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령군 사령관과 군정장관의 권한과 책임에 대해서는 정상적인 국가의 권력자나 책임자의 경우 같은 엄밀한 규정이 없었다. 과도적인 역할이고 무력에 의존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미군은 자체 운영에 있어서도 소련군 같은 사회주의 군대처럼 정치적 원리를 중시하지 않았으므로 일반사회를 다스리는 군정에 있어서는 정치적 감각에 더욱 큰 맹점이 있었다.
이 점을 보완하기 위해 하지의 정치 고문으로 파견된 국무성 관리들이 있었다. 이들의 역할이 적어도 점령 초기에는 하지의 정치력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정치 고문 메럴 베닝호프가 진주 직후(9월 15일) 국무성으로 보낸 첫 보고서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었다.(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김자동 옮김, 일월서각 펴냄 197쪽에서 재인용)
“정치정세에 있어서 유일하게 고무적인 요소는 서울의 보다 나이들고 교육을 받은 사람 중에 보수분자 수백 명이 있다는 사실이다. 비록 그 중 많은 사람들이 일본을 위하여 봉사하긴 했으나 그러한 오점은 결국 없어질 것이다. 이 사람들은 ‘임시정부’의 귀환을 지지하고 있으며 비록 다수는 아니지만 아마도 최대의 한인집단일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일본인의 재산을 당장 몰수하자고 주장하고 있으며 법과 질서에 대한 위협이 될 수 있다. 잘 훈련된 선동자들이 우리 지역에 혼란을 초래하려고 시도할 수도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한인들이 미국을 거부하고 소련의 ‘자유’와 지배를 바라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주한 미군은 수적으로 부족하여 지배지역을 급속히 확장할 수 없으므로 남한은 이러한 행동을 하기에 비옥한 토양을 이루고 있다.”
위 글에서는 친일 배경을 가진 보수세력, 즉 한민당 주류와의 밀착 방침을 밝혔고, 아래 글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을 강조했다.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이 크기 때문에 친일파 보수세력과 밀착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인데, 그 위협은 분명히 과장된 것이다. “일본인의 재산을 당장 몰수하자”는 것은 공산주의자들만의 주장이 아니었다. 모든 민족주의자들의 공통된 요구였고, 한민당조차 동조한 주장이었다.
중경 임시정부는 일본인 재산 몰수를 넘어 ‘토지 국유화’를 표방하고 있었다. 베닝호프의 눈에는 극단적 공산주의로 보였을 것이다. 베닝호프는 식민지시대의 기득권에 집착하는 소수 세력 외의 한국인을 모두 공산주의자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정치고문의 조언이라면 장님이 장님을 이끄는 꼴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2주일 후 베닝호프의 보고서에는 당시 미군정의 관점이 더욱 구체화되어 있다. (같은 책 198-199쪽에서 재인용)
“한편에는 이른바 민주적 혹은 보수적 집단이 있다. 이들의 구성원들 중에는 미국에서든지 아니면 한국에 있는 미국계 선교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은 전문적 및 교육계의 지도자들이 많이 들어 있다. 그들의 목적과 정책들은 서구식 민주주의를 따를 결의를 보이고 있으며, 그들은 이승만 박사와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의 조기 귀국을 거의 만장일치로 희망하고 있다.”
“급진파들은 그들의 민주적 반대파보다 잘 조직된 것 같아 보인다. (...) 그들의 홍보자료들은 배후에 명확한 강령이 있으며 아마도 훈련된 노선이 있는 것 같다. 이 조직의 천재적 인도자는 여운형이다. (...) 그러나 그의 정치이념이 기독교에서 공산주의로 변한 것이 명백하므로, 현재 인민은 그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
“다수 인민의 지지를 주장하는 보다 덜 호전적인 보수분자들은 자기보호와 자신들의 반공적이며 친민주주의적인 신념을 위하여 부득이 조직을 구성했다. 급진파들은 (...) 보다 잘 조직되었으며 보다 요란스러웠다. 진짜 공산주의자(소련의)의 침투 성격과 정도는 분명히 알 수는 없으나 상당한 정도일 것이다.”
베닝호프의 ‘민주주의’ 인식 방법이 두드러지게 눈에 띈다. ‘급진파’의 대립 개념이다.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은 전체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지키는 입장을 자임했다. 그 연장선 위에서 종전 후 소련의 스탈린주의를 비판하는 자세가 미국 정계와 군부에서 형성되고 있었고, 이것이 냉전기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깃발이 되었다.
사회주의 일체를 스탈린주의와 연루시켜 민주주의와 대립시키는 베닝호프의 편파적 시각에 “단순한 군인”인 하지와 아놀드도 공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남한에서 냉전을 앞당겨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 체제에 대한 성찰 없는 믿음과 다른 체제에 대한 무조건적인 적대감은 냉전의 핵심 요소였다.
친일에서 친미로 옮겨간 일부 세력만을 자기네 ‘편’으로 받아들이고 일반 민중을 불신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일본의 식민통치와 똑같은 통치 자세였다. 이런 자세에서는 남한에 미국의 절대적 영향을 받는 국가를 우선 세운 다음 군사력으로 북한을 통합하자는 내용으로 짐작되는 이승만의 제안이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1943년 말의 카이로회담 무렵부터 미 국무성에서 구상해 온 연합국 공동참여의 신탁통치안이 그 창안자인 루스벨트가 없는 이제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맥아더를 위시한 동아시아 지역 군정 담당자들이 보기에 일본 항복은 미국 원자탄의 힘으로 얻어낸 것이었고, 지금도 원자탄은 소련의 손발을 묶어놓는 절대적 힘을 가지고 있었다. 소련 등 다른 연합국의 눈치 볼 필요 없이 미국의 국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기회인 이 때, 구시대의 유물인 신탁통치안은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는 길로 보였다.
한국의 군정 담당자들이 민주주의의 의미를 ‘미국식 민주주의’의 좁은 뜻으로 해석해서 일반 민중의 염원을 외면한 오만은 인종주의적 우월감과 함께 원자탄의 힘에 대한 믿음에도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 적어도 반년간은 미국을 더 괴롭힐 것으로 예상되던 일본제국을 불과 일주일 만에 무릎을 꿇렸으니. 소련이고 나발이고, 이제 힘으로는 미국의 상대가 없다는 자신감이 미국 사회, 특히 미국 군부에 팽배했다.
빈센트 극동국장이 한국 신탁통치 방침을 발표한 1주일 후인 10월 27일 트루먼 대통령이 해군기념일 연설에서 미국의 군사적 사명 4개조와 외교원칙 12개조를 발표했다. 연합국과의 협력관계를 강조한 이 연설은 루스벨트의 다자주의-국제주의가 전후 상황에서도 계속 유효하다는 내용이었다. 빈센트의 발언에 대한 포괄적 확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며칠 후 남한 군정장관 아놀드는 신탁통치가 미국의 방침이 아님이 틀림없다고 기자들을 상대로 확언하고 있었다.
(問) 지난 20일 미국의 극동국장은 조선을 신탁통치국가로 할 의사를 말하였는데 무슨 정보라도 들어 왔는가? 또 미국독단으로 그런 말 할 수 있을까?
(答) 나도 제군이 쓴 신문기사를 보고서야 비로서 알았다. 신탁통치운동은 결국 조선사람의 손에 달린 문제다. 속히 독립하느냐가 조선 사람의 손에 달린 이상 조선 사람의 책임은 크다고 할 것이다. 군정청은 조선의 정부다. 여러분을 위해 일하는 기관이다. 조선 사람이 공동전선을 펼치고 이 정부에 협력하고 노력한다면 조선의 독립은 그만치 빠를 것이다. 이를 통하여 조선인이 이제부터 자주독립국가로서 충분히 걸어 갈 수 있다는 힘을 세계에 보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 사람은 신탁국가니 무어니 하는 걱정을 하기 전에 먼저 조선민족이 대동단결하여 하나의 힘을 뭉치는데 매진하기 바란다.
또 극동국장 빈센트 씨의 말은 단지 개인의 의사에 지나지 않는 줄 믿는다. 그분의 말이 미국정부의 방침이 아님은 틀림없다. 그러므로 그러한 소식은 묵살해야 할 것이다. 그런 개인의 말을 가지고 경솔하게 침소봉대하여 민중을 흥분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기 바란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10월 31일에 하지를 만난 송진우가 한국인들에게 전해달라고 하지가 부탁했다는 이야기 중에도 이런 내용이 있었다. 커밍스는 다른 자료들과 대조하여 하지의 발언이 왜곡되지 않은 것임을 확인했다고 했다. (커밍스 위 책 285-286쪽)
“신탁통치를 운운하나 이것은 극동부장 1개인의 의견이요. 그 사람이 조선정치를 좌우할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조선사람이 결속하여 독립할 만한 힘을 배우면 이제라도 나는 독립을 승인하겠다. 38도 이남의 조선인이 내 말대로 일심협력하여 민족일치를 배우면 그것은 즉시 해결될 일이다.”
자유신문 1945년 11월 05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연말의 모스크바 3상회담 결정 후 조작된 오보로 인해 반탁운동이 혼란스럽게 펼쳐질 때, 하지는 한민당-동아일보 측의 왜곡을 뒷받침해 혼란을 부채질했다. 미국이 한국의 즉각 독립을 주장하고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는 왜곡이었다.
하지는 이 왜곡 내용을 그대로 믿었던 모양이다. 1월 23일에 스탈린이 해리먼 미국 대사를 불러 왜곡에 대해 항의하고 25일에 타스통신이 3상회담의 진상을 발표한 직후인 27일 국무성에서 타스통신의 보도 내용이 맞다는 사실을 하지에게 확인해 주자 그는 바로 이튿날 사표를 제출했다.
만류에 못 이겨 2월 2일 사표를 철회하면서 하지는 분노에 찬 전보를 국무성으로 보냈다. “1월 27일의 메시지는 국무성이 여러 주 전에 본 사령부에 보냈어야 할 정보를 포함하고 암시하였다. (...) 타스 성명이 전적으로 진실이라는 확인은 내게 전혀 새로운 소식이다.” 운운의 내용을 담은 전보였다. 3상회담에 임하는 미국의 한국 관련 정책노선을 주둔군 사령관인 자신에게 알려주지 않았다는 불평이다.
커밍스는 위의 책 296쪽 이하 “톡톡히 망신당한 하지”라는 제목의 섹션에서 하지가 3상회담 이전에 충분한 통보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하지가 알고 있던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처럼 시치미를 뗀 것 같지는 않다. 그는 미국 정부에서 알려주는 방침조차 파악하지 않은 채 제멋대로 미군정의 권력을 운용한 것이었다.
하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아놀드를 비롯한 그의 보좌관과 고문들이 다 마찬가지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군정 담당자들이 한국을 망치려는 악의를 가지고 저지른 짓이 아니었다. 무식하고 게을러서 누군가에게 이용당한 것일 뿐이다.
정말 오래된 문제다. "주여 저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모르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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