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 선생은 직업을 “작가”로 내세운다. 특정 장르에 집중하는 전업작가가 아니라 아무거나 “만들어내는 사람”이란 뜻의 작가다. 글만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개념도 만들어내고 운동도 만들어내고 정당도 만들어내는 작가다. 결국 “무직”과 비슷한 뜻이다. 직업을 “안 가진” 무직자로서 직업을 “못 가진” 무직자와 혼동을 피해 “작가”란 말을 쓰는 것 같다.
유 선생이 독일에서 귀국한 얼마 후 디트리히 슈바니츠의 <Bildung>이 <교양 -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인성기 역, 2001, 들녘)으로 번역 출판되는 데 매우 큰 관심을 보이던 생각이 난다. 그 책에 추천사도 썼다.
그의 “자유인” 기질에서 나온 관심으로 이해했다. 독일 유학에서 석사학위만 취득한 후 박사과정을 밟지 않은 것도 전문화의 틀에 매이지 않으려는 기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학문 연구를 위한 능력과 소양을 잘 갖춘 사람이 틀에서 벗어나려는 의지를 가진다면 새로운 차원의 지적 성취를 바라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그를 주목하게 되었다.
“르네상스 맨”이란 말이 있다. 여러 방면에 걸쳐 재능을 발휘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직업이 전문화된 근대세계에서는 지식인의 활동이 좁은 영역에 묶이는 경향이 있다. 여러 방면에 능력을 보이는 사람이 신기해 보이기 때문에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다.
유럽에서는 근대와 직접 대비되는 시대가 바로 직전의 르네상스 시기였기 때문에 “르네상스 맨”이란 말이 나왔지만, 지식인의 다방면 활동은 전근대 사회에서 일반적 현상이었다. 중국과 한국의 학인(學人)이나 선비에게도 다방면 활동이 보통이었다. 때를 만나면 나아가 정치에 참여하고 때가 지나가면 물러나 후진을 양성하는 것이 선비의 자세로 통했다. 학문의 내용도 관념의 영역에서 실용적 분야까지 걸친 사람들이 실학파만이 아니었다.
내가 유 선생과 어울리기 좋아한 것은 그가 역사에 관해서도 좋은 글을 많이 썼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역사가”로 여긴다. 사실(史實)을 따지는 역사학자와 구별되는, 사론(史論)을 펼치는 역사가로 보는 것이다. 그 자신은 아니라고 잡아떼지만, 그만큼 역사 공부를 하고 역사에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직업과 관계없이 역사가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역사 공부를 한 사람은 현재나 미래를 생각할 때도 역사를 떠올리기 쉽다. 그래서 유 선생이 어떤 일을 하든 그 바닥에 어떤 역사의식이 깔려 있는지 늘 흥미로웠다. 어느 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돕는 길을 택한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으나 곧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판단에 작용한 역사의식을 생각하면서였다.
유 선생이 나를 찾는 일은 별로 없고 내가 그의 서재 부근에 갈 때 들르곤 했다. 그와 잡담 나누기가 즐겁고 내 공부에도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조국 사태”가 터진 후 재미가 없어졌다. 나는 관심이 전혀 없는 일에 그는 마치 뭐에 씌인 사람처럼 집착하는 것이었다. 그 후로는 연설 들을 흥이 나지 않아 뜸하게 몇 해 지나다 보니 기억 속의 사람이 되어버렸다.
요즘 그가 티브이 화면에 많이 나타나는 것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른다. 극단적인 주장을 쏟아내는 중에도 합리주의자의 면모를 지키려 애쓰는 모습이 재미있다. “합리주의”에도 여러 갈래와 여러 층위가 있다는 사실이 생각난다.
극단적 합리주의는 “이성”만을 지식의 근거로 인정하고 “경험”의 역할을 부정한다. 반면 이성의 우선적 역할을 주장하되 경험의 역할도 인정하는 온건한 합리주의가 있다. 데카르트, 스피노자 등 17세기 합리주의는 경험주의와 양립하는 온건한 합리주의였는데, 18-19세기에 극단적 합리주의가 득세하면서 경험주의와의 대립을 과장했다고 하는 근래의 견해가 흥미롭다.
여러 집단의 정치적 성향을 고정적인 것으로 보는 ABC론이나 정권 필패론처럼 일반인의 경험적 감각을 벗어나는 주장에 유 선생은 합리적 근거를 힘껏 갖다붙인다. 그가 합리주의자라는 사실은 그대로인데, 어떤 종류의 합리주의자인지는 다시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에릭 홉스봄의 근현대사 4부작이 나온 시간 터울이 흥미롭다. <혁명의 시대>(1962), <자본의 시대>(1975), <제국의 시대>(1987) 세 권이 십여 년 간격으로 나왔는데 마지막 권 <극단의 시대>(1994)는 7년 만에 나왔다. 다룬 기간(1914-1991)이 끝난 불과 3년 후였다.
앞의 세 권이 혁명, 자본, 제국이라는 구체적 키워드를 들고 나온 것과 달리 마지막 권에서 내세운 “극단”은 추상적 개념이다. 막 끝난 “짧은 20세기”를 하나의 시대로 묶어내면서 그 요점을 딱 짚어내기가 어려웠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어찌 생각하면 20세기라는 시기의 성격이 구체적 키워드보다 “극단”이라는 경향성으로 표현할 만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도 든다.
유시민 선생을 생각하다가 홉스봄이 떠오른 것은 합리주의자로서 그의 자세를 극단의 경향성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세계대전과 냉전에 묶여있던 20세기에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자유주의도, 민족주의도 성공보다 승리를 앞세우는 변형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 극단성이 21세기에는 소멸하기 바란 홉스봄의 희망이 30년이 지난 지금 보면 상당히 이뤄져 온 것 같다.
세계적 차원의 “진영” 논리가 퇴화하는 상황 앞에 국부적 대결 자세도 힘을 잃어가고 있다. 집권 세력의 중도 확장 노선이 과거와 같은 정략적 효과를 넘어 불가역적 성과를 바라볼 수 있다고 보는 배경이다. 유 선생을 만나면 30여 년 전 홉스봄이 내놓은 전망을 놓고 토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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