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무부 수사국장으로 있다가 12월 초 조병옥에게 파면당한 최능진은 두 차례 성명서를 통해 자기주장을 개진하다가 명예훼손죄로 검사국에 입건되기까지 했다. 그가 11월 20일 조미공위에 제출한 보고서는 신문에 보도되지는 않고 <24군단 역사파일(XXIV Corps Historical File)> 중 “한미공위 회의록(Minutes of the Korean-American Conference)” 속에 남아 있다. 나는 이 자료를 찾아보지 못했고, 커밍스의 책에서 이 자료를 활용한 부분을 옮겨놓겠다.

 

최능진은 남조선 경찰이 “일본의 훈련을 받은 경찰관과 민족반역자들의 피난처”가 되었고 그중에는 “이북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쫓겨난 부패한 경찰관들”도 포함되어 있다고 했다. 그런 경찰관들은 8월 15일 이후 평양에서 일본인들에게 목돈을 받았으며 “이 돈을 갖고 서울로 와서 경찰에 자리를 얻는 데 썼다.” 이남의 여러 지방에서 쫓겨난 뒤 서울로 온 경찰관들도 있었다. 최능진에 따르면 그들은 “고향에 돌아가면 사람들이 재산을 몰수할 것이기 때문에 돌아가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개성에서 쫓겨난 사람인 김후원의 이야기를 했고, “일제하의 악명 높은 형사로서 (...) 해방 후 집이 파괴당한 후에 서울로 온” 이구범의 이야기도 했다. 이구범은 서울의 큰 경찰서의 서장이 되었다.

 

최능진은 자신과 조병옥이 일제 협력자 등용에 의견을 달리했다고 말했다. “애국자와 독립운동가를 경찰에 받아들여야 한다는 내 주장에 조병옥은 끊임없이 반대했다.” “매일같이 사람들이 개인감정 때문에 아무 증거도 없이 체포당하고 있다. 누군가가 저 사람 나쁜 사람이라고 하기만 하면 감옥에 잡아들여 두들겨 패는 것이다.”라고 최능진은 말했다. “경찰은 부패하여 인민의 적이 되었다.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조선인의 80%가 공산주의자가 될 것”이라는 것이 최능진의 생각이었다.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166-167쪽)

 

커밍스의 책을 펼친 김에 미군정의 경찰정책에 대한 그의 의견을 옮겨놓는다.

 

미군이 조선 경찰의 기구와 그 조선인 인력을 보존하기로 결정한 것은 좌익에 단호히 맞설 만한 단결력 있는 다른 세력이 없기 때문일 뿐이었다. 일본 통치에 복무했던 조선인 경관들은 일제 협력자의 축출이나 처벌에 나설 만한 정치집단의 득세를 저지해야 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바로 이 이해관계 때문에 다른 조선인 집단보다 강한 단결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조병옥은 남조선 전역에서 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를 해체할 능력을 가진 것이 경찰뿐이라는 사실이 자신과 하지의 공통된 믿음이었다고 자서전에 뻔뻔스럽게 적었다. 미국 측 자료도 이 사실에 부합한다. 주한미군의 공식 역사기록에 “군대가 없으므로 경찰이 유일한 공권력의 도구였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혼란스러운 상황 때문에 필요에 따라 신속히 움직일 수 있는 대규모의 신축성 있는 병력이 필요했다.”고 했다. 중앙집권화된 국가 차원의 병력이 있어야만 “지역적 연대를 깨뜨려 저항세력의 결합을 최대한 억제할 수 있”으며 “특정한 지역사회에 너무 깊이 뿌리를 박은” 경찰관을 이동할 수 있다고 했다.

 

미국인들은 그 역사를 통해 자기 나라 안에서는 이런 국가경찰력의 존재를 배격해 왔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좌익의 위협을 이유로 그런 경찰력을 정당화했다. 점령군 사관들은 조선 경찰을 민주적이라 부르기 힘들고 원칙적으로는 어느 곳의 경찰이라도 “그곳 지역사회의 인민에게 책임을 지는 입장”이어야 하지만, 조선에서는 “아래와 같은 이점들 때문에 국가경찰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판단된다.”고 했다. (커밍스 위 책 162-163쪽)

 

이어 일곱 가지 이점을 열거했는데, 모두 기능적 이점이다. 이에 대해 커밍스는 야유한다. “일본인들이 그런 경찰력을 유지한 이유가 그와 얼마나 다른 것이었는지 따져보지 않는다면 너무나 소홀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점령기의 일본에서는 국가경찰제가 전제적 억압의 도구로 너무 쉽게 이용된다는 이유로 폐지된 사실을 지적한다. ‘국민학교’란 이름을 일본보다 오래 지킨 것은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국가경찰제는 2011년 현재까지도 억압의 도구로 버젓이 이용되고 있지 않은가?

 

조병옥과 함께 경무부장을 맡고 있다가 고문으로 물러선 윌리엄 매글린 대령도 인용된 말을 보면 경찰의 민주성을 그리 앞세워 생각한 것 같지 않다. “경찰의 조선인들이 일본인을 위해 일을 잘 했다면 우리를 위해서도 일을 잘 할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했다.”

 

그래도 뉴욕시의 경찰관 경력을 가진 매글린 대령은 경찰의 부패와 폭력성에 대해 한계를 그래도 생각하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경찰의 업무 기준에 관한 각서를 조병옥에게 보냈고 이 각서를 공개함으로써 엄중한 태도를 보였다.

 

조선국립경찰은 그동안 민주경찰로서 많은 공로를 쌓아왔으나 그러나 일반 민중으로부터 비난의 표적이 되어 있는 일부 경찰관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경찰의 위신이 감쇄되고 있는데 이 좋지 못한 비난의 원인이 되는 행동은 대략 다음과 같다고 맥그린 경무부장 고문은 조병옥경무부장에게 각서를 보내와서 이를 관하 각 청장·국장에게 통첩으로 보냈다고 한다.

 

① 체포 또는 심문시의 구금자에 대한 냉대

② 이유없는 체포

③ 어떠한 정치단체의 맹원이라는 이유로 인한 대량검거

④ 혐의체포

⑤ 상인 및 직업인에 대한 협박

⑥ 순전한 개인적 혹은 정치적 이유로 행하는 임명 전임 승임 등

⑦ 사례금의 청구

⑧ 수뢰

⑨ 불법 상업취인에 있어서 개인의 경제적 이득을 취하기 위하여 경찰계급 및 지위를 이용하는 것

⑩ 향응을 위한 공금소비

⑪ 압수한 식료품 및 물자를 자유이용에 전용하는 것

 

이상과 같은 악행은 광범위로 확대되지 않으나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데 경찰간부는 이러한 악행을 제거할 의무가 있다. 조선에 와 있는 이 사령관은 조선경찰을 참다운 민주주의적 경찰로 만들기로 결정하고 있다. 그는 경찰자신이 이상에 열거한 폭군적 행위를 제거하고 유죄한 직원을 추방시키리라고 믿는다.

 

조선에 군정이 있는 한 모든 조선인에게 공평 정당한 대우를 할 책임이 미군에게 있다는 것을 명기하여야 한다. 우리는 경찰이 자숙하여 목적을 완수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만약 경찰이 공평무사한 표준에 합하지 못함을 확정하게 되는 경우는 우리는 미군장교를 배치하여 각 경찰관구와 각 경찰구를 지배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 이 같은 필요가 없도록 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서울신문> 1946년 12월 25일자)

 

각서는 노골적인 협박으로 맺어졌다. 제대로 못하면 미국인들이 감독하러 나서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협박만이 아니었다. 벌써 십여 명의 미국 경찰관이 수입되어 배치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경찰 육성코자 미국서 경찰 12명 내선(來鮮)”

 

민주경찰의 육성을 돕고자 미국으로부터 이즈음 서울에 도착한 미국경찰관 남자 11명과 여자 1명이 조선경찰의 감독관으로 등장하기로 되었다. 이들의 목적은 개인의 권리를 공평하게 하고 존중하게 하는 미국경찰정책에 대하여 특별히 중점을 두고 현행법규 실시에 있어 조선인 경찰서장을 감독 지도하기로 되어 곧 남선 각 경찰청에 배치하기로 되었다 한다. (<동아일보> 1946년 11월 26일자)

 

“미인 경찰 고문 수도청에 취임”

 

미국경찰관으로서 조선경찰의 민주화를 지도코자 조선에 온 일행 중 알렌 다이스티스, 윌리암 엘페타슨 양씨가 수도경찰청 고문관으로 2일부터 취임하였다. (<동아일보> 1946년 12월 3일자)

 

이 작업을 시작할 때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자료 대한민국사”에 주로 의지해 왔는데, 작업 진전에 따라 “한국근현대신문자료”를 더 많이 들여다보게 된다. 이 시기 신문으로는 <동아일보>와 <자유신문> 둘밖에 없지만 “자료 대한민국사”에 뽑혀 있지 않은 것으로 참고 가치가 큰 기사를 꽤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어제 오늘 <자유신문>을 들여다보며 당시 경찰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기사 몇을 뽑아냈다.

 

“취경(醉警)에 검사 봉변”

 

경찰잠(警察箴)의 “민중의 공복 되라” 함은 한 장의 휴지가 아니거니와 지난 10월 29일 오후 6시반경 경성지방법원 검사 최상진 씨와 동 법원 호적과 서기 김세평 씨의 2명이 시내 황금정 4정목을 지날 즈음 술이 취한 본정서 1,700호 순경이 불심심문을 하던 끝에 건방지다고 구타를 하여 최 검사는 다행히 근방 파출소로 피하였으나 김세평 씨는 동 순경에게 구타를 당하였다. (<자유신문> 1946년 11월 3일자)

 

“8-15를 앙갚음 - 옥천군의 불상사”

 

작년 8-15 해방 후 충북 옥천군 청산면에서는 그곳 유지로 지조를 지켜오던 이세영 조준하 양씨를 중심으로 각 동리 대표가 모여 자치위원회를 만들고 면 치안에 애써 왔는데 동면 청년들도 이와 병행하여 ‘동호회’를 조직하고 치안에 협력하던 중 과거로부터 동면에서 왜정에 적극 협력자로 지칭받던 원정희와 근로보국대 응모에 누구보다도 앞장을 선 배X수 등을 방문하고 전비를 문책한 후 개과를 요구하는 말을 주고받던 중 청년들은 울분한 끝에 원을 구타한 사실이 있었는바 그 후 원은 모 단체의 지부장 됨을 기화로 지방 테러를 조종하여 지금은 해산되고 없는 그 전 자치위원회원을 협박하고 있는데 수일 전 그곳 경찰은 전기 자치위원 18명을 검거함과 아울러 서울에 와 있는 조준하 씨를 위시하여 4명에게 체포령을 나리어 방금 옥천서 형사 2명이 서울에 파견되어 활동 중이라고 한다. (<자유신문> 1946년 11월 11일자)

 

“무관심한 경찰 조치로 전재민의 강시(殭屍) 또 하나”

 

9일에는 올 겨울을 당하여 처음으로 전재동포 2명이 한을 품고 얼어죽어 사회 여론이 분분하거니와 11일에는 시내 효제동 310번지 앞 길가에서 또 한 전재동포의 싸늘한 시체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체는 조금만 따뜻한 온정의 손이 있었더라면 동사는 면하였을 것이 판명되었다.

 

즉 지난 10일 오전 10시 효제동 310번지 앞을 신덕영이란 행인이 지나다 보니 나이 22, 3세가량 되어 보이는 전재동포로 보이는 여인이 거적을 덮고 길 위에 누워 울고 있는 것을 보고 측은히 생각하여 근방 설렁탕집에 가 설렁탕 한 그릇을 갖다 먹인 후 그대로 두고 갈 수가 없어 종로5가 파출소를 찾아 이 전재동포를 구하기를 간청하고 동대문서를 찾아 보안계에 이 사실을 말하였다 한다. 그런데 동서 직할파출소에서 곧 경관을 보내겠다 하므로 안심하고 직장으로 갔다가 오후 6시경 그 앞을 지나다가 보니 아침과 마찬가지로 그 여인은 그곳에서 떨고 있으므로 다시 설렁탕을 사다 먹이고 5정목 파출소와 직할파출소를 다시 찾아 이야기를 하고 경관 2명을 현장까지 안내하고 보호하여 주기를 당부하였다.

 

그런데 11일 오전 그 자리를 지나다 보니 그 여인은 전날과 같이 그대로 거적을 덮고 누워 있으므로 그때는 의분이 폭발하여 거적을 치어들고 보니 하루밤 사이에 이미 싸늘한 시체로 변하여 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체는 11일 오후 1시가 지나도록 치우지도 않고 있어 지나가던 이들의 의분을 사고 있다. (<자유신문> 1946년 12월 12일)

 

“행려시 처치의 책임 - 시와 경찰이 상호 회피”

 

지난 10일 서소문정 앞 동아호텔 옆에 얼어 죽은 시체가 거적이 덮여 있는 채 놓여 있던 것이 이틀이 지난 12일 상오가 되도록 그냥 그 모양으로 놓여 있어 인도상으로 보아 차마 못할 책임당국의 처사에 일반은 비난이 많다. 거리에서 죽은 주인 없는 시체 누가 치워야 하는가? 인민의 공복인 경찰인가, 서울시의 살림을 도맡은 시청인가. 그런데 양편이 모두 상대편에만 일을 미루고 책임을 회피하는 데서 이런 사태를 일으킨 것이 판명되었다.

 

경찰 측은 시내 위생 사무는 지난여름부터 시청 위생과로 넘어갔으니 마땅히 시청 당국이 처리할 것이라고 방관적 태도를 취하고 있는 한편 시청은 시청대로 과연 사무는 이관되었으나 현재 일반 풍기 취체는 여전히 경찰에서 하고 있고 또 노상시(路上屍)는 경찰이 검시하여야 치우게 되지 않느냐, 모든 뉴스를 언제든지 빨리 알 수 있는 이상 이런 문제는 우리들에게만 미루지 말고 일단 현장에서만도 치워주었으면 좋지 않으냐고 대답하는데, 양편이 이런 태도로 나가는 이상 앞으로 노상시는 그대로 버려둘 밖에 도리가 없는지 추이가 주목된다. (<자유신문> 1946년 12월 14일자)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