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왕조 중 오랑캐에게 정복당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내부 혼란으로 무너지고 난 뒤에 오랑캐 왕조가 들어와 공백을 메운 경우가 많다. 명나라가 특히 분명한 경우다. 북경이 반란군에게 함락된 후 명나라 주력부대를 지휘하고 있던 오삼계(吳三桂)가 대치 중이던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인 것은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었다. 5호16국(五胡十六國)도 한-위-진(漢-魏-晉)의 혼란이 수습되지 못한 끝에 용병 역할로 중화제국 안에 들어와 있던 오랑캐들이 정권을 세운 것이었고, 요-금(遼-金)도 중국의 혼란에 흡인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송나라는 제국 체제에 결정적 파탄이 없는 상태에서 오랑캐의 힘에 압도된 이례적인 경우로 보인다. 다른 오랑캐의 중국 정복과는 다른 설명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다.

 

중화제국과 중국문명 사이의 간격에서 생각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중국문명 전체를 정치적으로 조직한다는 중화제국의 이념은 현실 속에서 완벽한 실현이 불가능한 것이다. 문명의 경계선은 제국의 국경처럼 명확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수한 농경 지역만을 제국에 넣을 때도 있었고 주변의 유목 지역까지 포괄한 때도 있었던 것이다.

 

당나라가 융성할 때는 많은 유목 지역이 제국에 편입되었다. 그에 따라 제국의 구성이 복잡해지면서 혼란이 일어났다. 당나라 후기의 절도사 세력과 그에 이은 5대10국(五代十國)의 대부분은 제국에 편입되어 있던 ‘오랑캐’를 주축으로 한 것이었다.

 

송 태조가 즉위 후 옛 동료 장군들에게 병권 해제를 권한 일화는 군사력 중앙 집중을 꾀한 송나라의 기본정책을 보여준다. 조정 직할의 금군(禁軍)이 송나라 군대의 주축이 되었다. 군사력의 약화를 피할 수 없는 정책이었다. ‘내 군대’를 내 세력으로 키우던 종래의 장군들 대신 월급쟁이 지휘관들이 군대를 관리하게 되었고, 그나마 최고위 지휘관들은 문관으로 임명되었다. 오랫동안 형성되어 온 중국의 경무(輕武) 전통이 이때 확정되었다.

 

제국이 강한 군사력을 유지하려면 ‘군벌(軍閥)’의 위상을 보장해주어야 한다. 조직의 특성을 문관들에게 침해받지 않고, 조직의 가치를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 전심전력으로 전투에 임하는 군대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군대가 필요로 하는 독립성은 상황에 따라 제국의 질서를 해칠 수 있다. 안록산의 난(755) 이후 2백 년간 중국을 괴롭혀 온 이 문제를 벗어나기 위해 송나라는 군사력의 약화를 감수하기로 한 것이다.

 

중화제국의 영광을 받드는 사람들에게는 송나라의 이 선택이 안타까운 일이다. 그만한 경제력과 기술력을 가지고 부국강병의 길을 걸었다면 한 무제나 당 태종보다 더한 제국의 위세를 떨칠 수 있었을 것을! 요나라와 금나라에게 굴욕적인 입장에 머물러 있다가 몽골에게 멸망당하는 일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을!

 

그러나 모든 선택에는 득실이 엇갈리게 마련이다. 송나라에게는 군사적 열세와 강역의 축소를 감수할 만한 이득이 있었다. 요-금에 대한 세폐는 넓은 강역의 확보-유지를 위한 군사비에 비하면 약소한 액수였고, 강력한 군부의 존재로 인한 권력구조의 위험이 없었다. 

 

“돈으로 평화를 사는” 송나라의 노선은 미야자키 이치사다가 말하는 ‘재정(財政)국가’의 길이었다. 풍부한 경제력 위에서 가능한 선택이었다. 장기간의 평화 속에서 학술, 사상, 상업, 문화를 한껏 발전시킨 송나라의 경제력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양자강 유역의 농업생산력 발전이 그 근거였다. 농업기술 발달에 따라 강우량이 큰 양자강 유역의 생산력 발전이 북방보다 빨랐고, 송나라 때는 인구가 북방보다 더 많아졌다. 프란체스카 브레이는 <The Rice Economies 벼농사 경제지역>(1986) 203-206쪽에서 송나라 때 벼농사 기술 발전이 중요한 국가정책이었던 사실을 설명했다. 1012년부터 참파 지역의 품종을 들여와 2모작을 시작하게 한 것이 가장 중요한 사례다.

 

농업생산력의 발전이 송나라 경제의 하드웨어를 제공하는 한편에서 소프트웨어를 만들어준 것은 운하 중심의 수운(水運) 네트워크였다. 수운 네트워크는 황하 유역보다 회하-양자강 유역 남중국에서 크게 발달해서 중국의 실질적 중심이 남쪽으로 옮겨가는 조건이 되었다. 1126년 수도가 금나라 군대에 함락되고 황제 이하 온 조정이 통째로 포로가 되는 파국을 겪고도 남쪽으로 옮겨 제국 체제를 이어간 것은 남중국의 경제기반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