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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르제국의 붕괴는 참으로 허망했다. 840년 키르기즈의 침공으로 수도 카라발가순이 함락되자 8세기 중엽부터 근 백년간 천하를 호령하며 고도의 번영을 누리던 제국이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야만족이던 키르기즈는 제국을 넘겨받을 생각 없이 재물의 약탈에 그쳤고 위구르 잔여세력도 제국의 재건에 나서지 않았다. 일부 세력이 서남쪽의 실크로드 방면으로 옮겨가 오아시스국가를 유지한 정도였다.

 

이 허망함의 원인을 위구르 내부 사정보다 당나라 사정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위구르의 번영은 당나라와의 관계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화려한 도시 카라발가순은 자체 생산기반 없이 당나라에서 끌어들인 재물로 만들어낸 철저한 소비도시였다. 한 차례 파괴를 겪자 도시를 재건할 자원이 위구르에게 없었다.

 

그리고 당나라에서 재물을 착취할 여지도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었다. 755년 안록산의 난 이후 당나라의 통제력이 줄어들어 북중국 일대는 절도사 세력의 할거 상황이 되었다. 각 지역의 조세징수권이 절도사들에게 넘어갔다. 중앙정부의 재정 수입은 남중국 일대로 한정되었고, 착취의 강화에 따라 9세기 들어서는 남중국에서도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730년대 돌궐제국이 무너질 때 위구르가 바로 당나라에 접근한 것은 당나라가 지불 능력 있는 고객이었기 때문이었다. 840년 위구르제국이 무너질 때는 당나라와의 거래관계를 물려받겠다는 세력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림자 제국을 투영시킬 중화제국의 실체가 흐려진 것이다.

 

남북조시대에 중원의 북방에서 널리 활동하던 유목민 유연(柔然)이 치밀한 정치조직을 발전시키지 못한 것은 북중국의 오랑캐국가들이 만만한 상대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중원의 통일이 이뤄질 무렵에 돌궐이 유연을 몰아내고 유목제국을 세워 수-당 제국을 상대하다가 위구르가 그 뒤를 이은 것인데, 이제 위구르제국이 무너지자 북방의 유목제국이 사라졌다. 당나라가 이 시기에 용병으로 활용한 돌궐의 일파 사타(沙陀)부가 당나라가 망한 후 5대 중 후당(後唐)을 세우기도 했는데, 이때의 사타부는 유목민이 아니었다.(사타부는 당나라 황실의 성을 하사받았기 때문에 을 자칭한 것이다.) 북방의 제국이 사라진 틈새에서 동북방의 거란(契丹)이 일어섰다.

 

농경민을 초식성, 유목민을 육식성으로 본다면 중원 동북방의 오랑캐는 잡식성이었다. 농경, 유목, 그리고 수렵-어로 등 다양한 산업이 혼재했다. ‘산업다각화가 되어 있어서 지역 내의 자급자족에 좋은 조건이었지만 외부세력과의 경쟁에는 불리한 조건이었다. 농경사회에게는 생산력에서 뒤졌고 유목사회에게는 전투력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리고 자급자족의 경향 때문에 대규모 조직의 동기도 약했다.

 

516국의 혼란 속에서 이 지역의 선비(鮮卑)족이 두각을 나타낸 것은 농경사회에도 유목사회에도 강한 세력이 없던 틈새가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그 틈새 속에서 선비족의 모용(慕容)부는 호-2중 체제를 개발했고, 탁발(跖拔)부의 북위(北魏)는 그 체제를 북중국 전역으로 확장했다. 토머스 바필드는 이 2중 체제가 선비족의 잡식성에서 나온 것으로 해석한다.

 

-당 제국과 돌궐-위구르 제국 시대에는 혼합형 오랑캐를 위한 틈새가 존재하지 않았다. 거란은 6세기 초부터 동북방에 모습을 나타냈지만 농경제국이나 유목제국에 눌려 지내는 입장을 오래도록 벗어나지 못했다. 잡식성 세력의 억압에는 농경제국과 유목제국의 이해가 일치되었다. 695년 당나라에 복속되어 있던 거란이 큰 반란을 일으켰을 때, 당시 당나라와 대치하고 있던 돌궐(2제국)이 거란의 진압에는 당나라와 협력한 일도 있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