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6년 세워진 대몽골국은 유목국가였다. 인접국 금나라에 대한 몽골의 정책노선은 한 마디로 바필드가 말하는 ‘외경 전략(outer frontier strategy)이었다. 금나라를 공격하더라도 영토 탈취가 아니라 재물과 유리한 교역 조건의 획득에 목적이 있었다. 오랑캐 출신이기 때문에 이 전략을 잘 이해하는 금나라는 몽골의 공격에 강경한 대응으로 일관했고, 그 결과 몽골은 원하지도 않는 영토를 획득하게 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생산력을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금나라의 군사 활동을 제한하기 위해 점령하는 영토였다. 

 

이렇게 획득한 영토를 제대로 관리해서 조세를 징수하는 정책은 칭기즈칸에게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영토는 몽골 귀족이나 장군에게 영지(領地)로 하사해서 구워먹든 삶아먹든 마음대로 하도록 맡기는 것이 예사였다. 대몽골국이 제대로 다스릴 영토는 초원이었고, 농경지대는 국가의 기본자산이 아니었다. 금나라로부터 빼앗는 땅에서 농민을 몰아내 초원을 늘리자는 주장은 이런 초원 중심의 유목민 관점에서 나온 것이었다.

 

1229년 오고타이 즉위 후 농경지대에 대한 정책이 바뀌기 시작한 덕분에 1234년 금나라 멸망 후 북중국 일대가 몽땅 초원지대로 바뀌는 운명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정책 전환을 이끌어낸 대표적 인물이 야율초재(耶律楚材, 1190-1244)였다. <원사(元史)> 권146의 열전에 실린 그의 행적에서 몽골제국이 중국식 통치방법으로 전환해 가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그의 글도 <湛然居士文集>으로 전해진다.)

 

야율초재는 요나라 황실 자손으로 (耶律阿保機의 9세손) 조부 때부터 금나라 고관을 지낸 집안 출신이다. 그 아버지가 60세 나이에 얻은 아들을 놓고, 큰 인물이 될 아이인데 다른 나라에 쓰일 운명이라며 “(남쪽의) 초나라 재목이 (북쪽의) 진나라에서 쓰인다(楚材晉用)”는 고사에 빗대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요나라 황손으로 금나라 벼슬을 하던 사람이 자기 아들이 또 다른 나라에 쓰일 것을 예상하고 그 생각대로 이름을 지어줬다는 것이 기이한 이야기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忠臣不事二君)”는 유교적 덕목에 구애받지 않던 오랑캐 왕조의 개방적 분위기를 보여주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금나라 조정이 1214년 변경(汴京, 즉 開封)으로 옮겨간 뒤 야율초재는 옛 수도 중도(中都, 즉 燕京)의 관원으로 남아 있다가 이듬해 몽골군에 함락될 때 포로로 잡혔다. 칭기즈칸은 풍채와 학식이 뛰어난 이 청년을 측근에 두었고 이 청년은 30년간 칭기즈칸과 오고타이의 조정에서 일하게 되는데, 1231년 이후에는 문관 최고직인 중서령(中書令)의 자리에 있었다. 

 

야율초재는 중국뿐 아니라 이슬람권 방면으로 몽골 지배가 확장될 때도 농경지역에 대한 살육과 파괴를 억제하는 전략과 정책을 꾸준히 건의했고, 추상적 ‘인의(仁義)’를 내세우기보다 조세 제도 등 ‘수익 창출 모델’을 제시하며 실용적 득실에 중점을 두었다. 그는 천문, 지리, 역법, 술수(術數) 등 다방면의 박학다식으로 명성을 떨쳤는데, 송나라의 학술이 성리학에 집중한 것과 달리 요나라와 금나라에서는 ‘실학(實學)’의 풍조가 성했고, 그것이 유목민 지도부를 설득하는 데 주효했던 것 같다. 

 

조세원(租稅源)으로서 농민의 가치를 설파하여 과도한 살상을 억제시키는 한편 유사(儒士)를 비롯한 각 부문 전문가 집단을 보호하고 등용하도록 이끈 것도 중국의 안정된 통치를 유도한 노력으로 볼 것이다. 오고타이에게 권해 4천여 명의 유사를 등용하게 한 1238년의 ‘무술선시(戊戌選試)’는 과거 제도에 접근한 시도로서 후일 쿠빌라이가 원(元) 왕조를 세우는 데 활용할 인재집단을 창출한 계기로 평가된다.

 

자크 제르네의 <La Vie quotidienne en Chine à la veille de l'invasion mongole 몽골 침략 전야 중국인의 일상생활>(1959)은 1250-1276년간 남송, 특히 그 수도 항주(沆州)의 생활상을 그린 책인데, 여기에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많이 인용된다. 폴로가 항주를 방문한 것은 몽골군에 함락된 뒤의 일인데, (항주는 1276년에 함락되었고 폴로가 유럽으로 돌아간 것은 1292년이다.) 폴로의 기록에 나타나는 화려한 모습은 함락을 계기로 큰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근접한 시기의 관찰로 참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1234년의 금 멸망과 1276년의 남송 멸망 사이에 몽골의 정복 정책이 크게 바뀐 것이다. 유목민의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랑캐로서 타자화하던 주류 한족사회와 마찬가지로 농경사회의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유목민은 중국을 약탈의 대상으로만 봤다. 그러나 접촉면이 넓어지고 이해가 깊어지면서 농경민을 백성으로 다스리는 입장의 중화제국을 몽골 지도부가 지향하게 되었다. 그래서 1271년 원 왕조의 선포에 이른 것이고, 그 후의 남송 정복은 적국의 침략이 아니라 ‘천하’의 회복을 위한 사업이 되었다.

 

몽골 지도부의 정책 전환, 나아가 그 정체성의 재정립을 향한 변화를 주도한 대표적 인물로 야율초재가 꼽힌다. 몽골군의 진격이 사납던 시기에 몽골의 신하 노릇을 하였음에도 그는 후세 중국 학인들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명나라의 손승은(孫承恩, 1481-1561)은 “어질음의 공덕이 이보다 더 클 수 있는가(仁者之功,孰能與京)?” 찬탄했고, 왕세정(王世貞, 1526-1590)은 그를 ‘원나라의 어진 인물 3인(元朝三仁)’의 하나로 꼽았다. 야율초재의 재능과 지혜(才智)에 대한 칭송이 워낙 많은 중에 어질음(仁)을 앞세운 두 사람의 평가가 특히 눈길을 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