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선언에서 한국의 독립 방침에 “in due course”라는 부사구가 들어 있다. “적절한 시기에”라고 흔히 번역되는데, 꽤 적절한 번역이기는 하지만 아주 정확한 것은 아니다. “마땅히 거칠 과정을 거쳐서”라 하는 편이 정확성에서는 낫겠다. 요컨대 ‘바로’, ‘그대로’ 독립되지는 않으리라는 것이다.
‘마땅히 거칠 과정’이란 독립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그 조건이 어떤 것인가?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식민지였던 한국이 독립국으로 안정을 취하기 위해서는 내적 조건과 외적 조건이 필요했다. 내적 조건은 국가체제를 내부 요소들이 지탱할 수 있는 ‘자립 능력’이고, 외적 조건은 지나친 외부 압력이 작용하지 않을 안정된 ‘국제관계’다.
외적 조건과 내적 조건은 상관관계를 가진다. 자립 능력이 다소 미흡해도 국제관계가 순조롭다면 허약한 국가체제라도 일단 세워놓은 다음 서서히 강화시켜 나갈 여유를 가질 수 있다. 반면 험악한 국제관계 속에서는 아무리 강한 자립 능력으로도 위험을 피할 수 없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국제관계는 큰 변화를 겪고 있었다. 변화의 핵심은 미-소 대립관계의 형성에 있었다. 두 나라 군대에 분할 점령된 한국은 열악한 외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웬만한 자립 능력을 가지고도 다수 주민의 염원을 충족시키는 안정된 국가체제의 수립을 어렵게 하는 외부의 압력이 작용하는 상황에 한국은 놓여 있었다.
해방공간에서 신탁통치 문제를 놓고 ‘자립 능력’이 늘 도마 위에 올랐다. 그 여파로 후세 사람들도 내적 조건에 관심을 집중시키게 되었다. 당시 여러 정파와 지도자들의 전술전략, 판단력과 실행력, 나아가 도덕성까지 시시콜콜 따지는 것은 내적 조건의 충족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노력이다.
후세 사람의 편리한 위치에서 개관하자면 분단과 전쟁의 비극을 불러온 1차 변수는 외적 조건이었다. 내적 조건은 그 종속변수였다. 미-소 대결의 추세가 통일국가 형성의 내부 욕구를 단순히 억누른 것이 아니라, 내적 조건의 형성과 전개 과정에 두 강대국의 패권주의가 작용한 것이다. 한국의 미래 결정을 한국인의 손에 맡겨놓지 않는 억압 요인이 일본의 의지로부터 두 나라의 의지로 바뀐 것이다.
두 나라의 의지가 작용했지만, 문제를 먼저 일으킨 것은 미국이었다. 초기 단계에서 소련은 수동적인 입장이었고, 이후 한국에 대한 소련의 패권주의적 태도는 미국의 도발에 대한 대응으로 해석할 여지가 크다. 초기의 점령정책에서 이 차이를 확인해 두는 것이 이후 상황의 이해를 위한 발판이 될 것이다.
지방행정에 대한 태도에서 점령정책의 차이가 극명하게 나타난다. 주민의 생활과 활동에 직접 닿는 영역이고, 점령군의 영향력이 미치는 과정을 살피기 좋은 시차가 있기 때문이다. 미군의 경우 제주도까지 전술적 배치를 끝내는 데 11월 10일까지 두 달의 시간이 걸렸고, 군정을 위한 전문적 훈련을 조금이라도 받은 ‘군정 중대(MG teams)’가 완전히 배치되는 데는 이듬해 1월 14일까지 다시 두 달의 시간이 더 걸렸다. 그 동안에는 미군의 개입이 없거나 불완전한 상태에서 지방행정이 현지 사람들의 손에 맡겨져 있었다.
65년 전의 오늘 북조선 5도행정국이 설치되었다. 이것은 위에서 일률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짜여 올라온 조직이었다. 해방 후 각 지역에서 주민들이 만든 인민위원회가 각도 인민위원회로 묶이고 10월 8일부터 10일까지 110명의 대표가 참석한 북조선 5도 인민위원회 연합회의에서 체제의 표준화를 결정했다. 그 시점까지 각도 인민위원회는 서울의 인민공화국 중앙에 귀속하는 것으로 보고 북한 지역을 통합하는 조직을 만들지 않았다. 그런데 10월 10일의 아놀드 망언 이후 미군정의 인공 부정 방침이 확실해짐에 따라 잠정적 통합조직으로 5도행정국을 만든 것이었다.
일본 항복 보름 후인 8월 말까지 건준에 145개 지방조직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중 몇 개는 건준 본부의 요원들이 연고지를 찾아가 결성을 도와주었지만, 대부분은 자생적 자치조직이 자발적으로 건준에 연락을 취한 것이고 건준 본부와 실질적 관계도 별로 없었다. 자생적 자치조직은 38선 남북에 관계없이 전국적으로 만들어졌고, 9월 초 인민공화국 선포 이후 대부분 ‘인민위원회’라는 간판을 달면서 인공 중앙과의 연결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련군은 북한에 진주하면서 인민위원회가 있는 것을 알자 이를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 480쪽 한 대목에서 이 방침이 시작되는 장면을 보여준다.
8월 30일의 한 보고는 8월 24일에 함흥에 진주함에 있어서 소련군 사령관과 함경남도 도지사가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고 말했다.
“한국의 정치적 장래가 결정될 때까지 소련군은 기존 정부 및 행정체제를 통하여 행정을 수행할 것이다 (...) 공안을 해치거나 파괴시키는 자는 엄중한 처벌을 받거나 사형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후의 보고는 소련이 함흥 인민위원회의 존재를 발견하자, 즉시 일본인들을 축출하고 행정을 위원회에 넘겨주었다고 말하였다.
일본의 항복이 예상 외로 빨랐기 때문에 점령정책을 준비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소련군도 미군과 마찬가지였다. 함흥에 진주해서 바로 발표한 방침은 식민지 통치기구를 그대로 활용한다는 것이었다. 점령군이 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봐줄 능력이 없는 바에야 어떤 조직이라도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인민위원회가 있는 것을 알고는 바로 일본 기구를 폐기하고 인민위원회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해방 열흘 후의 인민위원회가 조직력을 갖췄으면 얼마나 갖췄겠는가. 능률로 따진다면 수십 년간 운영되어 온 일본 통치기구가 더 나았을 것이다. 식민지 상태의 청산을 점령군의 지상과제로 여겼기 때문에 인민위원회를 택한 것이다.
인민위원회에게 권한과 책임을 적극적으로 맡기는 소련군의 방침으로 인해 북한 지역의 인민위원회 결성과 발전이 촉진되었다. 소련군 진주 후 두 달이 지난 10월 말까지는 북한 전역의 경찰 활동과 지방행정이 인민위원회에 장악되었다. 그리고 이 기간에 소련군은 인민위원회 조직의 상층부에 좌익의 존재가 어느 정도 포함되도록 제한된 수준의 영향력만 행사하면서 민족주의자들의 주도권을 존중했다.
악의적으로 해석한다면 민족주의자들을 앞세워 인민위원회를 키워놓은 다음 공산주의자들이 그 결실을 가로채도록 책략을 부린 것으로 볼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점령 초기의 소련군은 그런 책략을 구사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설령 책략이라 하더라도, 민족주의자들의 염원이 표출될 기회를 주었다는 점에서 건설적인 책략이라 할 것이다.
반면 남한에서는 미군정이 인민위원회를 전면적으로 탄압했다. 미군의 배치가 불완전한 단계에서는 인민위원회의 활동이 용인되었다. 북한에서처럼 점령군이 뒷받침해 주지 않는데도 남한 거의 전역에 군 단위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고, 그 대부분이 얼마 동안이라도 상당 수준의 경찰과 행정 기능을 수행했다.
병력 배치가 끝나자 본격적 탄압이 시작되었다. 인민위원회 파괴가 미군정의 가장 큰 업무가 되었고, 점령군 병력이 부족하다고 하지가 노상 징징댄 것도 억지로 만들어낸 이 업무 때문이었다. 북한 점령군이 아직 조직이 미비한 주민과 손잡고 일본인과 친일파의 저항을 분쇄하는 작업을 끝낸 시점에서 남한 점령군은 일본이 키워놓은 경찰력을 앞세워 어느 정도 조직이 갖춰진 주민을 억압하는 일에 몰두한 것이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 제9장 “지방인민위원회의 운명”(373-437쪽)에 미군정의 인민위원회 탄압 경위가 밝혀져 있는데, 그중 전라남도 해남군의 경우를 예시를 위해 인용한다. (386-388쪽, 정확성을 위해 인용 내용은 원서에서 직접 번역함)
해남에서는 “인민위원회가 의문의 여지없이 가장 강력하고 가장 활발한 정치조직이었다.” 위원회는 그 지역을 모든 층위에서 통제하고 있었고, 식민지 통치기구에 근무하던 한국인 직원들을 위원회의 지시 하에 일하게 하고 있었다. 위원회는 지역의 버스 서비스와 군청의 김 양식 사업, 그리고 21개 초등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45 (군정)중대는 12월 초에 해남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해남 군수로 정식 발령했다. (...)
1946년 초 미군은 이들 4개 군에 ‘구조조정’을 행할 결정을 내렸다. (...)
해남에서는 12월 말 (전라남)도 경찰이 인민위원회 지도자 19명을 체포했다. 1월 19일경 인민위원회 경찰서장과 그 휘하의 38명이 광주에서 파견된 특별경찰 38명으로 대체되었다. 2월에서 3월까지 해남에서 소요사태가 있었고, 더 많은 체포가 뒤따랐다. 3월 말 시점에서 해남군의 경찰력은 85명이었다. 유치장에는 50명이 갇혀 있었는데, 그중 14명의 혐의는 ‘경관 사칭’이었다.
남한의 방방곡곡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각 지역 주민들이 점령군의 도움 없이라도 식민 통치체제를 대치할 자치조직을 형성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지역 특성이나 우연한 조건에 따라 자치조직은 다소 급진적 성격이 되기도 하고 온건한 성격이 되기도 했다.
해방 직후 경찰은 위축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숨어 있었다. 9월 초 미군이 진주할 무렵 한국인 경찰관의 출근율은 30%도 안 되었다고 한다. 신변의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미군정은 이들의 출근을 독려해 경찰력을 복원시키고 그것을 앞세워 인민위원회를 격파했다. 군정하의 남한은 식민지시대보다도 더 지독한 경찰사회가 되었다. 인민위원회 경찰 39명으로 질서가 유지되던 해남에 몇 달 후 85명 경찰력이 필요하게 된 것이 무엇 때문이었겠는가? 민심에 역행하는 체제였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자치 능력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 차이 없을 것 같다. 어떤 악조건 아래서도 잘 꾸려나갈 만큼 뛰어난 것도 아니고, 어떤 호조건 위에서도 죽을 쑬 만큼 형편없는 것도 아니다. 분명한 사실은, 미군정과 같은 조건에서는 아무리 훌륭한 자치 능력이라도 제대로 발현되고 발전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지방행정만이 아니라 중앙정치도 민심을 역행하는 방향으로 미군정의 영향을 받았다. 사회주의적 요소에 대한 민중의 염원을 조금이라도 반영하는 정치세력은 미군정-한민당 복합체에게 공산주의자로 몰렸다. 극좌파를 제외한 한국인은 미군을 적으로 여기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군정 당국자들은 대다수 한국인을 적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미군에 대한 일반 한국인의 신뢰는 갈수록 떨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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