가 있는데, 조그맣지만 단단한 석조건물이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파괴된 건물의 일부만 살아남은 것이라 한다. 한 필지가 2~3백 평 정도 되는 꽤 오래된 동네 같은데, 전쟁의 파괴 흔적이 많이 남아 있었다. 집의 뒤 필지는 건물 없이 피에르의 집 뒷마당에 연결되어 있는데, 거기다 닭, 토끼, 오리, 거위까지 골고루 키우는 것이 피에르의 취미의 하나였다.

피에르는 취미도 많았다. 가장 중요한 취미는 윈드서핑 같다. 신나던 서핑 경험을 설명할 때는 눈이 반짝반짝했다. 근년 몰입하고 있는 취미가 바둑. 바둑을 단순한 기예가 아니라 하나의 '도'로 여기는 친구들이 유럽 바둑꾼들 중에 많다. 5급도 안 되는 하수들이 바둑판을 무슨 숭고한 원리의 실험장이나 되는 것처럼 심각하게 임하는 자세를 보면 웃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깨물기 바쁘다.

자기 집에서 지낼 만하겠냐고 묻기에 아주 좋다고 대답하니까 너무너무 행복해 한다. 그리고는 사실 그 전에 나를 봤다고 한다. 라데팡스 부근에서 내가 우승한 대회에 왔다가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너무나 흠모해 마지 않았는데, 자기 집에 묵게 되어 꿈처럼 행복하다고 너스레를 떤다. 뭐가 그렇게 흠모스럽더냐고 웃으며 물었더니 시계 누르는 내 폼이 너무나 멋지더라고. 체스용 시계를 쓰는 데 나는 익숙지 않아서 바둑돌을 누른 다음 시계로 손을 가져가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익숙한 친구들은 번개처럼 후닥닥 손을 움직이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다. 엉성한 내 동작이 너무나 여유만만해 보여서 "아! 이것이 전정한 고수의 시계 누르는 자세구나!" 탄복했다는 것이다.

화요일에 돌아오려 했는데, 화요일에 자기 일을 치워놓고 같이 바람쐬러 나가자고 꼬셔서 하룻밤 더 지냈다. 친절할 뿐만 아니라 대인관계에 대한 감각도 서로 비슷한 것 같아서 참 같이 지내기가 편안했다. 화요일에는 유명한 관광지에 데려다주었다. 관광지를 잘 안 돌아다니다 보니 이름도 잊었는데, 육지 바로 곁의 섬을 수도원이 덮어씌운 곳, 썰물 때만 걸어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경치도 아름답고 시설도 멋있었지만, 내게는 새로운 이야기들을 피에르에게 듣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학삐리 아닌 유럽인과의 넓고 깊은 대화는 처음이었다.

나를 우상처럼 쳐다보며 졸졸 따라다니던 프랑수아에게 떠나기 전날 밤 조그만 선물을 하나 줬다. 여행 때 쓰고 다니던 군용 스타일의 모자를 주며(그 녀석 머리통이 참 컸다.) "이 모자를 쓰고 바둑 두면 좀 더 잘 둘 수 있을 거야." 하니까 "정말요?" 하면서 모자를 얼른 써 보는데, 얼굴이 마치 전등에 불 들어오듯이 확 밝아진다. 뒤에서 피에르가 표정으로 나타내는 감사의 뜻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서로 익숙해졌다.

85년부터 뻔질나게 유럽에 다니면서 즐거운 경험이 수없이 많았지만, 독토르 콜송 집에서의 편안함은 각별한 즐거움이었다. 그 이듬해 프랑스에 다시 간 것은 자료조사 미진한 것이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피에르네 집에 또 가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재회의 즐거움에 이어 멀지 않은 앙쥬의 바둑대회에 함께 가 이번에는 마침 다시 마주친 앙드레를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그 때 우승상품은 지역 특산의 적포도주 여섯 병에 백포도주 여섯 병. 적포도주는 체류 중에 마셔 치우고, 백포도주는 피에르 진료소 지하에 있는 와인셀라에 넣어두었다. 그 백포도주 피에르랑 함께 따러 언제 가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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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영어의 "~ism"은 그리스어에서 동사를 명사화하는 어미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그래서 행위, 관습, 상태, 원리, 신조, 특성, 지향 등을 나타내는 여러 용도로 쓰인다. 이것을 흔히 "~주의"라고 번역하는데, 이 번역은 영어에서의 용도 중 일부만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착오를 일으킬 수 있다. 우리 말에서 "~주의"라 하면 윈리, 신조, 지향 등 목적의식이 개재된 규정적(normative) 의미로만 받아들여지고 현상을 묘사하는 기술적(descriptive) 의미가 배제되기 때문이다. (criticism, barbarism 같은 말은 "~주의"로 옮기지 못하지 않는가?)

'자본주의"로 번역되는 "capitalism"은 원래 "자본을 가진 상태"라는 기술적 의미로만 쓰이다가 20세기로 넘어올 무렵부터 규정적 의미로 쓰이기 시작한 말이다. <자본론>(1867, 85, 94)에서도 "capitalist"란 말은 수천 번 쓰이지만(물론 "자본주의자" 아닌 "자본주"의 뜻으로) "capitalism"이 쓰인 것은 총 10회도 되지 않는다. 대신 "kapitalistisches System", "kapitalistische Produktionsform" 등의 표현이 많이 쓰인 것은 이념 아닌 하나의 현상으로서, 기술적 의미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베르너 좀바르트의 <유대인과 근대 자본주의>(1902)와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1904)이 나올 무렵에야 "capitalism"이 하나의 이념을 가리키는 말로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이념으로서 자본주의는 20세기의 역사적 현상이다. 따라서 19세기 이전의 'capitalism'을 규정적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은 일종의 시대착오(anachronism)에 해당된다. 전근대 사회의 "자본주의 맹아"론은 이런 의미의 한계를 가진 것이다. "맹아"라 함은 장차 꽃 피우고 열매 맺을 잠재력을 가리키는 것인데, 그 꽃과 열매가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규정적 의미를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사회에서 어느 시기에 나타난 현상을 실제로 나타나지 않은 현상의 예고로 해석하는 것은 역사적 의미가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그 동안 많은 연구자들이 "자본주의 맹아"에 집착해 온 것은 자본주의의 위력이 어마어마한 세태 때문에 마치 문명 발전의 필수적 단계처럼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본주의를 문명의 궁극인 것처럼, 또는 문명 그 자체인 것처럼 받드는 유사종교 행태까지 나타나는데, 이것은 순수한 믿음이라기보다 기득권 고수를 위해 신자유주의 정책노선을 주장하기 위한 정략적 행태가 더 많은 것 같다.

"자본주의"라는 말 자체가 하나의 이념을 가리키는 인상을 주는 것이므로 이 글에서는 19세기 이전 기술적 의미의 "capitalism"을 "자본체제"라 부르기로 한다. "자본주의 체제"라 하면 이념으로서 자본주의를 전제로 하는 체제라는 잘못된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근세 초부터 서유럽 지역에서 자라난 하나의 경제체제가 19세기를 지나는 동안 힘을 키워 정치와 사회 방면까지 통합하는 강력한 세계체제로 자라나고 20세기에 들어와 이 체제의 원리에 대한 깊은 믿음이 널리 일어나 "자본주의"라는 하나의 이념이 세워졌다고 나는 본다.

1861년 프루동이 내린 "capitalism"의 정의를 "자본체제"에 해당하는 것으로 봐도 될 것이다. "노동자가 노동력으로 자본에 작용을 하여 수입의 원천이 되게 하지만 이들 노동자가 자본을 소유하지 못하는 사회경제체제". (황런위, <자본주의 역사와 중국의 21세기> 20쪽에서 재인용)

 

자본체제의 특성을 논하는 데는 여러 가지 관점이 있지만, 이 글에서는 사적 소유권의 강화에 초점을 맞춘다. 각 관점이 바라보는 측면들은 어차피 서로 얽혀 있는 것인데, 이념으로서 자본주의가 소유권의 절대화를 중심에 두는 것이므로 이에 맞춰 소유권 측면을 부각시키려는 것이다.

소유권 개념은 문명과 함께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문명 초기에는 '원시 공산제'가 존재했으리라고 인류학자들이 추정하는 것이고, 실제로 미개사회에는 소유권 개념이 미약하다는 사실이 확인되어 왔다.

농업문명이 발달하면서 소유권 개념도 자라나지만 농업사회 단계에서는 그 성장에 뚜렷한 한계가 있었다. 사회 질서를 위협하는 수준의 소유권 강화를 억제하는 압력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농업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재산인 농지의 경우가 명백한 예다.

농지는 경작하는 농부가 있음으로써 가치를 발휘할 수 있는 재산이다. 따라서 농부는 자기가 경작하는 땅의 주인이 아닐 수 없다. 대지주가 소작꾼을 마음대로 갈아치울 수 있는 절대적 소유권은 인구가 늘어나 노동력이 넘쳐나게 되는 먼 후세의 일이다. 개간할 땅이 넉넉히 있는 데 비해 노동력이 아쉬운 것이 초기 농업사회에서는 보통이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경작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춘추전국시대 중국 기록을 보면 영주들이 제일 두려워한 것이 백성이 떠나가는 것이었고, 제일 바란 것이 백성이 모여드는 것이었다.

그렇다 해서 농부가 경작지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을 주장할 처지도 아니었다. 농지의 획득과 유지에 권력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래서 권력자와 경작자가 호혜적 공생관계를 맺게 되고 토지는 공유의 대상이 된다. 이 공유는 절대적 소유권 사이의 평면적 분할이 아니라 부분적 소유권의 중층적 결합이다.

권력과 생산력의 공생관계가 농업사회 질서의 본질이다. 권력과 생산력이 1 대 1로 만나면 공생관계의 효율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 권력에는 경쟁이 일어나기 마련이고 이에 따라 소유권의 배타성 문제가 제기된다. 권력 내부에서 몫을 다투는 중간권력의 경쟁이 배타적 성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규모가 큰 사회에서는 최고권력자가 말단의 문제를 모두 직접 보살피기 힘들기 때문에 중간권력이 만들어져 권력 자체가 중층화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생산자 위에 소영주 계층, 그 위에 대영주 계층, 그리고 그 위에 왕이 자리 잡는 것이다. 권력의 중층화는 두 가지 문제를 일으킨다. 하나는 권력의 유통구조가 복잡해서 비용이 많이 들게 되는 것이고, 또 하나가 중간권력 사이의 경쟁으로 소유권의 배타성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두 가지 문제는 동전의 양면처럼 얽혀서 생산자와 최고권력자 양쪽의 부담을 크게 만든다.

중국에서 기원전 10세기를 전후해 '왕토(王土)'사상이 자리 잡은 것은 중간권력이 일으키는 구조적 문제에 대한 대응이었다. 천하의 모든 땅을 최고권력자의 소유로 선포함으로써 중간권력의 경쟁이 과열되지 않도록 한계를 설정한 것이다. 왕의 지배권과 농부의 경작권을 직접 결합시키면서 중간권력의 주체적 역할을 배제하고 보조적 기능만 허용한 관념이다.

왕토사상은 동아시아문명권에서 오랫동안 중앙집권체제를 지지하는 하나의 관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물론 이 이념이 언제나 완벽하게 실현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실현을 위해 행정의 효율화 등 노력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유럽 등 다른 지역에 비해 중앙집권성과 안정성이 뛰어난 정치체제를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동아시아 지배층에게는 "백성과 이익을 다투는 것(與民爭利)"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도덕적 전통이 있었다. 권력, 학식 등 경쟁에 유리한 조건을 가진 계층의 경제활동을 억제함으로써 불공정 경쟁을 원천적으로 가로막은 관념인데, 또한 중간권력층의 역할에 한계를 둔 의미도 있었던 것이다.

동아시아의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는 중간권력의 비용을 줄이고 토지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을 최소화한다는 점에서 권력자와 생산자 양쪽을 다 이롭게 해주었다. 이런 좋은 체제를 만들어낸 것이 동아시아 사람들이 다른 곳 사람들보다 꼭 똑똑해서가 아니었다. 농업사회가 일찍 발달하고 인구밀도가 조밀해져서 갈등을 최소화할 압박을 더 많이 느꼈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소유욕에 적절한 한계를 설정하는 것이 이 체제의 핵심적 요소였다.


농업사회 후기로 넘어오면서 내부 압력이 늘어나 변화 방향이 모색된 것은 유라시아 대륙 어디에서나 일어난 일이다. 변화의 중심축이 소유권 강화에 있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제 권력자의 경쟁 못지않게 생산자 사이의 경쟁도 치열해졌다. 최고권력자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질서가 개인을 직접 보호해 주는 힘이 약해지면서 각자가 자기 안전과 번영을 스스로 확보하기 위해 각개약진에 나서면서 들고 나온 무기가 소유권이었다.

농업사회 안에서도 소유권 강화 현상이 일찍부터 나타난 영역이 있었다. 상업 영역이었다. 농업사회의 생산력 발전에 따라 비생산 인구가 늘고 지역적 분업이 형성되면서 시장이 확대되고 상업의 비중이 커졌다. 상업활동은 안정된 소유권의 발판을 필요로 했다. 같은 시대 같은 사회 안에서도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보다 강한 소유권 의식을 가지고 활동했다.

그리고 상업활동이 집중되는 지역이 생기기도 했다.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이 대표적인 예다. 회사 제도를 비롯해 많은 '근대적' 금융-경제 제도들이 이 지역에서 나타나 유럽 각지로 퍼져나갔다. 강력한 소유권을 전제로 하는 제도들이었다. 그래서 근대 자본체제의 출발점을 베네치아, 피렌체 등 이탈리아의 도시국가에서 찾은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중국인들이 특별히 똑똑해서 안정성 높은 중앙집권체제를 만든 것이 아닌 것처럼 중세 말기 이탈리아에서 선진적 금융-경제 제도들이 나타난 것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당시의 유럽에는 중국처럼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없었기 때문에 이 도시국가들이 특화된 기능을 발전시키는 데 대한 권력의 통제가 약했다. 그리고 당시 유럽 지역은 생산력 수준이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선진적인 제도라 하더라도 필요로 하는 곳이 많지 않았다. 이탈리아에서 나타난 제도들이 북해-발틱해 연안의 일부 지역에 이식되는 데는 몇백 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이 시기 이탈리아의 금융-경제 제도 발전의 배경에 '이슬람 자본체제'가 어떤 작용을 했는지 밝혀져야 할 것이다. <Wikipedia>의 "capitalism" 항목을 보면 이 주제에 관한 연구가 근년 활발한 것을 알아볼 수 있고, 약간의 설명 중에는 8~12세기 '이슬람 농업혁명'에 힘입은 '이슬람 황금시대'에 화폐, 회사 제도 등 선진적 금융-상업 제도들이 고도로 발전한 사실이 나타나 있다.

중세 말기에서 근세 초기에 걸쳐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교역활동에 이슬람 지역과의 교역이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 시기에 이슬람권의 문화가 기독교권보다 높은 수준에 올라 있었다는 것은 더욱더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실증적 연구결과에 접해 보지 않았더라도 이런 정도 배경 위에서 가설을 세울 만한 길은 너무나 분명해 보인다. "이탈리아인들은 이슬람권의 선진적 제도와 문물을 가장 앞장서서 배워 온 유럽인이었다."

근대 자본체제의 뿌리를 이탈리아 도시국가에서 찾는 관점은 유럽 중심주의의 인상을 준다. '세계체제'라는 본질을 떠나 자본체제의 존재를 논하는 의미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슬람 자본체제'에 관해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이 이 관점의 밑바닥을 흔들고 있다. 상업활동이 고도로 발달한 이슬람권에서 교역활동을 벌인 여러 미개지역 중 하나가 유럽이었고, 그 방면의 창구 역할을 맡은 이탈리아인들이 거래 과정을 통해 선진 기술을 배워 온 것으로 보이는 정황이 분명해지고 있는 것이다.

<Wikipedia>의 "Islamic capitalism" 항목 일부 내용을 옮겨놓는다. 나도 읽으면서 놀랐지만 독자 여러분도 놀랄 것이라 믿는다.

"11-13세기에 카리미(Karimi)라는 기업이 이슬람세계 경제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게 된다. 초기 다국적기업이라 할 수 있는 카리미를 통제하는 50명 가량의 상인들도 역시 '카리미'라고 불리웠는데, 그중에는 예멘인, 이집트인, 그리고 더러 인도인도 있었다. 카리미 상인들은 상당한 재산가여서 각자 최소한 10만 디나르, 많으면 100만 디나르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이 그룹은 동방의 많은 주요 시장, 그리고 더러는 정치에도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금융활동의 고객으로 왕후(Emir), 술탄, 대신(Vizier), 외국 상인, 그리고 일반 소비자들까지 넓은 접촉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카리미 그룹은 지중해, 홍해와 인도양의 많은 교역로를 장악하고 있어서 북쪽으로는 프랑키아, 동쪽으로는 중국, 그리고 남쪽으로는 사하라 사막 너머까지 그 교역 범위 안에 들어갔다. 카리미 그룹이 발명한 제도 중에는 대리인 제도, 자금 동원을 위한 프로젝트 제도, 그리고 대출과 예금을 위한 은행 제도 등이 있다. 카리미 그룹이 그 당시까지의 다른 기업들과 다른 점 또 하나는 세금 징수자나 지주가 아니라 순전히 교역과 금융거래만을 통해 구축된 자본체제라는 것이다."

13세기 말 마르코 폴로 여행의 배경도 보다 석연해지는 설명이다. 아직 이슬람 자본주의에 관한 연구성과에 직접 접해 보지 못했지만, 12-13세기의 이슬람권이라면 르네상스 시대의 기독교권보다는 훨씬 '세계체제'에 근접한 현상을 보였을 수 있을 것 같다. 차후 조사로 흥미로운 내용을 얻는 것이 있다면 독자들에게 전할 방법을 찾도록 하겠다.


 
Posted by 문천
 


정운찬 교수가 또 민망한 꼴을 보였단다. 어느 분 빈소에 문상 가서 사오정 플레이를 했다 하니, 개인적 망신일 뿐이지 공적인 문제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서 다행이기는 하지만, 그 망발의 성격이 마음에 많이 걸린다.

왜 그렇게 강박에 몰리는 걸까? 청문회에서 731부대가 독립군 부대 아니냐 대답해서 보는 사람들의 어이를 실종시키더니, 왜 그렇게 자상한 체하느라고 남의 빈소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들어야 하나?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아는 것이라고 공자도 말했지 않나? 국으로 가만 있으면 2등은 한다는 속담도 있지 않나?

그분의 '촌놈 정신'이 그립다. 그러고 보니 그 양반 얼굴 본 게 98년도였나? 그 뒤론 메일만 더러 주고 받았을 뿐, 얼굴 본 기억이 없다. 하여튼, 김대중 정부 들어서고 그분이 한은 총재 물망에 오르내릴 때였는데, 그분 연구실에 찾아가 둘이 앉았다가 그 얘기가 나오니 이런 취지의 말을 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 같은 촌놈이 서울대 교수만도 과분한데, 너무 분수에 넘치는 일 할 생각 없다. 교수 노릇 잘하고 있다가 금융통화위원이라도 맡을 기회가 있으면 학교 밖의 사회를 위해서도 하고 싶은 일을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다."

나는 진짜로 촌놈들을 좋아한다. 대학 시절 이후의 교우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주류의 편안함보다 변두리의 활력에 더 끌리는 기질일까? 주견이 강하신 홀어머니 밑에 자라면서 헝그리정신이 몸에 배어서일까? 게으른 성품 때문에 스스로 긴장감을 필요로 해서일까? 언젠가 프레시안 이근성 고문 말이 생각난다. "김 선배는 한국 사회의 중심부로부터 바깥으로 바깥으로 도망쳐 나오기만 해 온 사람입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한국 사회의 '주류'가 가진 구조적 문제를 아직 철이 없을 때부터 은연중에 감지한 것일지도 모른다. 도덕성의 취약으로 나타나는 이 구조적 문제에 근년 공부 방향이 쏠리고 있는데, 아마 경기중고등학교 다니면서 이 문제를 막연하게나마 느끼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래서 정운찬 교수처럼 분수를 생각하는 촌놈이 좋았던 것일 게다.

청문회를 보다가 참지 못해 <프레시안>에 올린 "공개편지"에서 "형님, 어찌 그리 망가지셨습니까?" 한탄했는데, 98년에 멀쩡하던 양반이 망가져 버린 게 총장 하면서 아닐까싶다. 그리고 망가진 핵심이 그 '촌놈 정신'인 것 같다.

술이 절반 남아 있는 병을 놓고 "절반밖에 없네." 하기보다 "절반이나 있네." 하는 것이 촌놈 정신 아니겠는가. 남들처럼 잘하지 못하는 것을 괴로워하거나 불편해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잘하겠다는 안빈낙도의 자세가 여기에서 나올 수 있다. 그런 자세는 쓸 데 없는 강박을 받지 않는다. 학문에 적합한 자세일 뿐 아니라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자세라고 나는 생각한다.

731부대가 뭔지 모르겠다는 대답이 왜 못 나왔을까? 청문회를 골든벨로 착각한 건 설마 아니겠지. 나는 그 강박이 싫은 거다. 그분이 총리 아니라 뭘 하더라도 "저는 아는 게 있고 모르는 게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게 있고 할 수 없는 게 있는 사람입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게 해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면 좋다. 그런데 모르는 게 없어야 한다는 강박을 가졌다면 할 수 없는 일도 없다는 강박을 가졌기 쉽다. 한국 주류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태도다.

할 수 없는 일이 없다는 생각, 무서운 것이다. 기술만능주의가 여기서 나오는 것이고, 비인간적 행동이 극단으로 가는 것도 이 생각에서 출발한다. 해서 안 될 일을 "차마 못하는 마음(不忍之心)"을 공자가 무엇보다 앞세운 것도 그 까닭이다. 그러고 보면 행복도시, 4대강과 관련한 정 교수의 납득하기 어려운 행보 역시 이미 기술만능주의에 빠져버린 결과는 아닐까?

총장질이 촌놈 정신 망가지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의심하는 것은 '지도자'로 갑자기 부각되는 과정에서 지나친 충격을 받은 것 같아서다. 어릴 때부터 그분을 봐 오면서 그분의 좋은 점을 많이 인식해 왔지만, 그분이 용기 있는 분이라는 인상은 별로 받은 적이 없다. 겁이 없다는 뜻의 용기가 아니라 자기 존재의 가치에 대한 믿음으로서 용기를 말하는 것이다. 용기가 있다면 생긴 대로 놀 생각을 했겠지. 그러나 그분은 모델 찾기에 바빴을 것 같다.

이현재 선생님과 조순 선생님을 모델로 검토했으리라 짐작된다. 조 선생님을 모델로 했다면 그래도 체질에 웬만큼 맞았을 텐데, 조 선생님은 실패한 모델, 이 선생님은 성공한 모델로 판단해 버린 게 아닐까. 이 선생님은 자기 자신과 체질이 너무 다른 분인 것 같은데...

'촌놈 정신'을 그리워하면서도 그 안에 이미 함정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주류와 비주류를 구분하는 의식. 존재의 차원에서 내가 비주류, 촌놈이라고 인식하면서도 당위의 차원에서는 주류를 선망하는 마음도 있을 수 있겠다. 그런 마음이 있으면 기회가 있을 때 정체성을 바꾸려 들 수도 있을 것이고.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길을 바꿀 때도 있는 것이다. '변절'이란 이름에 너무 큰 의미를 두지 않으려 애쓴다. 나도 언제든 어떤 사람들에게는 들을 수 있는 말이니까. 그렇지만 길을 바꿔서 인생이 괴롭게 되는 일은 절대 피하려 한다. 이기적인 향락주의가 아니라 정신건강을 위해서다. 내 인생을 편안히 여기며 주변과 사회를 위해 조금이나마 공헌하며 산다는 존재의 자신감만은 버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정 교수 인생도 너무 괴롭지 않기만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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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