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조약(1905) 직후 조선에서 <월남망국사>란 책이 유행했다. 무술변법(1898)에 실패하고 일본에 망명한 양계초가 소남자(巢南子)란 베트남인과 만나 베트남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대화록을 현채가 번역하여 1906년 보성관에서 간행한 책이다. 국권을 상실하고 있던 조선인에게 베트남 식민지화의 사정을 알려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려는 뜻으로 간행된 책으로, 1907년 주시경이 풀어 쓴 판본이 다시 나온 사실로 보아 많은 주목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1909년 통감부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었다.


소남자는 판 보이 차우(潘佩珠, 1867-1940)의 아호다. 선구적 민족주의자인 판은 1905년에서 1908년까지 일본에 머물렀고, 일본에서 추방된 후 중국에서 활동하다가 1925년 상하이에서 프랑스 관헌에 체포되어 압송된 후 죽을 때까지 후에의 자택에 연금되어 있었다. 그는 호치민의 아버지 응우옌 신 삭의 친구여서 일본으로 가기 전 응우옌의 집에 들르면 어린 호치민이 찻상이나 술상을 갖다드리곤 했다고 한다. (<호치민 평전> 59쪽)


베트남은 개항기 이전에 조선과 접촉이 거의 없던 나라였다. 그런데 서세동점의 상황 앞에서 두 나라가 함께 겪는 위협을 조선 지식인들이 인식하게 되었고, 위기의 성격을 보다 입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베트남 사정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40년이 지난 후에도 조선인은 베트남의 운명에 적지 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미군과 소련군의 손에 쥐어진 조선인은 약소민족이 처한 상황을 판단하는 하나의 지표로 베트남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1945년 10월 22일자 <자유신문> 사설은 “난인(蘭印,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과 불인(佛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문제”였다.


20세기 국제정치의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는 강대민족으로서 약소민족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정책적 문제로서의 민족문제일 것이며 제2차 세계대전의 가장 주목할만한 성과의 하나도 이 문제에 대한 국제양심적 해결에 기대되고 있다고 아니할 수 없다. (...)


만일 인도네시아 충돌의 원인이 화란의 전전 식민주의정책 재현에 대한 원주민족의 반항이라면 화란 당국자의 태도는 너무나 유감인 것이며 현하 독립이 약속되었을 뿐 “적당한 시기”가 어느 때인지 막연한 기대에 불안 많은 생활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우리로서 중대한 관심사가 아니라 할 수 없다. 난인이 오랫동안 화란의 식민지적 착취로부터 금차 대전 중 다시 일본제국주의의 농락물로 이용당하던 그것이 전쟁 종료와 동시에 화란의 옛 지배를 다시 감수하여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나 잔인한 사실이며 국제양심상 용허치 못할 일이다.


이는 불인에 있어서의 안남인의 반항도 같은 사세로 볼 수 있다. 그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그 제국주의적 전철을 다시 밟으려는 데서 무력충돌이 발생한 것이며 이러한 문제는 전후 각처에서 볼 수 있는 사실일 것이다. H G 웰스는 지적하되 대영제국은 향항을 다시 그의 영토로 향유할 수 없으리라고 했다. 이는 동양을 제국주의로 유지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 지난 대전을 통하여 항상 민족자결을 위하여 노력한 연합군의 태도가 이번 난인과 불인 문제를 통하여 정당히 나타나기를 기대하며 이는 조선 문제에 대하여도 적지 않은 시사가 될 것이다.


<자유신문>에는 베트남 관련 기사가 이후에도 간간이 오르다가 1946년 말 전쟁이 터지자 대대적 보도가 시작되었다. 1946년 12월 25일자에는 1면 머리기사로 “백인의 아시아 착취 - 식민지시대 종언”이란 기사에서 전쟁 발발에 임해 뉴욕헤럴드트리뷴 지와 뉴욕타임스 지의 식민지시대가 끝나고 있다는 논평을 인용했다. 그리고 “‘奴隸보다 死를’ - 월남군 최후항전 각오”와 “불인 정세 중대 - 부룸 수상 의회서 성명” 큼직한 두 기사가 그 뒤에 붙었다. “월남군 최후항전 각오” 기사에는 12월 22일자 호치민의 성명이 인용되었다.


[파리 24일발 AP 합동] 월남정부 대통령 호치민 박사는 지난 22일 하노이(河內) 북동 15마일 지점에 있는 바치닌에서 최초로 현 불인 사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단호한 결의를 표명하였다 한다.


“월남인은 노예가 되느니보다 오히려 죽음을 택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유 획득이 여하히 장기에 걸친다 하더라도 여하한 참혹한 전쟁이든지 이를 감행할 작정이다. 2천만 월남인은 근근 20만밖에 안 되는 반동 프랑스인을 타도하고야 말 것이다. 또 금번 사태의 원인은 프랑스 측에 있는 것이며 프랑스 측은 북남 인도지나 민중에 대하여 억류 구타 행위를 마음대로 하였으며 심지어 부녀자에 대하여 노상 공격까지도 감행하였던 것이다.”


한편 월남군의 주요 병사(兵舍)는 프랑스 공군에 의하여 파괴되었으며 22일에는 월남 포병대도 프랑스군 수중에 들어왔다 한다. 또 하노이 재주 프랑스 시민들은 프랑스군 응원 차로 전부 무장하여 시민경비대를 조직하였다 한다.


<자유신문>은 이에 앞서 12월 24일자에도 뉴욕타임스 지 사설을 인용한 기사를 올려 아시아 해방을 바라는 뜻을 보였다.


“英의 실력 기진(氣盡) - 아세아 동란기”


[뉴욕 23일 UP발 조선] 뉴욕타임스 지는 사설에서 아세아 각지의 동란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사실에 있어 영국은 면전(미얀마)이나 인도에서 그의 정책을 강행할 능력이 없는 터이다. 영국은 그 제국을 설복 이외의 수단으로 통합보지할 수 없다. 만일 이 설복에 실패한다면 그는 퇴각하여야 한다. 영국은 이미 인도에서 실패하였으나 인도로부터 퇴각하는 길도 현재 내란으로 발전할 위험성이 있는 회-인도교도 간의 종파적 투쟁에 의하여 차단되어 있다. 면전에서는 여차한 투쟁은 없으므로 미구에 진행될 면전에 관한 교섭은 순조로이 진행될 것이며 인도와 같은 정돈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인도지나에는 절망적인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불란서 역시 너무나 약체로서 그의 동방 판도를 유지할 수 없다. 한편 중국은 전면적 내란이 전개되려고 한다.


세계는 여차한 아세아의 격화하는 동란을 주목하고 있다. 동란이 발생하는 곳에는 하처에든지 활발한 연락기관을 가진 소련만이 이 확대하는 혼란에 만족을 느낄 이유를 발견할런지도 모르겠다.”


이 기사와 같은 면에는 “제국주의 파멸 - 면전 독립은 英의 붕괴”란 제목으로 AP 평론가의 칼럼도 크게 소개되어 있다. 전 미국 국무차관 윌스의 방송연설을 인용한 “비독립국가 자유 획득에 총진(總進)”이란 기사도 있다. 식민주의에 대한 미국인의 일반적 반감을 바탕으로 유럽 열강의 몰락을 다룬 논설들이 약소민족 해방의 깃발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12월 26일자 사설 “면전 독립 문제”에도 제국주의 퇴각을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금번 대영국제국 권내 내지 권외에서 면전의 독립을 주기 위한 초보적 조치를 강구하겠다는 애틀리 수상의 성명에 관련하여 불원 자치정부 수립 문제를 협의할 목적으로 면전 지도자 대표들이 런던에 초대될 예정이라는 것은 극히 반가운 것으로서 약소민족인 우리로서 동경(同慶)하는 바이오 아무쪼록 완전 자주독립의 날이 오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그런데 이에 대하여 문제의 반동정객 처칠 씨는 또다시 반대의 논진을 편다는 것이니 그 불굴하는 반동정신에 놀라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말하되 일본으로부터 면전을 해방하기 위하여 인도와 함께 영국이 막대한 희생을 지불한 직후 너무나 시급히 노동당 내각이 면전을 해방하려 하였다고 이를 비난하였다는 것이다.


일본으로부터의 해방이 없이 미국에의 구속이 될진대 그것이 해방이 될 수 없는 것은 물론, 제국주의 침략의 종주국을 교체하는 데 지나지 아니하는 것은 물론이다. 면전을 해방하고 기타의 약소민족을 해방하는 것이 금반 전쟁을 완수한 연합국의 목적이었다면 당연히 조속한 이행을 하여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구질서에 유구한 반동정객의 너무나 염치없는 논법은 도리어 영국의 세계사상 정적을 방해하는 그것이며 약소민족의 공분을 금할 수 없는 것이다. 너무나 근사한 우리의 처지이니만치 그러한 인물이 우리의 독립까지 지연시키는 원인(遠因) 됨을 느끼지 아니할 수 없으며 분개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자유신문>은 베트남전 보도에 지면을 계속 할애했다. 12월 27일자에는 “불-월 전투 계속 - 불 원군 1만 명을 파견”과 “현하 불인에 완전독립은 불가 - 불인 판무관 담” 기사가 실렸고, 28일자에는 “호상 양보 주장 - 佛은 胡 대통령 비난” 기사와 월남 사태에 관한 한민당의 담화문을 보도한 “월남을 성원”기사를 올렸다. 한민당 담화문은 이런 내용이었다.


“월남 임정 대통령 호 박사는 대불 독립전쟁에 있어서 죽음이거나 노예이거나의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하여 비장한 호소를 하였다. 인도, 비도(比島, 필리핀), 인도네시아, 면전, 조선 등 아세아 제 민족이 다 독립할 계제에 있는데 홀로 월남만이 식민지로 남아 있는다는 것은 약소민족의 입장으로 좌시할 수 없는 일이다. 조선 3천만 민족은 월남의 독립에 대하여 만강의 경의를 표하는 바이며 제4공화국으로 발족하는 불국의 영웅적 용단을 바라는 바이다.


막부 3상협정 1주년을 당하여 동 협정 중 탁치에 관한 조항을 삭제하고 얄타협정을 파괴하여 조선의 자주독립의 날이 하루속히 실현되기를 관계 4개국에 다시 요청하는 바이다.”


<자유신문>의 베트남 관계기사는 12월 29일자에서 절정에 달했다. 1면 머리기사 “佛 내정 위기 야기 - 월남 분쟁에 세계의 시선 집중”에 이어 “월남군 맹반격 - 불군은 격퇴에 광분”, “동남아 문제 베빈 씨 심의 요청”, “소요 책임 佛에 - 호 박사 성명을 방송”, “불인 조정차 佛 식민상 사이공(西貢)에” 등 기사가 1면의 절반을 뒤덮었다. 기사 제목 중 “광분” 같은 말을 쓴 데서도 편집자들의 베트남에 대한 동정심은 여실히 드러난다.


이 시기의 신문으로 기사 모두를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자유신문>과 <동아일보> 뿐이다. 그런데 이 1주일 동안 <동아일보>에는 베트남 관계기사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전쟁 발발을 보도한 12월 25일자 외에는 한 꼭지가 오르다 말다 했다. 두 신문의 논조가 크게 갈라진 사례인데, 함께 비교해 볼 다른 신문을 찾아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