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 그루의 나무는 뿌리와 몸통, 큰 가지와 잔가지, 그리고 잔가지에 붙어 있는 잎, , 열매 등으로 구성된다. 나무를 볼 때 뿌리, 몸통과 큰 가지를 근본(根本), 잔가지와 그에 붙어 있는 것들을 지엽(枝葉)으로 이해하고, 복잡한 구조를 가진 어떤 대상을 볼 때도 이 비유를 떠올린다. 그 차이를 ()’()’로 표현하기도 한다.

 

나무를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잎과 꽃이 눈에 먼저 들어오고 따먹을 수 있는 열매에 관심이 많이 쏠린다. 어떤 대상을 바라볼 때도 근본보다 지엽에 눈과 마음이 쉽게 끌리는 것이 사람의 성정이다. 그래서 사물과 현상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지엽에 현혹되지 않고 근본을 밝히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나 어떤 일도 지나치면 폐단을 일으킨다. 근본과 지엽은 서로 얽혀져 있다. , , 열매가 피었다가 지고 열렸다가 떨어지는 무상(無常)한 것처럼 보이지만 나무의 생명이 그 신진대사에 걸려있다. 사상에 있어서도 현실적 측면을 지엽으로 여기며 무시하는 경향을 근본주의(fundamentalism)’로 경계한다.

 

역사학은 근본에 치우치는 경향을 조심할 필요가 있는 분야다. 취급하는 자료가 남긴 사람들의 가치관에 따라 선별되고 재단된 것이기 때문이다. 왕조사의 강고한 지배력이 하나의 예다. 기록을 남긴 당시 사람들도, 그 기록을 정리한 얼마 후의 사람들도, 왕조를 세상의 근본으로 여겼기 때문에 왕조 중심의 자료를 후세에 남겨주었고, 그 자료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도 과거의 세상을 왕조 중심으로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20세기 후반 사회사, 미시사 등 사람들의 실제 생활상을 탐구하는 경향이 일어난 것은 사료의 편향성에 대한 저항이다. 종래 사료로 인식되지 못하던 정보를 수집하고 발굴함으로써 사료를 남긴 사람들의 의도를 넘어 과거의 실제 모습을 향한 새로운 시각을 찾는 것이다.

 

중국사의 서술방법으로 오랑캐의 역사를 떠올린 것도 같은 맥락이다. 어느 문명권이나 마찬가지로 중국문명권도 중심부와 변방으로 구성되었고, 중심부가 자기네를 ()’, 변방을 ()’라고 불렀다. 역사의 기록은 거의 전적으로 에 의해 이뤄졌다.

 

기록의 편중성 때문에 화-이 사이 본-말 관계의 유기적 특성이 남겨진 자료에 제대로 나타나지 못한다. 근본이라 여겨진 제국 내부만 들여다봐서는 중화제국의 특성이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메커니즘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지엽으로 여겨진 오랑캐들이 그때그때 보여준 특성들과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 살펴봐야만 중화문명권 내지 동아시아문명권의 역사적 흐름을 하나의 신진대사 과정(metabolic process)으로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제국의 역사 아닌 문명권의 역사를 밝히기 위해 오랑캐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Tree#/media/File:Claude_Monet,_Weeping_Willow.JPG 모네의 <버드나무의 눈물>(1918)

https://en.wikipedia.org/wiki/Bonsai#/media/File:Pescia,_museo_del_bonsai,_punica_granatum,_stile_moyogi_(eretto_informale),_con_frutti.jpg 분재(盆栽)는 사람이 나무를 보는 시각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2.

 

오랑캐의 역사의 관심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세 개 방향으로 옮겨다녔다. 1(1-9)에서는 중세까지 천하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2(10-18)에서는 중세 말기에 천하밖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 3(19-28)에서는 근세 들어 천하는 어떤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는가?” 하는 질문에 관심을 모았다.

 

1부에서는 고전적 의미의 천하가 빚어지는 모습을 살폈다. 황하 유역에서 농경문명으로 일어난 중화문명은 춘추시대까지 천하의 차원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농업의 생산성이 아직 다른 생산양식들을 압도하지 못하고 있어서 농경지대인 중원은 범위가 좁았고, 그 범위 안에도 다른 생산양식의 집단들이 뒤얽혀 있었다. 전국시대 들어서야 황하 유역에서 장강 유역까지 광대한 농업문명권이 만들어져 천하의식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초기의 농경민은 사방을 둘러싼 오랑캐와 대비되는 자기정체성을 갖게 되면서 자기네 영역을 온 세상의 한가운데 있는 중원으로 여겼다. 지리적 중앙이 곧 문명의 중앙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지면서 오랑캐의 영역까지 포괄하는 천하의 주인을 자임하고 그 안에 위계질서를 세우는 노력을 시작했다. 중원은 기원전 3세기 말에 중화제국으로 통일되었고, 이후 제국이 무너지는 분열의 시대에도 제국의 통일성은 하나의 당위적 관념으로 계속되었다.

 

초기의 제국에 두드러진 위협을 많이 가한 것은 서방과 북방의 유목민이었다. 동쪽과 남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기까지 농업문명의 확장에 큰 장애물이 없기 때문에 그 방면의 오랑캐들은 축출되든지, 동화되든지, 아니면 아주 외진 곳에만 미미한 존재로 남았다. 반면 서방과 북방의 광대한 초원은 유목민의 공간이었다. 문명 초기에 유목은 농업에 버금가는 생산력 확대의 길이었기 때문에 유목민은 오랫동안 농경민과 경쟁하는 위치에 있었다.

 

당나라 때까지 유목민은 농업국가인 중화제국에 대해 가장 큰 위협으로 보였다. 그러나 유목사회는 농경사회와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필요로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중화제국을 탈취하려 들지는 않았다. 바필드가 제시한 외경전략(outer frontier strategy)’, 농경제국의 외부에 존재하면서 부차적 이득을 취하는 전략을 유목민들은 취했다. 516국을 오랑캐의 중국 정복으로 보는 것은 착각이다. 5호 중에 유목민 출신도 있기는 했지만, 그들은 바필드가 말하는 내경전략(inner frontier strategy)’을 통해 제국 내부에 들어와 있던 군사세력이었다. 유목민의 특성 대신 지역 군벌로 성격을 바꾼 세력이었다.

 

516국 시대를 남북조시대로 전환시킨 북위를 중국의 첫 정복왕조로 볼 수 있는데, 정복왕조의 주역은 대개 순수 유목민이 아닌 동북방의 혼합형 오랑캐들이었다. 농경, 유목, 수렵 등 다양한 생산양식을 병행한 동북방 오랑캐들은 생산력과 전투력에서 농경세력과 유목세력에 뒤졌기 때문에 작은 틈새만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양대 세력의 교착 상태에서는 이 틈새가 커져 오히려 큰 주도권을 쥐는 상황이 수시로 일어나곤 했다. 그들은 혼합형 사회를 경영한 경험 위에서 복합형 제국체제를 개발했다.

 

https://baike.baidu.com/pic/%E5%8D%8E%E5%A4%B7%E5%9B%BE/9816135/1/1f178a82b9014a9025d954d5a3773912b21beef7?fr=lemma&ct=single#aid=1&pic=1f178a82b9014a9025d954d5a3773912b21beef7 

송나라 때(1136) 작성된 화이도(華夷圖)에는 북방 유목지대와의 경계가 만리장성으로 그려져 있다. 서방은 산악지대와 사막으로 막혀 있었고, 동방과 남방은 화()의 영역이 해안까지 채워져 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Great_Wall_of_China#/media/File:Greatwall_large.jpg 만리장성의 1907년 사진.

 

 

3.

 

중국의 정복왕조 중 북위, , , 청은 혼합형 오랑캐가 주도한 것인데, 원나라만은 유목민 몽골족이 주도한 것이었다. 이 예외적 현상에는 따로 설명이 필요하다.

 

-금에서 발전시킨 복합형 제국 모델을 원나라가 물려받은 사실이 일단 눈에 띈다. 실제로 몽골제국의 중국 진입 과정에서는 야율초재 등 요-금 지배층 후예들의 역할이 컸다. 그러나 그런 조력자 집단을 원활하게 수용하는 배경조건을 살피는 데 제2부 전반부에서 노력했다.

 

세계가 좁아지고 있다는 말을 지금 사람들이 하는데, 중세 말기에도 세계는 좁아지고 있었다. 문명의 발전에 따라 여러 문명권이 확장되면서 문명권 간의 접촉과 교류가 늘어나고 상호 영향이 커진 것이다. 유라시아대륙에 일어난 여러 문명권 중에 중화문명은 다른 문명권과의 접촉과 교류가 적은 편이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천하사상이라는 폐쇄적 세계관이 오랫동안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고대에서 중세에 걸쳐 중화제국이 상대한 오랑캐들은 중화문명과 견줄 만한 문명 배경을 갖지 않은 집단들이었다. 군사적으로는 각축을 벌이더라도 문화-기술 측면에서는 언제나 수동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7-8세기 이슬람문명권의 팽창에 따라 중국 주변 유목사회의 문화적 성격에 변화가 일어났다. 751년 탈라스전투가 이 변화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8세기 이후 중앙아시아 유목세계는 여러 문명권의 온갖 문화와 기술이 융합되는 실험장이 되었고, 이로부터 몽골제국이 빚어져 나왔다. 칭기즈칸 세력은 당시의 유목민 중에도 후진적인 부족에서 출발했지만 다양한 문명 요소들을 포용하며 강력한 제국을 일으켰다. 중국과 페르시아에 세운 정복왕조 원나라와 일-칸국이 가장 압축적인 실험장이 되었다. 두 왕조 사이에 얼마동안 진행된 활발한 교류는 문명 통합의 선구적인 시도였다.

 

그러나 4칸국 분열은 문명 통합을 위한 여건의 한계를 보여주었다. 문명의 선진 지역을 점령한 원나라와 일-칸국은 세계사세계지리의 영역을 개척하며 문명 통합에 힘을 기울였지만 다른 두 칸국은 유목민의 특성을 지키며 지역 할거의 길을 걸었다. 원나라와 일-칸국 사이의 육상교통이 이 분열 때문에 막히자 인도양-남중국해를 통한 해로가 부각되었다.

 

2부의 후반부에서는 13-14세기 해로의 상황, 그리고 이 해로를 통해 중국이 마주치게 되는 이슬람세력과 유럽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이슬람은 7-8세기에 아랍 유목민이 이집트-페르시아-지중해문명을 융합해서 역사상 최대의 문명권을 일으켰다. 유라시아대륙 서반부의 중요한 전통을 모두 통합한 이슬람문명이 근대문명 발생의 토대가 된 사실은 근대역사학에서 외면받아 왔다. 근대역사학을 지배한 유럽중심주의는 다른 지역 전통들을 무시하는 경향을 보였거니와, 다년간 대결 상대로 여긴 이슬람에 대해서는 무시를 넘어 적대하는 경향을 보였다.

 

15-18회에서 이슬람권과 유럽 사이의 관계를 살펴본 것은 중국의 역사를 서술하려는 오랑캐의 역사의 취지와 거리가 (지리적으로) 있지만, 유럽중심주의의 반성을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 르네상스 이전의 유럽은 문명의 역사에서 주변적이고 종속적인 존재였다. 서남아시아 지역에서 발생한 고대문명은 해로 중심의 지중해세력과 육로 중심의 페르시아세력으로 갈라져 발전했는데, 이슬람세력이 양자를 통합할 때 유럽은 미개한 변방일 뿐이었다. 물리학의 이란 질량에 가속도를 곱한 것이다. 낮은 수준에서 출발한 유럽이 르네상스 이후 큰 가속도를 갖고 움직였다는 사실 위에서 서양의 흥기(Rise of the West)’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Catapult#/media/File:MongolsBesiegingACityInTheMiddleEast13thCentury.jpg 몽골 군사력이라면 기병(騎兵)을 먼저 떠올리겠지만, 그 정복사업에서 가장 큰 위력을 발휘한 것은 농경민들에게 배운 투석기였다.

 

 

4.

 

몽골제국은 세계사 전개의 중요한 분기점이었고, 중국사의 전개 양상에도 큰 변화를 가져온 계기였다. 해상교통이 늘어났고 그에 따라 장거리교역의 규모가 커졌다. 15세기에 유럽인이 원양항해를 시작해서 대항해시대에 진입한 것도 그 결과였고, 중국에서는 바다오랑캐(洋夷)’의 역할이 점점 더 중요해졌다. 3부에서는 바다의 상황에 초점을 맞췄다.

 

15세기 초에 인도양을 휩쓴 명나라 함대는 대항해시대 유럽의 해상력과 차원이 다른 엄청난 규모였다. 유럽의 해상력은 19세기 들어서야 그 규모를 따라오게 된다. 15세기 중국의 월등한 경제력과 기술력을 이 함대가 보여준다. 그런데 명나라는 인도양을 평정한 후 이 함대를 없애고 해상활동을 줄였다.

 

명나라 영락제는 원나라 때 확보된 지리정보 위에서 원나라가 추구하던 세계제국을 추구한 것이다. 그러나 영락제 이후의 명나라는 전통적인 닫힌 제국으로 돌아왔다. 명나라는 대항해시대의 유럽처럼 외부로부터 자원을 확보할 절실한 필요를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나라에게도 그 뒤의 청나라에게도 대외관계의 목적은 경제적 이득보다 군사적 안보에 있었다.

 

명나라의 소극적 정책에도 불구하고 대외교역은 꾸준히 늘어났고 그 대부분은 법외-불법의 형태로 이뤄졌다. ‘왜구가 그 대표적 현상이었다. 14세기의 왜구는 소규모 해적집단의 약탈활동이었는데 16세기에 다시 나타난 왜구는 해적이라기보다 대규모 무역조직이었다. 중국 동남 연안의 지방세력도 얽혀 있었고 이 해역에 진출한 유럽세력도 여기에 관여했다.

 

16세기 중국에는 외부에서 대량 수입이 필요한 물자가 거의 없었는데, 단 하나 예외가 은이었다. 중국에서 일찍부터 귀금속 아닌 구리로 화폐를 만든 것은 시장경제가 서민의 생활까지 침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제발전으로 대규모 거래가 늘어나자 고액결제 수단으로 지폐가 송나라 때부터 사용되었고, 명나라에서 은이 지배적 수단이 되었다. 16세기에 남아메리카와 일본의 거대한 은광들이 개발되면서 은의 산출이 급격히 늘어났고, 그 상당부분이 중국으로 흡수되었다. (16-18세기에 전 세계 은 생산량의 3분의 1가량이 중국에 유입되었다고 여러 연구자들이 추정한다.)

 

중국이 수백 년간 은 먹는 하마노릇을 할 만큼 은의 수요가 컸던 것은 은의 화폐기능이 교역의 결제수단에 그치지 않고 부의 축적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재력은 무력과 함께 국가의 통제 대상이다. 통제를 벗어난 재력은 통제를 벗어난 무력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통합성에 위협이 된다. 16세기 이후 민간 보유량이 크게 늘어난 은은 중화제국을 약화시키는 원심력의 매체가 되었다. 무기를 휘두르는 초원오랑캐가 중화제국에 외상을 입힐 수 있는 눈에 보이는 위협이라면, 은을 들여오는 바다오랑캐는 중화제국의 보이지 않는 심복지환이 되었다. 명나라 멸망의 원인도 북방의 군사적 상황보다 남방의 경제적 상황에서 찾아야 하겠다.

 

https://en.wikipedia.org/wiki/Printing#/media/File:Saint_Christopher_001.jpg 유럽 최초의 목판인쇄물은 1423년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가 머지않아 나오게 된다. 중국으로부터 8세기에 이슬람세계로 전파된 제지술이 13세기에야 유럽에 전해진 후부터 유럽의 정보산업이 비약적 발전을 시작한 것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Wokou#/media/File:Een_zeeslag_tussen_Japanse_zeerovers_en_Chinezen.jpg 13-14세기의 왜구는 이름대로 도둑떼였지만 16세기 중엽에 성행한 왜구는 해적이라기보다 무역업자였다. 그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은()이었다.

 

 

5.

 

18세기 후반부터 서세동점의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유럽인은 16세기 들어 대항해시대를 시작하고 인도양의 제해권을 장악했지만 교역의 이득을 차지하는 데 그치고 육상의 지배력에는 큰 관심 없이 오랫동안 지냈다. 18세기 중엽부터 영국의 인도 지배 등 식민지가 개발되면서 현지에 군사력을 키우게 되었고, 산업혁명의 시작에 따라 경제적 침략의 동기도 더욱 강화되었다.

 

1793년 영국 사절 매카트니가 건륭제에게 교역 확대와 상주 외교관 교환을 요청할 때는 침략의 동기는 갖춰져 가고 있었지만 침략의 수단이 갖춰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건륭제가 콧방귀를 뀌어도 속으로만 욕했지 당장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청나라의 태도가 바뀌지 않은 채로 40여 년이 지난 후에는 청나라를 굴복시킬 군대와 함선이 갖춰져 있었다.

 

두 차례 아편전쟁(1839-42, 1856-60)을 계기로 중화문명권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동아시아인들은 처음에는 서양의 무기를 들여오는 데만 힘쓰다가 서양의 산업과 경제를 모방하는 노력을 거쳐 서양의 사상과 제도를 따라가는 운동으로 나아갔다. 19세기 후반을 지내는 동안 서양의 우월성에 대한 인식이 확장-심화된 것이다.

 

근대화, 즉 서양을 본받는 노력에서 앞선 일본은 19세기 말까지 하나의 열강으로 변신해서 변화에 뒤진 중국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청일전쟁(1894-95)의 패배는 중국에게 새로운 충격을 가했다. ‘위로부터의 개혁마지막 시도인 무술변법(1896)이 좌절된 청 조정의 아노미 상태를 보여준 의화단의 난(1899-1901)을 계기로 중화제국은 해체 단계에 접어들었다.

 

근대화의 가장 시급하고도 중요한 과제는 국민국가건설이었다. 자유와 평등의 이념으로 중층적 위계질서에서 벗어난 국민을 국가가 고르게 통제할 수 있어야 근대세계의 국가 간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내부의 이질성이 적은 섬나라 일본은 이 과제에서 쉽게 성공을 거둔 반면 이질성이 큰 대륙국가 중국은 큰 어려움을 겪었다.

 

국민민족을 서양 언어에서 ‘nation’ 등 같은 말로 가리키게 된 것은 근대초기 국민국가 건설 과정의 경험 때문이었다. 동아시아 지역의 국민국가 건설 과정에서도 이 기준에 따라 민족국민의 기초로 삼으려는 경향이 일어났다. 그런데 비슷한 문명수준의 집단들 사이에서 빚어진 서양의 민족개념을 적용시키는 것이 문명수준이 다른 종족들의 유기적 결합으로 이뤄진 중국에서 특히 어려웠던 것이다.

 

중국과 같은 복합성의 문제를 가진 터키, 무굴 등 오래된 제국들은 서양에서 불어온 국민국가의 바람 앞에 조각이 나 흩어져 버렸다. 20세기 후반 중국 부흥의 가장 큰 열쇠가 이 문제의 극복에 있었다. 이 문제를 중국은 통일다민족국가로 풀었다. 큰 민족들 위주로 위에서 내려다보는 방식이 아니라 작은 집단들에서 시작해 쌓아 올라가는 방식으로 이 해법이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공산당 지도부가 대장정의 대부분 기간을 민족 분포가 복잡한 서남부 지역에서 지낸 경험이 이 방식을 뒷받침해 준 것으로 보인다.

 

https://en.wikipedia.org/wiki/First_Opium_War#/media/File:A_busy_stacking_room_in_the_opium_factory_at_Patna,_India._L_Wellcome_V0019154.jpg 1850년경 인도 파트나의 아편창고. 수백년간 중국에 쏟아 붓던 은의 공급이 줄어들자 아편으로 대신하게 되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First_Opium_War#/media/File:British_ships_in_Canton.jpg 1841년 영국군의 광동 공격 장면. 흰 옷의 병사들은 인도인으로 그려져 있다.

 

 

6.

 

1950년대 중국의 민족 식별 사업 중 스탈린의 민족 정의 기준을 벗어나는 대목에서 프레데리크 바스티아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Ce qu'on voit et ce qu'on ne voit pas)”을 다시 떠올렸다. 1850년에 나온 이 글을 읽으며 나는 근대라는 시대의 특징이 보이는 것에만 묶여 보이지 않는 것을 잃어버리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영역, 언어, 생산양식, 문화의 4대 기준으로 민족을 정의하는 스탈린의 민족관은 당시 공산권을 지배하던 근대적 민족관이었다. 민족 식별 사업에 나선 중국 인류학자들은 근대적 민족관으로 정리될 수 없는 중국의 복잡한 현실을 수용하기 위해 종족 잠재성이란 개념을 제기했다. 지금 당장 민족 정의의 기준을 완전히 충족시키지 못하더라도 여건의 변화에 따라 충족시킬 잠재성이 있다면 별개의 민족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56개 민족의 구획에 이 잠재성의 개념이 상당 부분 적용되었다. 그 구획의 타당성에 기술적으로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하더라도 그 이념적 타당성은 지난 70년간의 운용 실적으로 증명되었다고 본다. 잠재성이 바로 바스티아가 말한 보이지 않는 것아니겠는가.

 

오랑캐의 역사작업을 진행하면서 학창시절 이래 읽어 온 통사 내용과 다른 관점을 많이 떠올리게 되었다. 왜 이렇게 많이 떠올리게 되는지 스스로 의아할 정도다. 많은 선학들이 애써 정리해 놓은 내용에서 이렇게 많은 의혹을 일으킨다면 내 시각이 잘못된 것 아닐까 하는 걱정까지 든다.

 

그 큰 이유가 근대역사학의 과도한 실증주의 경향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 바스티아의 글을 읽으면서였다. 19세기 후반에 사회과학과 역사학에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한 실증주의(positivism)는 관찰이나 실험으로 검증되는 현상만을 인식의 대상으로 제한하고 그 뒤의 본질에 대한 추상적 사고를 배척하는 자세다. 그 시대 자연과학의 눈부신 성취에 힘입어 자연과학의 원리를 다른 학술분야까지 확장하려는 경향이 일어난 것이다.

 

관찰과 실험만을 학문의 발판으로 삼으려면 관찰자의 완전한 중립성(disinterestedness)’이 필요한데, 과연 그것이 가능한 것인가 하는 문제가 흔히 지적되어 왔다. 그런데 바스티아의 글을 읽으면서 이 중립성이 관찰자의 의지 이전에 관찰자가 처해 있는 상황에 의해 제한되는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다. 관찰자가 아무리 성실하게 노력하더라도 그의 관찰 방법은 그 시대의 가치기준과 기술적 조건에 따라 정해지는 것 아닌가.

 

유럽의 근대국가들이 민족주의를 발판으로 일어서던 19세기에 민족은 눈에 보이는 것이었다. 인간사회의 다른 조직 형태는 보이지 않거나, 보이더라도 덜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70년 전 중국의 민족 식별 사업에서 제기된 종족 잠재성보이지 않는 것을 명확하게 그려내지는 않았어도, 그 존재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현실에 더 가까이 간 것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Ethnic_minorities_in_China#/media/File:Ethnolinguistic_map_of_China_1983.png 중국의 민족분포. 서남방(운남-귀주-광서)의 복잡한 분포를 알아볼 수 있다.

https://baike.baidu.com/pic/%E5%B0%91%E6%95%B0%E6%B0%91%E6%97%8F/117663/1/5fdf8db1cb134954393fb65b534e9258d1094aef?fr=lemma&ct=single#aid=0&pic=bba1cd11728b47105e061b6ececec3fdfc032363 다민족국가의 화합을 강조하는 캠페인은 관광산업을 통해서도 추진된다.

 

 

7.

 

근대 역사학자들은 근대적 가치기준에 따라 역사를 고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탈근대를 의식하는 지금은 가치기준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진행 중인 변화를 엄밀하게 규정할 수는 없지만, 어렴풋이 떠오르는 방향은 열린 세계관에서 닫힌 세계관으로의 회귀다. 근대인은 외부로부터의 자원공급이 무제한 확대될 수 있다는 열린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환경과 자원 문제에 시달리는 지금 사람들은 단 하나의 생태계만이 존재한다는 닫힌 세계관으로 돌아오고 있다. 개방과 발전만을 숭상하던 역사관도 바뀌지 않을 수 없다.

 

관찰의 기술적 조건도 바뀌어 왔다. 과거의 주류 집단이 남긴 사료를 넘어 과거 현실의 여러 측면에 접근할 수 있는 여러 형태의 자료가 고고학, 인류학, 민속학, 언어학 등 여러 분야에서 개발되어 왔다. 이번 작업에서 이들 인접분야의 성과를 많이 참고하면서, 역사학도 바뀔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한다.

 

기술의 급격한 발전으로 자원 공급이 무제한 확대될 수 있을 것 같은 세상을 인간사회는 2백년간 겪어왔다. 그 환상이 깨어진 뒤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갈지, 2백년보다 앞선 시기로부터 가르침을 찾을 필요가 있다. 2천년간 천하의 닫힌 세계관을 지킨 동아시아의 경험에 가장 큰 참고 가치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오랑캐의 역사작업에 임했다.

 

작업 중 떠올린 새로운 관점들은 종래의 다른 관점들을 꼭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마지막 장에서 중국과 베트남이 진정한 공산주의 국가였던가?” 질문을 던졌지만, 공산국가가 아니었다는 주장이 아니다. 공산국가였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사실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측면도 살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 사회 지도층으로서 당원(黨員)’의 역할이나 인재 선발의 능력주의(meritocracy) 원리는 근대 이전 체제 원리의 연장선 위에서 깊이 있는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앞으로 종래의 역사 서술의 전면적 전환을 기대한다. 그러나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서술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뿐이다. 중국사와 문명사에 대한 기존의 관점보다 시각을 넓힘으로써 서술의 전환을 위한 준비를 하자는 것이다.

 

서술 전환의 보다 적극적인 시도로서 새 작업을 시작하고 있다. “동아시아의 근대국가”. 서양의 충격이 일으킨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동아시아 사회들의 궁극적 과제는 근대국가 건설이었다. 근대적 가치기준에서 풀려난 눈으로 그 과정을 다시 살펴보면 지금까지 보이지 않다가 새로 보이게 되는 것이 있지 않을까? 막 시작한 <중앙일보>의 역사칼럼 시리즈 근대화 뒤집기”(114, 211일에 1-2회 게재)에 새 작업 준비단계에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담으려 한다. 2024년경 그 작업성과를 <월간중앙> 독자들에게 내놓을 희망을 가지고 연재를 마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