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사변’, ‘동란’ 등의 이름으로 흔히 불려오던 1950~1953년간의 전쟁을 요즘은 ‘한국전쟁’이라고 많이 부른다. 나도 그 이름을 쓰겠다. 이 전쟁에 대한 너무나 편파적인 냉전기의 시각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서다.


이 전쟁이 ‘소련의 야욕’을 받든 ‘북한 괴뢰’의 도발이었다는 설명에 의문만 제기해도 반공법, 보안법으로 잡아넣는 환경 속에서 한국인들은 긴 시간을 지냈다. 미국 사정은 한국보다는 나았지만, 1970년대까지 미국인의(한국계 미국인 포함) 연구가 이 틀을 거의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시각을 시도하는 연구를 하려면 자료와 연구비를 구하기 힘든 정도의 제약은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1970년대에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한 내부 비판이 강해지고 베트남에서 굴욕적 패배를 겪으면서 베트남전쟁과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진 한국전쟁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각이 시도되기 시작했다. 특히 1940년대 후반의 비밀문서 중 30년 비공개의 엄중한 자료들이 1970년대 후반에 공개되면서 자료도 확충되었다. 이 시도의 가장 뚜렷한 성과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1981, 1990)이다.


1990년대 들어서는 소련 해체에 따라 소련 문서도 활용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 무렵에는 한국에서도 군사독재 종식으로 연구 활동에 대한 억압이 사라져 한국전쟁 및 그와 관련된 주제들에 관한 의욕적 연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주목할 만한 현상은 해방공간과 한국전쟁을 주된 연구 대상으로 하는 ‘현대사’ 분야가 역사학계에 자리 잡은 것이다.


<해방일기> 작업은 분단에서 전쟁으로 이어지는 비극의 줄거리를 더듬어가는 것이다. 전쟁의 원인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한 목적의 하나다. 작업을 시작한 지 겨우 세 달, 아직 시작 단계에서 전쟁의 원인을 논한다는 것이 성급한 짓이지만, 작업의 목적을 분명히 하는 차원에서 내 접근 방향을 한 차례 제시해 두는 것이 좋겠다.


초기 미군정의 극심한 폭력성을 어제 서술하고 보니, 전쟁의 원인을 미국 쪽에서 찾고 있는 내 작업가설을 분명히 밝힐 필요가 느껴졌다. 아직 ‘작업가설(working hypothesis)’이다. 지금 살펴보고 있는 1945년 10월 말의 상황으로부터 전쟁 발발까지 56개월의 기간 동안 많은 일이 일어날 것이고, 그중에는 전쟁에 더 큰 작용을 할 요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최초 2개월간의 미군정은 분단과 전쟁의 개연성을 늘리는 쪽으로 분명히 작용하고 있었다.


전쟁의 원인에 대한 여러 관점이 박태균의 <한국전쟁>(책과함께 펴냄) 제1장 “한국전쟁은 왜 일어났을까?”(36-81쪽)에 개관되어 있다. 크게 ‘내인론’과 ‘외인론’ 이 구분되어 있고, 외인론은 미국 책임론과 소련 책임론으로 구분되어 있다.


내인론이란 한국인들 사이의 불화에서 전쟁의 원인을 찾는 것이다. 말하자면 신탁통치의 필요성과 관련해 제기되는 ‘자치 능력’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저희들끼리 놔둬도 어차피 어떤 식으로든 싸움박질을 할 판이었고, 미국과 소련의 존재는 그 싸움박질의 양상을 결정하는 데 작용한 부차적 요소라는 것이다.


좌익과 우익 사이의 격렬한 항쟁이 내인론의 근거로 제시된다. 그런데 나는 이 격렬한 항쟁이라는 것이 외부의 작용으로 빚어진 피상적 현상이었다고 생각하고, 지금까지의 작업을 통해 적어도 그 실마리는 잡았다고 생각한다.


‘좌익과 우익’이라는 대립 개념 자체가 해방 당시 일반 한국인의 의식 속에서는 그리 명확한 것이 아니었다. 박태균의 위 책 55-60쪽에서 내인론 비판의 근거로 소개한 것처럼, 미국식 자본주의에 비해 훨씬 사회주의적인 여러 정책노선이 당시의 한국 사회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극우 역할을 맡은 한민당조차 공식적 정강-정책에서는 이것을 외면할 수 없었다.


대다수 한국인은 일본 식민통치에 억눌려 왔던 민족주의,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여러 원리가 실현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개인과 집단에 따라 어느 원리에 얼마만큼 큰 비중을 두느냐 편차가 있었지만, 그 원리들이 절대적으로 상충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충분히 절충될 수 있는 것이었다. 국가를 따로 세우지 않고도, 전쟁을 벌이지 않고도, 대다수 사람들이 만족할 만한 길을 찾아나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 범위에 드는 사람들을 ‘중도파’로 나는 범칭한다.


어느 당과 어느 당 사이는 샛강이고 또 다른 어느 당과 사이는 한강이란 말이 나돈 일이 있는데, 이 중도파 안의 여러 파벌(좌익이고 우익이고) 사이는 모두 샛강이었다. 모든 한국인이 식민지시대에 비해 빈곤과 폭력의 위협을 덜 받는, 그리고 한국인의 뭉쳐진 힘으로 발전의 길을 찾을 수 있는 민족국가를 세우는 것이 중도파가 공유하는 지상과제였다. ‘합의’라는 기준에서 해방 당시의 한국인은 훌륭한 ‘자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중도파의 공유 과제를 외면하는 소수의 극단파가 있었고, 그들이 극좌와 극우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중도파 안의 여러 파벌 사이에 비하면 중도파와 극단파 사이는 한강보다도 더 먼 거리였다. 중도파를 묶어주는 가장 강력한 접착제가 민족주의였는데, 여러 경향 극단파의 첫 번째 공통점은 민족주의를 무시하는 것이었다.


나는 민족주의가 궁극적 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식민지 상태에서 풀려나는 시점에서 민족주의는 거의 모든 한국인의 합의를 모을 수 있는 구심점이었다. 민족주의를 수용하는 전제 위에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제 원리가 원활하게 절충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주의를 외면한다는 것은 다른 특정한 믿음이나 이해관계에 극단적으로 집착하는 태도였으므로 나는 이를 ‘극단파’로 범칭하는 것이다.


극단파는 소수였다. 상황을 주도할 입장이 아니라 눈치 보며 적응에 바쁠 입장이었다. 그런데 식민지시대에 특권을 누리던 한국인 집단에게 엄청난 기회를 미군정이 만들어주었다. 특권을 포기하기는커녕 일본인 상전들이 누리던 더 높은 등급의 특권으로 진화할 기회였다. 미군정은 해방 전 일본인의 권력을 그 바로 밑에 있던 한국인 집단에게 승계시킨 것이다.


좌익에서도 극단적 공산주의자들은 소수였다. 서구의 좌파 안에서도 ‘정통적’ 공산주의자들이 소수파에 머무르는 것과 같은 상황이 한국에서도 예상되고 있었다. 그런데 미군정이 과거의 친일 세력을 극우파로 키워내자 이에 대한 반발로 극좌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것은 다시 극우파의 역할을 더욱 부각시켜 주었다. ‘적대적 공생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중도파 안에서 좌익과 우익은 대화를 통해 건설적 타협이 가능했다. 그런데 미군정의 극우파 양성과 이에 따른 극좌파의 득세는 대화의 조건을 파괴했다. 돈과 주먹이 사회를 휩쓰는 상황에서 대화를 위한 노력은 흑백론으로 배척당했다. 오죽하면 김구가 ‘빨갱이’로 몰리기까지 했겠는가!


앞으로 계속 더듬어 나가겠지만, 내 작업가설에서 내인론은 일단 배제한다. 그 가장 큰 근거인 좌익-우익 간의 격렬한 대립 자체가 외세의 작용에 기인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미군정은 한국의 우익을 지원한 것이 아니라 폭력이 판치고 대화가 불가능한 상황을 야기한 것이 그 역할이었다.


박태균은 위 책 77-81쪽에서 외인론에 대한 비판을 소개했는데, 직접적 비판이 아니라 정황론 수준이다. 오스트리아와 베트남도 분할 점령이나 분단을 겪었는데, 왜 유독 한국에서만 분단이 고착되었는가, 같은 국제적 상황 속에서 다른 결과를 맞았다면 외인론으로는 설명이 부족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이 비교가 부적절하다고 보는 의견을 간단히 붙인다.


오스트리아는 유럽의 중앙, 당시의 문명국들이 일상적으로 관찰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4개 연합국이 분할 점령했다. 남한의 미군정처럼 점령군이 야만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리고 독일 항복 직전인 1945년 4월 독일로부터 오스트리아의 분리를 선언하며 세워진 레너 정부가 연합국들의 승인을 받고 정부 기능을 수행했다. 점령군의 역할은 감시에 한정되고 오스트리아 정치에 적극 개입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국민들에게는 스스로 패전국이라는 죄책감이 어느 정도 있었지만 연합국들은 오스트리아가 독일로부터 해방된 나라라고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베트남이 한국과 다른 점 하나는 한국에서 해방공간에 민족주의가 탄압받고 몰락한 것과 달리 베트남 민족주의에는 큰 손상이 없었다는 것이다. 호치민을 통해 공산주의와 결탁한 민족주의만이 아니라 베트남 남부에도 민족주의는 살아 있었다. 1960년경 남한의 반 이승만 운동이 미국식 민주주의를 기조로 한 것과 비교하면 같은 때 남베트남의 반 고 딘 디엠 운동은 민족주의를 기조로 한 것이었다.


베트남에서는 1954년까지 프랑스를 상대로 민족주의 운동이 진행되었고, 그 후에 개입한 미국은 남한에서처럼 극우세력을 강고하게 키워 민족주의를 배제할 기회가 없었다. 남한도 남베트남도 초기의 부패 독재가 무너진 후 군사정권이 들어섰지만, 베트남 군사정권은 남한 군사정권과 비교할 만한 지지 기반을 만들지 못했다. 1974년까지 전쟁을 버텨낸 것은 미국의 군사력이었을 뿐, 베트남인의 적극적 지지가 거의 없었다.


남한에는 베트남과 달리 분단 고착을 원하는 세력이 큰 정치적 역할을 지금까지 맡아 오고 있다. 일반 국민 사이에도 민족주의보다 국가주의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앞으로 계속 살펴나가겠다. 분단과 전쟁의 책임이 한국인의 결함이 아니라 외세의 작용에 있음을 조금이라도 더 밝혀 “엽전은 안돼.” 하는 자기비하에서 벗어날 근거를 찾고 싶은 마음을 솔직히 밝힌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