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에 낸 <밖에서 본 한국사>는 한국사 전체를 조감한 책이지만 개설서나 통사가 아니다. 이 책에서 다룬 30여 개 주제 중에 내가 “연구”했다고 할 만한 것은 몇 안 된다. 대부분은 “교양” 수준의 이해였다.
중국사로 공부를 시작해 문명교섭사를 연구하면서 역사를 비교적 “넓게” 살펴온 나는 한국사 연구자가 아니라도 한국사 연구의 방향에 대한 의견을 내놓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 책을 썼다. “밖에서 본”다는 데는 두 가지 의미가 겹쳐진다. 한반도 외부와의 관계에 비중을 둔다는 의미가 있고, 한국사학계 밖에서 내는 의견이라는 의미가 있다.
넓은 범위의 이야기를 하면서 너무 엉뚱한 꼴을 보이지 않으려면 기존 연구를 어느 정도는 파악해야 한다. 나는 1991년 완간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마지노선으로 잡았다. 기존 연구가 대략 파악이 되어 있는 사전이라고 본 것이다.
그 후 20년 가까이 지내는 동안 이 책에서 제시한 방향에 대한 한국사학계의 반응은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최근에 나온 데이비드 로빈슨의 <무너지는 몽골제국 앞의 고려 Korea and the Fall of the Mongol Empire>(2022)를 읽으며 <밖에서 본 한국사>에 실었던 글 “역사에게 외면당한 영웅 공민왕”을 다시 돌아본다.
공민왕을 인격파탄자로 몰아버린 이유
그 글에서 나는 공민왕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를 제기했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 조선 초기에 작성된 공민왕의 시대에 대한 역사기록에는 곡필이 많았다. 왕조교체의 정당성을 확인할 필요 때문에 고려 말기의 국왕 중 왕 노릇을 열심히 했던 공민왕을 폄훼한 대목이 많았다. 내가 그를 “영웅”으로 내세운 것은 그에 대한 반발이었다.
공민왕의 왕 노릇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이 원나라와의 관계다. 백여 년에 걸친 이른바 “몽골간섭기”가 끝나갈 때였다. 공민왕이 즉위하던 1351년 무렵 원나라는 가장 중요한 경제적 기반인 장강 유역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있었고, 1368년 대도(大都, 지금의 베이징)를 버리고 새외(塞外)의 상도(上都)로 물러가기에 이른다. 원-명 교체가 확정된 시점이다.
원-명 교체의 의미를 당시 고려인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이해하는 데 방해되는 것이 “몽골 간섭기” 같은 용어에 나타나는 현대인의 애국심이다. “몽골 지배기”가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 기간에 고려 세자는 대도의 황제 친위대에서 소년기를 지낸 후 몽골 황족 왕비를 모시고 돌아와 즉위했다. 대도에서 세자와 함께 지내던 귀족들이 따라와 조정의 권력을 장악했다. 조선이 명나라와 청나라를 대하던 것과 전혀 다른 방식이었다.
조선시대 상황에 익숙한 현대인은 원-명 교체를 명-청 교체와 비슷한 틀로 보기 쉬운데, 전혀 다른 틀이었다. 명-청 교체에 적응하는 데는 “의리(義理)” 같은 상층부의 관념적 변화만이 필요했다. 반면 원-명 교체에는 고려 사회의 전면적이고 구조적인 변화가 필요했다.
조선 초기 기록에 나타난 공민왕의 성적 취향의 사실 여부를 확인할 길은 없다. 그러나 그런 기록이 남겨진 이유는 이해할 수 있다. 원-명 교체에 대한 공민왕의 나름 능동적인 자세의 타당성을 인정한다면 조선 왕조교체의 정당성을 어떻게 설명하나? 메시지의 타당성을 따지기 어려우니 메신저를 인격파탄자로 몰아버리는 것이 손쉬운 길이었다.
왜 연구서가 교양서가 되기 힘들까?
조선 초기 기록을 액면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한데, 그러면 공민왕의 실제 모습에 접근하기 위해 어떤 작업이 필요한가? 로빈슨은 그 방향을 찾아내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로빈슨의 책 참고서목에는 2010년대에 나온 몇 사람(정동훈, 이명미, 윤은숙 등)의 논문이 여러 편 표시되어 있다. (2022년에 나온 책이므로 2020년대에 더 나온 논문도 있을 것이다.) 몇 편은 찾아 읽고 싶다. 일단 유의하는 사실은 이 분야의 연구 성과가 국내에서 단행본으로 정리되어 나온 것은 아직 없다는 것이다.
연구가 쌓인 연구자 중에 머잖아 단행본도 내는 이가 있기를 기대하지만, 국내에서 일반 독자를 위한 고급교양서 성격의 연구서가 쉽게 나오지 못하는 이유를 생각해 본다. 우선, 연구서 내기보다 학술논문 여러 편 쓰는 편이 재계약에도(연구점수) 연구비 확보에도 일반적으로 유리한 길이라는 제도적 문제가 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역사를 넓게 보지 못하는 역사학계의 풍토에 있다. 학위논문 작성 때 나 자신 절감한 문제다. 동양사 전공으로 학위과정을 밟았는데, 중국과 한국의 서학(西學)을 묶어서 논문 계획을 세웠다가 학과장 승인을 받지 못했다. 동양사 전공자가 국내로 “침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중국 서학의 범위 안에서 논문을 썼다.
구분된 영역 안에서만 연구하고 논문 쓰고 자리도 만드는 한국 역사학계의 풍토는 문자 그대로 “봉건(封建)” 체제다. 각자 자기 영지 내에서만 활동한다. 모든 지역 사이의 모든 관계가 확장-심화하는 세계화의 시대에 이런 체제에는 생산성이 없다. 열심히 작업하는 연구자들도 세계화된 독자의 관심을 끌 만한 연구서를 쓰기가 몹시 어려운 조건이다.
로빈슨의 키워드 “동맹”과 “불확실성의 시대”
로빈슨의 책은 조선 초 학자-관료들이 쳐놓은 연막을 뚫고 공민왕의 실제 모습에 접근하는 데 큰 성공을 거두었고, 그 성공의 원인이 “밖에서 본” 데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고려-원 관계를 “동맹(alliance)” 관계로 보는 시각이 하나의 예다. 고려 “안에서” 볼 때는 이분법적인 조공-책봉 관계에 집착하기 쉽다. 이 집착을 벗어나 원나라의 세계체제 안에서 “동맹”의 넓은 스펙트럼을 이해해야 고려-원 관계의 실제 의미도 파악할 수 있다.
즉위 6년차인 1356년 공민왕은 기철(奇轍, 원나라 기황후의 오빠) 등 친원세력의 중심인물들을 반란죄로 처형한 데 이어 서북과 동북 방면으로 원나라 영토를 침공하고 원나라 연호 사용을 중단했다. 조공-책봉의 관계로 보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다. 그런데 원나라가 양보할 것을 양보한 후 관계가 회복되었다. 1363년 원 황제가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을 책봉했을 때도 공민왕은 덕흥군이 몰고 온 군대를 물리친 다음 원나라와 관계를 계속했다. 1368년 원나라가 중원에서 물러난 뒤에도 관계가 계속되었다.
관계의 성격이 크게 바뀌면서도 관계의 기본 틀이 유지되는 것을 조공-책봉의 흑백론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원나라가 흥기 과정에서부터 수많은 세력과 맺어 온 다양한 형태의 “동맹”을 염두에 둘 때 비로소 이해되는 일이다.
로빈슨이 당시 시대상을 “변화와 불확실성의 시대”로 묘사한 것도 독자의 이해를 도와준다. 정상 상태(normal state) 아닌 패러다임 전환의 단계로 생각할 수 있다. 몇 세대가 지나도 큰 틀이 바뀌지 않는 안정된 체제가 아니라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유동적 상태에서 많은 참여자가 각자의 선택에 따라 흥망이 갈리는 상황이다. 로빈슨이 그려주는 공민왕의 진로는 수시로 조정해 나가는 지그재그 행로로 보이지 않을 수 없다.
조그만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수구” 세력
로빈슨의 책을 읽으며 “동맹”과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두 개 키워드가 특별히 각인되는 것은 공민왕의 시대만이 아니라 지금의 세계 상황을 이해하는 데도 적절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13세기 후반에서 14세기 전반에 걸친 원나라의 체제는 종래 중국의 왕조들이 관할하던 영역을 넘어 유라시아대륙의 절반을 포괄하는 “세계체제”였다. 14세기 후반은 이 세계체제가 무너져가는 시기였다.
1351년 공민왕 즉위 때까지 몽골 지배기 백년 동안 고려 지배층은 이 체제에 묶여 있으면서 또한 이 체제에 의지하며 지냈다. 모든 정책, 모든 행동이 원 황제의 호오(好惡)에 따라 결정되었다. 황제의 사위인 국왕의 권위가 황제의 처남인 기철에게 위협받기에 이른 것은 이 의존도가 한계를 넘긴 것으로, 몽골 체제가 정상 상태를 벗어난 하나의 신호로 볼 수 있다.
“동맹”의 관점에서 본다면 백년 동안 원나라는 절대적 주도권을 가진 맹주였다. 그런데 이제 자기편을 보호할 힘도 항거하는 자를 응징할 힘도 떨어졌다. 남중국의 반란세력을 발본색원할 길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타협적인 정책으로 넘어간다. 1356년 이후 공민왕 역시 원나라와 동맹 관계를 회복하면서 한편으로는 남중국 반란세력과도 독자적인 관계를 맺는다. “불확실성의 시대”를 맞아 절대적이던 동맹 관계가 상대화한 것이다.
1374년 공민왕을 죽인 것이 “친원(親元)”세력이라고 하는데, 이 세력이 의지할 원나라는 사라져 버린 뒤였다. 요동 등지에 남아 있던 원나라 귀족 출신 세력들도 초원으로 물러난 북원(北元)의 통제를 받지 않는 독자적 세력이 되어 있었다. “친원”은 “수구(守舊)”의 간판이었다. 조그만 힘을 가지고 조그만 이익을 위해 움직인 이 세력이 고려 멸망의 하수인이 되었다.
20세기 후반 반세기간의 냉전체제는 근현대 세계사에서 드물었던 안정된 세계체제였고 미국은 많은 동맹국의 절대적 맹주로서 체제를 이끌었다. 그 체제가 해체될 때 나온 “역사의 종말” 이야기는 접어들고 있던 “불확실성의 시대”의 역설적 표현이었다. 몽골 세계체제의 해체기에 공민왕을 비롯한 고려인들의 고뇌에서 배울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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