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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시대 중국인들은 유목을 문명과 대비되는 야만의 모습으로 여겼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 유목은 문명 발전의 한 측면이었다. 식물을 길들여 식량자원을 확보한 것이 농경이라면 같은 목적으로 동물을 길들인 것이 목축이었다. 다만 식물이 동물보다 먹이사슬의 아래쪽에 있어서 확보할 수 있는 분량이 더 많기 때문에 농경이 문명의 주축이 된 것이다.

 

목축이 유목의 형태로 크게 확장된 것은 농경사회의 성장을 배경으로 이뤄진 일이다. 영국 고고학자 앤드루 셰라트는 부산물혁명(Secondary Product Revolution)’을 이야기한다. 초기의 목축은 식량으로서 고기를 얻는 데만 목적이 있었는데, 기원전 3-4천년대에 털, 사역력, 운송력 등 부차적 용도가 개발됨으로써 목축의 대형화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기는 유목사회 내에서 소비되지만 다른 부산물들은 인근의 농경사회에 제공하고 곡식 등 여러 가지 물품과 교환할 수 있는 것이다.

 

목축의 대형화에 따라 유목의 형태가 발전하게 되었다. 가축 떼가 커짐에 따라 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 초지가 황폐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 상태의 초식동물이 계절에 따라 옮겨 다니는 경로를 따라 움직이며 가축을 관리하는 방식이 개발된 것이다. 이동 방식은 여름에 높은 곳으로 갔다가 겨울에 낮은 곳으로 돌아오는 수직형과 여름에 북쪽으로 갔다가 겨울에 남쪽으로 돌아오는 수평형이 있다. 알프스와 안데스, 히말라야 산지에 아직도 남아있는 이동목축(transhumance)은 수직형 이동 방식이다. 동유럽에서 동북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초원지대에서는 수평형 이동 방식이 널리 행해졌다.

 

농경지대가 크게 자라나지 않은 문명 초기에는 유목지역과 농경지역이 뒤얽혀 있었다. 중국에서 춘추시대까지 중원(中原)’에 뒤섞여 있던 오랑캐가 아직 진행 중이던 농업화의 단계를 보여준다. 전국시대에 중원의 농업화가 완성되면서 북방에 장성(長城)의 축조가 시작되었다.

 

유목이 행해진 곳은 강우량이 농경에 부족한 초원지대였다. 춘추시대까지 중원 이곳저곳에 산재해 있던 오랑캐의 대부분은 농업기술의 발달에 따라 농경으로 전환해 화하(華夏)’에 흡수되었고 일부가 외곽의 산악지대와 초원지대로 옮겨가 유목사회를 이루었다. 유목사회는 농경사회에 비해 잉여생산이 작기 때문에 내부의 생산관계만으로는 계층과 직업의 분화가 활발하지 않고 대규모 정치조직을 키워낼 동력도 없었다. 생산 활동과 생활을 함께 하는 부족이 조직의 확실한 단위였고, 부족 간의 연합은 느슨한 형태에 그쳤다.

 

유목사회에 부족을 넘어서는 정치조직이 자라난 것은 농경사회와의 관계 때문이었다. 농경사회가 영토국가로 조직됨에 따라 물자의 교환에 불리한 조건을 강요받게 되자 그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대규모 조직의 동기와 수단을 갖게 된 것이다. 약탈도 물자 교환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기록에는 유목민의 농경사회 약탈이 많이 남아있지만, 농경민의 유목사회 침략과 약탈이 더 많았다. 기록이 농경사회의 특기였기 때문에 치우쳐 있는 것이다.

 

기원전 3세기 말에 일어난 흉노제국을 그림자 제국이라 한 것은 진-(秦漢) 제국의 통일에 대응해 일어난 현상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유목민의 제국이 나타나자 셰라트가 간과했던 유목사회의 부산물 하나가 새로 생겨났다. 무력(武力)이다. 유목사회는 그 생활방식 때문에 강한 군사력을 양성할 수 있었다. 한나라가 흉노제국을 격파한 이래 당()나라 때까지 유목민 기마병은 중국의 모든 무력충돌 현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왕조를 공격하는 쪽에서든, 방어하는 쪽에서든.

 

당나라 때 돌궐과 위구르가 중국과의 관계에서 이득을 취한 밑천은 그 무력이었다. 무력 시장에서 유리한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경쟁자를 배제해야 했다. 그래서 다른 오랑캐의 흥기를 막는 데는 당나라의 부탁이 없거나 보상이 충분치 않아도 자발적으로 힘을 기울였다. 만주 방면의 거란과 여진이 9세기 중엽까지 세력을 키우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당나라보다 돌궐제국과 위구르제국의 압력 때문이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