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9일 러치가 하지에게 제안하는 형식으로 모습을 드러낸 미군정의 입법의원 설치 구상은 애초 11월초 개원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그 목표에 따라 전국적 소요사태에도 불구하고 10월 하순 민선의원 선거를 강행했다.
그러나 선거의 실체가 워낙 부실했고 극심한 좌익 탄압 속에 한민당과 이승만 세력의 독과점 현상이 예상보다도 극심했기 때문에 11월초 개원은 강행할 수 없었다. 미군정이 입법의원 설치에 협조해 온 김규식 주도의 합작위를 최소한 만족시키기 위해 일부 선거의 무효화 등 몇 가지 조치를 취하고 관선의원 인선을 의논하느라고 개원은 12월로 넘겨졌다.
하지는 12월 12일을 개원 마지노선으로 정했다. 더 이상 늦출 수 없다는 초조감 외에 그 날짜에 특별한 의미는 없었던 것 같다. 충무공 제삿날이 입법의원과 무슨 상관이겠는가. 서울과 강원도 재선거 결과도 기다리지 않고 관선의원 명단도 발표하지 못한 채로였다.
그간 지연을 거듭하고 있던 입법의원의 개원일은 12월 12일로 정식 결정되어 30일 군정청공보부에서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입법의원은 12월 12일 정오에 개원하기로 결정하였다. 입의 사무국에서는 개원일 전에 서울에 집합하도록 서신을 피선의원에게 30일 발송하였다. 관선의원에 대해서는 이미 결정된 모양인데 아직 발표할 시기가 아니므로 수일 내에 발표할 터이다. 개원일에 대하여서는 신중을 기해서 조선인 학자들과 협의한 결과 음력 11월 19일 이 충무공 기일을 택할 것이다.” (<조선일보> 1946년 12월 2일자)
12월 7일 관선의원 45인 명단을 발표했다. 개원을 닷새 앞두고 구성원 절반의 선임 내용을 주둔군 사령관이 발표하다니, 명색이 민의 수렴기관의 체면이 말씀 아니다. 개원 협조에 앞장서 오고 이제 의장으로 입법의원을 이끌어갈 입장의 김규식까지도 참여하고 싶지 않았다고 하는 말이 빈말로 들리지 않는다.
한민당의 개원 등원 거부로 입법의원의 체면은 더욱 구겨졌다. 한민당의 거부는 서울 재선거에 반발하는 당리당략이기는 했지만, 말인즉슨 옳은 말이었다. 의원 선출도 끝나지 않은 채로 무슨 개원이란 말인가? 한민당의 등원 거부로 개원정족수가 안 되니까 개원 전날 정족수를 4분의 3에서 2분의 1로 법령을 바꾸다니, 애들 장난도 아니고...
그렇게 억지로 개원은 했지만, 개원 형식만 밟고는 ‘예비회의’로 돌아가야 했다. ‘원법(입법의원법)’이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8월 24일 공포된 제118호 군정청 법령은 “조선과도입법의원의 창설”에 관한 것일 뿐, 운영에 관한 규정이 미비했고, ‘입법’의원이라는 위상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도 스스로 원법을 창출할 필요가 있었다.
입법의원의 성립을 위해 처리해야 할 또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의원 자격 심사였다. 제118호 법령에도 친일파 등을 배제하는 규정이 있었으나 선거 과정에서 심사 주체가 없었기 때문에 입법의원 개원 후 스스로 심사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 규정을 묵살했었다. 이 규정에 어긋나는 것으로 보이는 민선의원 당선자가 여럿 있었기 때문에 자격 심사부터 해야 한다는 여론의 압력이 있었다.
그래서 12월 13일까지 계속된 예비회의에서 3인의 원법기초위원회와 5인의 의원자격심사위원회를 설치하고 두 위원회가 맡은 일을 끝낸 후에 예비회의 아닌 정식 회의를 시작하기로 하고 휴회에 들어갔다. 의원자격심사위원회 명단을 공개하지 않은 것은 시비가 복잡할 것을 걱정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심사위원회의 ‘심사’는 형식적 심사에 그쳤다. 의원 몇몇이 모여 아무 준비도 지원도 없이 동료 의원들의 자격을 엄밀하게 심사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었겠는가? 심사위원들이 특별히 무책임한 인물이 아니더라도 실질적 심사를 기대할 수 없는 여건이었다. 결국 입법의원의 자체 ‘심사’는 면죄부 발행 절차에 그치고 말았다.
입의의원자격심사회는 극비리에 16일부터 동 사무총장실에서 장자일·최명환·정이형·엄우룡·허규 등 5의원이 계속 개회 중인데 심사내용에 관하여는 여러 가지 억측이 유포되고 있으나 채문한 바에 의하면 동 심사회는 다만 의원의 형식적 자격심사에 불과하다고 한다.
즉 입의개원식에서 선서문에 서명 날인한 의원 57인에 대하여 관선의원은 하지중장의 선임장 민선의원은 관할도지사의 신임장의 소지와 의원의 본인여부 등을 심사하는 형식심사라고 하며 일반이 주시하고 있는 의원의 질적 자격문제 즉 친일파 민족반역자 등의 심사는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동 심사회는 19일까지 전기 57의원의 심사를 끝내고 이를 20일 정식 회의에 보고하리라는바 개원식에서 선서문에 서명 날인하지 않은 의원은 자격을 상실한다고 하며 원의로써 제명처분하리라고 전하고 있는데 그 실행여부는 자못 주목되고 있다. (<동아일보> 1946년 12월 18일자)
입법의원 제1회 제1차 본회의는 12월 20일 오후 1시50분 군정청 회의실에서 열렸다.
20일 개최된 과도입법의원 제1회 제1차 본회의에서 이날 처음으로 참석한 한민당 출신 대의원에 대한 보충선서를 먼저 하느냐 자격심사위원의 심사보고와 동 보고접수안을 먼저 토의하느냐 하는 식순문제로 갑론을박의 파란이 있었다 함은 기보한 바이어니와 동 문제는 하오 3시 40분에 이르러 결국 의장의 순서변경제의 취소로써 1시간 50분 만에 낙착되었다. 일단 휴게 후 속개하여 백관수 이하 한민당 출신 대의원 17명의 선서 서명이 있은 다음 자격심사위원회 위원 정이형으로부터 ‘의원의 구체적인 신분 자격심사는 院의 법안제정 후 특별처분으로 규정될 것이므로 본 위원회는 관선의원은 하지 중장의 선임장 민선의원은 당해 도지사의 피선증명서 및 이력서만을 심핵하여 단지 법령 118호에 준거한 합법적 수속의 여부에 한해서 심사한 결과 19일에 등록을 마친 76의원(관선 39명 민선 37명)은 합격임을 인정한다’는 보고가 있고 이어서 동 보고접수 가부를 토의한 결과 탁창혁·김철수·엄우룡·여운홍·김약수 제씨로부터 이견이 있었으나 신분규정은 현재 적용할 규율 혹은 조례가 없는 만큼 보고안대로 접수하자는 안을 53대 6으로 가결하고 동 6시10분 끝마쳤다. (<서울신문> 1946년 12월 22일자)
의장 김규식이 첫 출석하는 한민당 의원들의 취임선서를 자격심사위원회 보고접수 뒤로 돌리려 한 까닭은 밝혀져 있지 않지만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이 취임선서 후 새로 자격심사를 거치게 하려는 뜻이었을 것이다. 보고접수에 대한 몇 사람의 이견도 실질적 심사를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미 한 방에 모아놓은 사람들 중에서 누구누구는 쫓아내야 한다고 나설 만큼 모진 사람들이 많을 수 없다. 마음속으로 엄격한 기준 적용을 바라는 사람들도 대개 “다음에 기회를 보자”고 접어놓지 않을 수 없다.
제1차 본회의는 12월 20일(금)의 제1회 회의에 이어 23일(월), 26일(목), 27일(금), 28일(토), 30일(월)의 제6차 회의까지 열렸다. <자유신문> 12월 24일자의 “입의점경(立議點景)” 기사에서 회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모처럼 거액을 들여 만든 의사당은 한기(寒氣) 관계로 쓰지 못하고 작 제2회 본회의도 왕관실(제1회의실)에서 거행되었다. 90명 의석과 의장석 방청석 경위석 비서석 의원행정관석 등 혼란 협착을 면치 못해서 의장 내의 엄숙한 기분이란 찾아볼 수 없다. 국사를 의논하는 자리요 적어도 일국의 재상들이 나와 앉는 그 자리를 연상한다면 아무리 기성국가의 국회는 아니라도 그러한 기분을 지금부터 길러가기에 노력할 것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이렇게 엄숙한 기분이 결여하고 보니까 외투를 입고 앉은 의원도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김 의장으로부터 “혁명선열에게 묵념을 올릴 때만이라도 외투를 벗읍시다.”라고 주의를 환기한 것은 부득이한 일이라고 할까?
의장은 다심하고 치밀한 이로 알려진 분이다. 이 날도 의원의 발언을 허하고 나서 “의원은 먼저 일어나서 관-민선을 구별하여 어느 도 선출의 수모(誰某)라고 말할 것과 또 될 수 있으면 의원석을 향하여 발언하기 바란다.”고 자상하게 일러주는 것 등 의원에게는 대단 고마운 일이나 노인의 심경이란 가끔 과격한 점이 없지 않아 “의장을 그만두겠소.” 하고 지나치신 발언을 함은 귀에 거슬리는 점이 또한 없지 않다. 침묵은 금이요 웅변은 은이라는 말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이날 개회 초에 지난 번 제1차 회의록 보고에 있어 40분을 낭비하였다. 발언을 하지 않아도 좋을 때 4-5명이 발언, 전일 의사록을 보아도 알게 될 것을 공연한 토의를 한 것은 미숙한 의사진행 상황을 폭로한 것이다. 한 가지 동정되는 것은 속기문제이다. 우리말로 이번 회의를 치르느라고 속기를 한 것이 불과 1개월, 그리고 의석도 잘 찾아 앉지 못하는 의원들의 관계로 갑이 한 말을 을이 했다고 회의록에 게재되었고 남의 의석에 앉은 까닭에 불법의원이 발언을 한 것 같이 기록한 것은 웃지 못 할 난센스이다.
중간보고로 서울시의 재선 결과가 의장에서 발표되자 박수 일진(一振). 한민당계 의원들도 또한 의미 있는 박수와 함께 냉소를 하는 듯하였다.
이것은 23일 제2차 회의의 참관기였고, <동아일보> 12월 27일자의 제3차 회의(26일) 보도기사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26일 입의 3차 회의에서는 원법 기초안에 대한 대체토론으로 각 대의원은 헌법과 원법과의 혼동, 군정청법령 118호와의 관계, 행정권 이양, 민생문제, 입의의 성격불분명 등 토의의 핵심을 모르는 듯한 의견까지가 첩출 층기하여 긴장미 없고 박력 없는 장내가 1시간 이상 계속되는 중 신기언 의원은 “장내가 정치좌담회와 같다. 구비된 국회와 같이 각 대의원은 아는지 모르나 각 대의원 중 헌법이 무엇이며 원법이 무엇이며 제1독회, 제2독회가 무엇인지 누가 아는가. 우리 3천만은 과거 정치적 자유 없이 지나온 만치 헌법 원법 제1독회 제2독회가 무엇인지 모르므로 무용한 이론이 속출한다.”고 발언하는 등 각자 각론이 계속하는 중 일부에서 “이것으로 대체토론을 마치자”는 발언이 있자 김규식 의장으로부터 “신중히 토론할 바이니 심사위원을 정하여 심사하는 것이 가하다”는 발언이 있은 후 3시10분에 10분간 휴회를 선언하였다. (...)
23일의 제2차 회의에서 상당한 토론시간을 잡아먹은 안건 하나는 회의를 중지했다가 새해 1월 15일 이후에 속개하자는 일부 지방 의원들의 연명 제안을 둘러싼 것이었다. 장기간 서울 체류가 힘들다는 이유였다. <자유신문> 12월 27일자의 “입의점경” 기사에는 의원 1인 하루 체재비가 5백 원에 달하는데 법관 봉급 수준으로 정한 의원 보수로는 감당할 수 없으므로 일리 있는 주장이라고 했다.
사회를 임시의장 최동오에게 맡겨놓고 있던 김규식이 연내에 꼭 처리해야 할 의안들이 있다는 이유로 12월 30일 제6차 회의까지 열 일정을 발의했다. 의사일정 결정은 의장의 고유권한이므로 표결할 필요가 없다는 일부 의견도 있었으나 김규식이 제안한 일정은 표결을 통해 확정되었다. 원법 처리를 마무리해서 연내에 ‘원 구성’을 끝내려는 김규식의 의지를 알아볼 수 있다. 결국 30일의 제6차 회의에서 전문 13장 97조의 원법 심의를 끝내고 윤기섭과 최동오를 부의장으로 선출하는 등 원 구성을 끝냈다.
12월 하순의 입법의원 회의에서 정치적 의미가 가장 큰 토론은 26일 제3차 회의에서 제안된 원법 제2조 수정을 둘러싼 것이었다. 입법의원의 목적을 규정한 이 조항에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원칙으로 한”이란 구절을 넣자는 강순 등 9인 의원의 연명 제안이었다. 3상회의 결정을 무력화하고 미소공위를 전복시키려는 극우파의 획책을 견제하려는 의도로 제안된 것으로 보이는 이 제안은 부결되었다.
원법 초안의 수정 중 의미 있는 것은 30일 마지막 회의에서 제32조 “특별위원회” 조항의 수정이었다. 원래 1) 자격심사위원회 2) 임시헌법 임시선거법기초위원회 3) 행정조직법기초위원회 4) 식량 및 물가대책위원회 5) 적산대책위원회의 5항목이 있었는데 ‘친일파 반역자 간상배 징치조례 기초위원회’라는 제6항을 추가하자는 원세훈의 제안이 통과된 것이다. (<조선일보> 1946년 12월 3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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