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에서 고대-중세-근대의 3분법이 약화되고 있다. 3분법은 르네상스를 겪은 유럽인들이 빛나는 고전시대와 그 빛이 가려진 암흑시대를 거쳐 빛을 회복하는 시대로 들어선다는 자부심에서 시작한 것이었다. 근대역사학이 자리 잡은 뒤에는 노예제의 고대, 봉건제의 중세, 시민사회의 근대로 규정하는 기준이 3분법의 틀에 맞춰 널리 유행했다.

 

이 유럽산 시대구분법을 다른 지역에도 적용시키는 것이 얼마 전까지 각 지역 역사학계의 중요한 과제였다. 그러나 유럽 자체에도 이 기준의 엄밀한 적용이 어렵다는 사실이 확인되어 왔다. 후기 중세와 초기 근대의 경계선이 어디인가? 유럽 내에서도 지역에 따라 시차가 있을 뿐 아니라 각 시대의 여러 특성이 질서정연하게 가지런히 바뀐 것도 아니다.

 

인간사회의 변화 경로에 지역에 관계없이 일정한 법칙성이 있으리라는 추정은 어느 정도 수긍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근대역사학에서는 이 법칙성에 대한 믿음이 지나쳤다. 유럽과 다른 역사적 경험을 가진 많은 지역으로 역사학의 관심이 넓혀지는 데 따라 시대구분 3분법은 규범적 법칙이 아닌 편의적 관행으로 바뀌어 왔다.

 

 

--3개 왕조의 연속성

 

나는 중국사 공부를 하면서 일찍 3분법을 버렸다. 시대구분은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공부가 충분히 되기 전에 억지로 할 일은 아니라 생각하고, 일단 전통적 방식대로 왕조 기준에 따라 공부했다. 왕조 교체는 당시 사람들에게 하늘이 뒤집히는 것 같은 큰일이었던 만큼 실제로도 큰 변화의 계기였다.

 

그러다 보니 그중 큰 굴곡들이 서서히 떠오른다. 예를 들어 한나라 멸망에서 수나라 통일에 이르는 이른바 위--남북조 시대. 분열의 시대가 5백년 가까이 계속된 것은 통상적 왕조교체와 차원이 다른 변화였다. 그래서 진-한 제국과 수-당 제국 사이에 중화제국의 성격 자체가 바뀐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티머시 브루크가 최근 <대국: 중국과 세계(Great State: China and the World)>에서 내놓은 시대구분 시도도 흥미롭다. 원나라를 기점으로 중화제국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는 관점이다.

 

브루크가 제시하는 이유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원나라 이후 난세(亂世)’가 짧아진다는 사실이다. “합친지 오래되면 갈라지고 갈라진지 오래되면 합쳐진다(合久則分 分久則合)”는 말처럼 중국사를 치란(治亂)의 반복으로 보는 것이 전통적 관점이다. 그런데 한나라, 당나라, 송나라의 쇠퇴가 장기간의 분열로 이어진 것과 달리 원나라 이후에는 왕조 사이의 교체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던 것이다.

 

난세가 짧아진다는 것은 중화제국의 구심력이 커진 사실을 보여준다. 하나의 질서체계를 대표하는 왕조가 무너질 때 질서체계의 조속한 회복을 원하는 민심이 강하면 웬만한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는 밴드왜건 효과가 일어난다. 그런 효과가 아니라면 명나라나 청나라가 자리 잡는 데 훨씬 더 긴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이 구심력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시장경제의 발전에 가장 큰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송나라 때 지역 간 분업이 크게 발달한 결과 정치적 분열이 경제를 해치는 정도가 달라졌다. 원나라가 쇠퇴할 때 주원장 세력을 지지한 사람들은 어느 세력이 정의로운가?” 따지기보다 어느 세력이 세상을 더 빨리 평온하게 만들어줄까?”를 더 많이 생각했을 것 같다.

 

 

왕조교체기가 짧아진 중화제국

 

아리스토텔레스가 진공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자연은 공백을 싫어한다고 말한 것처럼 원나라 이후의 중국은 권력의 공백을 싫어하게 된 셈이다. 그렇다면 명-청 교체에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했다기보다 중국에 흡인되었다고 볼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원나라를 몰아내고 천하를 차지한 명나라는 몽골을 가장 큰 외부의 위협으로 보았다. 실제로 1449년에는 정벌군이 궤멸하면서 황제가 오히려 포로로 잡힌 일이 있었고 1550년에는 몽골군이 북경 일대에 침공한 일이 있었다. 그에 비해 만주족은 명나라 멸망 50년 전까지도 명나라와 몽골세력 사이에 끼어있는 미미한 존재였다.

 

1616년 누르하치가 후금(後金)을 세운 뜻은 명나라에게 조공국으로 인정해달라는 것이었다. 이것을 거부하고 정벌에 나선 명군이 사얼후전투(1619)에서 대패한 후 후금 세력이 크게 자라났지만, 1636년 대청제국을 선포할 때까지도 천하를 통째로 빼앗을 뜻은 없었다. , , 서하가 송나라와 천하를 나눠가진 것처럼 자기네는 만주지역의 주인이 되겠다는 것이었다.

 

명나라는 민란으로 무너졌다. 1644319(당시 역법 기준) 북경이 이자성(李自成)의 농민군에게 함락당할 때까지 청군은 오삼계(吳三桂)의 명군과 지리한 대치를 계속하고 있었다. 오삼계가 청나라의 도움을 청하자 도르곤(多爾袞)의 청나라 주력군이 49일 심양에서 출발해 422-23일에 산해관에서 이자성군을 격파하고 52일 북경에 입성했다. 이 엄청난 진군 속도에서 당시 명나라 관-민이 청군을 적극 배척하지 않던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명나라의 통치력이 무너지면서 많은 관리와 장수들이 청나라에 투항했다. 부득이한 경우도 있고 이기적 선택도 있었지만 청나라를 천하 질서를 위한 대안으로 여긴 사람들도 많았다. 당시의 현실세력 가운데 농민반란군은 질서에 대한 근본적 위협이었고 몽골은 오랫동안 적대해 온 이질적 존재였다. 그에 비해 만주족은 농경문명을 많이 수용하고 명나라가 우월한 입장에서 관계를 맺어 온 상대였다. 원나라가 무너질 때 주원장 세력이 가장 덜 나쁜 대안이었던 것처럼 이제 청나라가 가장 덜 나쁜 대안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대륙에서 해양으로 옮겨간 변화의 축

 

북경은 이자성군이 점령한 지 불과 달포 후 청군에게 넘어갔다. 청군은 도중에 산해관 전투를 치르고도 심양에서 북경까지 2천 리가 넘는 거리를 23일 만에 주파했다. 전투능력보다 그 행군능력이 돋보이는 신속한 정복이었다. 그리고 북중국을 휩쓸던 농민군을 그 후 1년 동안에 대략 평정했다.

 

북중국의 장악이 그리 어렵지 않았던 반면 남중국의 평정에는 시간도 많이 걸리고 피도 많이 흘려야 했다. 남명(南明)의 저항이 10여 년간 지속될 만큼 남방에는 저항을 위한 인적-물적 자원이 있었던 것이다. 이민족 지배에 대한 반감은 남북 간에 큰 차이가 없었을 텐데, 남방의 저항이 훨씬 더 끈질겼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남방 지방세력의 경제력이 눈길을 끈다. 남방의 농업생산력은 당나라 때 북방을 능가했고 송나라 때 촘촘한 수로를 갖추면서 시장경제가 발달했다. 게다가 해로를 통한 교역으로 부를 축적했다. 명나라 때 막대한 양의 은()이 중국으로 수입되었는데 중국에서 은의 교환가치는 다른 지역보다 1.5배 수준이었다. 그 차익의 대부분이 남방 지방세력의 손에 들어갔다.

 

민란이 북중국을 휩쓸고 북경을 함락시킬 때까지 남중국에서는 질서가 지켜지고 있었다. 이 질서의 주체가 지방세력이었다. 남방 지방세력은 강한 민병대를 조직할 재력을 갖고 있었다. 반란군에게 유린당한 북방 지방세력은 청군을 해방군으로 받아들였지만 자기 실력으로 자기 지역을 지킨 남방 지방세력에게는 청군이 침략군이었다. 3(三藩) (1676-1681)을 거쳐서야 남중국에는 청나라의 지배가 확립되었다.

 

-명 교체는 오랑캐의 지배를 몰아냈다는 점에서, -청 교체는 다시 불러들였다는 점에서 중국의 전통적 역사서술에서 중시되었다. 흉노 이래 북방 유목민의 위협을 중시해 온 관행 때문이었다. 그러나 원--청 세 개 왕조를 통해 제국의 권력구조에도 사회경제적 구조에도 큰 변화가 없었다.

 

눈에 쉽게 보이는 북방의 위협보다 남방의 경제적 변화가 중화제국에 더 큰 위협을 키워가고 있었다. 해상활동의 확장에 따라 변화의 축이 대륙에서 해양으로 옮겨진 결과였다. 해외교역의 이득을 선점한 남중국의 경제력은 원-명 교체기에도 명-청 교체기에도 큰 힘을 보여줬고, 19세기 말 청나라 쇠퇴기에도 다시 존재를 드러낸다.

 

https://en.wikipedia.org/wiki/Transition_from_Ming_to_Qing#/media/File:Battle_of_Shanhai_Pass.png 산해관 전투 개념도

https://en.wikipedia.org/wiki/Hong_Chengchou#/media/File:%E6%B4%AA%E6%89%BF%E7%95%B4.jpg 1642년 청나라에 투항한 후 청나라의 정책에 영향을 끼친 홍승주(洪承疇, 1593-1665)에게는 매국노[漢奸]와 경세가의 평가가 엇갈린다.

https://en.wikipedia.org/wiki/Shi_Kefa#/media/File:%E5%8F%B2%E5%8F%AF%E6%B3%95%E5%BD%A9%E5%83%8F.jpg 사가법(史可法, 1601-1645)은 청군의 남진에 가장 치열한 저항이었던 양주(揚州) 전투를 지휘하고 순절했다. 백년 후 건륭제가 충정(忠正)’의 시호를 내린 것은 청나라에 대한 남방의 반감이 그때까지 남아있었음을 보여준다.

https://baike.baidu.com/pic/%E5%90%B4%E4%B8%89%E6%A1%82/253974/1/86d6277f9e2f0708550487b7ea24b899a901f200?fr=lemma&ct=single#aid=0&pic=b7003af33a87e950911171d813385343fbf2b404 오삼계(吳三桂, 1612-1678)는 명-청 교체과정의 여러 단계에서 열쇠 노릇을 한 인물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Transition_from_Ming_to_Qing#/media/File:Qing_Empire_circa_1820_EN.svg 청나라의 중국 평정과 주변부 확장 연대

 

 
Posted by 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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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2.06.22 18:35

    오 이제 청인가요?
    점점 가까워져가네요.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사회가 안정되어 가면서 안정과 풍요를 맛본 사람들이 명분보다는 실리를 선택하는 추세가 그려 집니다 .

    • 2022.06.22 23:28 신고


      "안정과 풍요를 맛본 사람들이 명분보다는 실리를 선택하는 추세"! 멋진 그림입니다! 저도 염두에 두겠습니다.

  2. 2022.06.29 13:44

    비밀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