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 언저리에서 더러 인용되는 "깨진 유리창" 이야기가 있다. 어렴풋이 알던 이야기를 이제 조사해 보니 프레데리크 바스티아의 1850년 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Ce qu'on voit et ce qu'on ne voit pas)"에 나온 것이라 한다.

빵집의 유리창을 주인 아들이 실수로 깨뜨렸을 때, 새 유리를 끼우기 위해 돈을 내야 할 주인이 마음아픈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사회 전체를 봐서는 나쁜 일이 아니라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유리가게 주인에게 일거리가 생겨 수입을 얻고, 그가 그 돈을 다시 소비하고, 경제의 활성화에 보탬이 되는 행위가 이로부터 연쇄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바스티아는 이런 관점이 "보이는 것"에만 얽매여 "보이지 않는 것"을 놓치는 오류라고 지적한다. 유리가 안 깨졌으면 빵집 주인이 유리값으로 쓸 돈을 뭐든 다른 곳에 써서 어차피 비슷한 경제 활성화 현상을 일으켰을 것 아니냐는 말이다. 유리가게 주인이 실제로 번 돈은 빵집 주인이 쓴 돈보다 작을 수밖에 없으니, 그 손실이 사회 전체에게는 의미 있는 것이라는 지적이었다. 그가 말한 "보이지 않는 것"이 그 후의 경제학에서는 '기회 비용'이란 개념으로 채택되었다.

바스티아의 반박에도 불구하고 경제 활성화를 절대시하는 풍조는 계속되고, 오히려 더 확대되었다. 20세기 후반에는 '군사적 케인스주의(Military Keynesianism)'라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다. 군비 증강에 경제 활성화의 효과가 있다는 주장이다. 1930년대 나치 독일과 1980년대 미국의 상황을 예로 든다.

군사적 케인스주의도 경제학을 전공한다는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경제학 기본 개념들도 알 듯 말 듯한 내가 타당성을 논할 일이 아니다. 그저 말할 수 있는 것이라면, 좁은 범위, 좁은 의미에서 타당한 이야기를 지나치게 확대 적용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인상 정도다. 정부 지출을 늘려 고용을 확대하는 케인스주의 정책노선이 대공황이나 전후 상황에서 큰 효과를 얻은 것은 자원의 활용도가 극도로 낮은 일시적이고 특수한 시장 상태 때문인 것으로 이해한다. 어느 정도 정상적 상태의 시장에 똑같이 적용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특수 이해관계자' 이야기가 그럴싸하게 들린다. 단적으로 얘기해서, 유리가게 주인이 동네 아이들에게 푼돈을 주며 유리창 깨뜨리는 '실수'를 적극적으로 유발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유리가게 주인에게 군산복합체를, 동네 아이들에게 정부를 대입해 보자. 군산복합체에게는 사회 전체에 손해가 되는 전쟁이라도 일어나기 바라는 이해관계가 있고, 정부와 언론을 자기네 바라는 쪽으로 끌어당길 로비능력이 있다. 봉 잡히는 가게 주인이 세금 내는 시민들 입장이다. 20세기 후반 군산복합체 세력의 엄청난 규모를 생각하면 '군사적 케인스주의'라는 것에 그 입김이 들어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4대강 사업도 특수 이해관계자의 존재를 염두에 두지 않고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추진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경제 활성화를 위해서는 아무 쓸 데 없는 피라미드라도 만들어야 한다"는 케인스주의 정책노선을 들먹이면서 정작 경제학자들의 판단이 개입될 여지를 없애려고 타당성 검토를 회피하는 절차상의 문제까지 일으키고 있다. 유리가게 주인이 빵집에 들어와 "유리를 많이 깨뜨려 나한테 유리값을 많이 내야 그 돈이 돌고 돌아 빵집 매상도 올라갈 겁니다." 하면서 유리창에 몽둥이를 휘두르는 꼴이다. 그 몽둥이를 빵집 주인이 쥐어준 것이라고 하지만, 막상 휘두르기 전에 그래도 되는 건지 이야기는 해야 된다.

특수 이해관계자 이야기에서 옆으로 잠깐 샜지만, 바스티아가 '깨진 유리창' 얘기를 꺼낸 시점이 주의를 끈다. 아직 케인스주의 같은 식으로 이론화되지는 않았지만 "파괴는 건설의 아버지" 식의 '적극적 사고'가 19세기 중엽에 유행하고 있었기에 바스티아가 이를 반박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1832)이 나온 것도 그 무렵의 일이었다. 이 책은 오랫동안 고전의 위상을 누렸고, 거기 담긴 "전쟁은 정치행위의 연장"이라는 말은 전쟁의 개념에 대한 권위 있는 정의로 퉁해 왔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클라우제비츠의 전쟁관에는 당시 유럽의 상황에 의해 규정된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전쟁이라는 주제에 관해 그런 형태의 담론이 나왔다는 사실부터가 근세 이전과 달리 전쟁이 '수지맞는 사업'으로 떠오르는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18세기까지도 전쟁은 그리 수지맞는 사업이 아니었다. 예산 규모가 파악되는 근세 잉글랜드 경우를 보더라도 웬만한 전쟁에는 경상 수지보다 더 큰 비용이 들었고, 전리품을 충분히 얻을 만한 확실한 승리를 거두지 못하면 정권이 위기에 처하곤 했다. 전쟁 비용을 귀족 영주들에게 빌렸다가 왕의 직할지를 떼어서 갚는 일이 다반사였다. 17세기부터 상업자본가가 전쟁 비용을 담당하는 비중이 늘어났다.

1756-63년의 7년전쟁에 투자한 잉글랜드 자본가들은 엄청난 배당으로 거부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겼을 경우의 이득이 졌을 경우의 손해보다 크지 않았다. 당사자 모두를 놓고 보면 제로섬이나 마이너스섬 게임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19세기 들어와서는 차츰 플러스섬 게임의 양상이 나타났다. 이길 때의 이득이 질 때의 손해보다 큰 경우가 많아진 것이다.

이것은 군사적 케인스주의가 타당하게 적용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대량생산 기술이 급속도로 발달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것은 자원의 활용도가 낮은 상태에서 소비의 촉진으로 경제 활성화의 길을 여는 케인스주의 정책노선이 효과를 가지는 것과 같은 상황으로 생각된다. 전쟁 수행을 위한 소비와 파괴 복구를 위한 수요가 생산력 증대를 촉구했고, 그에 따른 기술 발전으로 생산비 자체를 대폭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18세기 말 혁명기 프랑스에서 징집제를 실시한 이후 유럽에서 전쟁의 양상이 크게 바뀌었다. 나폴레옹이 20년 가까이 유럽을 호령할 수 있었던 것도 군대 조직방법과 전쟁 수행방법을 앞장서서 바꿨기 때문이었고, 이것은 모든 유럽국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었다. 종래의 전투가 적군 전투원의 살상을 목적으로 이뤄진 것과 달리 공간을 파괴 대상으로 하는 포격전이 전투의 주종이 되었다.

이 전투방식의 변화에는 화약의 존재가 큰 역할을 했다. 그런데 유럽인들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화약을 사용해 온 중국인들이 전쟁에서의 화약 사용을 크게 늘리지 않은 것이 유럽인들보다 덜 똑똑해서뿐이었을까? <삼국지연의>에 제갈량이 남방 정벌 중 화약을 전투에 사용한 뒤 그 전술의 참혹성을 반성하는 이야기가 있다. 화약 사용 기술이 중국에서 크게 발달하지 않은 데는 이런 요인들도 작용했을 것이다.

생산력의 급격한 발전 속에서 전쟁이 성행한 일은 중국 고대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넘어오면서 전쟁이 크게 늘어나고 전쟁 수행방법이 전면전의 양상으로 바뀐 사실이다.

춘추시대의 질서가 무너진 것도 생산력 발전에 주된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거니와, 그 질서가 무너졌다고 해서 당시 중국 전역이 전쟁을 일상적으로 겪는 상태가 2백여 년이나 계속된 사실 역시 생산력 발전이 아니고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철기의 보급으로 생산력이 급속히 향상되는 상태가 아니었다면, 전쟁 수행에 그토록 많은 인력을 투입하고 파괴를 초래하는 상황이 그렇게 오래 계속될 수 없었을 것이다.

전쟁이 성행하는 상황에서는 사상의 동향도 그 영향을 받는다. 제자백가 가운데 메이저급 학파를 보더라도 전쟁에 반대하는 도가나 전쟁을 최소화하려는 유가에 비해 전쟁을 꺼리지 않는 법가사상이 전국시대에 힘을 썼다. 평화주의를 가장 앞세운 묵가까지도 방어전 전략을 가르침의 중요한 내용으로 삼았다. 전쟁이 줄어든 한나라 때에 와서야 도가와 유가가 역할을 키우게 되었다.

전쟁을 찬양하는 경향을 보인 헤겔과 니체가 19세기 유럽 사상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것도 음미할 점이 있는 사실이다. 20세기 대표적 양심으로 꼽히게 될 토마스 만조차도 1차대전 발발 시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평화란 시민사회를 부패시키는 것이고, 전쟁 속에 정화와 해방, 그리고 거대한 희망이 있는 것 아닌가?"

20세기에 들어와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은 뒤 전쟁을 싫어하는 마음이 많이 퍼졌다. 전쟁을 찬양한 사상가들은 그 사실만으로 불신의 대상이 되는 분위기가 되었다. 겪어보면서 전쟁을 싫어하게 된 것이 직접적 계기이겠지만, 그를 뒤따르는 또 하나의 조건이 있었기 때문에 그 분위기가 길게 자리 잡힐 수 있었다. 기술 발전에 따른 급격한 생산력 확장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경제적 이유에서 전쟁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특수 이해관계자들은 계속해서 존재한다. 그들은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는 상당 범위 사람들까지 동조시킬 수 있는 선동 능력도 가지고 있다. 그런데 1960년대 후반부터 광범위한 반전 평화운동이 일어난 것은 그 무렵에 고개를 든 환경 의식과 얽힌 것이다. 생산력 확대의 한계를 보여주는 환경운동은 평화운동과 사상적 친연성을 가진 것일 뿐 아니라, 경제적 이득을 앞세워 평화운동을 반대하는 선전에 커다란 족쇄를 채운 것이다.

19세기 후반, 조선의 개항기 무렵에 일반 유럽인의 전쟁에 대한 인식은 지금 사람들의 인식과 전연 다른 것이었다. 전쟁을 일으키는 데 대한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경제적 득실만을 기준으로 전쟁을 일으키는 풍조가 제1차 세계대전까지 이어져 가는 과정이었다. "하면 된다!"는 정신의 시대였다.



Posted by 문천
2010. 1. 31. 12:43
 


지난 7일 다녀온 뒤 23일만에 갔다. 중국 다녀올 때를 빼곤 최장 결석 기록이다. 그 사이에 세 번이나 갈 예정을 세워놓았다가 당일 아침에 취소했다. 그 동안 일이 너무 힘들어, 겨우 원고 보내고는 탈진해서 길에 나설 엄두가 안 나는 상태가 되고, 조금 쉬고 나면 다음 원고가 마음놓을 수 없는 상태였다. 이제 겨우 고비를 넘긴 것 같다.

덕분에 어머니가 나를 그리 많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내 얼굴이 보이니 벙긋, 입이 벌어지시는데, 닷새만에 보실 때나 한 달만에 보실 때나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음식도 사람도 있으면 즐기시되 없다고 괴로워하지 않으시는 것이 분명하다.

노랫가락 화법이 전보다 더 탄탄하시다. 단둘이 앉았을 때는 노랫가락을 덜 쓰셨는데, 오늘은 평상 화법으로 잘 돌아오지 않으신다. 가락의 범위가 그리 넓지 않지만, 내용은 구애가 없으시다. 그 때 그 때 하고 싶은 말씀을 아쉬움 없이 다 담으신다. 내용을 미처 다 담지 못해 끄트머리에서 가락이 흐트러지는 일도 오늘은 거의 없다. 시인으로 나서도 꿀릴 데가 없으시겠다.

왜 그렇게 오랫동안 안 왔느냐고 따지지 않으심은 물론 마음 상한 기색도 전혀 보이지 않으시지만, 말씀하시는 내용을 보면 느낌이 아주 없지는 않으신 것 같다. 너 참 착하다, 욕심 없다, 겸손하다 등등 셋째 아들 추켜올리는 말씀이 한참 계속되었다. 이렇게 듣기 좋은 말 해주는데도 니가 자주 안 올 거야? 하는 기세다. 아마, 나타날 때쯤 되었는데도 안 나타나니까 생각나실 때가 있고, 나타나면 이런 말 해줘야지 하고 준비해 두신 것도 같다. 요양원 식구들 붙잡고 리허설을 하신 것일지도 모른다.

"네 덕분에 내가 이렇게 행복하단다. 더 바랄 수 없이 행복하다." 하시는 데서 절정에 올랐다. 준비해 두신 대사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행복' 여부에 대해 긴장된 생각을 하시는 것 같아서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살짝 비틀어봤다. "어머니, 행복하신지 어떤지는 몰라도 참 편안하신 것 같아요. 거기다 행복까지 하시다니 더 좋네요."

역시 멈칫하시고 잠깐 평상 화법으로 되돌아오신다. 준비되어 있지 않던 주제에 생각을 집중하시는 것이 느껴진다. "그래, 편안한 게 무엇보다 중요한 거지..." 잠깐 오락가락 몇 마디 하신 다음 다시 노랫가락으로. "어머니, 노래 참 잘 부르시네요." 했더니. "그럼요, 이게 내 직업인 걸요~ 노래 하나야 잘 부르지요~" 하시기에 "가수가 되셨군요, 어머니." 하니까 노랫가락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으신다. "가수가 뭐냐?" "직업적으로 노래 부르는 사람이요, 어머니." 하니까 와하하! 웃으신다. 이런 파안대소가 오늘은 여러 차례 있었다.

복도 가의 테이블에 내내 앉아 있었다. 말씀이 조금 뜸해졌을 때 반야심경 암송을 권하려고 "어머니, 반야심경..." 하는데 벌써 외우기 시작하신다. 낭송이 갈수록 유창해지셨는데, 오늘은 힘까지 잘 들어가신다. 다 외우시고는 낭송이 잘된 데 흡족해 하시는 기색이다. 금강경을 가져와 한 꼭지씩 번갈아 읽는 것도 이제 습관이 되신 듯, 한 꼭지 읽으신 뒤에는 내가 읽도록 눈길로 재촉하시고, 내가 한 꼭지 끝내면 자연스럽게 뒤를 이으신다.

몇 꼭지 지나 내가 읽고 있을 때 한 할머니가 곁에 와 "여기 앉아도 돼요?" 하고는 함께 앉아서 어머니에게 말을 거는데, 치매가 심한 분인 듯 말이 오락가락하고, 언사가 좀 거칠다. 그런데 어머니가 응대를 참 잘하신다. 다른 할머니들한테 깍듯하게 대하는 것과 달리 말을 탁탁 놓기도 하며 기세부터 압도하는 태도를 보이신다. 찍자 붙어봤자 남는 게 없겠다 싶은지 금세 도로 일어나 갔는데, 그 다음 어머니 반응이 놀라웠다. 저만큼 멀어진 분을 흘낏 쳐다보고는 "문제가 많은 사람이야, 참..." 하시는 것이었다.

맞다, 다니면서 얼핏얼핏 봐도 '문제가 많은' 분들이 몇 분 계시다. 그걸 어머니는 다 파악하고 있으면서 적절한 대응방법을 강구해 놓고 지내시는 것이다. 진짜 갖출 것 다 갖춘 사회생활을 하시는 거다. 스스로 '행복' 여부를 생각하시는 데도 주변의 이런저런 분들 모습이 기준이 되는 것 같다.

에스터 엄마에게서 또 선물이 왔는데 사진틀과 과자가 들었다는 말씀이 일전 원장님 메일에 있어서 사진틀? 무슨 사진틀일까? 했는데, 오늘 보니 대단한 물건이었다. 투박하게 생긴 두툼한 사진틀인데, 아주 실용적이고 견고한 것이 곁에 두기 아주 좋다. 어머니를 즐겁게 해드릴 길을 이렇게 열심히 찾는 분들이 있다는 것이 어머니에게는 행복이다. 그런 행복의 길이 잘 열리고 통하도록 편안한 상태를 지켜드리는 것이 내 몫이고. 나도 20년 후에 저런 행복의 밑천이 다소나마 갖춰지도록 세상 사는 자세를 잘 가다듬어야겠다.

세 시 반이 넘어 저녁식사 때까지 계속 앉아 계셔도 될까, 간호사나 간병인에게 물어보려는 참에 마침 눕고 싶다고 하셔서 한 시간 가량은 방에서 모시고 앉았다. 노래 몇 곡 불러드리니, <푸른 하늘 은하수>는 바로 따라 부르시고 다른 노래들은 주의깊게 듣다가 일부를 가볍게 따라 부르신다. 원장님과 이사장님이 한 차례씩 들어와 잠깐씩 이야기를 나눴다. 이사장님은 평소보다도 얼굴이 더 훤하고 기분이 좋아 보이신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나? 내가 일 때문에 오래 못 오면서도 여기서 편안히 해드리기 때문에 마음놓고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고 치사를 드리니 무척 좋아하신다.

보통 네 시 반이면 식탁에들 앉아 식사를 기다리는데, 우리 모자간은 조용히 있도록 놓아두었다가 다섯 시가 다 되어 모시러 왔다. 지금 이 방 담당은 지난 번 휴가 나가는 길을 수원까지 바래다 드린 최 여사님이다. 서랍에 든 금강경을 가끔 꺼내 드리라고 부탁했다. 담당이 바뀌어도 그런 유의사항은 인수인계가 대충 될 것이다.

"어머니, 밖에 나가서 뽀뽀하면 다른 할머니들이 샘 내실 텐데, 여기서 해드리고 가도 될까요?" "그럼 여기서 하려무나." "어디다 할까요?" "너 하고 싶은 데 있잖아? 아무 데나 해." 오른쪽 뺨과 이마에 한 차례씩 하는데, 구경하는 원장님과 최 여사님은 재미있어서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원장님이 한 번 더 하라고 권하는 데 못 이기는 척 왼쪽 뺨에까지 마저 하는데, 어머니는 다소곳이 즐기며 가볍게 "고맙다." 하신다.

앉아 계실 때도, 누워 계실 때도 "고맙다." 소리가 수시로 나오셨다. 두어 번 들은 뒤에 "어머니, 어머니 뱃속에 고마운 마음이 꼴똑 차 있나 봐요. 건드리기만 하면 나오는 말씀이 '고맙다'예요?" 하니까 "그게 똥만 차 있는 것보다 낫지 않냐?" 절묘하게 대꾸하시는데, 한참 모시고 앉아 있다 보면 이런 묘기가 몇 차례씩 나온다. 다 기억해서 적지 못하는 게 아깝다. 그런데 오늘은 "이 쌍놈아!"가 한 번도 없었다. 그 말씀과 내 장기 결석 사이의 인과관계를 어렴풋이 상상하신 것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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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지난 번 글에서 이념으로서 자본주의는 20세기의 역사적 현상이라는 내 의견을 밝혔다. 잘못된 의견이라고 보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19세기 중엽까지 자본체제에 대한 생각은 '세상은 이렇게 돌아가는 것"이라 하는 기술적(descriptive) 접근이지 "세상은 이렇게 돌아가야 하는 것"이라 하는 규정적(normative) 태도에는 이르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념으로서 규정적 태도는 19세기 말에 형성되어 20세기에 들어와 널리 표현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념으로서 자본주의는 자본의 힘을 사회 질서의 중심축으로 설정한다는 것이다. 그 설정을 뒷받침하는 도그마는 "인간은 이기적 존재"라 하는 믿음이다. 입증도 반증도 불가능한 명제에 대한 믿음이므로 '도그마'라 하는 것이다.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보는 관점은 애덤 스미스 이래 고전경제학의 핵심 명제의 하나였다. 그러나 인간이 이기적 특성을 보편적으로 가진다는 가설적인 명제이지, 인간이 이기적 존재이기만 하다는 믿음은 아니었다. 사실 이런 믿음의 형태 자체가 종교적 신앙에 가까운 특이한 현상이었다. 19세기 말 기술만능주의가 풍미하는 세태가 아니고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처럼 편협한 도그마가 그토록 널리 유행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근대 자본체제를 뒷받침하는 사상은 오랫동안 발전해 왔다. 황런위의 <자본주의 역사와 중국의 21세기>(이재정 옮김, 이산) 4장에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1513)에서 시작해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1651), 제임스 해링턴의 <오세아나 공화국>(1656), 존 로크의 <통치 2론>(1689)을 거쳐 스미스의 <국부론>(1776)에 이르기까지 이 흐름이 개관되어 있다. 이 장 제목을 "자본주의 사상체계의 형성"이라 한 것을 보면 황런위는 이 흐름이 자본주의 사상의 발전과정이라고 본 것 같다.

20세기에 자본주의 이념이 맹위를 떨친 결과에 비춰보면 이 과정이 연속적인 인과관계 속에 진행된 것 같은 인상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결과를 기준으로 과정을 재단하는 비역사적 관점을 조심할 필요가 있다. 과정 전개의 매 단계를 당시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음미해보면 이 과정의 흐름이 그리 연속적인 것이 아님을 알아볼 수 있다.

<군주론>부터 살펴보자. '현실주의자'의 대명사처럼 알려진 마키아벨리는 이 책에서 정치를 도덕적 주제 아닌 기술적 주제로 다뤘다. 황런위가 마키아벨리를 자본주의 사상의 선구자로 지목한 것은 이 책 속에 "중산층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려" 하는 의도가 보인다거나, "이미 자본주의의 추세로 나아가고" 있는 자유도시를 이상적인 도시로 내세웠다거나, 유물론을 주장했다거나 하는 이유인데, 그리 납득이 가지 않는다. 결과에 맞춰 해석을 끌어당기는 느낌이다.

<군주론>의 의미는 이상주의 정치론에서 현실주의 정치론으로의 전환에 있다는 것이 전통적 해석이다. 장-자크 루소나 안토니오 그람시처럼 군주들의 통치수법을 까발림으로써 군주제에 타격을 가하려는 것이 이 책의 숨은 목적이라고 본 사람들까지 있을 정도로 냉소적 필치로 일관한 책이다. 그런 성격의 책에서 미래의 가치체계에 대한 긍정적 비전을 찾는다는 것부터 무리한 일 같다. 이 책에 선구적 의미가 있다면 정치의 도덕적 의미가 약화되는 근대 유럽의 변화를 앞서서 보여줬다는 데 있으며, 이것은 마키아벨리 시대 이탈리아의 혼란에 빠진 정치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17세기 후반부에 나온 홉스, 해링턴과 로크의 저술은 당연히 잉글랜드 내전(1641-51)에서 명예혁명(1688)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변화를 배경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변화는 기본적으로 왕권의 제한을 향한 것이었다. 왕의 전제권력을 탈피하는 변화라 하여 민주주의 발전으로 찬양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 역시 후세의 기준으로 과거를 재단하는 오류가 다분히 개재된 것이다. 왕이 이 때 권력을 양보한 상대는 일반 백성이 아니라 귀족과 유산계층, 즉 중간권력 담당자들이었다.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가 1603년 엘리자베스를 이어 잉글랜드 왕을 겸하게 되면서 스튜어트 왕조가 열렸다. 큰 나라의 왕이 된 제임스 1세는 왕권신수설을 바탕으로 국가체제 강화를 꾀하면서 신흥 유산계층만이 아니라 다수 귀족의 불만을 샀고, 1625년 그 뒤를 이은 찰스 1세 재위중 문제가 더욱 악화되었다. 찰스 1세가 1629년부터 11년간 의회 소집을 거부, 의회세력과의 소통을 단절하고 있다가 1640년 부득이한 필요로 의회를 열자 의회가 왕권에 대항하는 조치를 확대해 나간 끝에 내전에 이르게 되었다.

1646년 찰스 1세가 체포되고 1649년 처형된 후 9년간 크롬웰의 군사독재를 겪은 후에 1660년 의회가 찰스 2세를 불러들여 왕정이 복고되었다. 크롬웰의 극단노선에 환멸을 느낀 의회 세력이 타협책을 찾은 것이었다. 1685년까지 이 타협책은 불안하게라도 유지되었으나 제임스 2세 즉위 후 왕의 가톨릭 비호 정책에 불안감을 느낀 반대세력이 네델란드에서 오랑쥬 공 빌렘을 영입해 윌리엄 3세로 즉위시킴으로써 명예혁명이 진행되었다.

내전 당시 잉글랜드는 프랑스에 비하면 약소국이었고, 네델란드에 비하면 후진국이었다.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는 프랑스 루이 14세의 절대왕권을 따라가고 싶어 한 반면 반대파에서는 자유도시들이 주도권을 쥔 네델란드를 흠모했다.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이란 으리으리한 이름을 붙인 것은 극도로 미화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이것이 실질적으로 네델란드의 잉글랜드 정복이라고 볼 수 있지 않냐는 시각도 유력하기 때문이다.

잉글랜드의 일부 세력이 오랑쥬 공과 합작해 정변을 일으킨 것임은 아무리 미화해도 감출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윌리엄 3세 즉위 후 잉글랜드와 네델란드의 긴밀한 관계 속에 경제활동의 중심이 암스테르담에서 런던으로 옮겨지고 네델란드 해군력도 쇠퇴해 잉글랜드가 경제적-군사적 약진의 계기를 가지게 된 결과를 보면 의회세력의 '매국' 행위로 볼 수는 없겠다. 아무튼 명예혁명을 계기로 잉글랜드의 자본체제 지향이 확정되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말로 회자되는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잉글랜드 내전이 끝나고 크롬웰의 군사독재가 시작하는 시점에서 나온 것이다. 국가를 비유한 '리바이어던'은 미증유의 괴수의 모습이다. 전에 경험하지 않은 새로운 형태의 국가가 나타나는 것을 홉스는 바라보고 있었다. 그 책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인류는 일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죽기 전에는 그치지 않는 권력추구욕이다. 이는 인간이 지금 가진 것보다 더 강렬한 쾌락을 바라거나, 보통의 권력에 결코 만족할 수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없다면 그가 현재 가지고 있는 잘 살 수 있게 해주는 수단과 힘을 보장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ch 11, 황런위 책 241쪽에서 재인용)

인간성을 일의적으로 규정하려는 태도는 전통이 무너지는 혼란 속에서 나오는 것 같다. 안정된 질서 속의 인간에게는 여러 특성이 균형을 이루고 나타나는 데 반해 혼란 속에서 분투하는 인간은 한 쪽으로 치우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의회와 왕권 사이의 무장투쟁, 그리고 왕권을 굴복시킨 후 동지들까지 숙청한 크롬웰의 철권통치를 보며 현실을 합리적으로 해석하려는 홉스의 노력이 <리바이어던>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사회계약론'으로 유명한 로크의 <통치 2론 제2논문>이 나온 것은 의회 세력과 윌리엄 3세 사이의 '계약'으로 반 세기를 끌던 잉글랜드의 정치적 격변이 비로소 안정된 틀을 짜고 있던 시점이었다. 홉스가 불안한 눈길로 내다보던 새로운 국가체제를 로크는 신뢰감을 가지고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논문에서 로크가 사유재산권에 대한 안정된 관점을 보여주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상에 기여한 것으로 황런위가 간주했지만, 로크는 이론에 있어서나 행동에 있어서나 확고한 중상주의자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중상주의 체제도 자본체제와 공유하는 요소가 있지만, 대혁명 전 프랑스의 앙시앵 레짐에서 보는 것처럼 중상주의는 질서의 근거를 시장에게 내맡기지 않는다는 본질적 차이를 가진 것이다.

마키아벨리에서 로크에 이르기까지 사상의 전개는 경제사상보다 정치사상의 발전이었다. 봉건체제에서 정치권력은 현상 유지에 기본 목적을 둔 치안의 주체였다. 농업사회의 생산력이 어느 수준을 넘어 상업의 비중이 커지면서 권력의 목적이 경쟁과 변화로 옮겨간다. 하나의 국가사회 안에서도 여러 요소들이 권력을 놓고 경쟁하게 되면서 정치 참여의 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정치의 새로운 구조와 원리를 모색하게 된 것이다.

명예혁명을 통해 경제선진국 네델란드를 발전 모델로 확정하고 네델란드와 경제-군사 양면에서 긴밀한 관계를 맺은 잉글랜드는 18세기 전반을 통해 압도적 강대국이었던 프랑스의 국력을 추격해 가고, 1756-63년의 7년전쟁을 계기로 우월한 위치에까지 올라섰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1776)은 한 세기에 걸친 국력 성장의 자신감을 바탕으로 나온 것이다. 시장을 질서의 주체로 삼는 자본체제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고전경제학이 <국부론>에서 출발했다고 할 만큼 이 책에는 중요한 경제 개념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그 개념들의 상호관계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 "보이지 않는 손"이다. 경제현상에는 자체의 원리가 내재해 있으므로 외부 권력의 개입이 필요 없고, 개입이 적을수록 더 효과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고대 이래 정치권력의 통제 아래 놓여 있던 경제현상을 해방시키는 길이 열린 것이다.

그러나 스미스가 완전 자유방임론을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스미스 당시까지 영국의 경제정책이 프랑스에 비해서는 자유방임적인 것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국가의 개입을 중시하는 중상주의 노선을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 스미스는 개입의 수준을 낮추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내놓은 것이었다. 지금 '네트워크 산업'이라 부르는 분야처럼 국가의 최소한의 개입이 필요한 공공 영역의 존재를 스미스도 인정했다.

시장 원리에 대한 스미스의 믿음은 계몽사상의 자연법 관념과 결합해 자유주의 물결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무렵 궤도에 오른 산업혁명을 통해 생산과 유통이 대량화 되는 상황에서 시장 원리의 유효성이 폭넓게 확인되면서 '경제 자유주의'가 19세기 유럽을 풍미했다. 그 결과 시장에서 만들어진 자본권력이 자유주의의 다른 측면(사회와 정치)을 압박하기에 이르자 19세기 후반 들어서는 자유주의의 억제 내지 수정 제안이 나오게 된다.

자본권력이 공산주의와 제도학파 등의 도전에 반동적인 대응으로 시장경쟁을 더욱 격화시키는 과정에서 자본주의 이념이 나타났다. 자본체제의 타당성을 넘어 정당성을 주장하는 이념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의 파국을 겪으면서 이 이념은 힘을 잃었지만 냉전의 압력 속에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가 1970년대의 경제 위기를 계기로 '신자유주의'라는 간판 아래 다시 모습을 나타내 지금에 이르고 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