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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발달 과정에서 바다의 역할은 많은 주목을 받아 왔다. 바다는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고 농업을 중심으로 한 초기 문명에서는 역할이 아주 작았다. 문명 발달에 따라 지역 간 분업관계가 형성되면서 상업의 발생과 함께 운송의 필요가 커질 때 수상 운송은 육상 운송에 비해 대량 화물의 장거리 이동에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었다. 이 단계부터 바닷가와 큰 강변에 도시가 많이 자라나게 되었다. 

 

학생 시절 몽골제국의 역참(驛站)제도를 알게 되면서 사막도 바다와 같은 성격을 가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면서 빠른 이동이 가능하다는 것이 양자의 공통점이다. 전근대세계에서 운송의 효율성은 매체의 성능만이 아니라 통과 지역의 정치적 조건에도 걸려 있었다. 통과하는 여러 지역의 세력들이 통과를 가로막거나 많은 통과세를 요구한다면 아무리 매체의 성능이 좋더라도 운송의 비용이 컸을 것이다. 바다와 사막처럼 정주(定住) 세력이 없는 공간이 운송에 유리한 점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주경철의 <문명과 바다>(산처럼, 2009) 130-137쪽에도 ‘사막의 배’와 ‘바다의 배’를 비교한 대목이 있다.)

 

빈 공간이 운송에 유리한 점도 있지만 이를 이용하기 위해 필요한 기술적 조건이 있다. 바다의 경우 항해술이 어느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 육지를 바라보며 배를 몰다가 어두워지면 항구에 들어가 쉬어야 하는 연안항해 수준으로는 빈 공간의 이점을 활용할 수 없다. 항구마다 정주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육지가 보이지 않는 난바다에서 나침반으로 방향을 잡고 해가 저문 뒤에도 별을 보며 항로를 찾을 수 있어야 바닷길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다.

 

인도양은 여러 문명권-문화권이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서 마주보는 곳이기 때문에 해상 교통이 일찍부터 발달한 바다였다. 13세기 이전 인도양의 교통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몽골제국 흥기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되어 지난 달 몇 권 책을 주문했다. 그런데 코로나 사태 때문인지,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책이 들어오지 않고 있다. 바다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되, 먼저 눈에 띤 스리비자야(Srivijaya) 이야기부터 꺼내둔다.

 

앞 회에서 이야기한 의정(義淨, 635-713)이 671년에서 695년까지 동남아시아와 인도에 체류하고 돌아온 후 남긴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内法傳)>에 ‘불서(佛逝)’라는 나라 이름이 나오는데, 이것이 수마트라섬의 팔렘방에 수도를 둔 스리비자야였다. 송(宋)나라 기록에는 ‘삼불제(三佛齊)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스리비자야는 7세기 후반에 세워져 10세기까지 수마트라섬과 말레이반도의 대부분, 그리고 자바섬의 서부를 지배한, 이 지역의 역사상 최대 국가였다. 스리비자야가 멸망한 후 그 역사도 전승되지 못하고 있었는데, 20세기에 들어와 프랑스 학자 조르주 세데스(George Cœdès, 1886-1969)의 손으로 발굴되었다. 그 후 스리비자야의 역사는 중국 기록과 현지에서 발굴된 금석문의 대조를 통해 밝혀져 왔고,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의 중요한 근거로 자리 잡았다.

 

의정은 671년 광저우에서 파사(波斯) 상선을 타고 20일간 항해로 팔렘방에 도착해서 6개월간 체류한 뒤에 인도로 건너갔다. 687년 인도를 떠나 귀국하는 길에도 퍌렘방에 들러 695년까지 체류했다. 가는 길의 체류는 산스크리트어를 배우는 등 준비를 위한 것이었고, 오는 길의 체류 동안에는 수집해 온 경전을 번역했다. 

 

689년에 잠깐 광저우에 건너가 필묵과 조수를 구해 왔다는 대목이 흥미롭다. 광저우와 팔렘방 사이의 항해가 그리 어렵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왕래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리고 번역 작업을 여러 해 동안 팔렘방에서 수행한 것을 보면 그곳이 작업에 유리한 조건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불교왕국이던 스리비자야에서 경전 내용을 토론할 상대가 많았으리라는 점도 생각되지만, 장기 체류가 크게 불편하지 않았음도 알 수 있다.

 

스리비자야가 지배한 수마트라섬과 말레이반도는 인도양과 남중국해 사이의 말라카해협을 끼고 있는 곳이다. 의정이 귀국을 서두르지 않고 8년간이나 체류할 만큼 안정된 조건을 제공하는 정권이 이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면 인근 해상활동의 주도권도 그 정권이 쥐고 있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의정이 여행을 시작할 때 탔다는 ‘파사’ 상선이 페르시아 배가 아니라 말레이반도의 한 지역에 속한 배가 아니었을까 앞 회에서 추측한 것도 그 까닭이다. 말라카해협 일대에 강력한 지역 정권이 존재했다면 페르시아 지역과 중국 사이의 교역은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한 중계무역의 형태를 취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오늘 도착한 책 핀들레이와 오루어크의 <Power and Plenty(권력과 풍요)>(2007)를 펼치자마자 눈에 띈 한 대목을 옮겨놓는다. (67쪽) 앞으로 인도양과 남중국해의 교역 상황을 살펴보는 데 출발점으로 삼을 만한 대목이다.

 

“중국과 중동 지역 사이의 해로가 동남아시아 지역을 통과한다는 사실은 한 쪽은 당나라와 송나라, 또 한 쪽은 아바시드 왕조와 파티미드 왕조가 같은 시기에 번영하던 두 지역 사이의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양쪽 방향으로 중계와 수출 교역이 번성할 조건이 되었다. 앞에서 본 것처럼 인도차이나의 푸난(Funan) 왕국이 일어나고 크라지협[말레이반도의 북부를 가로지르는 지협]의 교역이 활발했던 것도 이 사실 때문이고, 후에는 말라카해협과 순다해협을 장악한 수마트라의 상업제국 스리비자야로 그 역할이 넘어갔다. 그러나 이 교역은 이익이 너무 커서 경쟁자가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가까운 자바섬뿐 아니라 육지의 캄보디아, 타이, 버마, 그리고 실론섬의 세력들이 경쟁에 나섰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