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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너선 스카프는 <Sui-Tang China and Its Turko-Mongol Neighbors: Culture, Power and Connections, 580-800(수당제국과 그 투르크-몽골 이웃들)>(2012)에서 중국 북방 지역의 기후와 생태 조건을 살펴 각 지역 인구의 한계를 추정한다. 깊은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강우량이 적은 것은 당연한 사실인데, 그에 덧붙여 위도와 고도를 고려하는 점이 특이하다. 몽골고원은 기온이 낮아 증발이 적기 때문에 강우량이 비슷한 다른 지역에 비해 초원의 식생이 풍성하다는 것이다. 몽골 지역의 초원 1 평방킬로미터에 50 두 가축을 키울 수 있는 반면 신장 지역에서는 서너 마리밖에 키울 수 없었다고 말한다. (25-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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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민의 큰 세력이 서북방 신장 방면보다 북방 몽골 방면에서 많이 일어난 까닭을 설명해 주는 이야기다. 그런데 동북방은 어땠을까? 만주 방면에는 강우량이 꽤 큰 평지가 많다. 그러나 중세 이전의 기술 수준으로는 농업 발달이 어려운 조건이었다. 위-진-남북조의 혼란기에는 중국의 농업 발달이 남쪽으로만 향했다. 당나라 때까지 만주 지역에는 소규모 밭농사가 여러 형태의 산업과 뒤섞여 있었다.

 

이 지역에서 비교적 큰 농업사회를 이룬 것은 발해(渤海, 698-926)였다. 고구려의 농업기술을 이어받은 발해는 당나라의 군사력이 닿지 않는 만주 동부 지역에서 독립을 지키다가 713년 이후에는 당나라와 조공-책봉 관계를 맺고 만주 중부 지역까지 세력을 넓혔다. 당나라와 비슷한 시기에 발해가 멸망한 것을 보면 당나라와의 관계가 발해의 체제 유지를 위한 중요한 조건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순수 유목사회에 비해 농업을 포함하는 혼합사회는 생산력이 크면서도 군사력에서 뒤졌다. 유목사회에서는 모든 구성원이 잘 훈련된 기마병이기 때문이다. 만주 방면의 혼합사회는 남방의 농경사회와 서방의 유목사회 양쪽으로부터 군사적 압박을 받았기 때문에 큰 세력을 키울 수 없었다. 다만 두 방면 모두 제국이 와해되어 정치조직의 확대에 방해가 없을 때는 호-한 2중 체제의 이점을 활용할 수 있었다. 5호16국 시대 선비족의 활동이 그런 예다.


840년 위구르제국이 무너진 후 거란의 흥기 과정에서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872-926)의 지도력도 2중 체제를 통해 빚어진 것이었다. 거란은 원래 8부(部)로 갈라져 있었고 각 부의 수령도 3년 임기 선출직이 관례였다. 아보기의 일라(迭剌)부는 중국 방면을 공략, 농민과 농토를 확보함으로써 힘을 키운 결과 제부를 통합하여 요 왕조(907-1125)를 열 수 있었다. 


요나라의 2중 체제는 초기부터 남정(南廷)과 북정(北廷)을 함께 둔 데서 나타난다. 남정은 5대10국의 혼란기를 틈타 중국에서 탈취하는 농경지역을 운영하고 북정은 주변 유목민족을 상대하고 부족사회를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경제력과 군사력을 분담한 셈이다. 


요나라의 제국체제가 안정 단계에 들어선 것은 제5대 경종(景宗, 969-982) 때였다. 그때까지는 황제가 시해되는 일이 거듭되고 황위 계승방법도 불확실했다. 경종 이후는 장자 계승이 다시 흔들리지 않았다. 5대10국의 혼란이 경종 무렵 송나라의 재통일로 수습되고 있던 상황에 영향을 받은 측면도 있었을 것 같다.


936년 석경당(石敬瑭)이 후당(後唐)을 멸하고 후진(後晋)을 세우는 과정에서 거란의 도움을 청하는 조건으로 연운16주(燕雲十六州)를 떼어준 결과 요나라가 장성(長城) 이남까지 영토를 확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요나라는 중원 진출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946년에 후진의 수도 개봉(開封)을 점령했으나 바로 퇴각한 것은 황제의 죽음 때문이기도 했지만, 정복의 의지가 강하지 않았음을 또한 보여준다.


‘서희(徐熙)의 담판’(993)도 요나라가 영토의 야욕이 크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침략군이라면 으레 영토를 뺏으러 오는 줄 알고 당시 고려에서 당황했던 모양인데, 담판을 통해 오히려 강동6주(江東六州)를 확보한 서희가 영웅이 되었던 것이다. 서희의 업적은 용맹한 기세로 거란 장수를 겁줘서가 아니라 요나라가 원하는 고려의 역할을 정확하게 읽어내고 그에 부응함으로써 얻은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당시 강동6주는 발해 멸망 후 여진인이 주로 거주하던 지역임에 비추어 볼 때, 요나라가 바란 것은 여진의 견제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스카프는 <수당 제국과 그 투르크-몽골 이웃들>에서 전통시대 중국사 서술의 ‘계층 편향성’을 지적한다. 기록과 편찬의 담당자들이 모두 중앙의 문사 계층이었기 때문에 변경 지역의 실정에 어둡고 경직된 관념에 얽매이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이다. (52-53쪽) 20세기 이래 고고학 연구의 확장과 발전에 의해 이 편향성이 조금씩 보정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래도 50년 전 중국사 공부를 시작할 때에 비해 시야가 많이 밝아졌음을 생각하며, 우리 세대까지 얻어놓은 그림을 남기는 일에 보람을 느낀다.

Posted by 문천